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도 많고 탈도 많았다. ‘슈즈트리’는 예고도 없이 공공미술에 관한 뜨거운 논쟁을 불러왔다. 크게 두 갈래였다. ‘예술이냐 흉물이냐’는 대주제 아래 ‘예술표현의 자유를 침해하는 몰이해’를 탓한 것이 하나, ‘1억 4000만원짜리 세금의 가치’를 따지는 것이 다른 하나.
비난을 부른 건 비호감의 외형 탓이 컸다. “예술은 무슨? 악취 나는 넝마”라는 혹평이 끊이질 않았다. 1억 4000만원을 들인 조형물이란 얘기가 돌자 여론은 다시 들끓었다. “아까운 세금으로 재활용쓰레기장을 만들었느냐. 그것도 달랑 9일간 보이려고?” 예술표현의 자유를 들이댄 쪽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거부감이 들어도 예술은 예술”이라며 이해가 부족한 대중의 몰지각을 쏘아붙였다.
잠깐 장면을 바꿔보자. 2014년 등장했던 ‘러버덕’은 공공미술의 불모지라 할 한국서 성공사례로 꼽힌다. 네덜란드 공공미술작가 플로렌타인 호프만이 서울 잠실 석촌호수에 띄운 1t짜리 초대형 노란 고무오리는 한 달간 500만명을 끌어모았다. 가장 큰 요인은 대중을 위로했다는 것. ‘마케팅 수단’ ‘폭발 위험’ 등 냉소가 없던 건 아니지만 ‘치유’를 강조한 작가의 뜻은 제대로 먹혔다. 그에 힘입어 석촌호수 일대에는 ‘판다’ ‘슈퍼문’에 이어 최근 백조가족 ‘스위트 스완’까지 불려 나왔다.
맞다. 예술은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데서 출발한다. 하지만 추한 것을 외면하는 것이 예술인 것도 아니다. 고급스러워야 한다는 것도 편견이다. 여기에 개인의 취향이란 건 더 강력하다. 모든 이들을 똑같이 만족시킬 작품은 있을 수가 없다. 인내가 부족했다는 것도 인정하자. 애써 쌓아올린 작가도 있었다.
헌 신발에 마음이 쓰이지 않는 사람은 없다. 굽이 닳은 낡은 구두, 짝 잃은 운동화는 가슴을 울린다. 작가는 “설치미술의 낯섦에 대한 대중의 두려움”으로 진단했지만, 천만에. 결국 그 좋은 소재를 낯설게 만들어서다. ‘슈즈트리’는 망했다. 대중의 이해를 얻지 못한 탓이 아니다. 마음을 얻지 못한 탓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