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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를 키운 8할은 물음표였지”…큰 스승 이어령의 사유
- [이데일리 김미경 기자] ‘너무 잘 돌아가기에 마치 서 있는 것처럼 보이는 바람개비.’ 2018년 작고한 문학평론가 김윤식 서울대 명예교수는 생전에 이어령 초대 문화부 장관을 이렇게 비유했다. 이보다 더 적절한 표현이 있을까.이어령 전 장관은 인문학자, 대학교수, 언론인, 작가, 행정가, 비평가 등 다채로운 활동을 하며 ‘시대의 지성’으로 불려왔다. 그는 ‘앉는 그 자리가 곧 강의실이 된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박학다식했고, 달변가였다. 20대부터 60년여 동안 130여종이 넘는 책을 냈다. 큰 스승이 떠나갔다. 평생을 바쳐 세상에 이야기를 던진 이어령 선생이 26일 별세했다. 향년 89세. 고인은 지난 2017년 암이 발견돼 두 차례 큰 수술을 받았고, 말기 암으로 투병하면서도 생애 마지막에는 항암치료를 거부하고 집필에 몰두했다. 말년의 그는 죽음에 대한 성찰을 공유해 우리의 삶을 돌아보도록 했다.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이 지난해 8월25일 서울 종로구 영인문학관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사진=연합뉴스)1933년(호적상으로는 1934년) 충남 아산에서 태어난 고인은 한국의 지성사에 한 획을 그은 큰 산이었다. 등장부터 범상치 않았다. 스물세 살 서울대 국문학과 졸업 무렵인 1956년 기성세대를 신랄하게 비판한 ‘우상의 파괴’로 문단을 뒤흔들며 나타났다. 1957년엔 ‘화전민 지대’를 발표하며 전쟁의 폐허 위에 새로운 창조의 씨앗을 뿌려야 한다고 선언했다. 59년 문학의 사회 참여를 비판한 평문 ‘작가의 현실 참여’에서는 한국 문단을 다시 각성시켰다.1960년부터 언론계에서 당대 최고 논객으로 활약했다. 1960년 서울신문을 시작으로 1972년까지 한국일보, 경향신문, 중앙일보, 조선일보 등 주요 언론사 논설위원을 거쳤다. 고인이 논설위원으로 언론사에 처음 발탁될 때 불과 스물일곱이었다. 1966년 이화여대 강단에 선 이후 1989년까지 문리대학 교수, 1995∼2001년 국어국문학과 석좌교수를 지냈고, 2011년 명예교수가 됐다. 고인의 일은 문명비평, 문학창작뿐 아니라 문화기획까지 확장했다. 1988년 서울올림픽의 개막식을 총지휘하며 여러 장면을 역사에 새겼다. 개회식에 등장한 ‘굴렁쇠 소년’도 고인의 어린 시절에서 착안한 것이었다. 노태우 정부 때는 신설된 문화부의 초대 장관(1990~1991)을 역임했다. 이때 한국예술종합학교와 국립국어연구원(현 국립국어원)을 설립했고, 조선총독부 청사를 철거하는 경복궁 복원계획을 수립했다. 80여년 평생 ‘이 시대 최고의 지성’, ‘말의 천재’라는 꼬리표가 붙었다. 지난해 1월 출간된 인터뷰 책 ‘이어령, 80년 생각’(김민희 지음·위즈덤하우스)에서 이 전 장관은 “나를 키운 팔할은 ‘물음표’였다”고 했다. 지은이와의 인터뷰에서 이어령 선생은 “나는 천재가 아니여”라고 손사래까지 치며 부정을 표했다고 책은 전한다.“내 인생은 물음표와 느낌표 사이를 시계추처럼 오고 가는 삶이었어. 