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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일리 오현주 문화전문기자] 결국 줄을 세웠다. 요즘 ‘줄’이라곤 두 가지 정도가 전부 아닌가. 코로나19 검사를 위해 선별진료소 앞에 늘어선 줄, 명품브랜드를 구입하자고 백화점 앞에 늘어선 줄. 그러니 이 줄은 참 특별하다. 그림을 사겠다는 갤러리 앞에 늘어선 줄이었으니까. 새벽부터 찾아와 상점이 오픈하길 오매불망 기다리는 ‘오픈런’이 갤러리에서도 벌어진 거다.
벽에 건 그림 곁에 빨간딱지가 여럿 붙은 전시장을 둘러보는 일이 없진 않지만 모든 작품에 죄다 붙은 경우는 흔치 않다. 올해 그 처음은 바로 이 작가의 이 전시였다. 작가 김지희(38)의 개인전 ‘팬시 스피리트’(20일까지 서울 용산구 한남동 가나아트사운즈). 회화작품 29점을 내건 전시는 사전판매로 25점을 팔아치웠다. 다만 현장으로 달려온 컬렉터를 위해 4점만을 남겨뒀던 게 오픈런이란 갤러리 앞 진풍경을 만들어냈고, 결국 빨간딱지를 매단 작품들을 걸고 전시를 개막했던 거다.
모처럼의 개인전도 아니었다. 작업량이 많기로 소문이 난 작가는 지난해 개인전 ‘킵 샤이닝’(갤러리나우)을 열었고, 2020년에는 ‘찬란한 소멸의 랩소디’(표갤러리) 전을 포함해 2회 개인전을, 2019년에는 ‘트윙클 트윙클’(초이스아트컴퍼니) 전 등 3회 개인전을 기어이 채웠다. 어디 이뿐인가. 국내외 아트페어 출품작을 만들고 단체전에 몇 점씩 내는 일도 다반사인데, 일일이 꼽는 게 번거로울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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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어디서 이런 열정이 나오는지. 그 힌트를 여기서 찾을 수 있으려나. 작가는 오래된 얘기 한 토막을 꺼내놓는다. “2008년, 미국산 광우병 소고기 수입 반대 시위로 온 나라가 시끌시끌하던 그때. 서울 세종로와 태평로에는 연일 촛불집회 인파가 그득했더랬다.” 그래 그랬다. 그런데 뜬금없이 웬 공팔년 집회 얘기인가.
그 해 열었다는 첫 개인전 때문이다.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서울 삼청동의 작은 갤러리가 진행한 공모전에서 ‘발탁’돼 귀한 기회를 얻은 첫 전시. 긴장과 설렘 속에 준비는 또 얼마나 열심히 했겠는가. 그런데 축하도 해주고 그림도 사줘야 할 관람객이 아무도 찾아오질 않았다는 거다. 때마침 광우병 시위가 격화되자 시위대를 막는 조치로 삼청동을 입구부터 원천봉쇄를 했던 탓이다. “달랑 엿새뿐인 전시기간 동안 날마다 텅빈 갤러리에서 올 수 없는 관람객을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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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고 싶은 건지 웃기 싫은 건지…독보적 ‘교정기 미소’
굳이 장르 구분을 해야 한다면 작가는 동양화가고 한국화가다. 장지에 채색하는 작업만 놓고 보면 틀리지 않다. 그런데 그 작업이 빚어낸, 팝아트 향이 물씬 풍기는 형체 앞에선 망설이게 된다. 먹 대신 빛, 은은한 담채 대신 반짝이는 원색이 화면을 지배하고 있으니까.
간단히 요약하면 이렇다. 오로지 소녀의 얼굴 하나만 둥둥 떠 있는 화면. 그런데 그 얼굴이 평범치 않다. 눈을 가린 짙은 안경과 머리 위에 올린 크라운은 기본, 안경테와 크라운에 수없이 박힌 보석·꽃 장식은 거부할 수 없는 옵션이다. 가끔 영화 ‘티파니에서 아침을’에서 스크린을 장악한 배우 오드리 헵번의 티아라 스타일이 나오기도 하는데. 어쨌든 그 휘황한 광채에 어느 정도 눈이 익으면 그제야 다른 게 보인다. 들여다볼 수 없는 눈빛 대신 자꾸 들여다보게 하는 붉은 입술이다. 웃고 싶은 건지 웃기 싫은 건지, 살짝 벌린 그 입술이 만든 미소, 또 그 사이에 걸쳐 있는 치아와 치아교정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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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만큼 ‘치아교정기 미소’는 독보적이다. 2008년 이래 한 번도 작품명을 바꾸지 않은 ‘실드 스마일’(Sealed Smile) 연작이 지금껏 존재하는 이유기도 하다. 뜻을 풀자면 ‘닫힌 미소’ ‘억지웃음’쯤 될 터. “원체 인물작업을 좋아했다. 처음을 거스르자면 초등학교 때 그린 ‘피에로의 눈물’부터일 거다. 웃고 있지만 또 울고 있는. 이후 다양한 풍경도 정물도 그렸지만 결국 돌고 돌아 또 인물을 그리고 있더라.”
2년 전부터 웃음기 싹 거둬낸 정밀한 동물 연작도
‘실드 스마일’을 두고 누구는 강요받은 헛된 욕망을 떠올린다고 했다. 세상부귀를 다 얻은 소녀가 한번도 활짝 웃은 적이 없다고. 또 누구는 소녀의 ‘행복코스프레’라고도 한다. 모든 걸 쥐었으나 결코 채워지지 않을 거라고. 그런데 딱 거기까지다. 좋다는 건지 나쁘다는 건지, 버리라는 건지 채우라는 건지. 작가는 이렇다 한 말이 없다.
대신 채울 수 없는 존재감, 잃어버릴 것에 대한 불안감 등은 작가의 확장한 기량을 타고 작품의 규모를 늘려갔는데. 이태 전부턴 새로운 ‘얼굴’이 보이기 시작했다. 웃음기 싹 거둬낸, 검고 흰 털 사이에 빛나는 푸른 눈동자가 등장한 거다. 그 ‘왕관 씌운 호랑이’를 앞세워 ‘선글라스 쓴 부엉이’ 등 동물 연작이 작가의 붓끝에 따라나왔다. 1호 붓으로 털 한올 한올까지 세워 그린 ‘팬시 스피리트’(The Fancy Spirit)다. 웬만해선 이겨내기 힘든 위압감 하나로 화면을 그득 채우고 있는 그들은, 치아교정기 소녀와는 상황이 달랐다. 선명해졌다고 할까, 비장해졌다고 할까. 결국 이번 전시에선 24K 금박으로 배경을 도배한 100호(163×130㎝) 규모의 부엉이까지 꺼내놨다.
하지만 이조차도 여기에 비할 건 아니다. “지금 폭 10m 작품을 그리고 있다. 2020년 9월에 시작해 1년 반을 매달렸는데, 드로잉에만 몇 달이 걸렸다. 욕망과 존재의 문제에 시간성을 넣었고, 낮에 시작해 밤으로 끝나는 여정을 담는다.” 소름 끼치는 작업을 하고 싶어 작정하고 덤볐다니, 어쩌겠나. 기다리는 우리도 독하게 참아볼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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