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검색결과 6,192건
- 박근혜, 중·고교 6년간 반 1등 안놓친 모범생
- [조선일보 제공] 박근혜는 1952년 2월 2일 대구에서 박정희와 부인 육영수의 장녀로 태어났다. 초등학교 1학년 생활기록부엔 ‘온순하고 침착하고 차근차근하며 실수가 별로 없음. 남에게 호감을 받으나 특정한 아동들과만 노는 습관이 있음’이라고 평가됐다. 이후 생활기록부엔 ‘자존심이 강한 어린이’(3학년) ‘약간 냉정한 감이 흐르는 편이며 굳게 다물어진 입가에는 위엄이 엿보임’(4학년)이라고도 적혀 있다. ▲ 박정희 전 대통령이 재임 중이던 때인 1966년 11월 박근혜 전 대표 가족의 단란한 한때. 왼쪽부터 박지만씨, 육영수 여사, 박 전 대통령, 박 전 대표, 박근영씨. 박근혜 후원회 제공 ◆모범생의 길 아버지가 대통령에 당선된 1963년 2월부터 청와대에서 살았다. 1964년 입학한 성심여중 1학년 2학기부터 3학년 졸업할 때까지 반장을 맡았고 성적도 줄곧 반에서 1등이었다. 2학년 때 검사한 지능지수는 127이다. 성심여고에서도 1학년부터 3학년까지 반에서 1등이었다. 담임의 의견란엔 긍정적인 평가가 대부분이지만 2학년 때 ‘단 하나 지나치게 어른스러움이 흠’, 3학년 때 ‘지나친 신중성 때문에 과묵한 편’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 1967년 박정희 전 대통령 호주 방문 시 성심여고 재학 중이던 박근혜 전 대표가 공항 출국장에 부모님을 배웅 나왔던 모습.1970년 서강대 전자공학과에 입학했다. 등·하교 때 신촌 로터리에서 관용차를 타고 내린 뒤 학교까지 걸어 다녔다. 경호원들도 정문까지만 따르도록 했다. 박근혜가 없어져 경호실에 비상이 걸린 적이 있다. 박근혜는 다음 날 친구에게 “학교의 샛문으로 빠져나가 영화를 보고 왔다”고 했다. 친구들에 따르면 몇몇 남학생이 박근혜를 좋아하긴 했으나 제대로 접근하지 못했다. 한번은 박근혜에게 “빵을 사달라”고 조르던 후배 남학생에게 경호원이 빵을 한아름 안기면서 “앞으로는 근혜에게 빵 사달라고 하지 말라”고 했다. 박근혜는 며칠 뒤 그 후배를 불러 “본의가 아니었다. 미안하게 됐다”고 사과했다. “박정희 대통령 물러가라”고 데모하다 2학년 때 퇴교당한 같은 과 친구 성기철씨는 “근혜는 자유로운 대학생활은 하지 못했지만 남에 대한 배려심은 돋보였다”고 했다. 성씨의 어려운 처지를 전해 들은 박근혜는 어머니에게 부탁해 성씨가 취직하고 복교하는 데 도움을 줬다. 대학 4년 성적은 4점 만점에 3.82로 수석 졸업이었다. ▲ 박근혜 전 대표가 서강대 재학 중일 당시 학과의 가장행렬행사에 참여했던 모습. 맨 오른쪽 화살표가 가리키는 이가 박 전 대표. ◆비운의 퍼스트레이디 프랑스 유학을 떠난 뒤 6개월 만인 74년 8월 15일 귀국 길에 올랐다. 어머니의 사망 소식을 듣고서였다. 22세의 ‘퍼스트 레이디’는 향후 5년간 공식 행사에 참석하고 외국사절을 영접했다. 오전 7시30분 아버지의 아침상을 준비했고, 중앙정보부의 일일 특별보고를 아버지와 함께 읽으며 국사(國事)를 얘기했다. 1979년 김영삼 총재 제명 때는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에게 “왜 국회의원 옷을 벗기느냐. 중앙정보부가 아버지가 쌓아온 업적을 부수고만 다닌다”고 비판했다고 한 청와대 인사는 증언했다. 박근혜는 1975년 자신에게 편지를 보낸 최태민 목사와 만나 구국봉사단 일을 함께 시작했다. 중앙정보부는 최 목사를 뒷조사하고 그 결과를 박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1979년 10월 27일 새벽 2시 잠옷차림으로 깨어난 박근혜는 김계원 비서실장이 “각하가 서거하셨습니다”라고 하자 “전방의 상황은 어떻습니까”라고 말문을 열였다. 1979년 11월 청와대를 나서는 박근혜에게 P회장은 “한남동 저택으로 모시겠다”고 했다. 박근혜는 “제게 호화주택이 뭐 필요합니까”라며 부모가 살던 신당동 집으로 돌아왔다. 이삿짐은 트렁크 6개였다.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대통령 집무실 등에서 9억원을 찾아 전달하자, 박근혜는 이 중 3억원을 수사 격려금조로 돌려줬다. ▲ 박근혜 전 대표가 퍼스트레이디로 활동하던 당시 방한한 뉴질랜드 멀든 총리와 건배하는 모습. ◆은둔과 인고의 세월 박근혜는 1980년대 초 한 학기 동안 예장신학대학원을 다니다 그만두었다. 당시 일기(1981년 3월5일)엔 “자기를 은혜로이 돌보았지만 언제 어떻게 돌변하여 총을 겨눌지, 욕을 할지 모르는 사람들이 가득 찬 도시, 또 그러한 사람들이 영웅시되는 사회는 도덕이 바로 설 수 없다”고 돼 있다. 가슴속 슬픔을 삭이던 박근혜는 1988년 박정희 기념사업회를 발족했고 1989년엔 근화봉사단을 조직했다. 아버지를 기리는 ‘겨레의 지도자’라는 책도 냈다. 1989년 박정희 10주년 기념식을 성대히 치른 그녀는 “1989년은 수년간 맺혔던 한을 풀었다고 해도 좋을 한 해”(1989/12/30 일기)라고 썼다. ▲ 박근혜 전 대표의 성심여고 시절 학생기록부.그러나 다시 시련이 찾아왔다. 1990년 동생 근령을 지지하는 ‘숭모회’가 “어린이 회관 고문인 최태민 목사가 각종 전횡을 일삼는다”며 육영재단 이사장직을 내놓으라고 하자 1992년 이사장직을 동생에게 물려줬다. 당시 일기엔 “그 많은 보람에도 불구하고 세월이 가져다 준 고통과 슬픔이 너무나도 컸기에 고통스럽게 추억될 뿐”(1992년 5월21일자)라는 심정이 담겨 있다. 아버지와 어머니 추도식 때도 모습을 감췄다. “그 자리에 모인 분들과 마주치기 싫어서였다”고 추후 술회했다. 1992년부터 단전호흡을 시작한 박근혜는 서서히 내면의 평화를 찾기 시작했다. 1993년과 1995년엔 수필집을 냈다. “삶은 소중한 것이기에 한계가 있는 것이기에 이 세상에서 생을 허락받은 시간 동안 그 가치를 충분히 느끼고 그 기쁨을 만끽하고 그리고 후회 없이 마감해야 하는 것이다.”(1993년 6월24일 일기) 박근혜에게 남자는 미스터리다. 대졸 즈음 어머니가 구체적으로 혼담을 추진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어머니가 사망한 후 아버지와 주변에서 시집가라고 할 때마다 박근혜는 “안 하겠다”고 했다. 사촌오빠 박재홍 전 의원은 “청와대에 있을 때, 그리고 1980년대에 시집가라는 말만 꺼내면 근혜는 ‘그런 얘기 하려면 돌아가세요’라고 했다”고 전했다. 한 측근은 “박 전 대표가 맘에 두고 있었던 사람이 있었으나 그 남자가 다른 길을 택하면서 마음을 닫은 것으로 안다”고 했다. ◆청와대를 향한 도전 1998년 4월 재보선 때 대구 달성에서 당선돼 정치권에 진입했다. 2004년 봄 한나라당 대표를 맡아 노무현 대통령 탄핵역풍으로 군소정당으로 전락할 위기의 한나라당을 121석으로 만들었다. 2년4개월 동안 여당 대표 8명을 상대하며 지방선거와 재보선에서 연전연승을 이끌었다. -----------------------------------------------------------------------박근혜 프로필 1952.2.2 대구시 삼덕동 출생 64.2 장충국민학교 졸업 67.2 성심여중 졸업 70.2 성심여고 졸업 74.2 서강대 전자공학과 졸업 74~79 ‘퍼스트 레이디’ 대행 74~80 걸스카우트 명예총재 87 자유중국문화대 명예문학박사 학위 82~92 육영재단 이사장 〃 영남대 재단 이사장 93~現 한국문화재단 이사장 94~2005.2 정수장학회 이사장 97.12 한나라당 입당 98~2000 제15대 국회의원(대구 달성 보궐선거) 2000~04 제16대 국회의원(대구 달성) 02.5~02.11 한국미래연합 대표운영위원 02.11~02.12 한나라당 중앙선대위 공동의장 03 한나라당 상임운영위원 04.3~06.6 한나라당 대표최고위원 04.4~現 제17대 국회의원(대구 달성) 출생지: 대구시 중구 삼덕동 5-2 본적: 경상북도 구미시 상모동 171 혈액형: B형 신장: 162cm 체중: 비밀(허리-26인치 반) 종교: 무 가족관계: 동생 박근령, 박지만 취미: 산책 좋아하는 음식: 향토음식과 나물 싫어하는 음식: 다 잘 먹지만 기름진 음식은 별로 신체 비밀: 목에 어머니와 똑같은 곳에 점이 있다 성형수술을 한다면: 테러당한 상처 부위 즐겨 찾는 곳: 민속촌 사람을 평가하는 기준 세 가지: 신뢰할 수 있나, 최선을 다하나, 진취적인가 가장 자신있는 요리는: 비빔밥 살면서 가장 고마웠던 사람: 부모님 꼴불견이라고 생각하는 것: 무책임하고 거짓말하는 사람 결혼은 언제쯤: 이미 나라와 결혼했다고 생각한다 스트레스 해소법: 단전호흡, 산책 살면서 가장 창피했던 적은: 글쎄… 최근엔 스타킹에 구멍이 났을 때 나의 패션: 나만의 스타일이 있다. 남들은 공주 패션이라 한다 자신이 잘하는 스포츠: 테니스, 탁구 가장 좋아하는 외국인은: 빌 게이츠 좌우명은: 바르고 현명하게 살자 가장 좋아하는 책은: 중국철학사 주량은: 소주 1잔. 4잔까지 마셔봤다 좋아하는 영단어: Courage 화났을 때 하는 행동은: 말을 안한다. 특이한 습관·버릇: 메모. 수첩공주 아시죠? 내 주위에서 이런 건 없어지면 좋겠다: 가난, 어린이 유괴, 성폭력 어린 시절의 꿈: 선생님 나의 라이벌은: 나 직업을 바꾼다면: 대학교수가 되고 싶다 요즘 받고 싶은 선물은: 지혜와 용기 생일날 어떻게 보내나: 동생들과 함께 존경하는 정치인(국내외 상관없이): 아버지, 대처 지금 가장 부러운 사람: 가족과 함께 산책하는 사람 내가 보기에 나는 괜찮은 사람인가: 상당히 괜찮은 사람이다 지금 잃고 싶지 않은 것 세 가지: 건강, 싸이 1촌, 조카 세현이 애창곡: 천생연분(솔리드), 빙고(거북이)
- (펀드의정석)①저금리 시대..이만한게 어딨나
