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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일리 오현주 문화전문기자] # 고민 1. “명함을 받았습니다. 다소곳이 쥐고 아무개씨를 여러 번 입에 올렸더랬지요. 그런데 말입니다. 이틀 뒤에 다시 만났는데 이름만 기억이 안 난다 이겁니다. 콧잔등에 작은 점, 입고 있던 슈트와 셔츠 색, 영화의 한 장면으로 나눈 시답지 않은 농담, 하다못해 명함의 빠닥빠닥한 질감까지 다 기억이 나는데요. ‘외우기 쉬운 이름이네요.’ 이런 헛소리나 하지 말걸. 내가 치매에 걸린 걸까요.”
# 고민 2. “둘이 앉아 삼겹살 5인분을 해치웠지요. 철판에 볶아주는 밥이 별미라고 해서 두 공기를 주문해 철판이 닳도록 긁어댔습니다. 된장찌개, 계란찜을 연신 떠올려가면서요. 그러곤 ‘배가 터질 거야’라고 하모니를 맞추며 식당을 나왔는데. 아이스크림가게가 보이는 겁니다. ‘아니 디저트 먹을 배가 남아 있어?’ 둘 중 하나가 이렇게 물었는데 ‘응 남아 있어!’란 외침은 동시에 터져 나왔지요. 우리 위가 어떻게 된 게 아닐까요.”
두 고민의 핵심은 이거다. ‘내가 잘못된 건 알겠는데 도대체 어디가?’다. 고민은 장황하지만 미안하게도 대답은 간결하다. ‘뇌’다. 치매로 몰린 것도, 대식을 허용한 것도 모조리 뇌의 장난이란 말이다. 이뿐인가. 마음이 아픈 것도 뇌가 시킨 거고, 성질을 부리는 것도 뇌가 진두지휘한 거다. 그렇다면 슬슬 떠오르는 궁금증 하나. 뇌와 나는 별개의 존재인가, 내 뜻대로 움직이질 않으니.
책은 뇌 탐구서다. 기능적으로 작동하는 뇌의 구조나 캤으려니 하는 판단은 섣부르다. 뇌가 친 그물에 늘 속으면서도 결국 뇌의 지시에 고분고분 따르는 인간, 그 둘의 기묘한 공생을 파헤치는 게 목적이니까. 뇌와 인간을 마치 두 개의 영혼이 든 생물체처럼 구분해낸 저자의 이력도 범상치 않다. 낮에는 신경과학자로 영국 카디프대에서 교수로 뛰고, 밤에는 스탠딩 코미디언으로 클럽 무대에 서는 투잡맨이라니.
△성격이 이상해? 뇌가 이상해!
“인간의 경험과 뇌의 경험은 다르다.” 시작은 이거였다. 경험을 공유하지 못하니 삐거덕거리게 마련이고, 어쨌든 일은 진행해야 하니 속이려는 뇌와 속지 않으려는 인간의 ‘공존프로젝트’는 불가피하다는 생각에서였다. 왜 굳이? 이렇게 보면 간단하다. 뇌는 이식할 수 없는 장기이기 때문. 인간의 모든 장기는 다른 사람의 것을 대신 달 수 있지만 뇌는 안 된다. 이제껏 성공한 사례도 없지만 연구 자체가 윤리논쟁을 부를 만큼 사안이 크다. ‘A의 뇌를 B에 이식했을 때 B는 A인가 B인가’란 질문에 답할 재간도 없다. 저자에 따르면 기억 때문이란다. 뇌에는 한 인간의 역사를 몽땅 담은 기억이란 게 있으니까. 그러니 뇌의 깊은 의중을 어찌 간파하겠느냐는 거다. 몇 가지만 보자.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지만 비난은 날뛰게 한단다. 비난의 위력이 더 세다는 뜻인데. 뇌 안의 코르티솔 때문이란다. 스트레스를 받을 때 분비되는 호르몬 말이다. 칭찬을 받을 때 나오는 옥시토신의 화학반응은 보통 5분이면 끝나지만 코르티솔은 1~2시간이 우습다고 했다.
분노 역시 뇌 탓이다. 물리적·정신적 위협을 감지하는 해마와 편도체가 화를 부추기는 거다. 통제수단 역시 뇌에 뒀다. 화가 났을 때 활발해지는 안와전두피질이 감정·행동을 통제한단다. 두고두고 곱씹는 것도 뇌다. 이건 내측 전전두엽피질의 역할. 그런데 흥미로운 건 화가 날 때 느끼는 본능적 감정이 화가 난 정도와 항상 일치하진 않는다는 것. 몇 시간일 수도 몇 날, 몇 주일 수도 있고 결국 화병으로 운명을 달리할 수도 있다는 얘기다.
△1.4㎏짜리 컴퓨터, 믿을 건가 말 건가
저자가 불쑥 던져놓은 정보는 덤이다. 지구 전체 인구의 평균 IQ는 100이란다. ‘어느 나라의 평균 IQ는 85더라’ 따위는 잘못됐다는 건데. IQ테스트가 지능 자체가 아니라 다른 이들과 비교해 얼마나 뛰어난지를 재는 방식이라서다. 정상분포곡선상 인구의 80%는 IQ 80∼100에 걸치고 속한 구조인 거다. 혹시 누가 ‘난 IQ 260’이라고 떠들고 다닌다면 100% 허세다. 화성이나 목성에서 측정한 게 아니라면.
키가 큰 사람이 더 똑똑할 확률이 높다? 이것도 사실이다. 키와 지능의 상관관계는 5명 중 1명꼴. 그러면 일단 키를 키워야 하나. 유전이냐 양육이냐는 늘 따라붙는 문제지만 지금은 키가 아닌 뇌 얘기 중이니 접어두자.
책은 흥미유발 단계를 넘어 썩 ‘재미있다’. 의학지식과 신변잡기를 교묘히 연결한 지점에선 경외감이 생길 정도다. 그렇다면 한 가지, 처음 의도대로 뇌와 인간의 공존프로젝트는 순조로운가. 서로 관계를 맺고 소통까지 한다면 콧노래가 절로 나와야 하지만 사실 그렇진 않은 듯하다. 인간세계에선 여전히 험악한 사건·사고가 끊이질 않으니. 그래도 저자는 이렇게 타협하잖다. 1.4㎏짜리 컴퓨터를 더 이상 신뢰하진 못하더라도 이해는 하자고. 혹시 일을 그르쳐도 ‘인간’ 당신의 잘못이 아니라 함께 사는 ‘뇌’ 그가 잘못한 거니. 덕분에 비빌 언덕 하나씩은 마련한 셈이다. 의도치 않은 잘못을 했다고 치자. 이젠 이렇게 말하면 된다. “미안합니다. 같이 사는 뇌가 사고를 쳤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