누가 나더러 ‘유식하다, 박식하다’고 할 때마다 거부감이 들지. 나는 궁금한 게 많았을 뿐이거든. 모든 사람이 당연하게 여겨도 나 스스로 납득이 안되면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그냥 넘어가지 않았어. 물음표와 느낌표 사이를 오가는 것이 내 인생이고 그 사이에 하루하루의 삶이 있었지. 어제와 똑같은 삶은 용서할 수 없어. 그건 산 게 아니야. 관습적 삶을 반복하면 산 게 아니지.”선생의 마지막 사유는 죽음이었다. 그는 삶과 죽음에 대한 지적인 깨달음을 말년에 여럿 남겼다. 지난달 출간한 ‘메멘토 모리’(열림원)는 그의 생애 마지막 저서가 됐다. 삼성그룹 창업주인 고 이병철 회장이 1987년 별세 한달 전 가톨릭 신부에게 물은 24가지 질문에 병마와 싸우고 있던 고인이 자신의 관점으로 답한 책이다.그는 이 책에서 팬데믹 시대의 죽음에 관해 이런 사유를 전했다. “죽음이라는 것이 바이러스, 질병을 통해 개개인의 마음속에 들어와 경험하게 되고, 직접 경험하지 않더라도 죽음이 자기 일로 비치기 시작한 것이죠. 죽음을 통해 황폐화된 개인을 응시하게 된 겁니다. 이 죽음이 우리 사회를 어떻게 변화시킬지 두고 볼 일이지.”, “이모털(immortal·죽지 않는)한 존재는 하나님뿐이라는 사실을 망각한 거지. 생명이라는 것은 다 죽어. 코로나19 바이러스를 통해 메멘토 모리를 다시 깨닫게 된 겁니다.”고인에게 죽음은 하나의 탐구 대상이었다. “생명이지. 나에게뿐 아니라 오늘날 가장 중요한 가치이기도 해요. 생명 자체가 목적이고, 찬란한 것이고, 아름다운 것이지. 고통마저도 생명에겐 아름다운 거예요. 죽은 사람이 무슨 고통이 있겠어. 우리가 마지막으로 믿을 수 있는 건, 온 우주에 단지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 승리인 생명력이에요. 어떤 절망의 시대에도 생명의 힘은 놓치지 않았으면 해.”(책 ‘이어령, 80년 생각’ 중).나라의 지성 이어령 선생은 26일 오후 1시경 잠들어 있던 중 세상을 떠났다. 빈소는 서울 종로구 연건동 서울대학교병원 장례식장 1호실에 마련됐으며 발인은 2일 오전 8시 30분이다. 장례는 5일간 문화체육관광부장으로 치러지며, 영결식은 다음 달 2일 오전 10시 서울 서초구 국립중앙도서관 국제회의장에서 엄수된다.
- 기차, 어느 칸인들 어떠랴…풍광이 다른 것도 아닌데[이윤희의 아트in스페이스]<25>
- 윌리엄 터너의 ‘비, 증기, 그리고 속도’(1843∼1844). 철도를 주제로 한 그림으론 선구자 격이다. 19세기 새로운 교통수단으로 등장한 증기기관차에 깊은 인상을 받은 터너가 런던 템스강을 건너는 기차를 ‘순간포착’했다. 기차의 형체를 세세히 묘사하기보다 기차 자체가 변화시키는 빛·대기·속도를 포착한 묘사가 독창적이다. 캔버스에 유채, 91×122㎝, 영국 런던 내셔널갤러리 소장.200여년 전 소설 ‘오만과 편견’이 탄생한 곳은 낡은 책상이었답니다. 종이 몇 장과 잉크병, 깃대펜이 전부인 그곳이 바로 영국작가 제인 오스틴의 작업실이었던 셈입니다. 장서가 그림처럼 꽂힌 책장, 큼직한 책상이 근사한 ‘서재’란 공간은 남성 작가만 차지할 수 있던 시절이었습니다. 서재뿐인가요. 화가의 공간이던 ‘아뜰리에’도 그랬고, 누구에게나 열려있다는 ‘카페’와 ‘술집’ ‘광장’도, 한 가정집의 ‘부엌’과 ‘식당’ ‘침실’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속해 있던 공간이지만, 그곳이 모든 이들에게 늘 공평했던 것은 아니었던 겁니다. 