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세영 사태에서 우리가 봐야 하는 것들[정덕현의 끄덕끄덕]

  • 등록 2024-08-22 오전 5:00:00

    수정 2024-08-22 오전 5:00:00

[정덕현 문화평론가]“손흥민·김연아에 맞춰진 눈높이가 기준이면 부족하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지 않겠나.” 2024 파리올림픽 배드민턴 여자 단식에서 금메달을 딴 안세영 선수가 기자회견장에서 한 작심발언에 대해 배드민턴협회는 장문의 보도자료와 함께 이 같은 문제의 발언을 내놨다. 그 발언에 대해 누리꾼들의 맹비난이 이어졌다. 안세영 선수가 그간 거둔 성과는 ‘손흥민·김연아 급’이 맞다라는 이야기다. 사실이 그렇다. 안 선수는 불과 22세의 나이에 세계선수권대회, 아시안게임에 이어 올림픽까지 제패했다. 선수 생활 목표로 세운 ‘그랜드슬램’에 아시아선수권대회 하나만 남겨두게 됐다. 4년에 한 번 열리는 올림픽과 달리 아시아선수권대회는 1년에 한 번 열리기에 그랜드슬램을 위한 가장 큰 퍼즐을 맞춘 셈이다. 그러니 손흥민·김연아 급은 아니라는 협회의 비꼬는 듯한 뉘앙스가 담긴 발언에 누리꾼이 발끈한 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협회의 이 발언이 더 당혹스러운 건 그것이 현재 대한민국의 스포츠가 맞닥뜨린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이른바 국가스포츠라는 이름으로 엘리트들을 선발하고 그들을 국가대표로 키워내 국제무대에서 메달을 따오는 것이 우리네 스포츠가 지금껏 짧은 기간 동안 급성장한 동력이었다. 실제로 이처럼 될성부른 싹을 일찍부터 발굴해 육성하고 집중지원하는 방식은 좋은 결과로 돌아온 게 사실이다. 88올림픽 때 무려 총 메달 33개를 땄던 것도, 또 이번 파리올림픽에서 금메달 13개, 은메달 9개, 동메달 10개를 따는 놀라운 성과를 낸 것도 이러한 엘리트 스포츠를 집중육성하는 방식이 힘을 발휘했다는 걸 부정할 수 없다.

물론 이렇게 육성한 엘리트 스포츠와 일반인들의 생활체육이 연결고리를 갖지 못하는 건 아쉬운 일이긴 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러한 엘리트 스포츠의 성과는 정반대로 일반인들의 생활체육에도 영향을 미치는 게 사실이다. 배드민턴 같은 종목이 단적인 사례다. 올림픽 등을 통해 전해진 승전보 효과로 배드민턴 동호인 수가 급증했다. 그 저변이 현재는 약 300만 명을 넘었다고 한다. 즉 스포츠에서 엘리트를 육성하는 방식 자체가 문제는 아니라는 것이다. 다만 집단적 성과만이 목표가 아닌 개인의 성취가 중요해진 시대에 구시대적인 시스템을 고집하는 건 자칫 개인의 동기부여를 막아 부작용을 유발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안세영 사태에서 우리가 읽어내야 할 것은, 안 선수도 밝힌 것처럼 누가 잘했고 잘못했는가를 가리는 것이 아니라 달라진 시대에 맞는 보다 융통성 있는 열린 접근으로 과거 불합리한 관행들을 어떻게 고쳐나갈 것인가를 고민하는 일이다.