- 코스피가 1700선까지 돌파하며 사상 최고치 행진을 이어가고 있다. 해외증시의 강세흐름도 지속되고 있다. 펀드와 같은 시장성 자산 비중이 낮은 투자자들의 기회손실 가능성은 그만큼 높아지고 있다. 구조적인 저금리 고령화 사회 진입으로 노후 대비가 절실해진 가운데, 풍부한 유동성 환경에서 부동산 시장이 둔화됨에 따라 ‘대안’ 찾기가 활발해지는 양상이다. 하지만, 펀드산업이 발전함에 따라 시중 상품이 나날이 복잡다기화하고 있어 투자자들의 선택과 결심은 더욱 어려워졌다. 일부 신흥시장국 펀드의 괄목할 만한 성과는 그릇된 대박심리와 쏠림현상으로 이어져 펀드투자 문화가 도리어 퇴보하는 듯한 모습도 나타나고 있다. 불합리한 기대에 근거한 펀드투자는 예상치 못한 실패를 수반할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지난해 테마기획 ‘투자의 날을 제정하자’ 시리즈를 통해 지적했듯이, 이데일리는 펀드투자가 국가자본을 생산적 부분으로 집중하는 합리적 자원배분의 수단이자 저금리 탈(脫)대량고용 시대에 가장 적합한 국민소득 창출원의 하나라고 보고 있다. 이에 ‘정확히 알고’, '신중하게 책임성을 갖고’, ‘합리적 기대를 토대로’ 펀드투자를 할 수 있도록 돕는 지침서로서 테마기획 「대한민국 부자 만들기 프로젝트 ‘펀드의 정석’」시리즈를 총4부, 19편에 걸쳐 보도하고자 한다.[편집자주] [이데일리 배장호기자] 10~20년전만해도 가계 자산 축적의 가장 효과적인 수단은 저축, 특히 은행 예금에 가입하는 것이었다. 당시 우리나라의 금리 수준은 두자리수였다. 연 10%대의 예금 이자로 장기 목돈 마련에는 별 문제가 없었다. 거기다 근로자우대저축 등 정부 정책으로 세금까지 깎아주는 예금상품이라면 금상첨화였다. 새로운 세기에 접어들면서 두자리수 금리는 꿈같은 이야기로 변했다. 연 5%대 이자만 보장해줘 감지덕지다. 가끔 6%대의 특판예금상품이라도 등장하면 투자처를 찾지 못해 떠돌던 시중자금들이 구름처럼 몰려든다. 그만큼 1%의 추가 수익이 아쉬운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여기에 연 2%대에 달하는 물가상승률을 제하고 나면, 실질 이자소득은 기껏해야 2∼3% 수준에 불과하다. 정부의 비과세 예금상품 폐지 정책과 금융소득종합과세 시행으로 인해 막대한 세금 부담을 피해갈 방법도 점차 사라지고 있다. 세금까지 떼고 나면 저축상품으로 얻을 수 있는 수익은 더욱 보잘것 없어진다. 저금리 시대의 도래, 저축 시대의 퇴조는 비단 우리나라만의 문제가 아니다. 1%라도 더 높은 수익처를 찾아 막대한 글로벌 유동성들이 전 세계를 떠돌고 있다. 펀드는 이러한 투자 욕구를 담아내는 유용한 투자수단으로 인정받고 있다. 전 세계 펀드산업이 유사이래 최고의 호황을 구가하고 있다는 사실이 이를 입증한다. ◇ 높은 수익성..저금리 시대의 총아물론 펀드는 자금 운용 성과에 따라 수익을 배분받는 상품이어서 은행 예금처럼 보장을 받지는 못한다. 시장 상황이 나쁘거나 운용자의 투자 실패 등으로 인해 이자는 커녕 투자 원금마저 손해를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 펀드가 주목받는 이유는 저금리 시대에 펀드보다 나은 투자 대안을 찾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실제로 국내 펀들의 수익성은 과연 어느 정도일까. 가장 최근의 펀드 수익률 자료에 따르면, 운용기간 5년 이상인 100억원 이상 국내 성장형 주식형펀드들의 5년 수익률은 100%를 훌쩍 넘는다. 연 20% 이상의 수익은 너끈히 거두고 있다는 의미다. 특히 수익률 최상위권인 미래에셋자산운용의 `디스커버리주식형펀드`나 `인디펜던스주식형펀드`의 5년수익률은 300%에 육박한다. 최초 설정일을 기점으로 한 6년 수익률로 따지면 600%를 넘어 해마다 100%의 경이적인 수익을 올리고 있다. 만약 1억원을 금리 5%인 보통예금에 5년동안 넣었다면 2500만원의 이자 소득에 만족해야 하지만, 이 돈을 디스커버리펀드에 투자했다면 5년만에 3억원의 투자수익을 낼 수 있었을 것이다. 최근 몇년간 강남 아파트에 투자해 돈 좀 번 사람이라면 "그 정도 수익은 부동산으로도 얼마든지 벌 수 있다"고 반박할 지 모른다. 실제로 강남 아파트 값은 최근 6년동안 무려 3배 가까이 올랐다. 그러나 이 강남 아파트 투자 수익률을 구체적인 통계 자료를 통해 주식 투자수익률과 비교해 보면 그릇된 통념이었음을 금세 깨달을 수 있다. 미래에셋투자교육연구소가 국민은행의 전국 부동산 가격 동향 자료를 토대로 분석한 결과, 지난 1986년 이후 올 4월까지 강남 아파트 값이 5배 정도 상승한 반면, 같은 기간 코스피 지수는 9배 이상 오른 것으로 나타났다.<그림 참조> 지난 1986년에 코스피 지수를 그대로 추종하는 인덱스펀드에 투자를 했다면 현재 9배가 넘는 투자 수익을 거뒀을 것이란 얘기다. 강남 아파트와 같은 부동산은 워낙 고가여서 급여로 생활비를 쓰고 노후자금까지 마련해야 하는 일반 급여생활자들에게는 현실적인 투자대안이 되지도 못한다. 펀드는 소액의 여유자금으로도 얼마든지 투자가 가능하기 때문에 현실성까지 따진다면 펀드가 부동산보다 더욱 더 우수한 투자수단이라고 볼 수 있다. ◇ 탄탄한 안전장치..예금보다 무조건 위험한 것은 아니다 원금 보장을 최우선으로 여기는 보수적인 투자자들 입장에서는 실적에 따라 수익이 달라지는 펀드상품이 미덥지 못하다고 여길 것이다. 그러나 원금 보장이라는 측면만을 가지고 투자의 안전성을 따지는 것은 잘못이다. 투자의 여러 대안 중에서 펀드가 `상대적으로` 얼마나 안전한지, 현실적으로 펀드가 얼마나 안전하게 운용되고 있는 지에 대해 종합적인 평가가 내려져야 한다. 펀드에 의한 간접투자가 직접 주식 투자보다 안전하다는 점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마치 돌발상황이 속출하는 고속도로에서 아마추어 운전자와 전문 베테랑 운전자가 각기 차를 몰고 가는 것에 비유할 만하다. 펀드는 자산운용 전문 자격증을 가진 투자전문가의 손에 의해 엄격한 투자원칙에 따라 운용된다. 자산운용사들은 투자하기에 적합한 재무 건전성을 지닌 기업을 엄선하고, 이 중에서 장단기적으로 유망한 종목을 다시 선별한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과학적인 리스크 관리 시스템을 구비해 펀드가 과도한 투자 위험에 노출되는 것을 사전 차단한다. 내부 컴플라이언스 조직을 두어 비정상적인 투자행위도 걸러낸다. 또한 펀드 수탁은행이 자산운용사의 무리한 투자 행위를 견제하게 돼 있고, 주기적으로 펀드 외부감사도 실시한다. 낭패를 볼 정도의 과도한 재산손실이 발생할 가능성을 최대한 줄일 수 있는 장치가 돼 있다는 의미다. `원금 보장` 을 받는 은행 예금이 언제나 펀드보다 더 안전하다고 단정할 수도 없다. 현행 예금자보호법상 개인은 5000만원까지만 보장받을 수 있다. 그 이상의 예금을 가입한 경우라면 유사시 나머지 돈을 돌려받을 수 없다는 얘기다. "은행이 망할 리 있을까?" 생각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불과 10여년 전 IMF 구제금융 시절 은행들이 부도 위기에 몰렸던 경험을 통해 "은행도 망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다. 예금자보호를 받는 소규모 제2금융회사들은 지금도 가끔 문제를 일으켜 문을 닫는다. 이에 반해 펀드의 경우, 운용회사가 파산한다고 해서 고객의 투자금이 허공으로 사라지지 않는다. 고객이 가입한 은행예금은 일단 은행의 고유재산에 포함돼 은행이 부도나면 예금도 무용지물이 되지만, 펀드는 처음부터 자산운용사나 수탁은행의 재산과는 별도로 구분돼 관리된다. 자산운용사나 수탁은행이 망하고 없어지더라도 펀드 투자자는 투자 원금 뿐만 아니라 그동안의 투자 수익까지 고스란히 보장받을 수 있다. ◇ 높은 환금성..필요할 때, 필요한 만큼 언제든 현금화 펀드의 또 하나의 장점은 환금성이다. 환금성(換金性)이란 `투자자가 원하는 때에 언제든 투자금을 회수할 수 있는가`에 대한 것이다. 펀드가 상대적으로 탁월한 환금성을 지니는 것은 펀드가 투자하는 대상이 주로 자본시장에서 활발히 거래되는 유가증권이기 때문이다. 유가증권은 특정한 권리자와 의무자 쌍방간에 맺는 계약과 달리 `표준화`된 증서에 의해 거래되기 때문에 유가증권 소지자는 언제든 시장에서 이 유가증권을 현금을 용이하게 바꿀 수 있다. 특히 보통의 유가증권은 거래할 수 있는 최소단위가 정해져 있어서 필요한 시기에 필요한 규모만 쪼개어 현금화 할 수 있다. 가령 특정 부동산을 처분하려고 하면 매수 상대방을 찾아 쌍방이 받아들일 수 있는 가격을 흥정해야 하지만, 주식과 같은 유가증권은 매일 열리는 증권거래소에서 실시간으로 형성되는 가격에 따라 매매를 하면 된다. 특히 아파트와 같은 부동산은 필요한 부분만 쪼개서 매매하기가 어렵지만 유가증권은 필요한 수량만 내다 팔 수 있다. 물론 모든 펀드가 유가증권에만 투자하는 것은 아니다. 2003년까지 펀드는 증권투자신탁 또는 증권투자회사 형태로서 주식 채권 등 유가증권에만 투자할 수 있었지만, 2004년부터 간접투자자산운용업법이 시행되면서 파생상품, 부동산, 특허권 등 특정한 수익권 등에도 펀드가 투자할 수 있도록 문호가 대폭 개방됐다. 따라서 요즘 나오는 펀드 중에는 상대적으로 거래가 제약을 받는 것들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펀드는 여전히 상대적으로 뛰어난 환금성을 보유하고 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가령 개인이 직접 부동산에 투자할 때와 펀드를 통해 투자하는 경우를 비교할 때 펀드를 통한 경우가 훨씬 환금성이 좋다. 왜냐하면 펀드는 기관 투자가로서 부동산 거래에 관한 정보와 협상에 있어 개인보다 우월한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펀드는 우월한 정보력과 협상력을 바탕으로 개인보다 수월하게 부동산을 사고 팔수 있다. 또한 제도적으로도 펀드는 환금성을 확보하기 위한 장치들을 마련하고 있다. 가령 부동산, 사회간접자본(SOC) 등 거래에 제약이 있는 투자대상에 펀드가 투자하는 경우, 현행법은 이 펀드를 의무적으로 증권선물거래소에 상장토록 하고 있다. 이러한 펀드에 가입한 투자자는 거래소 시장을 통해 언제든 투자금을 회수할 수가 있는 것이다.
