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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일리 오현주 문화전문기자] 키만 훌쩍 키운 마른 나무 아래에는 늘 여인들이 있다. 등에 아이를 업었든, 머리에 소쿠리를 올렸든. 우린 그이들이 말을 섞는 모습은 본 적이 없다. 그저 멀찌감치 서로 바라보든가, 가던 걸음을 재촉할 뿐이다. 어찌 보면 모두가 동지인 듯도 하다. 나 사는 세상에 함께해주니 그저 좋을 뿐이라고 말없이 마음으로만 전하는.
잎이 떨어져 가지만 앙상하게 남은 나무란 뜻의 ‘나목’을 박수근은 즐겨 그렸다. 그 곁에서 서성이거나 머물러가던 이들의 이야기를 토속적 미감으로 풀어냈던 거다. 그 ‘나목’을 일찌감치 발견한 작가 박완서는 동명소설(1970)로 박수근을, 또 그이가 처한 현실을 그 앙상한 나무에 비유하기도 했다. 전쟁으로 집과 재산을 다 잃고 서울에 와 혹독한 추위를 맨몸뚱이로 버텨냈던 고단한 ‘환쟁이’. 하지만 죽어가는 고목인 줄 알았던 그 나무에 생명이 피어나더라고 했다. 박수근, 당신도 그럴 거라고.
1914년 강원 양구에서 부유한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난 박수근은 열두 살 무렵 밀레의 ‘만종’을 보고 화가를 꿈꿨다고 했다. 하지만 아버지 사업의 실패로 보통학교(지금의 초등학교)만 졸업한 이후 그림은 독학으로 공부했다. 1932년 열여덟 살에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입선하며 꿈이 실현되는가 했지만 더욱 어려워진 집안형편으로 가족이 뿔뿔이 흩어지는 등의 비운을 겪으며 청년시절을 버텨냈다.
박수근 작품이 인기를 높여간 건 타계 직후인 1970년대부터다. 2007년에는 서울옥션에 나온 작품 ‘빨래터’(1961)가 당시 국내 미술품 경매사상 최고가인 45억 2000만원에 낙찰되기도 했다. 현재까지 전해지는 박수근의 작품은 400여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