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春! 봄빛 찬란한 南道로 떠나요~
  • 春! 봄빛 찬란한 南道로 떠나요~
  • [노컷뉴스 제공] 따사로운 햇살과 파란 하늘, 어느새 봄이 온 세상을 물들이고 있다. 봄 중에서도 남도(南道)의 봄은 상춘객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축복이다. 한국관광공사는 2008 광주/전남 방문의 해를 맞아 봄빛 찬란한 남도 여행지 4곳을 추천했다. 지구온난화로 성급한 여름이 찾아오기 전에 봄 내음과 꽃향기 가득한 남도로 떠나보자! ◈ 섬진강 줄기 따라 떠나는 봄빛 여행 - 곡성 섬진강과 보성강이 합류하는 곡성은 깨끗한 자연과 수려한 경관으로 유명한 고장이다. 이곳에 새로운 명물이 생겼다. 옛 전라선 구간을 활용해 운행하는 관광용 증기기관차다. 봄꽃이 만발한 섬진강변을 따라 기적을 울리며 달리는 증기기관차는 관광객들의 마음을 설레게 한다. 또, 나무로 지은 기차역과 향수를 자극하는 옛날 거리는 영화, 드라마 촬영장으로도 인기를 끌고 있다. 섬진강변은 3천여 평의 잔디광장과 원두막, 디딜방아, 나룻배, 꽃길 등 소담스럽고 잔잔한 풍경이 가득하다. 가족, 연인과 함께 자전거를 타고 봄날의 정취를 만끽하는 것도 크나큰 즐거움이다. 강변에 위치한 섬진강 천문대와 태안사도 놓쳐서는 안 될 볼거리들이다. ▲ 문의 : 곡성군청 관광홍보과 ☎ 061)360-8224 ◈ 꽃과 나비의 천국 - 함평 함평의 봄은 나비 천국으로 변한다. 2008 함평 세계나비/곤충 엑스포가 33만 평의 드넓은 엑스포공원에서 18일부터 6월 1일까지 열리는 것이다. 100여 종의 꽃창포와 30여 종의 화초류가 가득 핀 공원에는 수십만 마리의 나비와 곤충이 날아다닌다. 특히 세계에서 가장 화려하고 아름다운 몰포나비, 가장 큰 풍뎅이인 헤라클레스 왕장수풍뎅이와 순금 162kg으로 제작된 황금박쥐 조형물 등이 큰 관심을 끈다. 이밖에 '시골스러워서' 더욱 정겨운 해수찜탕과 어린이 드라마 촬영장인 자연생태공원, 그리고 '꽃반지 끼고'를 부른 추억의 인기가수 은희씨가 운영하는 천연염색 체험장 민예학당도 들려볼 만하다. ▲ 문의 : 함평군청 문화관광과 ☎ 061)320-3364 / 함평 세계나비/곤충엑스포 조직위 ☎ 061)320-3757 ◈ 봄 향기 가득한 보성 나들이 - 보성 차밭으로 유명한 보성은 부드러운 연녹색으로 채색되고 있다. 대한민국 대표관광지로 자리 잡은 보성 차밭은 새싹이 돋아 찻잎이 밝은 녹색을 띠면서 봄의 생기를 담뿍 머금고 있다. 신라 고승 아도화상이 창건했다는 백제의 천년 고찰 대원사는 갖가지 봄꽃으로 화사함을 발한다. 대나무로 길을 낸 산책로와 자그마한 연못들, 아담한 크기의 일화문 등 소박하면서도 아기자기한 느낌이 좋은 사찰이다. 보성 남단 일림산 정상은 철쭉꽃으로 서서히 붉게 타오르고 있다. 100만 평 가량 군락을 이루고 있는 일림산 철쭉은 유난히 색이 선명해 여행자의 마음을 단박에 사로잡는다. 다음 달 3일부터 6일까지는 보성다향제와 일림산 철쭉제가 함께 열려 다양한 체험 행사를 즐길 수 있다. 국제현대미술전이 열리고 있는 백민미술관, 주암호 조각공원, 서재필기념공원, 득량면과 조성면의 유채꽃밭은 덤으로 얻을 수 있는 즐거움이다. ▲ 문의 : 보성군청 문화관광과 ☎ 061)850-5736 ◈ 금빛 게으른 울음을 내어보려 떠난 여행 - 청산도 숨돌릴 틈도 없이 뛰어온 인생, 가끔은 그 자리에 멈춰 삶을 음미해보고 싶다. 이 느림의 미학을 가져다주는 곳이 바로 아시아에서는 네 곳뿐인 슬로우시티 중 한 곳인 청산도다. 전남 끝자락 완도에서도 배를 타고 50여 분을 들어가는 청산도는 푸르른 청보리밭과 노오란 유채꽃이 절로 낭만에 빠져들게 한다. 영화 '서편제'와 드라마 '봄의 왈츠'의 무대였던 당리 황토길과 화랑포를 미음완보(微吟緩步)하다 보면 어느새 마음은 꿈길을 거닐고 있다. 유채꽃이 만발한 국화리, 상서리 돌담길, 청계리로 이어지는 청산도의 여행길은 봄의 향기와 빛깔, 소리로 포근하고 아늑하다. ▲ 문의 : 완도군청 관광안내소 ☎ 061)550-5152 ▶ 관련기사 ◀☞제철맞은 쭈꾸미, 아직도 못드셨나요?☞10달러짜리 ''mp3 가이드''와 시드니 골목골목 여행하는 법☞입안 가득 쫀득쫀득한 실치의 매력에 빠지다
`버림받은 양자` 다이먼의 야심 `JP모간 1위`
  • `버림받은 양자` 다이먼의 야심 `JP모간 1위`