- 19살 소녀의 거침없는 성공기,윤하 "난 내 음악을 해요"
- [이데일리 최은영기자] 2007 메가톤급 신인 윤하의 행보가 거침이 없다. 윤하는 3일 '비밀번호486'으로 SBS '인기가요' 1위에 해당하는 뮤티즌송을 수상했다. 5월 20일 수상에 이은 두 번째 정상. 이제 막 정규앨범을 발표한 신인이 이룬 쾌거라 하기엔 대단한 성장 속도다. 윤하는 "10년 뒤에나 가능한 일로 생각했는데 의외로 빨리 1위 트로트를 받게 돼 감격스럽고 기쁘다"고 소감을 전했다. 무릇 스타에겐 나름의 성공 비결이 있게 마련이다. 직접 만나본 윤하에게선 3색 매력이 전해졌다. 상큼한 외모, 풍부한 가창력과 능숙한 무대 매너, 그리고 나이를 능가하는 음악에의 열정이 바로 그것이다. ◇ 중3 때부터 오디션 도전, 대형 기획사에서 20번 넘게 낙방 "요즘 인기를 실감하느냐" 묻자 윤하는 "인기보다는 노래를 알아주는 사람들이 많아져 기분이 좋다"며 순간의 인기에 일희일비 하지 않는 진중함을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데뷔 당시에 대해 이야기를 할 때는 천상 10대 소녀다. 윤하는 "데뷔 당시엔 사실 가수보다 스타로 비춰지고 싶은 욕심이 컸다"고 솔직히 고백했다. 윤하가 가수의 꿈을 안고 기획사를 찾아다니기 시작한 건 중학교 3학년 때의 일이다. 대 부분의 사람들은 그녀가 운이 좋아, 혹은 천부적인 자질 탓에 고생 없이 스타덤에 올라선 샛별로만 기억한다. 하지만 여느 사람들에 비해 출발이 빨랐을 뿐, 윤하에게도 가수, 그리고 스타의 길은 멀고도 험했다. "스무번 넘게 오디션을 봤을 거예요. SM, YG, JYP 등 줄줄이 낙방했죠. 지금의 소속사 스탐과 계약을 맺는 일도 쉽지만은 않았어요. 떨어져도 좋으니 오디션만 보게 해달라고 몇 번을 찾아간 끝에 기회를 잡았죠. 운도 따랐네요. 그날 마침 비가 왔거든요. 우두커니 비를 맞으며 밖에 서 있는 제가 불쌍해보였는지 일단 좀 들어와서 기다리라 하셔서 오디션 보게 됐죠. 그후로도 오디션은 다섯번이나 더 봤어요. 합격 소식을 접했을 때 뛸 듯이 기뻐 날아갈 것 같았죠." 가수의 꿈을 키우게 된 건 SBS '세기의 대결'에 출연하면서부터다. '세기의 대결'은 강타와 문희준이 진행하는 서바이벌 형식의 연예인 발굴 프로그램이었다. 순전히 재미 삼아 도전해본 무대였다. 하지만 예상 밖의 결과는 그를 가수로 키웠다. 수만명의 응시자가 지원한 가운데 최종 20명에 드는 결과를 받아든 윤하는 "비록 결선에서는 떨어졌지만 가수로의 자질을 깨닫게 해준 소중한 기회가 됐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 '피아노 록'이라는 새로운 장르의 음악으로 사랑받는 윤하(사진=스탐)◇ 日 데뷔 초기 고생 잊지 못해, 2명의 청중 앞에서도 노래해 윤하는 잘 알려져 있다시피 일본에서 먼저 데뷔해 한국으로 역진출한 독특한 이력의 소유자다. 윤하는 "거기서 데뷔만 하면 '고생 끝 행복 시작'으로 알았는데 진짜 고생은 그때부터 시작이었다"고 일본 데뷔의 고생담을 되뇌였다. "2004년 8월이었어요. 전 가수가 되면 누구나 전광판에 커다랗게 이름과 얼굴이 새겨지며 화려하게 데뷔하는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기대했던 화려한 데뷔식은 간데 없고 공연을 한다고 가보면 관객이 딸랑 두 명 뿐이질 않나... 그때 실망을 얼마나 많이 했는지 몰라요. 그래서 웬만한 일에는 놀라지도 않아요. 끝도 없는 시련이 절 단단하게 단련시킨 셈이죠." 윤하는 일본 후지TV에서 방영된 '도쿄만경' OST에 '유비키리(약속)'과 '이프(IF)' 두 곡을 수록하며 일본서 먼저 데뷔식을 치뤘다. 하지만 오리콘 차트에 이름을 올리며 제대로 두곽을 나타내기 시작한 건 그로부터 8개월쯤 후 싱글 '호우키보시(혜성)'를 발매하면서부터다. 윤하는 일본에서 애니메이션 주제가 '호우키보시'로 인기를 얻을 당시 '오리콘 혜성'으로 불리며 '제2의 보아'라는 별칭을 얻기도 했다. 윤하는 일본서 활동 당시 선배 가수 보아와 만난 날도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일본에서 활동하며 보아 선배를 두 번 정도 만났어요. 저보다 한참 선배시잖아요. 그래서 잔뜩 긴장해 있는데 선배가 먼저 반갑다며 친근하게 말을 걸어 주시더군요. '난 피아노 치는 여자가 그렇게 부러울 수 없다'며 노래 잘 하더라 칭찬도 해주시고 말이죠. 얼마나 감사했는지 몰라요." '피아노 록'이라는 독특한 장르로 침체된 가요계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 넣고 있는 열아홉 소녀 가수 윤하. 윤하는 올 한해 더욱 바쁜 행보를 이어갈 예정으로 있다. 한국에서의 정규앨범 활동이 끝나는대로 일본으로 건나가 싱글 앨범을 연내 추가로 발표한다. 지금은 피아노를 치며 노래를 하는 윤하로 기억되지만 언젠가는 연기를 하며 노래하는 만능엔터테이너 윤하를 만나게 될 수도 있다. 윤하는 "자신이 추구하는 삶은 표현자로서의 삶을 사는 것"이라면서 지금 보다 한차원 높은 비상을 기대하게 했다. ▶ 주요기사 ◀☞가수 방실이 뇌졸중으로 쓰러져... 오늘 내일이 고비☞'태왕사신기' 잇단 연기에 MBC 노조 강경 비난 성명☞이창동과 마틴 스콜세지, 하정우 주목☞조영구 열애 신재은, "나이 차요? 오빠 젊어보이잖아요."