협회에서 ‘형펑성’을 문제로 들고 나와 안 선수의 주장을 ‘특혜’처럼 치부하는 이야기 속에는 안타깝게도 집단의 이익을 위해 개인이 희생해도 된다는 과거의 ‘집단주의적’ 사고방식이 담겨 있다. 이건 1970~80년대 개발시대를 거치며 우리 사회가 압축 성장을 위해 감수해야 했던 희생의 방식이다. 가정에서는 가장이 나서고 가족구성원들이 희생하는 가부장적 시스템이 그것이었고, 직장에서도 윗사람의 지시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일하는 이른바 ‘가족경영’이 그것이었다. 국가 역시 모두가 매일같이 태극기 앞에 멈춰 서서 의례를 하는 일이 당연한 것처럼 여겨지던 시대였다. 그래서 실제로 나라는 잘살게 됐고 국민 개인소득도 높아졌다. 하지만 부작용도 적지 않았다. 그런 집단의 이익이 실현되면서 야기되는 개인들의 희생이 적지 않았다. 한 개인이 하는 이야기를 이제 그저 ‘일탈’이라고 치부하는 일은 그래서 집단주의 시대의 그림자를 떠올리게 한다. 안 선수의 작심 발언은 그래서 ‘손흥민·김연아 급’ 운운하며 비꼬는 투로 받아들여서는 곤란하다. 사실상 현 한국의 배드민턴 선수 중 최고의 성과를 낸 선수가 하는 말이 아닌가. 경청하고 대화를 통해 수용할 건 수용해야 하는 게 맞다.

특히나 이번 작심발언에서 개인 후원 계약 제한 문제나 개인 자격 국제대회 출전 제한 문제는 개인주의 시대로 들어온 현재 개인적 차원에서의 충분한 동기부여를 위해서도 진지하게 변화를 고민해야 하는 사안이다. 이제 국가가 몇 개의 메달을 따내느냐가 중요해진 시대는 지나갔다. 이를 위해 개인이 희생하는 일이 때로는 경기 조작 같은 부작용으로 나타나지 않았던가. 이제는 반대로 스포츠 선수 개개인이 자신이 하는 종목에서 성과를 내면 충분한 보상이 이뤄질 수 있게 시스템을 바꿔나가야 한다.

개인 후원 계약을 자유롭게 풀어주면 후원사들이 스타선수들에게 몰려 협회로서는 후원금이 줄어들게 되고 결국 대표팀 운영 자체가 어려워질 것이라는 고민이 이해되지 않는 건 아니다. 하지만 이런 협회 중심의 집단주의적 사고방식은 제2의 안세영, 나아가 제2의 손흥민·김연아가 나오기 어렵게 만드는 일이 되지 않을까. 또 개인 자격으로 국제대회에 출전하려면 국가대표로 활동한 기간이 5년이 넘어야 하고 여자는 만 27세, 남자는 만 28세 이상이어야 가능하다는 규정도 좀 더 융통성 있게 조정할 필요가 있다. 이런 규정은 국가대표를 마치 군 복무처럼 의무화하는 조항처럼 보인다. 제아무리 개인적인 능력이 있어도 의무를 치러야 국제대회 등에서 활동할 수 있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안 선수가 중학교 3학년 때 국가대표로 발탁돼 7년 동안 막내로서 일부 대표팀 선배들의 방 청소와 빨래를 대신했다는 이야기 또한 너무나 시대착오적으로 느껴지는 건 그래서다.

대중문화를 들여다보는 필자의 입장에서 바라보면, 안세영 사태는 마치 K팝의 글로벌 성공과 함께 등장했던 연습생 시스템에 대한 변화의 요구들을 떠올리게 한다. 스포츠가 엘리트들을 모아 집중육성하는 시스템을 이어온 것처럼, K팝도 유사한 연습생 시스템을 갖고 있다. 하지만 장기 계약 문제나 연습생 개개인들의 인권 문제 등이 제기되면서 조금씩 시스템 또한 변화해왔던 게 사실이다. 그 변화과정에서 안 선수와 같은 이들의 목소리가 적잖이 있었다. 그 아픈 목소리들을 들어야 한다. 빠르게 변화해가는 시대에 관행처럼 과거의 기준들이 전도유망한 청춘들의 발목을 잡아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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