  • [이데일리 김국헌기자] 샌포드 웨일 전 씨티그룹 회장의 버림을 받은지 10년. 지난 1998년 찰스 프린스에게 씨티그룹 후계자 자리는 내주고 10년간 절치부심했던 `양자` 제이미 다이먼(52) JP모간 체이스 회장이 씨티그룹을 제치고 JP모간을 세계 1위 은행에 올려놓겠다는 야심을 뚜렷이 드러냈다. 다이먼 회장은 지난 16일 JP모간 1분기 실적 발표 자리에서 미국 5위 투자은행 베어스턴스 인수가 또 다른 은행을 인수하는 데 걸림돌이 되지 않는다고 확실히 했다. 웨일 전 회장의 손과 발이 돼, 씨티그룹의 큰 그림을 그렸던 다이먼 회장은 그의 꿈을 실현할 적기를 만난듯 하다. ☞관련기사: (정명수의 월가 키워드) Mentor◇JP모간, 상환우선주 60억弗 발행…`인수 실탄용?` 한 관계자는 JP모간이 10년 만기 상환우선주를 60억달러 규모로 고정금리 7.9%의 조건에 발행할 예정이라고 블룸버그통신을 통해 밝혔다. 이 자금은 손실을 메우기 보다 기업의 인수자금으로 활용될 공산이 크다. 다이먼 회장은 현재의 위기 상황을 낙관하고 있고, JP모간의 역량을 자신했다. JP모간은 신용위기 손실로 현재까지 자산 가치를 총 100억달러 상각했고 지난 1분기에 홈 에쿼티 론 채무불이행에 대비해 대손충당금 11억달러를 쌓았지만, 다른 금융사에 비해 누적 상각 규모는 큰 편이 아니다. 또 비자 지분 매각 대금 15억달러로 손실을 어느 정도 만회할 수 있다. JP모간의 1분기 순이익이 전년 동기 48억달러에서 24억달러로 절반으로 줄긴 했지만, 2분기 연속 100억달러대 적자를 낸 것으로 추정된 씨티에 비해선 양호한 상황이다. 다이먼 회장은 전일 1분기 실적발표 자리에서 "신용시장 위기가 거의 끝났다"며 "금융사가 레버리지 비중을 줄이면서 신용위기가 80% 정도 마무리된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어 그는 "우리는 인수를 실행할 경영팀과 시스템 그리고 지원부서를 갖췄다"며 "그것이 일을 가능하게 만들 것"이라고 자신했다. ◇인수 사냥감은 지역은행…`선트러스트` 물망에 ▲ 제이미 다이먼 JP모간 회장JP모간은 이미 베어스턴스를 주당 10달러(11억5000만달러)에 인수하기 전에 미국 최대 주택대부업체 워싱턴 뮤추얼에 인수가격 주당 8달러(총 70억달러)를 제시했었다. 2분기 연속 적자를 낸 워싱턴 뮤추얼은 사모펀드의 자금 70억달러를 수혈받아, JP모간의 인수 제안은 물거품이 됐다. JP모간의 다음 사냥감은 지역은행이 될 것으로 외신들은 점쳤다. 파이낸셜타임스는 JP모간이 애틀랜타 소재의 선트러스트 같은 지역은행에 관심을 둘 수 있다고 예상했다. 로이터통신은 미국 대형 은행 가운데 하나 인 JP모간이 신용위기에도 건전한 재무구조를 유지해, 소형 은행 포식자로 자주 거론돼 왔다고 전했다. UBS의 글렌 스코 은행 전문 애널리스트는 "JP모간을 위한 시기가 무르익었다"며 "경쟁자들은 신용 문제로 타격을 입었고, 매물이 두둑한 인수자를 찾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스코 애널리스트는 "지금이 다이먼이 학수고대한 때"라고 덧붙였다. ◇시총 2위·자산규모 3위 한계 극복할까 기업을 키우는데 인수·합병(M&A)만큼 가까운 지름길은 없다. 현재 JP모간의 성적표는 시가총액 기준으로 뱅크 오브 아메리카(1580억5000만달러)에 이어 미국 2위(1430억6000만달러)이고, 자산 규모 기준으로는 씨티그룹과 뱅크 오브 아메리카(BOA)에 이어 3위다. 전문가들은 JP모간이 연말까지 씨티의 자산 규모 1조9000억달러를 추월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1위에 올라서는 데 걸림돌은 BOA. 올스타인 캐피탈은 베어스턴스를 매입한 JP모간의 자산은 연말까지 1조9000억달러를 넘어설 것으로 예상했다. 메릴린치는 현재 1조7600억달러 수준인 BOA 자산은 연말에 1조9200억달러로 늘어날 것으로 내다봤다. 다만 JP모간의 부채비율(블룸버그통신 집계 34.3%)이 씨티그룹(47.6%)과 BOA(40.1%)에 비해 낮아, 레버리지를 일으켜 부실 금융사 사냥에 나선다면 자산 규모로도 BOA를 추월하는 데 충분히 승산이 있다. ◇스승과 제자의 옛날 이야기 ▲ 샌포드 웨일 전 씨티그룹 회장JP모간이 씨티그룹을 제치고 명실상부한 미국 1위 은행으로 자리매김하는 것의 의미는 웨일 전 회장과 다이먼 회장의 과거를 빼놓고 이해할 수 없다. 지난 1982년 하버드 경영대학원에서 경영학 석사(MBA)를 취득한 청년 다이먼은 골드만삭스, 모간스탠리 등 유수한 투자은행의 입사 제의를 받았다. 그러나 신용카드사 아메리칸 익스프레스의 사장으로 일하고 있던 웨일 전 회장은 동료의 아들인 다이먼에게 `재미`를 약속하고 그를 투자은행보다 낮은 보수에 개인비서로 채용했다. 그 이후 다이먼은 웨일 전 회장이 그린 M&A 청사진을 수행하는 손과 발이 됐다. 웨일 전 회장 밑에서 다이먼은 커머셜 크레디트, 프라이메리카, 살로먼브러더스, 트래블러스 등의 인수에 참여했다. 다이먼이 웨일 전 회장과 이별하게 된 것은 역설적으로 M&A 행진이 막바지에 다다른 씨티그룹 시절이었다. 합병 직후 내부 권력다툼이 심화된 가운데 웨일 전회장과 다이먼의 사이도 벌어졌다. 재미있는 점은 웨일 전 회장이 다이먼을 내치고 후계자로 삼은 찰스 프린스 전 씨티그룹 CEO가 씨티의 합병 역사를 `슬픈 이야기`로 만든 주역이 됐다는 점이다. 반면 다이먼은 웨일 전 회장에게 받은 M&A 수업을 착실히 실천해, JP모간을 100년 만에 다시 월가 최고 은행으로 부활시키는 주역이 됐다.
