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우리치오 카텔란의 조각작품 ‘동훈과 준호’(2023) 중 하나. 나무·스티로폼·스티인리스스틸 등으로 실물 크기의 형체로 제작해 리움미술관에 로비에 앉혔다. 나머지 하나는 현관 초입에 놓았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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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일리 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왜 여기서 이러고 있소? 딱한 사정 한번 들어나 봅시다.”
하마터면 이럴 뻔했다. 한겨울 찬바람을 피해 어쩌다 여기까지 들어왔다 해도 말이다. 명색이 대한민국 최고의 사립미술관, 그것도 현관 초입에 얇은 점퍼차림의 한 노숙자가 벌러덩 드러누워 있으니 그 사연이 어찌 궁금하지 않겠는가. 어쩌다 못 보고 지나쳐 그대로 로비로 들어섰다고 치자. 대략난감한 상황은 끝이 아니다. 이번엔 중앙 기둥에 기댄 채 바닥에 웅크리고 앉은 또 다른 노숙자가 보이니까. 도대체 뭐 이런 일이 있나.
그래 맞다. ‘말린’ 거다. 누구에게? 마우리치오 카텔란(63)에게. 세계 미술계가 고개부터 절레절레 젓는 이탈리아 출신 설치미술가 카텔란에게 시작부터 한방 먹은 거다. 저 노숙자들은 다름 아닌 카텔란의 조각작품이니까. 나무·스티로폼·스테인리스스틸로 실물 크기의 형체를 빚은 뒤, 옷 입히고 모자 씌우고 마스크까지 끼워 ‘속이자’ 작정하고 내놓은 ‘동훈과 준호’(2023)니까.
| 리움미술관에 들어서는 현관 초입에 놓은 마우리치오 카텔란의 조각작품 ‘동훈과 준호’(2023) 중 하나. 나무·스티로폼·스티인리스스틸 등으로 실물 크기의 형체로 제작했다. 나머지 하나는 로비에 앉혔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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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마 손을 내밀어 그이를 일으키려 하지 않은 건 그날 운이 좋았기 때문이다. 그 ‘딱한 사정’이 자칫 ‘그에게서 나에게로’ 긴박하게 옮겨올 수도 있었단 얘기다. “몰라서 한 일”이라고 변명을 해봐도 ‘작품 훼손’의 혐의에선 자유로울 수 없었을 테니.
서울 용산구 한남동 리움미술관. 국내서 처음 펼친 카텔란의 ‘우리’(WE) 전은 그렇게 문을 연다. 개인전에서조차 작품 2∼3점 내놓는 게 전부일 만큼 까탈스럽기 그지없다는 그이에게서 ‘한국 첫 개인전’에 무려 38점을 얻어냈다. 덕분에 1990년대 데뷔 이후 30여년에 걸쳐 작업한 조각·설치·회화·벽화 등 주요 작품을 단단히 챙겨서 걸고 세울 수 있었고. ‘한쌍의 노숙자’는 그저 맛보기에 불과하다는 얘기다.
| 바닥에서 얼굴만 빼꼼히 내놓은 침입자를 유머러스하게 포착한 마우리치오 카텔란의 조각설치 ‘무제’(2001). 비현실적인 설정으로 미술계에 어정쩡한 위치에 있는 카텔란 자신을 투영했다는 해석이 나오기도 했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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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우리치오 카텔란의 조각설치 ‘무제’(2001)의 침입자를 뒤에서 내려다봤다. 리움미술관은 이 작품 설치를 위해 개관 이래 처음으로 바닥을 뚫는 공사를 했단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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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기는 깨는 것…‘논쟁적 작품’ 수두룩카텔란을 두고 왕왕 붙이는 별칭이 있다. ‘뒤샹의 적자’. 철물점에서 사온 소변기(‘샘’ 1917) 하나 달랑 전시장에 들여놓고 현대미술계의 패러다임을 바꿔버린 마르셀 뒤샹(1887∼1968)의 뒤를 잇는 후예란 말은 꽤 적절해 보인다. 2019년 ‘아트바젤 마이애미’ 현장, 근처 식품점에서 사온 바나나(‘코미디언’ 2019) 하나를 벽에 덕테이프로 붙여두고 12만달러(현재 약 1억 5000만원)를 부른 누군가에게 냉큼 팔아버렸으니 말이다. 100년을 사이에 두고 미술계는 또 한번 폭풍에 휩싸였더랬다. 작품과 작품 아닌 것의 경계, 미적·경제적 가치를 결정하는 기준에 다시 트집을 잡힌 셈이니까.
