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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일리 송승현 기자] 통상임금 소송에서 대법원이 신의성실의 원칙(이하 신의칙)의 중요한 기준으로 판단하는 `중대한 경영상 어려움`을 까다롭게 보기 시작하면서 하급심에서도 유사한 취지의 판결이 이어지고 있다. 통상임금 판결 때 기업 입장 보다는 근로자의 급여 권리를 우선적으로 고려하는 경향이 짙어지고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
달라진 ‘신의칙’ 적용 기준…1·2심 뒤집은 핵심 쟁점
30일 법조계에 따르면 서울고등법원 민사1부(재판장 윤승은)는 최근 두산인프라코어 근로자 안모씨 등 561명이 회사를 상대로 낸 통상임금 소송에서 “회사는 23억 6369만원을 지급하라”고 원고 일부 승소 판결했다. 안씨 등은 정기상여금·생산장려수당·개인연금보험료는 통상임금에 해당하기 때문에 이를 반영하지 않고 지급된 법정수당과 퇴직금을 다시 계산하고, 차액을 지급하라고 회사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1·2심 개인연금보험료를 제외하고 정기상여금 등은 통상임금에 해당한다고 판단했다. 재판의 핵심 쟁점은 안씨 등의 소 제기가 신의칙을 위배한 것인지에 있었다. 1심 재판부는 “2008년 이후 현재까지 일부 기간을 제외하면 지속적인 손실을 기록하고 있고 회사의 수익상황이 단기간에 개선될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며 “(정기상여금 등을 통상임금에 포함할 경우) 예측하지 못한 새로운 재정적 지출로 인해 회사 경영의 중대한 어려움이 따른다”고 봤다.
대법 “신의칙 위배 적용 전, 근로기준법 입법 취지 봐야”
만도 통상임금 소송의 1심 재판부는 신의칙 위배를 인정하지 않으면 비슷한 소송이 연이어 제기될 것이라는 점에서 시설투자와 생산개발 등 회사 투자활동에 위축 내지 지장을 불러올 수 있다고 판단했다. 반면 2심 재판부는 “이 사건 청구기간인 2010~2014년 동안 만도의 재정 및 경영상태 등을 비춰볼 때 회사 소속 다른 근로자에게 미지급 법정수당과 퇴직금 지급으로 인한 추가 부담액 규모(약 1446억원)가 중대한 경영상 어려움을 초래한다고 볼 수 없다”고 달리 봤다.
두 사건 모두 대법원이 잇따라 신의칙 기준을 엄격히 보면서 그에 영향을 받아 뒤집힌 사례로 보인다. 대법원은 올해 시영운수에 이어 한진중공업이 낸 통상임금 소송에서도 회사의 신의칙 위배 주장을 인정하지 않았다. 특히 대법원은 한국남부발전의 통상임금 소송에선 신의칙을 적용할지에 앞서 근로자의 기본적 생활을 보장과 향상이라는 근로기준법의 입법 취지를 충분히 고려하겠다고 밝혔다. 이 사건을 심리한 대법원 2부(주심 박상옥 대법관)는 “통상임금 재산정에 따른 추가 법정수당 청구를 중대한 경영상 어려움 초래나 기업 존립 위태 이유로 배척한다면 기업경영 위험을 사실상 근로자에게 전가하는 결과가 초래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렇다보니 경영계에선 기업 경영상 어려움을 단순히 회계장부나 재무제표 등을 바탕으로 판단하는 건 경쟁력 요인을 고려하지 않는 판결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재계 관계자는 “신의칙을 좀처럼 인정하지 않는 대법원 판결 태도가 계속된다면 소송당사자인 기업의 경영여건은 판결을 기점으로 계속 악화될 수밖에 없다”고 우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