2008.04.17 I 김국헌 기자
다랑이 논이 13년 만에 농원으로… 여기가 ''무릉도원''
  • 다랑이 논이 13년 만에 농원으로… 여기가 ''무릉도원''
  • [조선일보 제공] '안평대군(安平大君·1418~1453년)이 박팽년(朴彭年)과 함께 말을 타고 복사꽃(복숭아꽃) 만발한 오솔길을 올라갔다. 구름과 안개가 서린 첩첩산중 복숭아밭이 노을에 반짝였다. 안평이 말했다. "(이곳이)무릉도원(武陵桃源)이다." 안평대군 일행은 시를 지으며 산을 내려왔다. 그러다 안평이 잠에서 깨었다. 꿈이었다. 안평은 안견(安堅)을 불러 꿈에서 본 풍광을 그리도록 했다.' 조선 최고 화가로 꼽히는 안견이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를 그린 배경이다. 지난주 찾아간 '산방산비원(山芳山秘園)'을 돌아보며 몽유도원도가 떠올랐다. 꿈을 구체화시켰다는 공통점이 있다. 차이가 있다면 안평대군이 꿈을 그림으로 구체화시켰다면, 자신의 고향을 널리 알리겠다는 꿈을 10여 년에 걸쳐 농원으로 실체화시켰다는 점이다. ▲ 산방산비원의 오후. 인간세상이 아닌 듯 고요하고 평온하다. 이따금 두꺼비 우는 소리가 들릴 뿐이다. /조선영상미디어 유창우 기자산방산비원은 경남 거제 둔덕면 산방산(山芳山) 기슭에 오는 19일 새로 문 여는 야생화농원이다. 이 부근은 흔히 '청마마을'이라 불린다. 청마 유치환(柳致環·1908~1967) 선생이 이곳에서 태어났다. 청마는 통영에서 활동했지만 산방산에서 멀지 않은 둔덕면 방하리에서 태어났다. 산방산비원을 만든 김덕훈(68) 원장은 청마와 인연이 각별하다고 느낀다. "제가 청마의 생가(生家)에서 태어났습니다. 청마는 태어나고 세 살 때 가족과 통영으로 이사했죠. 그의 가족이 살던 집을 우리 할아버지가 사셨어요." 김 원장이 10년 넘게 정성껏 가꾼 산방산비원을 올해 개장하는 건, 올해가 청마 탄생 100년을 맞는 해이기 때문이다. 오는 18일 청마기념관이 정식 개관하고, 18일부터 20일까지 '청마 탄생 100주년 기념 문학제'가 열린다. 김덕훈 원장도 청마처럼 어렸을 때 고향을 떠났다. 사업으로 큰 돈을 벌었다. 20여 년 전 고향에 왔다가 깜짝 놀랐다. 산기슭을 깎아 만든 다랑이논에 억새가 우거져 있었다. 젊은 농부가 없는 건 어느 시골이나 마찬가지나, 농기계가 들어갈 수 없는 다랑이논이라 나이 많은 땅주인들이 아예 농사를 포기했기 때문이다. 김덕훈 원장은 황폐해진 다랑이논에 야생화농원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야생화 농원은 김 원장의 오랜 꿈이었다. 그는 경남 일대에서 야생화와 수석, 난(蘭)으로 꽤 이름 난 사람이다. "나무와 풀을 잘 가꾸는 어머니를 보고 자랐는데, 그 영향을 받은 모양입니다." 입구에서 바라다 본 농원은 그리 규모가 대단해 보이지 않다. 다른 수목원이나 농원처럼 한 종류의 꽃이나 풀, 나무를 한 곳에 집중적으로 심어놓지 않아 첫눈에는 다소 실망스럽기도 하다. 개인 인터넷사이트에 사진 찍어 올리기가 유행하면서, 요즘은 어디나 소위 '사진발'이 좋아야 사람이 몰린다. 그런데 이곳은 예쁘게 사진 찍기가 쉽지 않다. 이곳이 생겼다는 소식을 듣고 산방산비원 웹사이트를 둘러봤다. 솔직히 '좀 별로 아닌가' 의심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산방산비원은 실제로 보면 훨씬 좋은 곳이다. 입구를 들어서면 먼저 규모에 놀란다. 1995년부터 조금씩 사들인 땅이 3만여 평. 높은 산으로 폭 에워 싸인 지형이라 바깥에 보이는 것보다 훨씬 넓다. 메울 곳은 메우고 깎을 곳은 깎으며 농원의 터를 잡았다. 다랑이논 형태를 그대로 살려 계단식 연못이나 화단을 만들기도 했다. 여기에 전국 곳곳에서 우리 풀과 꽃과 나무 1000여 종을 찾아다 심었다. 김 원장은 "수국이 약 200가지, 비비추 50가지, 수련 30가지가 있고, 중국 우한(武漢)에서 희귀 연꽃 11종도 들여와 연못에 띄웠다"며 자랑스러워했다. 산책로 돌계단 틈새에서 돌단풍이 한창이고, 연못에는 수련과 창포가 물가 군데군데 나 있다. 마치 오래 전 그곳에 뿌린 듯 자연스럽다. 꽃과 나무를 최대한 자연스럽게 보이도록 심고 조경했다. '사진발'이 살지 않는 건 이처럼 인위적 아름다움을 가능한 배제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꽃 피우거나 잎에 단풍 드는 시기가 조금씩 다른 야생화를 적절히 섞어놨다. 언제나 볼거리가 있다. 김 원장은 "15일 간격으로 꽃이 나온다"고 설명했다. 지금은 돌단풍이며 라일락, 꽃잔디, 철쭉, 명자나무, 왕벚꽃, 수선화, 진달래 따위가 한창이다. 연꽃이 곧 찾아올 여름에 만개하려 대기 중이고, 멀리 울릉도에서 찾은 까실쑥부쟁이는 가을이면 예쁜 무늬를 잎사귀에 피울 것이다. 김 원장은 "형형색색 꽃으로 눈요기하는 시대는 지났다"면서 "풍경이 제일 중요하다"고 했다. 농원은 김 원장이 자부심 가질 만한 풍광을 품었다. 농원 앞 바다는 산으로 둘러싸이고 섬으로 막혀 잔잔하고 평화로운 호수 같다. 왼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산방산이 진면목을 드러낸다. 언제나 물 흘러내리는 소리가 들리고, 계곡을 타고 바람이 불어와 상쾌하다. 바람이 왕벚꽃나무 꽃잎을 하늘에 날렸다. 