- "명품신도시? 땅 투기하라는 소리다"
- [오마이뉴스 제공] ▲ 6월 5일 동탄면 산척리에 있는 한 가건물 상가에는 여행사, 서점, 재무건설팅 사무소의 간판이 걸려있다. 1. 한적한 시골 마을에 들어선 스키대여점·책방·여행사 경기도 화성시 동탄면 산척리. 동탄 2기 신도시 지역으로 확정된 곳이다. 이 마을에선 한 시간에 한 대밖에 없는 마을버스가 외부세상과 마을을 잇는 유일한 교통수단이다. 이곳에는 한 달 새 많은 가건물 형태의 점포들이 들어섰고, 또 들어서고 있다. 가건물에는 스키대여점은 물론 재무컨설팅 업체, 책방, 문구점, 비디오대여점, 그리고 여행사 간판이 걸려있다. 5일 오전 11시에 만난 마을 주민은 여행사를 언급하며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다 딱지를 노리고 들어온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올해 초부터 하나둘 씩 들어왔고 대부분 한 달 새 지어진 것"이라고 덧붙였다. '스키대여점'이 있다는 이유로 언론에 여러번 보도된 상가로 갔다. 스키대여점은 문이 닫혀 있었다. 주변에서 옷 수선을 하는 한 상인은 "임대료가 싼 곳을 찾아 이곳까지 왔다"고 주장했다. 또한 "딱지 받기 위해 온 사람도 있겠지만 언론에서 우리까지 다 싸잡아 몰아붙이고 있다"고 불만을 나타냈다. 길가에서 멀리 떨어진 상가에는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여행사는 문이 닫혀 있었고 책방엔 책이 거의 없었다. 주변에서는 가건물이 한창 들어서고 있었다. 도로에는 덤프트럭과 건설자재를 실은 차량이 끊임없이 오갔다. 검은색 고급 승용차도 많이 보였다. 국세청 직원들의 모습도 눈에 띄었다. 이들은 "허가받은 내용과 실제 영업 실태를 조사하고 있다"고 밝혔다. ▲ 6월 5일 동탄면 산척리에 있는 한 가건물 형태의 서점 내부 모습. 2. "아파트가 없어서가 아니라 돈이 없어 집 못 사" 동탄 2기 신도시로 확정된 동탄면 오산리, 산척리, 중리, 송리 등에 사는 주민들은 "걱정이 앞선다"는 표정이다. 농사를 짓는 황순남(71·산척리)할머니는 "보상 몇 푼 주겠냐"며 "어디로 가야하느냐"고 말했다. 인근 골프장에서 청소를 하며 생계를 이어가는 채연숙(61·오산리)할머니도 "걱정이 앞선다"며 "여기서 쫓겨나면 이 나이에 일자리를 어떻게 구해야 하느냐"고 걱정했다. 본인 소유의 땅이 없는 사람들은 걱정이 더 크다. 산척리에 사는 은정대(65)할머니는 "신도시가 사람을 내쫓아 없는 사람은 죽어야 한다"며 우려를 감추지 못했다. "10년 째 남의 땅 800평을 빌려서 고추, 콩, 부추, 도라지, 딸기를 재배했다. 지난 4월 작물을 심을 시기에 주인이 밭 농사를 하지 말라고 했다. 집을 지어서 보상받는다고 하더라. 개발할 때까지만 해도 농사짓게 해달라고 했더니 안 된다고 했다. 뭐 먹고 살라는 말이냐? 이게 사람 사는 경우냐?" 박찬식(43)씨는 이번 발표의 정책적인 면을 비판했다. 박씨는 "'분당급 신도시', '명품 신도시'라는 것은 땅투기하라는 소리"라며 "아파트가 없어서 못 사는 게 아니라 돈이 없어서 못 산다, 신도시 정책이 잘못됐다"고 말했다. ▲ 박찬식씨는 "'분당급 신도시', '명품 신도시'라는 것은 땅투기하라는 소리"라고 주장했다. 농사나 자영업으로 생계를 이어가는 사람들뿐 아니라 이 지역에서 공장을 운영하는 사람들도 큰 시름에 빠져있다. 오산리 ㄷ철강 관계자는 "보상을 10배 해준다고 해도 여기 남는 게 낫다"며 "공장 이사하면 그 동안 일도 못하고 자리 잡으려면 시간이 많이 걸린다"고 말했다. 거래처가 멀어져 물류비가 많이 드는 건 기본이었다. 송리에 있는 복사기 부품 업체 사장은 "정부가 기업에 대한 대책도 내놓아야 하는데 대책은 없고 세무조사 이야기만 한다"며 "땅값이 올라 이미 늦었다"고 한숨을 쉬었다. 그는 이어 "신도시로 쫓아내고 세금에, 규제에 기업하기가 너무 힘들다"고 덧붙였다. 많은 사람들이 신도시에 반대하는 와중에 보상을 기대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ㅅ전자의 장아무개 관리부장은 "어차피 반대해봤자 소용없다"며 "중요한 것은 보상 문제다, 보상에 대한 기대가 있는 게 사실"이라고 밝혔다. 3. "집 만드는 신도시 때문에 원주민은 집 잃고 거지되게 생겼다" 오전 10시 반부터 저녁 7시 반까지 동탄 2기 신도시 예정 지역을 취재하는 동안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그들은 이 지역을 삶의 터전으로 삼고 있는 농민, 자영업자, 제조업체 관계자와 노동자 등이었다. 다음은 이날 만난 사람들과의 인터뷰 내용을 정리했다. ▲ 황순남 할머니는 "보상 몇 푼 주겄슈? 보상이 나와도 걱정이야, 촌에서 농사짓는 사람들은 갈 데가 없어"라고 말했다. 황순남(71·농업·산척리) "29 마지기 땅에 논농사와 함께 텃밭에 콩·고추 농사 등을 짓는다. 겨우 먹고 살고 있는데 (신도시 발표로) 어디로 가야하느냐. 보상 몇 푼 주겠느냐? 보상이 나와도 걱정이다. 촌에서 농사짓는 사람들은 갈 데가 없다. 90 먹은 노인네와 같이 살고 있는데 이 노인네를 끌고 어디로 가겠느냐?" 홍진호(35·제조업체 사원·중리) "동탄신도시 무주택 청약 1순위로 분양을 받았었다. 34평에 3억이었다. 하지만 초등학생과 4살짜리 아이들이 있는 월급쟁이로서 2억원 대출 받아 갚을 엄두가 안 났다. 신도시가 생겨나면 지금 살고 있는 중리에서 쫓겨나야 한다. 살 여건이 안 된다. 꿈도 못 꾼다." 박찬식(43·제조업체 과장·경기 오산시) "'분당급 신도시', '명품 신도시'라는 것은 땅투기하라는 소리다. 정부가 투기 판을 벌려 놓은 거다. 돈 있는 사람들만의 얘기다. 아파트가 없어서 못 사는 게 아니라 돈이 없어서 못산다. 임대아파트를 지어야 한다. 오산 쪽 아파트 지역에는 청약저축 부어서 청약 들자고 난리다." 산척리 주민(익명 요구) "살던 사람들까지 명품 만들어주나? 원주민들 삶의 터전을 잃는 거다. 어르신들 시내에서 적응 못한다. 이제 와서 세무조사 하면 뭐하나? 다 끝나고 나서 하면 뭐하냐? 벌써 땅값 다 올랐다." 복사기 부품 생산 업체 관계자(익명 요구) "수원의 땅값이 비싸 2000년에 이곳으로 내려왔다. 그때 거래하던 삼성이 해외로 빠져나가 어려웠다. 겨우 버티다가 작년부터 후지 제록스에 납품하면서 조금씩 나아졌다. 그런데 이 지역이 신도시에 들어간다니까 완전히 골탕 먹이는 것 같다. 설비가 고가인데 이전하면 정확성이 떨어진다. 몇 개월 동안 불량률이 높아지는 등 눈에 안 보이는 손실이 많다. 기흥에 있는 거래처도 멀어진다. 요새 잠도 못자고 있다. 정부 대책은 없고 세무조사 얘기만 나오고 있다. 신도시로 쫓아내고 세금에 규제에 너무 힘들다." 은정대(65·농업·산척리) "10년 째 남의 땅 800평을 빌려서 고추, 콩, 부추, 도라지, 딸기를 재배하고 있다. 지난 4월 작물을 심을 시기에 주인이 밭 농사를 하지 말라고 했다. 집을 지어서 보상받는다고 하더라. 개발할 때까지만 해도 농사짓게 해달라고 했더니 안 된다고 했다. 없는 사람들은 어떻게 먹고 살아야 하나? 주인은 800평만 보상 나와도 부자 아니냐. 신도시 짓는다며 남의 밭뙈기 빌려 먹고사는 사람 내쫓고 있다. 이게 사람 사는 경우냐? 있는 사람만 사는 세상이냐? 없는 사람은 다 죽어야한다. 10년 동안 작물 심어 나눠 먹은 사람들이 신도시 발표난다고 이럴 수가 있느냐? 정부에서는 확실히 누가 밭을 지었는지 확인한 후 보상해줘야 한다." ▲ 산척리에 사는 은정대 할머니는 "신도시가 사람을 내쫓아 없는 사람은 죽어야 한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유령점포' 장판가게 상인(익명요구) "세입자들이 얼마나 받겠나? 왜 그렇게 난리인지 모르겠다. 정당하게 허가 받고 장사를 하고 있다. 우리한테 '왜 장사하느냐'고 물어보면 속 터진다. 가게를 창고로 쓰고 보통 차떼기로 물건을 판다. 이곳은 보증금 500만원에 월세가 30만원이라 시내에 비해 매우 싸다." '유령점포' 옷 수선 가게 상인(익명요구) "동탄신도시는 보증금 5000만원이다. 하지만 이곳은 동탄신도시에서 겨우 10분 떨어져있는데 가격은 1/10이상 싸다. 합법적으로, 먹고 살려고 들어왔다. 기자들이 확실한 것만 기사로 써야 하는데 아닌 것까지 싸잡아 몬다. 옷 수거해서 이 곳에 와 수선한다. 문 닫고 옷 수거하러 가려고 하는데 갑자기 기자들이 와서 '유령점포다', '문 닫고 뭐하느냐'라고 할까봐 못 나가고 있다. 또한 계속해서 카메라 들이대니까 괜히 사무실이나 정리하고 있다. 딱지 노리고 온 사람들도 있겠지만 난 아니다." 오산리 주민(익명 요구) "원주민들 거의 다 반대다. 여기 땅 거의 다 외지인이 샀다. 오산 3리 140가구 중에 논 있는 사람은 5가구 밖에 안 된다. 2/3은 세입자다. 얼마나 보상을 해주겠나? 여기 가건물이 계속 생겨나고 있다. 이거 보상해주려면 분양가는 계속 오를 것이다. 원주민들 중에 몇 명이나 입주할 수 있겠나? 다들 쫓겨나는 거다. 집 만드는 신도시 때문에 원주민은 집 잃고 '거지'되게 생겼다. 근처 골프장을 수용 안하는 이유를 모르겠다. 골프장에 얼마나 많은 아파트를 지을 수 있는데 그거 놔두고 왜 주민들 땅 수용하느냐!" ㄷ철강 관계자(익명 요구) "보상은 상관없다. 공장 이사하는 게 아파트와 수준이 다르다. 전기 등 기반시설 마련하려면 엄청나다. 그 동안 일도 못하고 자리 잡으려면 시간이 걸린다. 거래처가 멀어져 물류비가 많이 든다. 주변 땅값도 올라 구석구석으로 쫓겨난다. 보상이 10배가 나온다고 해도 여기 남는 게 낫다. 이 주변 허가를 왜 내주는지 모르겠다. 사실 여기 신도시 발표 몇 년 전부터 개발될 거라는 얘기가 있었다. 그 얘기 모르면 간첩이다. 정부가 부동산 정책을 통해 집값 낮춘다고 하는데 여기는 이미 투기가 다 끝났다." ▲ 동탄 2기 신도시로 지정된 화성시 동탄면 오산리 일대 모습.