오랜 시간 미술관을 일터로 삼아온 이윤희 큐레이터가 이데일리와 함께 그 장면, 장면을 들여다봅니다. 때론 객관적 기록으로, 때론 상징을 담아, 때론 비틀린 풍자를 숨겨낸 ‘그림으로 읽는 공간이야기’ ‘그림으로 읽는 사람이야기’입니다. 주말 독자 여러분을 아트인문학의 세계로 안내합니다. <편집자주> [이윤희 큐레이터·미술평론가] 이제 기차는 ‘칙칙폭폭’ 하며 달리지 않는다. 하지만 어린아이들에게 기차장난감을 쥐어줄 땐 아직도 ‘칙칙폭폭 빽~’ 하는 소리를 들려준다. 고속열차가 날아다니는 21세기에도 역사의 유물로 사라진 증기기관차가 증기를 내뿜으며 달릴 때 내는 그 소리는 여전히 사람들 마음속에 울리고 있는 것이다. 그만큼 19세기 증기기관차의 등장은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수많은 사람과 화물을 한꺼번에 옮길 수 있는 거대한 위용은 이미 시작된 산업혁명을 가속화했을 뿐 아니라, 인간의 정신적 한계도 확장시켰다. 이곳에서 저곳까지 며칠씩 걸렸던 거리를 단 하루만에 갈 수 있다면 생각의 범위와 과정 역시 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 무엇보다 속도, 인간이 걷거나 뛰어서는, 혹은 마차를 타더라도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는 기차의 속도는 환상적인 경험이었다. 그래서 19세기 사람들은 기차가 달리는 것을 구경하거나 기차역에서 기차가 오가는 것을 바라보는 일을 일종의 여가로 즐기기도 했다. 기차를 타고 먼 곳으로 간다면 다른 인생이 시작될 것인가, 빠른 기차에 앉으면 어떤 기분이 들까 등을 상상하며 백일몽을 꾸는 것도 그 시대의 취미생활이었다. 영국 화가 윌리엄 터너(1775∼1851)는 1843년 그레이트 웨스턴 철도(GWR)의 기차 일등석을 타고 창밖으로 머리를 한껏 내민 채 지나가는 풍경을 바라봤다. 마침 안개가 낀 습한 날이었다고 한다. 기차가 내뿜는 증기와 안개가 뒤섞이며 대기는 혼란스럽고 얼굴을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은 머리카락을 헤집어 놓았을 것이다. 터너는 이러한 경험을 토대로 ‘비, 증기, 그리고 속도’(1843~1844)를 그렸다. 이 그림은 첫눈에는 추상화처럼 보일 정도로 알아볼 수 있는 것이 별로 없는 듯하다. 하지만 우리의 시선은 한곳을 향할 수밖에 없는데, 철길을 밟고 달리는 기차가 바로 화면 오른쪽에서 돌진해오고 있기 때문이다. 그림의 제목처럼 이 화면의 주인공은 기차가 지나면서 만들어내는 대기의 혼란인 것처럼 보인다. 툭툭 끊어지는 붓자국으로 형상화한 잿빛과 황금빛 공기는 석탄을 연료로 한 기관차가 내뿜는 매연일지도 모르겠다. ◇안개 자욱한 날, 기차가 내뿜는 황금빛흐릿하나마 그림에는 두 개의 다리가 있다. 깊은 원근법을 적용한 화면 오른쪽에는 철길이 놓인 다리가, 왼쪽에는 고대 로마시대 양식으로 보이는 옛 다리가 보인다. 얼룩으로 가득찬 것 같은 화면 속에서도 옛 다리는 아치형 벽돌 하나하나가 정성스럽게 그려져 있다. 