|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바나나. 벽에 덕테이프로 고정한 이 바나나에 카텔란은 ‘코미디언’(2019)이란 이름을 달았다. 2019년 ‘아트바젤 마이애미’에서 12만달러(현재 약 1억 5000만원)에 팔렸던 작품이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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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그 수준에 그쳤다면 영 섭섭했을 터. 카텔란의 발칙한 세상은 예술영역을 뛰어넘는다. 배배 꼬인 위트·유머로 각이 딱 잡힌 종교·정치·사회의 틀을 휘저으며 폼나는 기성체계를 조롱하고 풍자하는 작업을 ‘본업’으로 삼은 거다. 그뿐인가. 죽고 사는 일, 외로움과 불안한 내면에 빠진 ‘우리’ 이야기까지 서슴없이 털어놓았으니. 다시 말해 그이의 작품에는 ‘논란·논쟁’이 마를 날이 없었다는 뜻이다. 이런 식이다.
교황이 붉은 카펫 바닥에 쓰러져 있다. 지병으로? 천만에. 하늘에서 떨어진 운석을 맞아서(‘아홉 번째 시간’ 1999). 그저 상징적인 교황이어도 난리가 났을 텐데, 그 모델이 1999년 작품을 처음 선뵀던 당시 요한 바오르 2세였으니 세상의 반응이 과연 어땠겠는가.
| 마우리치오 카텔란의 ‘아홉 번째 시간’(1999). 작품을 제작하던 당시 바티칸 교황이던 요한 바오로 2세를 모델로 했다. ‘교황이 운석에 맞아 쓰러진다면’이란 발칙한 상상력을 보탠 대표적인 카텔란의 문제작이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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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정하게 두 손을 모으고 무릎을 꿇고 앉은 남자. 얼굴을 확인하니 낯이 익는다. 콧수염 하나로 단박에 알아볼 아돌프 히틀러(‘그’ 2001). 누구도 어디서도 다시 세우기 꺼려 하는 그 인물은 등장 자체로 화제가 됐더랬다. 그러거나 말거나 카텔란은 저토록 깔끔하게 빚어놓은 히틀러의 등 뒤에서 대놓고 묻고 있다. ‘그가 이렇게 나온다면 이제 용서할 건가.’
| 마우리치오 카텔란의 조각작품 ‘그’(2001). 아돌프 히틀러의 무릎을 꿇렸다. 다소곳하게 앉아 깊이 반성하는 표정을 한 히틀러를 통해 카텔란은 이 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한 ‘역사적 반성’에 관해 묻는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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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천을 덮어 나란히 바닥에 내려놓은 아홉 개의 조각. 굳이 천을 들춰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어느 참사에서 옮겨다 놓은 시신이란 것을(‘모두’ 2007). 하지만 그 사고가 어떤 것이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보는 이라면 누구나 자신이 직·간접적으로 겪고 기억에 남긴 가장 참혹한 비극을 떠올릴 테니까.
거꾸로 선, 아니 머리를 땅에 박고 벽에 기댄 경찰관 둘도 보인다(‘프랭크와 제이미’ 2002). 한 경관은 팔짱을 끼고 한 경관은 두 손을 내린 채다. 그다지 심각한 얼굴들도 아니다. 바로 여기에 포인트가 있다. 2002년 9·11테러 직후에 내놓은 작품은 당시 손 놓고 있을 수밖에 없던 공권력을 우스꽝스럽게 비꼰 거다.