- 의사들 "우리가 제일 무서워 하는건 '삼촌들'"
- [조선일보 제공] 의사들은 “생명을 다루는 의사가 어찌 이럴 수 있나”라는 질타와 원망을 듣다가도 돌아서면 “내 아들, 딸도 제발 의대만 갔으면…”하는 부러움을 한 몸에 받는다. 그들 앞에 따라 붙는 수식어도 천차만별이다. 죽은 사람도 살려내는 신(神)의 손, 타인의 아픔을 헤아릴 줄 모르는 냉혈한, 돈만 아는 기술자, 자신의 전문 분야 외에는 아무것도 모르는 똑똑한 바보…. 환자들을 대하는 데 있어서 의사의 잘못도 있지만, 정부 규제가 의사와 환자 간의 불신을 불러일으키고 있다고 이들은 입을 모았다. 조선일보는 ‘의사들이 쓰는 병원이야기’ 연재에 앞서, 지난 26일 토요일 오후 종합병원 의사 5명을 ‘솔직 토크’에 초대했다.―제가 봐도 ‘이러니 의사가 욕을 먹지’ 싶을 때가 있어요. 환자한테 인사는커녕 눈길 한번 제대로 안 주는 의사도 있지요. 어깨가 아프다는 할머니께 “나이 들면 다 그래”라고 반말로 툭 내뱉고는 약 처방만 주는 경우도 봤습니다. 여기저기 아프다고 호소하는 중년 부인에겐 “남편이 바람 피우시나 보죠”라고 했다는 이야기도 들었고요.의사 잘못도 있지만 건강보험의 과도한 규제가 환자·의사 불신 불러 ―이마가 찢어진 세 살짜리 아이가 병원 응급실로 왔습니다. 얼굴에 난 상처라 성형외과 의사를 불렀더니 3시간이 지나서 내려온 성형외과 레지던트(전공의)가 “뭐 이 정도 가지고…. 근데 제가 아직 전문의가 아니거든요. 이거 대충 꿰매도 되나…”라고 하더군요. 아이 엄마 보기가 어찌나 민망하던지 결국 제가 그 레지던트를 불러서 야단을 쳤습니다. 나중에 어떤 의사가 될지 걱정스럽더군요.―제가 직접 환자가 돼보니 알겠더라고요. 의사들이 얼마나 설명을 안 해주는지. 환자 상태가 어떻다는 건지 한 마디도 없이 이것저것 검사만 하라고 ‘명령’했어요. 뭘 좀 물어보려고 했더니 의사는 벌써 휑하니 사라지고 없었죠. 일반 환자들이 얼마나 답답해 할지 이해가 갔어요.―의사들은 사회성이 부족하단 얘기를 많이 듣지요. 일단 의사라는 길이 한 번 정해지면 곁눈질할 여유나 이유가 별로 없는 탓이기도 합니다. 대학 때는 한 교실에서 의대생들끼리 같은 공부만 하고, 의사가 되고 나면 병원에서만 살지요. 이후에도 어울리는 사람은 대부분 의사들이고요. 그러다 보면 병원 밖 세상에 대한 관심이 자연스럽게 사라지죠.―의과대학 시절 “상위 5%나 하위 5%에만 들지 않으면 된다”는 말이 있었어요. 다수를 따라가기만 하면 크게 문제될 것 없다는 뜻입니다. 안정적인 삶을 추구한다는 말이지요. 강의 듣고 시험만 잘 보면 누가 뭐라는 사람도 없고, 또 유급 당하지 않기 위해서 공부에 매달리다 보면 자기 일 외엔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그러다 보면 나중에 환자나 다른 사람들과 소통하는 기술이 부족해지는 것 같아요.―환자들도 좀 바뀌었으면 하고 바랄 때가 있습니다. 밖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환자가 의사를 때리는 일이 많아요. 최근 우리 병원 여자 레지던트 두 명이 환자 보호자에게 맞아 입원하기도 했습니다. 막무가내로 난동을 부리거나 폭력을 휘두르는 일은 삼갔으면 해요, ―응급실에선 의사들이 멱살 잡히는 일은 부지기수죠. 경찰이 와도 “의사 선생님이 좀 참으시죠”라고만 합니다. ‘환자는 약자’라는 인식 때문에 환자들이 폭력을 휘둘러도 경찰이 관대하게 대하는 것 같아요. 레지던트 시절엔 술 마시고 행패 부리는 환자들 때문에 가운이 찢어져 5벌이나 버린 적도 있습니다. 넥타이를 잡히면 도저히 당할 수가 없어 그때부터 넥타이를 안 매는 버릇이 생겼죠. 환자가 의사 때려도 ‘환자=약자’ 인식 때문에 경찰도 “선생님이 참으시죠” ―의사들끼리는 ‘삼촌’이 제일 무섭다고 합니다. 환자의 상태를 계속 지켜봤던 직계 가족들은 불만이 없는데 뒤늦게 나타난 ‘삼촌’들이 다짜고짜 화를 내며 난동을 부리는 일이 많거든요. 일찍 찾아보지 못한 환자에 대한 미안한 마음 때문이라고 하더라도, 그렇다고 의사에게 무작정 화 내고 소리를 지른다고 상황이 나아지나요?―의사와 환자 간에 불신이 생기는 것은 정부와 건강보험의 과도한 규제 탓도 있습니다. 의사들이 ‘양심 진료’를 못하게 만들죠. 예를 들어 불가피한 개복(開服) 수술을 할 때 낡은 인공 심장박동기도 새 것으로 바꿔 끼려고 해도 불가능한 경우가 있습니다. 인공 심장박동기의 배터리가 조금이라도 남아 있으면 건강보험 혜택을 못 받기 때문이죠. 그러면 환자는 얼마 후 또 다시 배를 째고 인공 심장박동기를 교체하는 수술을 받아야만 합니다. 환자가 내 돈을 내고서라도 하겠다는 경우도 있지만, 만일 이들이 아직 폐기할 상태가 아닌 심장박동기를 갈아치웠다고 나중에 문제를 제기하면 병원측은 손해를 봅니다. 이런 사정을 모르는 환자들은 의사들이 돈을 벌려고 꼼수를 쓰는 것이 아닌가 의심하지요. ―‘명의’(名醫)라는 말은 없어져야 합니다. 현대의학에 명팀(team)은 있을지 몰라도 명의는 없어요. 어려운 수술일수록 의사 혼자선 안 되죠. 어떤 수술이든 집도의 외에도 마취과 의사, 간호사가 있어야 하고 검사에는 또 얼마나 많은 이들의 수고가 필요합니까. 명의 한 사람이 ‘씻은 듯’ 낫게 해줄 수 있다는 기대는 버려야 해요. 명의만 찾다가 치료 적기를 놓치면 그만큼 치명적인 손해도 없습니다.―아주 큰 수술도 아닌데 대학병원에 오는 환자들이 많습니다. 심장수술 같은 대수술이라도 성공률이 대학병원보다 우수한 전문병원도 있지요. 대학병원에서는 교육을 위해 인턴·레지던트도 수술에 참가하니까 실제 성공률이 떨어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중소 종합병원에선 훈련을 모두 마친 전문의들이 직접 처음부터 끝까지 수술하니까 오히려 나은 결과를 낼 수도 있죠. ―대학병원에 몰리니까 환자들도 서로 피해를 봅니다. 사소한 수술까지 대학병원으로 몰리면 정작 급할 때, 위암 수술 같은 중한 수술을 받아야 하는 환자들은 몇 달씩 기다려야 하니까요. ―종합병원 의사들도 샐러리맨의 심정을 알 것 같은 때가 있어요. 병원 경영진의 ‘인센티브’제 때문이죠. 환자 많이 보는 의사가 유능한 의사가 되고, 추가 수당까지 더 받게 됩니다. 그러면 어렵고 위험 부담이 높은 환자를 진료하기보다는 쉬운 환자를 많이 보면 더 인정 받는 ‘의료 왜곡현상’이 벌어지게 됩니다. 중환자실 평가를 환자의 사망률로만 평가하면 의사들은 사망률 높은 위험한 환자를 오히려 피하게 돼요. 의료란 것이 단순히 숫자로만 평가할 일이 아닌데 안타깝습니다. 환자 많아야 유능한 의사? 그러면 쉬운 환자만 고르지 누가 위험한 수술하겠나 ―외국계 병원이 국내에 진출하면 그곳으로 가고 싶다는 의사도 꽤 있어요. 의대 교수처럼 직위가 보장되는 것도 아닌데 왜냐고 물으면 ‘한 번이라도 제대로 된 의사 노릇 해보고 싶어서’라고 합니다. 한 환자에게 30분씩 시간을 내서 충분히 설명도 해 주고, 눈물 짓는 환자 보호자의 하소연도 끝까지 들어주는 ‘진짜 의사’가 돼 보고 싶다는 거죠. 모든 의사들의 꿈일 겁니다.―한국의 의료제도나 수준이 그래도 훌륭한 편이란 걸 국민들이 좀 알아주었으면 해서요. 물론 불편한 점은 많지만, 비용에 비해 의료의 질은 상당히 높은 편입니다. 굳이 선진국 병원을 찾아갈 필요가 없죠. 또 누구든 필요할 때 병원에 갈 수 있다는 점에선 되려 선진국도 부러워할 수준입니다. ―의사가 곧 병원이고 의료제도 자체인 것은 아닙니다. 의사도 제도와 사회의 일부이고 저희도 어쩔 수 없는 부분이 있지요. 모든 의사를 ‘허준’의 잣대로만 재지 말아줬으면 합니다. 이번 조선일보의 의사가 쓰는 병원이야기 연재를 계기로 의사들이 국민들과 함께 진솔한 고민을 나누고, 함께 머리 맞대고 보다 나은 의료를 고민했으면 합니다.