마치 옛것과 새것을 대비하려는 것처럼 옛 다리는 저 멀리 소실점으로 사라지는 듯이 보이고, 새 다리는 우리를 향해 달려오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림의 또 다른 비밀은 다리와 다리 사이에 있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지나치기 쉽지만, 양산을 쓰고 나룻배에 탄 사람들도 있고, 지나가는 기차를 향해 손을 흔드는 한무리의 사람도 숨어 있는 것이다. 요즘이야 지나가는 기차가 신기한 일도 아니고, 기차 안에 탄 사람을 향해 손을 흔들 일도 없지만, 예전에는 모르는 이들이 탄 기차에라도 열심히 손을 흔들어줬다. 아쉬워서도 아니고 반가워서도 아니고, 기차를 보면 그냥 신이 났기 때문인 것 같다. 앞으로 인간이 더 좋은 세상에서 살 것 같다는, 우리의 앞날에 희망이 비친다는 막연한 마음이었을까. 윌리엄 터너의 ‘비, 증기, 그리고 속도’(1843∼1844)의 디테일. 기차가 달리는 철길 다리와 다리 사이에 숨어 있는 두 가지 풍경이다. 양산을 쓰고 나룻배에 탄 사람들(왼쪽)과 지나가는 기차를 향해 손을 흔드는 한무리의 사람들.기차에 열광했던 것은 터너만이 아니었다. 프랑스 화가 클로드 모네(1840∼1926) 역시 오고 가는 기차에 심취했다. 그는 파리 생 라자르역에 허락을 구하고 그곳에서 ‘노르망디 기차의 도착, 생 라자르역’(1877)을 포함해 무려 12점의 그림을 그렸다. 생 라자르역은 유리 천장을 가진 철골구조의 건물로 당시로선 첨단의 외관을 자랑하는 곳이었다. 천장을 통해 하늘을 볼 수 있다는 것도 놀라운 일이었지만, 기차노선이 한둘도 아니고 열네 개에 이르는 대형 기차역이었기에 출발하는 기차와 도착하는 기차를 하루종일 볼 수도 있었다. 모네는 증기기관차가 내뿜는 열기와 바쁘게 오가는 사람들, 하늘빛을 그대로 투과하는 기차역의 혼란스러운 풍경에서 동시대를 읽었다. 모네의 눈으로 본 기차와 기차역은 분명 시대의 새로운 풍경이었다. 하지만 그 안에서 벌어지는 잡다한 인간사는 그저 한두 번의 붓질로 ‘사람들이 이 풍경에 함께 있음’ 정도로만 표현하는 게 다반사였다. 클로드 모네의 ‘노르망디 기차의 도착, 생 라자르역’(1877). 1876∼1878년 모네가 ‘생 라자르역’과 그 주변 풍경으로 완성한 12점의 연작 중 한 점이다. 기차를 타고 내리는, 사람들이 만나고 헤어지는 공간으로서의 기차역보다는 ‘기차’란 신문물이 만든 동적인 분위기를 ‘인상적으로’ 그렸다. 캔버스에 유채, 59.6×80.2㎝, 미국 시카고 시카고아트인스티튜트 소장.◇기차, 근대화의 상징이자 불평등의 상징으로대신 기차가 오가는 풍경을 홀린 듯이 바라보는 ‘사람’을 표현했던 화가는 귀스타브 카유보트(1848∼1894)였다. 그의 ‘유럽의 다리’(1876)에서는 생 라자르역사로 연결된 신축 철교 위에서 기차가 지나다니는 것을 구경하는 사람들이 보인다. 새 시대의 철교에서 턱을 괴고 저 멀리 증기를 내뿜으며 기차가 지나가는 것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난간에 기대고 선 남성 외에도 다리를 따라 몇몇이 더 보인다. 한가롭게 오가는 사람들의 모습은 오늘날과 다르지 않아 보이는데, 귀족신분제가 위력을 잃고 부르주아 시민사회가 건설되면서 자금의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 이른바 ‘여가’를 즐기게 된 것이다. 턱을 괸 채 하릴없이 기차가 오가는 것을 구경하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있는 남성은 시간 가는 것을 촘촘히 헤아리지 않아도 될 만큼 여유가 있는 사람일 것이다. 