따뜻한 오후 햇빛에 꽃잎이 반짝거렸다. 안평대군은 이 광경을 보고서 뭐라고 할까, 궁금했다. ::: 산방산비원 언제 갈까요?  언제 가도 좋답니다. 왜냐하면… 꽃 피우거나 잎에 단풍 드는 시기가 조금씩 다른 야생화를 적절히 섞어놨기 때문에 언제나 볼거리가 있습니다. 김 원장은 "15일 간격으로 꽃이 나온다"고 설명합니다. 지금은 돌단풍이며 라일락, 꽃잔디, 철쭉, 명자나무, 왕벚꽃, 수선화, 진달래 따위가 한창입니다. 연꽃이 곧 찾아올 여름에 만개하려 대기 중이고, 멀리 울릉도에서 찾은 까살쑥부쟁이는 가을이면 예쁜 무늬틀 잎사귀에 피울 테지요. ▲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여기처럼 어울리는 곳도 없다. 설명을 듣고 나면 꽃 하나, 풀 하나도 소중하게 보인다. 단체관람객의 경우 예약하면 김덕훈 원장이나 다른 직원이 차근차근 재미있게 안내해준다. 1시간부터 4시간짜리까지 다양한 관람 코스도 알려준다. 개별 관람객이면 계절별로 피는 꽃과 풀을 표시하고 설명한 지도를 달라면 된다. 입장료 어른 1만원, 아동 5000원. 농원 내 샌드위치, 김밥 등 스낵과 음료를 파는 매점이 있다. 농원 한가운데 있는 건물에서는 녹차(1만원) 등 전통차를 판다. 경주 커피전문점 '클라라 & 슈만'에서 볶은 커피원두로 드립커피(1만원대)도 내려 팔 계획이다. 문의 (055)633-1221, www.bee-one.co.kr ▲ 통영에서 거제대교를 넘어 오른쪽 둔덕면 방향으로 튼다. 하둔에서 양갈래길을 만나면 왼쪽을 선택한다. '청마생가'란 팻말이 보이고, 오른쪽으로 갈라지는 길이 보인다. 청마생가를 지나 조금만 더 가면 산방산비원이 왼쪽에 있다. 거제대교를 넘으면서부터 '산방산비원' 간판이 여럿 세워져 있어 찾기 어렵지 않다. ▲ 산방산에 올라보자. 거제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산이다. 한산도와 욕지도, 비진도 등 다도해 절경이 펼쳐진다. 8부 능선까지 등반 가능하다. 2~3시간 걸린다. 둔덕면 하둔에서 해안을 따라 1018번 지방도로를 따라 내려가면 해안길 드라이브 코스로 이어진다. '홍포-여차 해안도로'가 백미다. 14번 국도를 타고 조금만 가면 해금강이다. 진시황제를 위해 서불이 불로장생초를 구하러 왔었다는 전설이야 믿거나 말거나지만, 전설이 생길만하다 싶게 경관이 훌륭하다. 문의 거제시 관광과 (055)639-3198 ▶ 관련기사 ◀☞노랑·분홍… 화려한 고산식물 만나러 가요☞봄기운 받은 식물원… 야생화들 꽃망울 터트리네☞벚꽃이 진다… 야생화가 핀다
이종우 "현대차IB증권서 마지막 꿈 이루겠다"
  • 이종우 "현대차IB증권서 마지막 꿈 이루겠다"
  • [이데일리 안재만기자] "회사를 자주 옮겼다는 지적에는 할말이 없습니다. 특히 교보증권에서 나온 것은 변명할 여지가 없죠. 하지만 제겐 꿈이 있습니다. 현대차IB증권에서는 그 꿈을 이룰 수가 있습니다. 저는 먼 훗날에 `현대차IB증권의 초석을 이종우가 닦아놨다`란 말을 듣고 싶습니다." 교보증권에서 8개월간 리서치센터장으로 근무하다 현대차IB증권(001500)으로 옮긴 이종우 센터장(사진). 그는 출근 이틀째인 15일 기자를 만나자마자 오랫동안 간직했던 꿈을 털어놨다. 애널리스트로서 20년간 활약한해온 그는, 마지막 꿈을 펼치기 위해 현대차IB증권에 둥지를 틀었다고 강조했다. 사실 그를 둘러싼 증권업계의 시선은 호의적이지 않다. 회사를 자주 옮겼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있고, 그가 몸담게 된 현대차IB증권이 대대적인 인력 영입으로 업계를 뒤흔들 것이란 우려의 목소리도 있다. "600명을 영입한다더라, 수십명을 한꺼번에 보쌈질 한다더라 하는 소문은 모두 사실무근입니다. 아직 본격적으로 영입 제안에 들어가지도 않았습니다. 돈으로 사람을 긁어모으겠다는 계획을 가져본 적도 없습니다. 나쁜 소문이 너무나 많습니다." ◇"인력 확보는 최소한으로..소수정예로 나갈 계획" 이종우 센터장은 충원할 애널리스트의 규모에 대해 분명하게 밝혔다. 향후에 나올 수 있는 잡음을 미리 차단하려는 듯 했다. "그동안 증권사들은 대규모 자금을 앞세워 애널리스트들을 끌어왔습니다. 하지만 좋은 효과를 낸 기업은 거의 전무합니다. 돈을 매개로 사람을 충원하는 건 좋지 않습니다. 현대차IB증권 역시 일정 수준의 사람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대규모로 뽑을 계획은 없습니다. 6~7명의 핵심 인원과 3~4명의 부수적인 인원이면 될 것 같습니다. 이 정도면 중요한 섹터는 다 커버할 수 있습니다." 이종우 센터장은 오는 5월 중순까지 인력 구성을 마무리할 계획이다. 이종우 센터장은 자신만의 애널리스트 평가 기준을 만든 뒤 이를 기초로 애널리스트 영입에 나설 예정이다. "중소형 회사에 있으면서도 상당한 실력을 갖춘 이들이 많습니다. 일단 이들을 꼼꼼히 살펴볼 계획입니다. 현대차IB증권이 아직 초기인만큼 엄청나게 고생해야할테니 성실성과 실력은 필수입니다." 현대차IB증권엔 현재 주니어 애널리스트를 포함해 10명의 애널리스트가 있다. 10여명을 충원한다해도 경쟁사들에 비해 인력 면에서 뒤질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 이에 대해 이종우 센터장은 `초기이니만큼 당연히 엄청나게 고생해야한다`고 강조한다. "삼성그룹에 인수됐던 국제증권이나 미래에셋증권도 처음에는 엄청나게 고생을 했습니다. 