- [김은구의 PD열전]소설가 꿈꾼 PD, ''하얀 거탑''의 안판석
- ▲ 소설가를 지망하는 문학소년이었던 안판석 PD(사진=김정욱 기자)[이데일리 김은구기자] 그는 1시간 남짓 인터뷰를 하는 동안 잠시도 담배를 입에서 떼지 않았다. 애연가의 입지가 갈수록 좁아드는 요즘 좀처럼 보기 힘든 줄담배였다. 바로 MBC 드라마 ‘하얀거탑’의 연출자 안판석(46) PD였다. "원래 담배를 그렇게 많이 피우느냐"고 묻자, 그는 “드라마 연출을 하면서 특히 많이 늘었다. 촬영 현장에서 자신감 없는 모습, 초조함을 들키기 싫어 담배를 꺼내 문다”고 말했다. ‘하얀거탑’에서 김명민, 김창완, 이정길, 변희봉 등 강한 존재감이 있는 연기자들을 이끌던 연출자여서 카리스마 있는 모습을 연상했는데, 의외로 여린 속내를 가지고 있었다. “내가 좀 무른 편이에요. 연기자나 다른 스태프가 나와 의견이 다르다면 협의를 하지, 소란스럽게 충돌하는 건 좋아하지 않아요. 우리에게는 촬영장이 직장인데 그곳에서 모두 행복할 수 있어야죠.” 여린 듯하면서 모나지안게 사람들과 어우러지며 조화를 이루는 것이 치열한 촬영 현장에서 스태프를 통솔하는 안판석 PD만의 노하우다. ◇ 20년 연출 인생 “갈수록 두려워진다” “고교 때까지 꿈은 소설가였어요. 따지고 보면 드라마 연출자, 영화 감독도 스토리 텔러라는, 소설가와 같은 맥락의 직업이라고 생각해요.” 안판석 PD는 자신의 꿈을 좇아 1987년 드라마 연출자로 MBC에 입사했다. 결국 드라마, 영화도 소설처럼 문학의 한 장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내린 결정이었다. 안 PD는 “문학에는 소설, 시, 희곡 등만 있는 게 아니라 영화, 연극, 드라마도 모두 포함된 것이라고 생각해요”고 말했다. 안판석 PD는 특이하게도 사춘기를 고교 1학년부터 대학 3학년까지 6년간 겪었다고 했다. 당시 인생에 대한 고민을 했다는데, 그는 “내가 어디서 뭘 했는지 자세한 기억은 없고 그 기간이 하나로 뭉뚱그려져 기억에 남아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고 나서 선택한 직장이 방송사였고, 마음을 둔 직업이 드라마 연출자다. 내심 ‘사회생활을 하려면 어디를 가든 사람들끼리 벌어지는 인간관계의 정치 싸움을 피할 수 없는데, 드라마, 영화를 제작할 때는 그런 게 없을 것 같다’는 생각도 직업 선택에 한 몫 했다. '그렇다면 드라마 연출자는 그런 정치싸움이 없이 편할까?' 안판석 PD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매 번 공포로 시작해요. 결과에 대한 두려움도 있지만 나이가 들고 안면이 있는 사람들이 늘수록 캐스팅 때문에 전화를 거는 것조차도 어려워져요. ‘전화를 안받으면 어쩌나’라는 생각에 두렵기도 하고, 마주 앉아 캐스팅 제의를 할 때 배우 얼굴의 미묘한 떨림을 보고 있는 것도 가슴 조이는 일이죠.” ▲ 안판석 PD의 새로운 대표작이 된 MBC 드라마 '하얀 거탑'◇ ‘하얀거탑’ 연출 제의, 피가 무서워 처음엔 거절 안판석 PD는 3월 종영된 ‘하얀거탑’으로 새롭게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물론 그는 그동안 적잖은 드라마를 연출한 베테랑 연출자다. 최진실 주연의 ‘장미와 콩나물’, 안재욱, 김혜수 등이 나온 ‘짝’ 등은 인기도 높았다. 하지만 최고 시청률이 23.2%에 불과했던 ‘하얀거탑’이 지금은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고 있다. ‘하얀거탑’이 의사들의 삶, 병원 내에서 성공을 향한 치열한 암투를 담아내며 메디컬 드라마, 전문직 드라마의 새 지평을 열었다는 높은 평가를 받았기 때문이다. “극본을 맡은 이기원 작가가 같이 해보자고 제안을 했는데 처음에는 거절했어요. 환자들이 오가는 병원에서 촬영을 해야 하는 것도 미안했고 겁이 많아 피도 무서워하거든요.” 하지만 안판석 PD는 ‘하얀거탑’의 원작을 읽은 뒤 푹 빠져 결국 연출을 맡았다. 감동도 있었고 드라마틱한 부분도 충분하다는 판단에서 용기를 냈다. 드라마를 만들어가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무엇보다 등장인물의 로맨스를 배제한 구성이 간단치 않았다. ‘하얀거탑’은 메디컬 드라마인 만큼 격투, 카 스턴트 등 이른바 흥미를 유발할 수 있는 볼거리도 적어 로맨스를 배제하는 것이 일종의 모험이었다. 그러나 안판석 PD는 의사들의 이야기에 사랑까지 덧붙인다면 두 가지 재미를 모두 잃어버릴 수 있다는 판단을 했고 결과적으로 모험은 성공을 거뒀다. “등장인물들의 심리싸움을 어떻게 보여주고 이끌어갈지 집중했어요. 그것만으로 20부까지 끌고 가는 것도 어려웠지만 운이 따라준 것 같아요.” ▲ 안판석 PD(사진=김정욱 기자)◇ “‘하얀거탑’ 덕분에 딸이 아빠 직업 알게 됐죠” ‘하얀거탑’은 안판석 PD의 가정 생활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올 해 초등학교 6학년이 된 딸이 아버지를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계기가 된 게 ‘하얀거탑’이다. 안판석 PD는 1990년 결혼, 슬하에 고교 1학년인 아들과 딸이 있다. “딸이 어느 날 우쭐해져서 돌아왔더라고요. 주위에서 ‘하얀거탑’ 얘기를 하면서 ‘네 아빠가 만드는 드라마’라고 했대요. 그런데 그 일로 아빠가 드라마 연출을 한다는 걸 처음 알았다지 뭐예요.” 안판석 PD는 “아빠가 만날 회사에 간다며 출근을 하니까 회사원인 줄로만 알고 있었던 모양”이라며 웃었다. 하지만 드라마 연출자로서 촬영이 시작되면 집, 가정에 소홀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은 안판석 PD도 피해가지 못했다. 안판석 PD는 “가정에서 나는 없는 존재, 즉 ‘부재자’나 마찬가지죠. 그래도 그게 가족 모두가 같이 살 수 있는 길”이라고 말했다. 더구나 ‘하얀거탑’의 기획과 연출을 하느라 거의 1년간 경기도 고양시 일산 집에서 불과 500미터 거리 밖에 안되는 부모님 집도 1번 밖에 찾아가지 못했다며 인터뷰 도중 "정말 어른들께 죄송하다"는 말도 빼놓지 않았다. 끝으로 안 PD에게 앞으로 가장 하고 싶은 작품을 물었다. 그는 “영화든 드라마든 관계없어요. ‘왕대박’이 터지고 작품성도 인정받는, 결코 가능하지 않을 것 같은 작품을 만들고 싶죠”라고 말했다. < 관련기사 >☞[김은구의 PD열전] 안판석 PD "스크린 첫 도전 실패가 약 " ☞[김은구의 PD열전] 김창완, 기태영이 본 안 PD "너무 진지"<!--기사 미리보기 끝-->
- [김은구의 PD열전]소설가 꿈꾼 PD, '하얀거탑' 안판석
- ▲ 안판석 PD(사진=김정욱 기자)[이데일리 SPN 김은구기자]그는 1시간 남짓 인터뷰를 하는 동안 잠시도 담배를 입에서 떼지 않았다. 애연가의 입지가 갈수록 좁아드는 요즘 좀처럼 보기 힘든 줄담배였다. 바로 MBC 드라마 ‘하얀거탑’의 연출자 안판석(46) PD였다. "원래 담배를 그렇게 많이 피우느냐"고 묻자, 그는 “드라마 연출을 하면서 특히 많이 늘었다. 촬영 현장에서 자신감 없는 모습, 초조함을 들키기 싫어 담배를 꺼내 문다”고 말했다. ‘하얀거탑’에서 김명민, 김창완, 이정길, 변희봉 등 강한 존재감이 있는 연기자들을 이끌던 연출자여서 카리스마 있는 모습을 연상했는데, 의외로 여린 속내를 가지고 있었다. “내가 좀 무른 편이에요. 연기자나 다른 스태프가 나와 의견이 다르다면 협의를 하지, 소란스럽게 충돌하는 건 좋아하지 않아요. 우리에게는 촬영장이 직장인데 그곳에서 모두 행복할 수 있어야죠.” 여린 듯하면서 모나지안게 사람들과 어우러지며 조화를 이루는 것이 치열한 촬영 현장에서 스태프를 통솔하는 안판석 PD만의 노하우다. ◇ 20년 연출 인생 “갈수록 두려워진다” “고교 때까지 꿈은 소설가였어요. 따지고 보면 드라마 연출자, 영화 감독도 스토리 텔러라는, 소설가와 같은 맥락의 직업이라고 생각해요.” 안판석 PD는 자신의 꿈을 좇아 1987년 드라마 연출자로 MBC에 입사했다. 결국 드라마, 영화도 소설처럼 문학의 한 장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내린 결정이었다. 안 PD는 “문학에는 소설, 시, 희곡 등만 있는 게 아니라 영화, 연극, 드라마도 모두 포함된 것이라고 생각해요”고 말했다. 안판석 PD는 특이하게도 사춘기를 고교 1학년부터 대학 3학년까지 6년간 겪었다고 했다. 당시 인생에 대한 고민을 했다는데, 그는 “내가 어디서 뭘 했는지 자세한 기억은 없고 그 기간이 하나로 뭉뚱그려져 기억에 남아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고 나서 선택한 직장이 방송사였고, 마음을 둔 직업이 드라마 연출자다. 내심 ‘사회생활을 하려면 어디를 가든 사람들끼리 벌어지는 인간관계의 정치 싸움을 피할 수 없는데, 드라마, 영화를 제작할 때는 그런 게 없을 것 같다’는 생각도 직업 선택에 한 몫 했다. '그렇다면 드라마 연출자는 그런 정치싸움이 없이 편할까?' 안판석 PD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매 번 공포로 시작해요. 결과에 대한 두려움도 있지만 나이가 들고 안면이 있는 사람들이 늘수록 캐스팅 때문에 전화를 거는 것조차도 어려워져요. ‘전화를 안받으면 어쩌나’라는 생각에 두렵기도 하고, 마주 앉아 캐스팅 제의를 할 때 배우 얼굴의 미묘한 떨림을 보고 있는 것도 가슴 조이는 일이죠.” ▲ MBC 드라마 '하얀거탑'◇ ‘하얀거탑’ 연출 제의, 피가 무서워 처음엔 거절 안판석 PD는 3월 종영된 ‘하얀거탑’으로 새롭게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물론 그는 그동안 적잖은 드라마를 연출한 베테랑 연출자다. 최진실 주연의 ‘장미와 콩나물’, 안재욱, 김혜수 등이 나온 ‘짝’ 등은 인기도 높았다. 하지만 최고 시청률이 23.2%에 불과했던 ‘하얀거탑’이 지금은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고 있다. ‘하얀거탑’이 의사들의 삶, 병원 내에서 성공을 향한 치열한 암투를 담아내며 메디컬 드라마, 전문직 드라마의 새 지평을 열었다는 높은 평가를 받았기 때문이다. “극본을 맡은 이기원 작가가 같이 해보자고 제안을 했는데 처음에는 거절했어요. 환자들이 오가는 병원에서 촬영을 해야 하는 것도 미안했고 겁이 많아 피도 무서워하거든요.” 하지만 안판석 PD는 ‘하얀거탑’의 원작을 읽은 뒤 푹 빠져 결국 연출을 맡았다. 감동도 있었고 드라마틱한 부분도 충분하다는 판단에서 용기를 냈다. 드라마를 만들어가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무엇보다 등장인물의 로맨스를 배제한 구성이 간단치 않았다. ‘하얀거탑’은 메디컬 드라마인 만큼 격투, 카 스턴트 등 이른바 흥미를 유발할 수 있는 볼거리도 적어 로맨스를 배제하는 것이 일종의 모험이었다. 