그는 또 언젠가 생 라자르역에서 기차를 타고 프랑스 북서부를 여행하리라 꿈을 꾸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는 과연 기차의 어느 칸에 탑승할 것인가. 귀스타브 카유보트의 ‘유럽의 다리’(1876). 고전적인 규범에서 벗어나 일상적인 파리의 모습 그대로를 테마로 한 카유보트의 이른바 ‘다리’ 연작 중 한 점이다. 길 위 풍경에 관심이 많아 넓은 거리와 광장, 다리, 무엇보다 그 전경을 배경으로 삼은 사람들을 다양하게 그려냈다. 덕분에 그의 작품들에선 19세기 변화하는 파리가 한눈에 보인다. ‘유럽의 다리’는 기차가 등장하지 않는 ‘기차가 오가는 풍경’으로 그려졌다. 캔버스에 유채, 125×181㎝, 스위스 제네바 프티팔레컬렉션.당시 기차는 일등 객실, 이등 객실, 삼등 객실을 구분했는데, 이처럼 각기 다른 기차 내 풍경에 관심을 가진 이는 오노레 도미에(1808∼1879)였다. 그는 일등 칸에 탄 사람들이 넉넉한 자리를 차지하고 여유 있게 풍경을 바라보거나 신문을 읽는 모습도 그렸고, 삼등 칸을 오르며 자리를 차지하려 다툼을 벌이는 장면도 그렸다. 터너와 모네, 카유보트 등이 다소 낭만적으로 기차와 기차역, 기차를 바라보는 사람들을 그릴 때, 도미에는 신분에 따라 기차의 객실이 나뉘어 있다는 사실에 주목한 것이다. 도미에의 ‘삼등 열차’(1862∼1864)에서는 객실에 빼곡히 앉은, 지치고 피곤한 사람들이 보인다. 입성이 허름해 보이는 젊은 여인은 아기를 품에 안고, 머릿수건을 둘러쓴 노인은 아마도 먹을거리가 들어 있을 바구니를 소중하게 붙들고 있다. 그들 옆의 어린 소년은 노인에게 기대 잠들어 있고, 이고 가야 할 짐이 들었을 법한 나무상자도 보인다. 당시 기차의 삼등칸은 시골에서 도시로 일자리를 구하러 가는 사람들을 실어 날랐다. 이들에게서는 차창 밖 풍경의 낭만이나 여행의 즐거움 따윈 찾아볼 수 없다. 그저 이 기차가 데려다 줄 낯선 곳에서의 다음 인생을 굳세게 살기 위해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오노레 도미에 ‘삼등 열차’(1862∼1864). 산업혁명이 함께 밀고온 자본주의 사회는 기차 안에서 시작됐고, 도미에는 그 지점을 잘 잡아냈다. 빈부격차에서 비롯된 서민들의 박탈감, 노동의 고단함이 절절하게 배인 허름한 열차객실 풍경을 암울하고 쓸쓸한 갈색톤으로 진하게 녹여냈다. 캔버스에 유채, 64.5×90.2㎝, 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미술관 소장.기차가 신문물이던 때는 한참 전에 지났다. 지금 우리는 19세기 사람들이 상상할 수 없는 세계의 입구에 또 서 있다. 이제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공간 속에서 서로 이야기하고, 마음을 전하고, 일거리를 주고받기도 한다. 여기에 더해 앞으로는 ‘메타’ 공간이 우리 삶을 바꿀 것이라고 하니 하루하루 사는 것이 한 걸음씩 뒤쳐지는 것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하지만 어떤 미래를 맞게 될지 일단 구경을 해 봐야지, 달리는 기차를 보며 신나서 손을 흔들던 사람들처럼 좋은 일이 생길 거라고 믿어볼 수밖에. 