특히 미래에셋증권은 7~8년전에 2~3명의 인원이 모든 것을 다 해야했습니다. 우리도 그래야죠. 당분간은 고생해야합니다." 그는 모회사가 현대차그룹인만큼 자동차와 철강 등의 분야에선 최고가 되고 싶다고 강조했다. 일단은 `현대차IB증권은 자동차와 철강을 잘 보더라`란 말을 듣는 것이 목표다. ◇"이곳에서 나의 꿈을 이루고 싶다" 이 센터장이 현대차IB증권에 온 것은 현대차그룹이 자신의 꿈을 이루게끔 도와줄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저는 업계 25개 중 22위였던 국제증권이 삼성그룹에 인수된 후 1위로 올라서는 것을 지켜본 사람입니다. 그룹의 규모, 잠재력은 무시할 수가 없습니다. 처음부터 시작해서 1등을 만드는 것이 제 마지막 꿈입니다." 이 센터장은 지난 20년동안 리서치 업무에 종사해왔다.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20년 동안 스트래티지스트로서 명성을 날렸고 매년 고연봉을 받아왔다. 리서치헤드도 리서치센터장도 남 부럽지 않게 해봤다. 그에게 남은 꿈은 자신의 손으로 1등 리서치센터를 만드는 것이다. "리서치 일을 하는 사람들 중에 나이순으로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갑니다. 리서치센터장으로만 8년을 일했죠. 20년을 해온만큼 만들고 싶은 꿈이 있습니다. 좋은 조직을 만들고 싶습니다.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교보증권보다는 현대차IB증권이 그 꿈을 이루기에 적합합니다. 교보증권이 작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나오는 매각설이 부담이었습니다." 이 센터장은 현대차IB증권의 미래를 상당히 높게 평가했다. "향후 몇년간 중소형 증권사들을 중심으로 업계가 재편될 것입니다. 혹독한 경쟁을 거쳐 경쟁력을 갖춘 곳만 살아남겠죠. 현대차IB증권은 모회사의 강점과 연계된 많은 사업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자체 경쟁력을 강화한 후 해외시장에 뛰어들 겁니다. 성공 가능성은 아주 높습니다. 전 나중에 업계 1위가 된 현대차IB증권의 초석을 이종우가 만들었다는 말을 듣고 싶습니다."▶ 관련기사 ◀☞현대차IB증권, 제네시스 경품 퀴즈 이벤트 실시
2008.04.16 I 안재만 기자
신해철-호란-정재형 연이어 책 출간...가수들의 작가 데뷔 '눈길'
  • 신해철-호란-정재형 연이어 책 출간...가수들의 작가 데뷔 '눈길'
  • ▲ 가수에서 작가로 변신한 신해철-호란-정재형[이데일리 SPN 양승준기자] 가수들이 최근 연이어 책을 발간하며 작가로 변신해 눈길을 끈다. 그룹 ‘넥스트’의 신해철과 ‘클래지콰이’의 호란, 정재형이 바로 그 주인공. 평소 거침없는 입담으로 화제가 된 신해철은 지난 3월 인터뷰 전문작가 지승호씨와 손잡고 ‘쾌변독설’을 출간했다. ‘쾌변독설’은 대마초 문제, MP3 문제 등 사회, 문화 이슈 등에 대한 신해철의 평소 생각을 인터뷰 형식으로 담아낸 책. 신해철은 책을 발간하고 최근 독자들과 가진 저자와의 만남에서 “자신의 말이 신문이나 방송 등 미디어의 편집 과정을 거치며 왜곡된 부분이 있어 온전하게 나의 생각을 전하고자 책을 출간하게 됐다”고 출판 이유를 전한 바 있다. 최근 ‘이바디’란 프로젝트 밴드 활동을 통해 어쿠스틱 음악에 새롭게 도전하고 있는 클래지콰이의 호란도 3월 중순경 산문집 ‘디카포’를 내놓았다. EBS ‘책 읽는 여자, 밑줄 긋는 남자'의 진행과 '맨즈헬스'의 북 칼럼니스트로 활동한 호란은 평소 책 읽기와 글쓰기에 많은 애착을 보였던 가수 중 한 명. 호란은 독서광답게 ‘디카포’ 첫 챕터에 자신이 감명깊게 읽었던 앤 패디먼 작가의 ‘서재 결혼 시키기’ 등 33권에 대한 서평과 자신이 즐겨듣는 음악에 대한 감상 그리고 개인사에 대한 고백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특히 호란은 이 책에서 “소아마비로 인해 다리를 저시는 어머니에게 어렸을 적 펭귄이란 별명을 지어드린 적이 있는데 지금 생각하면 참 가슴 아픈 일”이라고 고백하며 어머니에 대한 애뜻한 사랑을 표현해 독자들에게 감동을 안기기도 했다. 6년만에 솔로 3집 앨범 ‘포 자클린’으로 돌아온 가수 정재형은 이달 중순 ‘파리 토크’란 에세이집 출간을 앞두고 있다. 지난 1999년 그룹 베이시스를 해체하고 돌연 프랑스 파리로 음악 유학을 떠난 정재형은 이 책에서 파리에서의 보낸 9년간의 추억들을 글과 자신이 직접 찍은 사진으로 엮었다. ‘파리 토크’에서 정재형은 유학 생활 동안 파리 곳곳을 돌아다니며 발견한 자신만의 아지트 소개와 일상에 대한 철학적 단상, 그리고 유희열, 김동률, 엄정화 등 친한 지인들과의 에피소드를 글로 풀었다. 정재형은 패션지인 마담 피가로에 6개월 정도 글을 기고하기도 했으며, 최근 이데일리 SPN과의 인터뷰에서는 “글을 쓰는 것을 좋아해 책을 내는 것이 꿈이었다”며 “이번 책 발간으로 꿈을 이루게 됐다”고 책 발간에 대한 소박한 감상을 전하기도 했다. ▶ 관련기사 ◀☞신해철, "한국 교육 현실 참담"...24시간 학원 허용, 진성고 문제 비판☞신해철, "책 낸 이유? 토막난 내 의견 제대로 전달하고파"☞신해철, "내가 소수의견? 난 상식을 말했을 뿐"☞정재형, "12년지기 엄정화, 싸움 한번 한 적 없는 궁합 잘 맞는 친구"☞'이효리와 듀엣' 정재형, "그녀는 역시 프로...감탄"