그러나 안판석 PD는 의사들의 이야기에 사랑까지 덧붙인다면 두 가지 재미를 모두 잃어버릴 수 있다는 판단을 했고 결과적으로 모험은 성공을 거뒀다. “등장인물들의 심리싸움을 어떻게 보여주고 이끌어갈지 집중했어요. 그것만으로 20부까지 끌고 가는 것도 어려웠지만 운이 따라준 것 같아요.” ▲ 안판석 PD(사진=김정욱 기자)◇ “‘하얀거탑’ 덕분에 딸이 아빠 직업 알게 됐죠” ‘하얀거탑’은 안판석 PD의 가정 생활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올 해 초등학교 6학년이 된 딸이 아버지를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계기가 된 게 ‘하얀거탑’이다. 안판석 PD는 1990년 결혼, 슬하에 고교 1학년인 아들과 딸이 있다. “딸이 어느 날 우쭐해져서 돌아왔더라고요. 주위에서 ‘하얀거탑’ 얘기를 하면서 ‘네 아빠가 만드는 드라마’라고 했대요. 그런데 그 일로 아빠가 드라마 연출을 한다는 걸 처음 알았다지 뭐예요.” 안판석 PD는 “아빠가 만날 회사에 간다며 출근을 하니까 회사원인 줄로만 알고 있었던 모양”이라며 웃었다. 하지만 드라마 연출자로서 촬영이 시작되면 집, 가정에 소홀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은 안판석 PD도 피해가지 못했다. 안판석 PD는 “가정에서 나는 없는 존재, 즉 ‘부재자’나 마찬가지죠. 그래도 그게 가족 모두가 같이 살 수 있는 길”이라고 말했다. 더구나 ‘하얀거탑’의 기획과 연출을 하느라 거의 1년간 경기도 고양시 일산 집에서 불과 500미터 거리 밖에 안되는 부모님 집도 1번 밖에 찾아가지 못했다며 인터뷰 도중 "정말 어른들께 죄송하다"는 말도 빼놓지 않았다. 끝으로 안 PD에게 앞으로 가장 하고 싶은 작품을 물었다. 그는 “영화든 드라마든 관계없어요. ‘왕대박’이 터지고 작품성도 인정받는, 결코 가능하지 않을 것 같은 작품을 만들고 싶죠”라고 말했다. < 관련기사 >☞[김은구의 PD열전] 안판석 PD "스크린 첫 도전 실패가 약 " ☞[김은구의 PD열전] 김창완, 기태영이 본 안 PD "너무 진지"
- [김호의 축구보기] 축구 선수와 병역...방법이 없을까
- [이데일리 김호 칼럼니스트] 최근 기억에 남는 기사들이 있었다. FC 서울 세뇰 귀네슈 감독의 통역을 맡고 있는 시난씨가 소개한 터키의 병역 제도 관련 기사가 하나였고, 축구선수가 연루된 것으로 알려진 병역 비리 관련 소식이 또 다른 하나였다. 시난씨는 터키도 의무 복무기간 12개월의 징병제를 택하고 있는데 해외에서 직업을 구해 3년 이상 활동하면 3주간의 기본 군사훈련으로 병역을 마친다고 했다. 축구 선수들도 외국 구단에서 뛰게 되면 이 제도의 혜택을 받는다고 덧붙였다. ‘이런 방법도 있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편법으로 축구 선수들을 채용한 병역특례업체의 병역 비리 이야기는 ‘또 이런 일이 일어났구나’하는 안타까움을 가지고 유심히 봤다. 불법적인 방법으로 병역 혜택을 보려한 선수들도 비난을 면할 순 없는 일이다. 그러나 마음이 불편했다. 축구를 비롯 운동 선수들의 병역 비리 문제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현역 지도자 생활을 할 때 이런 문제에 연루돼 운동을 그만 두는 후배들도 봤고 병역 문제 때문에 고민하고 방황하다 더 이상 발전하지 못하는 선수들도 있었다. 극단적으로는 병역 면제를 위해 안해도 될 수술을 하는 선수도 있는 것으로 들었다. 이는 불법이다. 요행으로 법에 걸리지 않더라도 이들 대부분 선수로서 크게 빛을 보지 못한 것으로 알고 있다. 불필요한 수술로 몸이 망가진 탓이다. 불미스러운 일이 이어지는게 안타까울 뿐이다. 그러면서 축구 선수들이 병역 관련 범죄자가 되기 쉬운 것으로 사회에 비춰지지 않을까 하는 우려도 생긴다. 방법이 없을까. 병역문제는 전 국민이 민감하게 여기는 사안이기 때문에 조심스러운 면도 있다. 하지만 한 평생 축구만 한 사람으로서 젊은 선수들이 한순간에 범죄자가 되거나 활짝 꽃을 피우지 못하고 스러지는 현실을 해결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줄 필요가 있다고 말하고 싶다. 그 필요성에 대한 인식은 축구 선수를 비롯 운동선수들의 특수성부터 이해하는데서 시작할 수 있다. 선수들은 길어야 35세 정도가 되면 은퇴한다. 지도자로 제2의 인생을 열수도 있으나 대부분의 경우 그것도 쉽지 않다. 요즘 현실이야 그렇지 않지만 대개 55세까지 정년제를 시행하는 직장에서 근무하는 일반인들과의 근본적인 차이다. 선수들은 20대 초반부터 10여년 동안 집약해서 평생을 살 수 있는 경제적인 바탕을 마련해야 한다. 그동안 군에서 보내는 2년의 의미는 일반인들과 또 다를 수 밖에 없다. 축구를 떠나 2년을 보내고 난 뒤 선수 생활을 재개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광주 상무, 경찰청 등에서 축구팀을 운영, 숨통을 터주고 있지만 이걸로는 부족하다. 우리 때만 해도 방첩대, 해병대, 공군, 헌병대 등 각 군에 축구팀이 있어 많은 선수들이 경기력을 유지하는 게 가능했다. 한국 축구가 발전하고 세계의 중심에 서기 위해선 더욱 해결책이 시급하다고 본다. 한창 배우고 익힐 시기에 군대를 가야한다면, 그리고 해외에 진출하려 해도 병역문제가 발목을 잡는다면 전체적인 축구의 질을 높이기 힘들다. 또 국가대표로 뽑힌 이들은 국가를 위해 대가를 바라지 않고 자기 몸을 던진다. 국가대표 경기에서 부상을 당해도 이에 대한 변변한 보상을 받을 수도 없는 게 현실이다. 국가를 위해 희생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해외에서 활약하는 박지성(맨체스터 유나이티드)처럼 어린이들에게 꿈을 주고, 국민들에게 즐거움을 줄 수 있는 존재들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선수들에게 면제 혜택을 주자는 것은 아니다. 대체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자는 이야기다. 가령 시기를 선택해 군 복무를 하도록 할 수도 있고, 초, 중, 고교 팀에서 의무적으로 몇 년간 봉사하는 방안도 고려할 수 있다. 축구협회를 넘어, 대한체육회, 그리고 정부에서 진지하게 연구해 주기를 바란다. 앞날이 촉망되는 젊은 후배들이 불법의 덫에 빠지는 것을 지켜 보는 일은 선배로서 가슴 아프다. / 전 수원 삼성 감독
- (edaily리포트)고액권에 이런 모델 어때요?
- [이데일리 최한나기자] 작년 사정없이 풀린 돈으로 부동산 광풍을 겪은 뒤 우리 사회의 돈벌기 열풍은 한층 심해졌습니다. 자고 나면 뛰어있는 집값 앞에, 성실히 벌어 차곡차곡 모으자는 논리는 무색해졌습니다. 어떻게 하면 더 빨리, 더 쉽게, 더 많이 벌 수 있는지에 관심이 뜨거웠고, 올해도 사정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시장부 최한나 기자가 고액권에 실릴 인물 초상 후보를 추천한 배경도 이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화폐 앞면에 돈을 잘 쓴 인물을 넣어 `가치있게 돈 쓰는 방법`에 대한 인식을 높이자는 것입니다. 요즘 금융권의 가장 큰 이슈는 단연 `넘쳐나는 돈` 입니다. 막상 내 호주머니 속엔 찬바람만 가득한데 여기저기서 돈, 돈, 돈, 말들이 많습니다. 시중 유동성을 잡기위해 한국은행이 9개월동안 올린 금리만 1.25%포인트에 달합니다. 그러나 이런저런 이유들에 막혀 금리인상의 효과는 발휘되지 않았고, 부풀어가는 유동성에 대한 우려는 해를 넘기며 더욱 높아지고 있습니다. 작년 한해 내내 대한민국을 흔들었던 `부동산 광풍`도 바로 이 유동성 팽창과 연결돼 있습니다. 대출로 풀린 돈들이 집으로, 땅으로 흘러갔습니다. 부동산 시세표는 자고 나면 새로 고쳐져 있었고, 몇억쯤은 우습게 회자됐던 해였습니다. 새로 문을 여는 모델하우스에 와글와글 모인 사람들과 밤을 새워가며 청약순서를 기다리는 사람들, 지역과 평수로 나뉘어 내 몫에 아귀다툼하는 사람들의 모습에 익숙해져갔습니다. 옆집 누구네, 친척 누구네 돈벼락 소식에 자기도 모르게 표정이 굳어 버리는 사람들도 흔했구요. 절대적인 비극보다 상대적인 박탈감이 더 참담한 법이지요. 차곡차곡 저축해서 몇년안에 내집 마련하겠다는 소박한 꿈들은 끝도없이 공허해졌습니다. 정직하게 월급받아 알뜰살뜰 살아가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바보같은 일로 전락했습니다. 아이들 사이엔 집 평수와 차 종류가 내편네편을 가르는 기준으로 쓰이기도 했습니다. 해가 바뀌고 부동산가격 오름세가 예전보다 둔해졌지만, 돈벌기에 대한 관심은 여전히 뜨겁습니다. 최근엔 주가가 사상 최고치를 돌파하며 치솟아 `한탕`의 신화는 끊이지 않고 들려옵니다. 서점에는 돈 버는 법을 알려주겠다고 나선 책들이 즐비합니다. 각종 부동산과 주식 투자방법들이 고수익을 보장하며 명함을 내밉니다. `일단 많이 벌고 보자`는 풍토야 유사 이래 계속 있어왔겠지만, 갈수록 일반화되고 정당화되고 있다고 개탄하는 사람은 저 뿐일까요. 문제는 어떻게 하면 돈을 벌 수 있는지에만 관심있을 뿐, 정작 어떻게 써야하는지에 대한 논의가 부족하다는 점입니다. 왜 돈을 벌어야 하고, 어떻게 벌어야 하며, 어떻게 써야하는지에 대한 철학 없이 무조건 많이 벌기에만 관심이 집중돼있다는 것이죠. 지금 시중에 풀리고 있는 돈들이 어느 곳에서 어떤 현상으로 결말을 맞을지 궁금합니다. 걱정도 되고요. 다행히 실물경제 쪽으로 흘러가 우리 경제가 한단계 도약하는데 쓰인다면 좋겠지만, 작년과 같은 현상이 또다시 반복된다면 사회내 반목과 갈등, 시기와 다툼들이 한층 업그레이드돼서 나타날지도 모를 일입니다. 생각만 해도 아찔한 일이죠. 이런 와중에 한국은행이 고액권 발행에 시동을 걸었습니다. 오는 2009년 상반기중 5만원권과 10만원권을 새로 발행하겠다고 합니다. 가장 큰 관심사는 역시 화폐의 앞면을 누가 장식하느냐 입니다. 여성계와 과학계를 비롯한 각계 각층에서 저마다 이유있는 인물들을 내세워 앞면을 선점하겠다고 나섰습니다. 초등학생도 알만한 유명한 인물들부터, 역사속에 묻혀 그동안 알지 못했던 낯선 인물들도 꽤 나왔더군요. 장군도 좋고 과학자도 좋지만, 이번 기회에 돈을 버는 것 못지 않게 번 돈을 어떻게 쓰는지도 중요하다는 점을 인식시켜보는 건 어떨까요. 고액권 앞면에다 `돈에 관한한 가장 존경할 만한` 분을 넣는거죠. 누구보다도 돈을 잘 번 인물이면서도, 허투루 쓰지 않고 아름답게, 가치있게 사용한 인물 말입니다. `박수 받으며 돈 쓰는 방법`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높일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지 않을까요?