일등칸이든 삼등칸이든 주어진 자리에 앉아 다가오는 풍경이 얼마나 새로울지 호기심을 잃지 않고 기대해보기로 한다. △이윤희 큐레이터는… 1970년생. 대학을 다니던 20대 어느 겨울, 해외여행 자유화 덕분에 유럽행 비행기에 오른 것이 인생에 미술을 들인 결정적 계기가 됐다. 누구나 들렀던 어느 미술관에서 뜻밖에 렘브란트의 ‘어머니 초상’이란 작품이 발을 붙들었다. 뭔가 꿈틀거리는 게 올라왔다. 세상을 감동시킨 그 수많은 작품을 설명하는 언어를 가지고 싶다는 열망도 함께였다. 이화여대에서 독문학과를 졸업한 뒤론 동대학원 미술사학과에 진학해 본격적으로 미술의 역사, 미술의 말을 공부했다. 이후 ‘공간’ 지 미술기자를 시작으로 대전시립미술관 학예실장, 아트센터 화이트블럭 학예실장, 청주시립미술관 학예실장, 수원시립미술관 학예과장 등을 거치며 오래전 그 렘브란트의 감동을 현장으로 옮겼다. 번역서로 ‘그림자의 짧은 역사’(2006), ‘포토몽타주’(2003), ‘바디스케이프’(1999)가 있으며 저서로 ‘여성의 눈으로 보는 미술 키워드’의 출간을 앞두고 있다.
- 뚱뚱하면 치매에 더 잘 걸릴까 [조성진 박사의 엉뚱한 뇌 이야기]
- 조성진 순천향대 서울병원 신경외과 교수가 뇌 이야기를 합니다. 뇌는 1.4 키로그램의 작은 용적이지만 나를 지배하고 완벽한 듯하나 불완전하기도 합니다. 뇌를 전공한 의사의 시각으로, 더 건강해지기 위해, 조금 더 행복한 인생을 살기 위해 어떻게 뇌를 이해해야 하고, 나와 다른 뇌를 가진 타인과의 소통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의학적 근거를 토대로 일상에서 일어날 수 있는 재미있는 이야기들과 함께 탐구해보겠습니다. 일주일 한번 토요일에 찾아뵙습니다.[조성진 순천향대 부속 서울병원 신경외과 교수] 인류 역사적으로 인간의 뇌가 진화하게 된 결정적 이유로 ‘불의 발견’을 꼽는다. 불을 이용하여 고기를 익혀 먹기 시작해서 소화기관으로의 과다한 혈액 공급을 줄일 수 있었고, 장의 길이도 줄어들어 상대적으로 뇌로 혈류가 많이 갈 수 있게 되어 뇌 발달을 촉진시켰다는 이론이다. 그 이후 연구자들은 뇌의 크기가 건강과 기능을 결정지을 수 있음을 알게 되었으나 뇌 크기 자체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에 대해서는 연구가 미미하였다.비만과 뇌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 지에 대한 하나의 연구로 영국의 마크 해머 교수는 체지방이 뇌 크기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하여 비만한 사람에서 뇌의 크기가 작다는 것을 밝혀냈다. 연구진은 MRI 스캔을 사용하여 뇌의 크기를 계산하고 백질과 회질의 부피를 조사했는데 BMI가 30 이상인 사람들에서 뇌 부피가 가장 적었고, 뇌량의 크기도 작았다고 보고하였다. 특히 중년의 비만은 뇌 수축과 관련이 있을 수 있다고 설명하였으나 비만이 뇌의 부피를 변화시키는 것 인지, 아니면 뇌 구조의 이상으로 비만이 발생하는지는 알 수 없다고 하였다. 또 다른 연구에서 복잡한 사고, 계획 그리고 자제 능력에 해당하는 뇌의 전전두엽이 비만과 체중증가를 일으킬 수 있는 과식하는 경향이 있는 사람들에서 활동이 떨어진다고 하였다. 