2008.04.15 I 양승준 기자
'1박2일'의 아이콘! '은초딩' 은지원과 '허당선생' 이승기
  • [스타n스타①]'1박2일'의 아이콘! '은초딩' 은지원과 '허당선생' 이승기
  • ▲ KBS 2TV '해피선데이' '1박2일'의 재간둥이 '은초딩'과 '허당승기'(사진='1박2일' 신효정 PD 미니홈피)[이데일리 SPN 김용운기자] 딱히 정해진 틀은 없다. 여섯 명의 남자들과 한 마리 개는 자신들의 집을 떠났다가 돌아올 뿐이다. 굳이 정해져 있는 것을 찾자면 그 기간이 '1박2일'이라는 점이다. 그들의 짧은 여정은 단순하고 유치하다. 먹을 것과 잠자리 때문에 아옹다옹 하는 그들은 오직 생존(?)을 위해 이합집산을 거듭한다. 도시를 벗어나 야생으로 떠난 그들의 1박2일간 생존기가 현재 예능프로그램의 대세를 장악하고 있는 KBS 2TV ‘해피선데이-1박2일’이다. MBC '무한도전'의 아류라는 초기의 비난에서 어느덧 자유로워진 '1박2일'은 현재 야생버라이어티 프로그램이라는 타이틀을 앞세워 시청자들에게 남다른 재미를 선사하고 있다. 강호동을 비롯해 김C, 이수근, MC몽, 은지원, 이승기 그리고 국민견(犬) 상근이는 매 주말마다 전국 각지를 돌며 자신들의 성격과 일상의 모습을 시청자들에게 꾸밈없이 전달한다.시청자들은 여섯 명의 남자들 가운데 특히 은지원과 이승기에게 주목한다. 어느새 자신들의 이름 앞에 ‘은초딩’과 ‘허당선생’이란 별명이 자연스러워진 두 남자는 ‘1박2일’을 통해 무대 위에서 보여줬던 모습과는 180도 다른 모습을 이 코너를 통해 선보이고 있다. 1990년대 후반 젝스키스라는 아이들 그룹의 리더였던 은지원과 2004년 귀공자 타입의 미소년 가수로 데뷔해 숱한 누나들을 설레게 했던 이승기는 어느새 ‘1박2일’의 아이콘으로 부상해 프로그램의 인기를 견인하고 있다. ◇ 은지원, '여섯 개의 수정'에서 '초딩의 대명사'로 초등학생처럼 유치하고 천방지축이란 의미에서 ‘은초딩’이라 불리는 은지원은 1978년생이다. 우리나라 나이로 하면 서른 한 살. 즉 은지원의 동갑내기 중 교육대학을 바로 졸업하고 초등학교 교사가 되었으면 대략 7년차에서 8년차의 경력을 쌓았을 나이다. 하지만 지금 초등학생들 중에 은지원을 보며 자신의 담임선생님과 같은 나이임을 짐작할 수 있는 어린이들은 몇 명이나 될까? 은지원은 1997년 독일어로 여섯 개의 수정이라는 의미의 아이들 그룹 ‘젝스키스’의 리더로 연예계에 데뷔했다. 당시 ‘젝스키스’는 아이들 그룹의 선두주자였던 H.O.T와 함께 가요계의 양강 구도를 구축하며 십대 팬들의 환호를 한몸에 받았다. 당시 은지원의 이미지는 다소 무표정한 얼굴에 거친 댄스를 소화해 내는 카리스마 넘치는 모습이었다. 남성적인 이미지를 풍기는 세 명을 블랙키스로, 깜찍하고 귀여운 이미지의 세 명을 화이트키스로 나뉘어 이미지 메이킹 했던 젝스키스에서 은지원은 이재진, 김재덕과 함께 블랙키스로 분류됐다. 젝스키스는 이후 4년 정도의 전성기를 구가한 뒤 2000년 5월 공식기자회견을 통해 해체를 선언한다. 해체 선언문을 읽는 일도 리더 은지원의 몫이었다. 젝스키스의 해체 이후 은지원이 선택한 것은 힙합이었다. 댄스가수로 분류되던 그가 힙합을 들고 나왔을 때 가요계 반응은 냉담했다. H.O.T의 문희준이 로커를 자임하며 등장했을 때 수많은 안티 팬이 생겨난 바 있다. 하지만 이는 그만큼 문희준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높다는 방증이기도 했다. G라는 예명으로 래퍼에서 힙합전도사로 나선 은지원에게 문희준의 안티팬들은 차라리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이렇듯 은지원은 솔로 독립 이후 뮤지션의 길을 택했지만 젝스키스 때의 인기를 회복하지는 못했다. 차츰 대중들의 기억 속에 잊혀지던 은지원은 2003년 SBS ‘일요일이 좋다-엑스맨’의 출연과 이후 강호동의 '천생연분' 등을 통해 예능프로그램 게스트로 숨겨졌던 감각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 이승기, '누나들의 로망'에서 '허당선생'으로 1987년생인 이승기는 2004년 고등학생 신분으로 데뷔곡 ‘내 여자니까’로 단숨에 누나들의 로망으로 떠올랐다. 당시만 해도 이승기의 상품성(?)은 가수에 집중되어 있었다. 이승기의 1집 앨범 ‘나방의 꿈’을 프로듀싱한 싸이는 이승기 홈페이지에 “이승기 군의 노래를 듣는 순간 직감적으로 끌렸습니다. 다듬어지지 않는 듯 투박하면서도 그 속에 잔잔히 다가오는 감성 터치가 제 마음을 움직였습니다”고 밝힐 정도였다. 이랬던 이승기가 예능 프로그램의 블루칩으로 떠오르리라 예상했던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물론 이승기는 지금도 가수로서 왕성하게 활동 하고 있다. ‘1박2일’에서도 2집 앨범의 홍보를 위해 자신의 노래를 서슴없이 부르는 그의 모습이 낯설지 않다. 하지만 이제 이승기는 누나들의 마음을 흔들던 귀공자 가수 이미지가 아닌 '허당선생'으로 널리 그 이름을 떨치게 됐다. 