- [김호의 축구보기] 축구 선수와 병역...방법이 없을까
- ▲ (자료사진) 박광태 광주광역시장이 상무 축구단 선수들을 격려하고 있다 [뉴시스][이데일리 SPN 김호 칼럼니스트] 최근 기억에 남는 기사들이 있었다. FC 서울 세뇰 귀네슈 감독의 통역을 맡고 있는 시난씨가 소개한 터키의 병역 제도 관련 기사가 하나였고, 축구선수가 연루된 것으로 알려진 병역 비리 관련 소식이 또 다른 하나였다. 시난씨는 터키도 의무 복무기간 12개월의 징병제를 택하고 있는데 해외에서 직업을 구해 3년 이상 활동하면 3주간의 기본 군사훈련으로 병역을 마친다고 했다. 축구 선수들도 외국 구단에서 뛰게 되면 이 제도의 혜택을 받는다고 덧붙였다. ‘이런 방법도 있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편법으로 축구 선수들을 채용한 병역특례업체의 병역 비리 이야기는 ‘또 이런 일이 일어났구나’하는 안타까움을 가지고 유심히 봤다. 불법적인 방법으로 병역 혜택을 보려한 선수들도 비난을 면할 순 없는 일이다. 그러나 마음이 불편했다. 축구를 비롯 운동 선수들의 병역 비리 문제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현역 지도자 생활을 할 때 이런 문제에 연루돼 운동을 그만 두는 후배들도 봤고 병역 문제 때문에 고민하고 방황하다 더 이상 발전하지 못하는 선수들도 있었다. 극단적으로는 병역 면제를 위해 안해도 될 수술을 하는 선수도 있는 것으로 들었다. 이는 불법이다. 요행으로 법에 걸리지 않더라도 이들 대부분 선수로서 크게 빛을 보지 못한 것으로 알고 있다. 불필요한 수술로 몸이 망가진 탓이다. 불미스러운 일이 이어지는게 안타까울 뿐이다. 그러면서 축구 선수들이 병역 관련 범죄자가 되기 쉬운 것으로 사회에 비춰지지 않을까 하는 우려도 생긴다. 방법이 없을까. 병역문제는 전 국민이 민감하게 여기는 사안이기 때문에 조심스러운 면도 있다. 하지만 한 평생 축구만 한 사람으로서 젊은 선수들이 한순간에 범죄자가 되거나 활짝 꽃을 피우지 못하고 스러지는 현실을 해결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줄 필요가 있다고 말하고 싶다. 그 필요성에 대한 인식은 축구 선수를 비롯 운동선수들의 특수성부터 이해하는데서 시작할 수 있다. 선수들은 길어야 35세 정도가 되면 은퇴한다. 지도자로 제2의 인생을 열수도 있으나 대부분의 경우 그것도 쉽지 않다. 요즘 현실이야 그렇지 않지만 대개 55세까지 정년제를 시행하는 직장에서 근무하는 일반인들과의 근본적인 차이다. 선수들은 20대 초반부터 10여년 동안 집약해서 평생을 살 수 있는 경제적인 바탕을 마련해야 한다. 그동안 군에서 보내는 2년의 의미는 일반인들과 또 다를 수 밖에 없다. 축구를 떠나 2년을 보내고 난 뒤 선수 생활을 재개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광주 상무, 경찰청 등에서 축구팀을 운영, 숨통을 터주고 있지만 이걸로는 부족하다. 우리 때만 해도 방첩대, 해병대, 공군, 헌병대 등 각 군에 축구팀이 있어 많은 선수들이 경기력을 유지하는 게 가능했다. 한국 축구가 발전하고 세계의 중심에 서기 위해선 더욱 해결책이 시급하다고 본다. 한창 배우고 익힐 시기에 군대를 가야한다면, 그리고 해외에 진출하려 해도 병역문제가 발목을 잡는다면 전체적인 축구의 질을 높이기 힘들다. 또 국가대표로 뽑힌 이들은 국가를 위해 대가를 바라지 않고 자기 몸을 던진다. 국가대표 경기에서 부상을 당해도 이에 대한 변변한 보상을 받을 수도 없는 게 현실이다. 국가를 위해 희생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해외에서 활약하는 박지성(맨체스터 유나이티드)처럼 어린이들에게 꿈을 주고, 국민들에게 즐거움을 줄 수 있는 존재들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선수들에게 면제 혜택을 주자는 것은 아니다. 대체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자는 이야기다. 가령 시기를 선택해 군 복무를 하도록 할 수도 있고, 초, 중, 고교 팀에서 의무적으로 몇 년간 봉사하는 방안도 고려할 수 있다. 축구협회를 넘어, 대한체육회, 그리고 정부에서 진지하게 연구해 주기를 바란다. 앞날이 촉망되는 젊은 후배들이 불법의 덫에 빠지는 것을 지켜 보는 일은 선배로서 가슴 아프다.
- (CEO칼럼)윤성태 대표, "처음으로 사인(Sign)을 해주다"
- [윤성태 휴온스 대표] 며칠 전 모경제지 기자들과 함께 식사를 하면서 인터뷰를 할 기회가 있었다. 모임의 취지는 아직 코스닥 새내기인 휴온스에 대해 정확한 정보가 부족한 기자들에게 회사를 소개하는 자리였다.왜 상장을 결심하게 되었는가, FTA가 제약회사에 미치는 영향은 무엇인가, 휴온스의 비전은 무엇인가 등 여러 가지 현안에 대한 날카로운 질문들이 나왔다. 어떤 질문은 곤혹스러웠고 어떤 질문은 과거의 고생스러웠던 시절을 기억나게 했다. 사실 필자는 잘 다니던 다국적 회사인 IBM을 그만두고 지난 1992년 휴온스에 입사하여 약 8년간 엄청난 어려움을 겪었다. 경영이 잘 됐던 회사가 어려움에 처한 것은 공장 건축에 대한 과도한 투자가 원인이었다. 그 당시 나는 인생의 최대 시련을 겪어야 했으며 1998년에 완성된 플라스틱 주사제를 국내 최초로 개발해 회사가 다시금 기사회생 할 수 있었다. 회사가 기사회생하면서 신제품 개발이 얼마나 중요한지 뼈저리게 경험하였고 향후 회사가 더욱 발전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성장 동력이 필요함을 절감해 시작한 신제품 개발 노력이 바로 웰빙의약품 개발이었다.2000년대 들어서 비만치료제, 태반주사제, 비타민주사제를 차례차례 개발하면서 회사가 급격한 성장을 하였고 드디어 코스닥 상장이라는 업적을 이루게 되었다. 여러 현안들에 대해 이야기했고 특히 최근 당사가 개발하여 출시한 생약 성분의 비만치료제인 `살사라진`에 대한 이야기도 자연스럽게 나오게 되었다. 살사라진 개발 동기, 이름을 누가 지었는지, 매출은 어떠한지 실제 효과는 있는지에 대해 기자들은 흥미롭게 질문했고 필자는 있는 사실을 모두 숨김없이 이야기했다.살사라진이란 이름을 지은 직원에게 5월2일 월례조회에서 포상과 함께 표창장을 주었다는 이야기, 효과가 슬슬 나타나면서 홈페이지에 경험담이 올라오기 시작한다는 이야기, 향후 제2의 살사라진을 개발하고 있다는 이야기도 하였다. 그런데 식사가 끝나갈 즈음 서빙하는 아주머니께서 작은 케이스에 담긴 약을 들고 갑자기 방으로 들어오시더니, 광고를 보고 약국에서 구입해 본인이 지금 살사라진을 복용하고 있다면서 이 회사 사장을 직접 만나게 돼 영광이라며 내 손을 꼭 잡는게 아닌가?나 역시 처음 방문한 광화문의 한 일식집에서 서빙하는 아주머니께서 살사라진을 복용하고 있을 거라곤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였는데 살사라진 휴대용 약통을 보여주면서 자랑하는 아주머니를 만나니 너무 기쁘기 그지없었다. 그런데 이 아주머니께서 식사가 끝나고 나가려고 하는데 나에게 오늘 만난 인연으로 사인을 하나 해 달라고 부탁해서 태어나고 처음으로 모르는 분에게 사인을 해 주게 되었다. 개인적으로 너무 기뻤으며 앞으로도 사명감을 가지고 사업을 하여야겠다고 다짐하였으며 이 일로 태어나서 처음으로 유명 연예인이 된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기분 좋은 하루를 보내게 되었다. 윤성태 대표<약력>한양대학교 산업공학과 졸업한양대 공학대학원 프로젝트관리학과 재학中한국IBM 근무이노비즈협회 부회장 (현재)(주)휴온스 대표이사 (현재)(주)휴온스1965년 07월 광명약품공업사 설립2003년 06월 (주)휴온스로 상호변경2004년 11월 오백만불 수출의 탑 수상(대통령상)2005년 09월 벤처기업 인증 취득2006년 10월 국가생산성대상 리더쉽부문 국무총리상 수상2006년 12월 19일 코스닥 상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