즉 비만이 있는 사람들에게서 인지 저하와 치매의 위험이 더 높다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특히 내장 지방은 대사 질환의 위험요소로 알려져 있고 전신적인 경도의 염증과 관련이 있기 때문에 체지방 분포 차이가 뇌 형태학적 구조의 차이와 관련이 있는지에 대한 연구가 앞으로 필요하다. 음식을 먹을 때 뇌의 포만 중추에 의해 배부름을 느끼며 과식을 하지 않도록 유도한다. 이러한 과정은 장내분비 세포에서 호르몬을 혈류로 보내 뇌의 포만 중추에 신호를 보내는 체계를 이루고 있는데, 장내분비 세포의 감소가 되면 포만 호르몬 방출을 감소시켜 과식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비만은 결국 에너지의 불균형이다. 사용하는 것보다 더 많은 칼로리를 섭취해 비만이 발생하는 것인데 우리는 단순히 음식 섭취에 대한 자제력과 의지의 부족이라 생각하지만, 이것은 사실이 아니며 대사 요인과 관련이 있음이 증명되고 있다. 이런 이유로 2013년 미국의사협회에서 비만은 공식적인 질병으로 인정되었는데, 비만이 단순히 운동이 부족하고 과식의 결과에 의한 것이 아니라 대사 요인에 의한 신체 기능을 손상 시키는 질병에 해당하는 의학적 기준에 부합하다는 것을 의미한다.사람의 키와 체중을 기반으로 하는 체질량지수(BMI)는 사실 근육량, 골밀도, 전체체성분, 인종 및 성별 차이를 고려하지 않은 부정확한 지수 임에도 오늘날 BMI가 30 이상이면 비만으로 규정하고 있다. BMI가 30 이상인 사람은 당뇨병, 암, 심뇌혈관질환, 골관절염, 간 및 담낭 질환의 발병위험이 상당히 높다. 이는 조기 사망의 위험이 높아지는 것이다.BMI의 가장 큰 결점은 사람의 체지방 대 근육 함량을 고려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근육의 무게는 지방보다 무겁다. 따라서 BMI는 필연적으로 근육질의 운동선수를 실제 보다 뚱뚱하게 분류하는 오류를 번하게 된다. 그래서 BMI보다 허리-신장 비율이 심혈관 질환 발병의 더 우수한 예측 인자로 알려지게 되었고, 허리 둘레를 키의 절반 이하로 줄이는 것이 건강을 위해 중요하다고 하였다. 예를 들면 키가 180cm 인 사람은 허리둘레가 90cm (35.4 인치) 이하로 줄이는 것을 추천한다. 세계에서 비만율이 가장 높은 국가는 미국, 멕시코, 뉴질랜드, 호주, 영국, 캐나다, 아일랜드 순이다. 멕시코를 제외한 가장 뚱뚱한 국가들은 모두 공교롭게도 영어를 사용하는 국가이다. 사실 언어와 비만과 연관성은 없지만, 한가지 이론은 모두 미국식 생활 방식으로 인해 비만이 발생한다고 보고 있다. 어디든지 운전하고, 저녁에 TV 시청을 하며 간식을 먹고, 패스트푸드 등을 먹는 것들이 공통적으로 비만을 일으키는 요인이라 할 수 있다.한국의 비만율은 OECD 국가 중 두번째로 낮지만 일본에 이어 계속 증가하는 추세이다. 우리나라 성인의 4%가 고도 비만이며, 30%가 과체중이라고 한다. 여성은 교육수준이 높을수록 과체중이 줄어들지만, 남성은 사회경제적 또는 학문적 수준에 따른 차이가 거의 없다고 한다. 단 부모 중에 한명이라도 비만이 있는 경우 자식이 비만이 발생할 가능성이 남아는 3배, 여아는 6배 이상 비만이 될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 뇌를 위해 자식을 위해 그리고 노년의 치매 예방을 위해 허리둘레를 줄이는 노력을 열심히 해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