이승기가 ‘1박2일’ 내에서 헛일과 허탕을 일삼으면서도 자기고집을 피우는 모습을 보고 김C가 붙여준 호 ‘허당’은 현재 ‘은초딩’과 함께 ‘1박2일’이 만들어낸 고유명사처럼 쓰이고 있기도 하다. 가수 데뷔 후 연기자로서도 재능을 보이고 있는 이승기는 드라마 속에서도 모범생과 귀공자 이미지가 강했다. 극중에서 철없고 귀여운 모습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1박2일’에서 만큼은 아니었다. 예컨대 강호동과 이수근은 본업이 개그맨이기 때문에 ‘1박2’일에서 망가지는 모습이 시청자들에게 낯설지 않다. 김C는 특유의 능청스러움과 여유로움으로 다른 프로그램에서 보여주는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게 ‘1박2일’에 적응했다. MC몽과 은지원도 이전부터 여러 예능 프로그램을 통해 자신의 이미지를 구축하고 ‘1박2일’에 합류했다. 그러나 애초 노홍철의 빈자리를 대신 한 이승기에게는 그런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덕분에 ‘누나들의 로망’이었던 이승기의 ‘1박2일’ 속 모습은 파격적이었고 신선하게 다가왔다. 점진적 변화 없이 단숨에 이미지가 달라져서다. ◇ ‘1박2일’ 집안의 문제아들, '은초딩'과 '허당선생' 은지원과 이승기는 아홉 살 차이가 난다. 쉽게 말해 은지원이 무대 위에서 젝스키스의 리더로서 카리스마를 뿜어내고 있을 때 이승기는 초등학생이었다. 그러나 ‘1박2일’에서 은지원과 이승기의 나이차는 그야말로 숫자에 불과하다.(사실 ‘1박2일’ 내에서 모든 멤버들 간의 나이차가 무의미하긴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박2일’의 구성을 보면 묘하게 한 가정의 모습과 겹친다. ‘1박2일’ 내에서 강호동은 특유의 카리스마로 구심점이자 때로는 다른 멤버들의 공공의 적이 되어 프로그램의 중심을 잡고 있다. 일종의 아버지 역할이다. 김C는 MC몽이 엄마라고 부르는 것처럼 외모와 배치되는 모성애(?)로 멤버들을 다독거린다. 이수근은 마치 집안에서 눈칫밥 먹는 백수 삼촌처럼 다른 멤버들과 묘하게 겉돌면서도 툭툭 치는 웃음을 선사한다. MC몽은 삼형제 중 둘째처럼 형 은지원과 동생 이승기 사이에 갈피를 잡지 못해 김C에게 늘 투정을 부린다. 이런 역학관계에서 은지원과 이승기는 자연스럽게 한 쌍의 콤비처럼 시청자들에게 다가 섰다. 둘은 종종 가당치도 않은 것으로 고집을 피우며 초등학생들처럼 유치하게 싸우기를 반복한다. 은지원은 한참 동생인 이승기에게 사소한 것쯤 하나는 져줄 법도 한데 매번 승부욕을 불태운다. 이승기 또한 마찬가지다. 은지원 앞에서 자신의 의견을 수그리기보다 관철시키기 위해 눈에 힘을 주는 경우가 많다. 그렇지만 이들의 다툼에는 특별한 악의가 없다. 앞에서 투닥 거리다가도 뒤에서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한 팀을 이루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러한 은지원과 이승기의 관계는 ‘1박2일’의 내부적인 역동성을 부여하며 ‘1박2일’ 전체적인 하모니에 액센트를 부여하고 있다.  ‘1박2일’ 제작진의 한 관계자는 “출연자들 가운데 둘의 성격이 가장 비슷한 점이 많다”며 “둘 다 낯을 가리는 성격인 데다 하나에 집중하면 다른 것을 잘 보지 않는 점에서 닮았다”고 밝혔다. ◇ 은초딩과 허당선생의 앞날은?최근의 추세로 보면 당분간 은지원과 이승기는 ‘1박2일’의 인기와 함께 대중들에게 환호를 받는 스타의 위치를 확고히 할 것으로 전망된다. 그러나 은지원과 이승기가 언제까지나 1박2일의 ‘은초딩’과 ‘허당선생’으로 연예계 생활을 할 수는 없다. 그들의 본분과 시작은 가수였기 때문이다. 젝스키스 해체 뒤 힙합의 외길을 걸어왔던 은지원은 힙합뮤지션으로서 평가를 받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은지원의 음악을 좋아했던 팬들은 최근 ‘은초딩’으로 초등학생들과 동일시 되어가고 있는 은지원의 모습에 안타까움을 나타내기도 한다. 행여 은초딩의 이미지가 그가 이룬 음악적 성취까지 폄하하지 않을까 싶어서다. 실제로 은지원은 젝스키스 시절에도 작곡 실력을 뽐냈고 솔로로 독립한 이후 대부분의 앨범에서 자신이 직접 곡을 쓰고 가사를 붙였다. 이승기는 ‘1박2일’에서 거의 유일하게(?) 자신의 출발이 가수임을 망각하지 않으려 애 쓰는 모습으로 웃음을 주고 있다. 제작진 사이에서 이승기의 또 다른 별명은 '홍달이'다. 홍보의 달인을 줄여서 만든 별명만큼 이승기는 시시때때로 자신의 노래를 부르며 앨범홍보에 적극적이다. 그만큼 가수에 대한 애착이 크다는 증거다.  예능프로그램은 당대의 대중들에게 웃음과 즐거움을 주지만 훌륭한 뮤지션은 당대 뿐만 아니라 후대의 대중들에게까지 감동을 안긴다. 그 지점이 예능프로그램에 출연하고 있는 가수들의 본질적인 고민이기도 하다.현재 은초딩과 허당선생 이미지는 본인들에게 대중적인 인지도와 인기를 안겨주고 있지만 그들의 출발과 정체성은 엄연히 가수다. 예능프로그램의 뛰어난 엔터테이너가 아닌 한국의 대중가요사에 족적을 남길 가수로서의 꿈을 그들은 가지고 있다.문제는 그때까지 대중들에게 잊혀지지 않는 존재로 꾸준하게 활동 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그들이 진정 헤쳐나가야 할 곳은 오지의 여행길이 아닌 스스로의 가수인생이다. 그리고 가수로서 그들의 앞날이 지금의 대한민국 가요계에서 '1박2일'의 여행길보다 더 험난할 것임에 분명하다.  ▶ 관련기사 ◀☞[스타n스타③]포스트 '은초딩'과 '허당선생'은 누구?☞[스타n스타②]'1박2일' 담당PD가 본 은지원과 이승기☞[스타n스타①]'숙명', '친구' 신화 이을까?...같지만 다른 남자들의 세계☞[스타n스타①]유인촌vs이창동...발로 뛰어온 현장형 장관, 색깔이 다르다☞[스타n스타①]'살인의 추억’vs‘추격자’...닮은 듯 다른 한국형 스릴러