| 붉은 카펫 위에 놓인 하얀 조각작품 9점. 마우리치오 카텔란이 ‘모두’(2007)라 이름 붙인 작품은 한눈에 ‘천으로 덮인 시신’을 알아챌 수 있게 한다. ‘익명의 죽음에 대한 기념비’라고 했다. 실제로 기념비에 자주 쓰는 카카라 대리석으로 제작했단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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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뉴욕 경찰관을 머리를 바닥에 박은 채 거꾸로 세웠다. 마우리치오 카텔란의 ‘프랭크와 제이미’(2002)는 결정적 순간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마네킹 같은 공권력을 꼬집었다. 물구나무선 모양새로 9·11테러로 무너진 쌍둥이빌딩을 연상케 했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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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 하나하나가 가진 아찔한 수위에 비한다면 ‘애교’처럼 보이는 작품도 여럿이다. 세발자전거를 타고 전시장 곳곳을 헤집고 다니는 꼬마(‘찰리’ 2003), 7분마다 양철북을 시끄럽게 두들겨대는 소년 오스카(‘무제’ 2003), 바닥에서 얼굴만 빼꼼히 내놓은 침입자(‘무제’ 2001), 냉장고에 들어앉은 채 밖을 내다보는 여인(‘그림자’ 2023) 등등.
비틀어댄 가벼움, 단순화한 급진성굳이 한 줄 특징으로 꼽으라면, 심각하게 비틀어댄 가벼움, 천연덕스럽게 단순화한 급진성이랄까. 주변 혹은 문화·역사 속 인물을 불러들여 ‘부조리 희극’ ‘블랙 코미디’처럼 연출한 작업이 말이다. 그렇다고 날 세운 비수를 찔러 대는 범위가 이토록 광범위할 수 있나.
| 마우리치오 카텔란의 ‘그림자’(2023·왼쪽)와 ‘찰리’(2003). 냉장고 안에 들어앉아 밖을 내다보는 여인은 20대 초반에 여읜 카텔란의 어머니. 자신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그리움을 표현했다. 세발자전거를 타고 미술관을 종횡무진 누비는 꼬마는 카텔란의 어린 시절을 닮았다고 했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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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복 입은 두 남자를 침대에 나란히 눕힌 마우리치오 카텔란의 ‘우리’(2010). 카텔란의 얼굴을 닮았다는 두 얼굴은 또 서로 다르다. 이른바 ‘2중 자화상’을 통해 카텔란은 삶과 죽음, 개인과 사회, 권위에 대한 오마주와 전복 등 두 가지 잣대를 한 침대에 들였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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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한시도 방심할 수 없다. 천장부터 바닥, 사각공간의 구석까지 샅샅이 헤집어보지 않으면 놓치게 될 작품도 여럿이니까. 박제한 말 한 마리를 천장에 매달아두고(‘노베첸토’ 1997), 희생을 상징한 두 발을 7m 가까이 되는 벽화로 그리고(‘아버지’ 2021), 바티칸의 시스티나 성당을 축소해 통째로 옮겨낸(‘무제’ 2018) 대형작품 사이사이에 말이다. 앙증맞은 또 다른 세상이 있다. 창가에 화분처럼 놓고 식물을 심어둔 부츠(‘무제’ 2008), 어느 벽에 설치한 정강이 높이의 베이비 엘리베이터(‘무제’ 2001), 권총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은 다람쥐의 미니어처 살림집(‘비디비도비디부’ 1996) 등이 숨어 있는 거다.
| 마우리치오 카텔란의 ‘노베첸토’(1997·왼쪽)와 ‘무제’(2018). 카텔란은 진짜 말을 박제해 공중에 매달고, 바티칸의 시스티나 성당을 축소해 통째로 옮겨내기도 했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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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텔란의 대담한 공격성 덕에 미술관으로서도 ‘안 해본 일’들을 했다. 바닥을 파내 속살을 보여주고 벽을 뚫어 틈새까지 열어내는. 작가와 ‘코드’가 맞았다고 할까. 이런 안팎의 장치까지 더해 모처럼 ‘리움’의 이름값에 대한 의심을 빼낼 자리가 되지 않을까 싶다. 비정상을 비틀고 비틀어 정상으로 되돌리는 관록은 아무나 다 가진 자질이 아니다.
멀쩡한 미술관을 가히 난장으로 만들어두고도 역시 작가는 말이 없다. 아무리 “아트스트의 이야기는 절대 듣지 말라”고 설파했다지만. 하긴 굳이 말이 필요하겠나. 노숙하는 동훈과 준호가 어디 이곳에만 있겠는가. 전시는 7월 16일까지.
| 마우리치오 카텔란의 분신이라 할 ‘찰리’(2003·아래)가, 카텔란이 아버지를 떠올리며 극사실적 회화로 그린 ‘아버지’(2021) 앞에 세발자전거를 잠시 멈춰 세웠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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