2008.04.15 I 김용운 기자
데뷔 40주년 맞은 조용필 '40년? 그거 숫자에 불과해요'
  • 데뷔 40주년 맞은 조용필 '40년? 그거 숫자에 불과해요'
  • ▲ 고교 시절 외국 음악의 영향으로 기타를 처음 잡은 조용필이 데뷔 40주년을 맞았다. 끊임없이 자신을 단 련시켜 최고의 뮤지션 자리에 오른 그는“최고의 비 결 같은 것은 없다. 오로지 연습, 연습뿐이다”라고 말했다.[조선일보 제공] 폭우 속 수만 관객 붙드는 마력의 소유자 90년대 초, 25억원 짜리 밤무대도 거절 고3 때 '비틀즈'에 빠져 가출… 음악 독학"내 모든 것은 관객의 힘… 관객이 기뻐하면 그렇게 힘이 날 수가 없어""2003년 35주년 기념 공연, 인생에서 승리한 내 생애 최고의 날이었지" 데뷔 40주년을 맞은 조용필(58)을 지난 4일 서울 역삼동 한 음식점에서 만났다. 금요일 오후 강남은 자동차 지옥이다. 그 지옥을 빠져나와 식당에 도착하니 환갑을 눈앞에 둔 가왕(歌王)이 먼저 도착해 숯불에 등심을 굽고 있었다. 조용필은 3시간 공연을 히트곡으로만 채울 수 있는 대한민국 대표가수다. 국내 최초로 음반 판매량도 1000만 장을 넘겼다. 올림픽 주경기장을 채운 4만5000여 관객을 폭우 속에 꼼짝 못하게 가둬둘 수 있는 마력(魔力)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기자는 2002년부터 조용필과 알고 지내왔다. 조용필 역시 기자를 동생처럼 대했다. 인터뷰를 시작하기에 앞서 이번 인터뷰를 '공적인 것'으로 만들 필요가 있었다. ―오늘은 공식 인터뷰니 그간 물어보지 못한 것을 물어볼 겁니다. "무슨 소리야? 그런 게 뭐가 있어?" ―데뷔 40주년 인터뷰니까 그동안 못 듣고 못 쓴 얘기를 좀 해주시죠. "물어보세요, 뭐든지. 허허허." 긴장을 만들어보려는 수작을 그는 허허실실 넘겼다. ―이런저런 '신화'가 많습니다. 예전 어느 나이트클럽에서 엄청난 개런티를 주겠다고 했는데 거절한 적도 있다면서요. "아, 그거? 90년대 초쯤인가, 30회 출연에 25억원 주겠다고 했지. 그때 한 이틀 갈등을 했던 게 사실이에요. 액수가 워낙 크니까. 그렇지만 당시 밤무대는 물론이고 방송도 일절 않겠다고 선언을 했기 때문에 불가능한 일이었어. 공연만 하겠다고 결심한 뒤 밤무대에 서는 건 나를 배신하는 거지." 한 회 출연에 서너 곡 부르고 내려오는 나이트클럽 무대는 당시로선 많은 가수들의 주요 수입원이었다. 90년대 초 개런티로 25억원이면 요즘 시세로 50억원을 훨씬 넘는다는 게 음악계 사람들의 말이다. 그 당시 조용필은 전국 체육관 공연을 시작했는데 생각보다 관객이 적었다고 했다. 그는 "어떤 도시에 가면 관객이 절반밖에 차지 않았다. 히트곡도 많고 인기도 있는데 왜 객석이 차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잠이 안 왔다"고 했다. 그런 불면(不眠)을 뚫고 온 거액의 밤무대 스카우트 제의를 그는 냅다 차버린 것이다. 최고가 되기 위해 지켜야 할 것이 무엇인지 알았던 것이다. 예술가들이 대개 그렇듯 조용필은 자신을 최고의 음악인으로 여긴다. 스스로 그렇게 말한 적은 없으나 음악을 대하는 그의 태도를 보면 알 수 있다. 물론 그 자부심은 천재적인 자신의 음악성에 뿌리를 두고 있다. 조용필은 악보를 한 번 보면 노래를 부르고, 어떤 노래든 한 번 들으면 바로 악보를 그리는 재능이 있다. 공연기획사 서울기획 이태현 사장의 증언이다. "일본에 처음 진출했을 때였어요. 그때 외국 가수가 NHK에 출연하려면 일본 노래 한 곡을 부르는 게 관례였지요. PD가 일본 노래 악보와 카세트테이프를 가져왔는데 조용필씨가 노래를 딱 한 번 듣더니 '이건 필요 없다'며 테이프를 돌려주는 거예요. 그때 일본인 PD의 표정을 잊을 수가 없어요. 저 사람이 그렇게 대단한 사람인가 하는 놀람과 과연 한 번 듣고 노래를 잘 부를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뒤섞인 얼굴이었죠. 물론 그 노래는 기막히게 잘 불렀습니다." ―초견(初見)에 악보를 읽지 못하고, 초청(初聽)에 악보를 쓰지 못하면 뮤지션으로 인정하지 않으시죠? "그런 건 아니야. 세계적으로 훌륭한 뮤지션 중엔 악보를 전혀 읽지 못한 사람도 많았어요. 그렇지만 그들이 악보를 읽거나 쓸 수 있었다면 더 훌륭한 음악을 만들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은 해." 경동고 3학년이던 1968년 조용필은 '벤처스'와 '비틀스'에 빠져 살았다. 결국 "음악을 하겠다"며 가출해 미군 클럽에서 활동하기 시작하면서 화성학(和聲學)을 독학했다. 종이를 기다랗게 이어 붙여 건반을 그려 넣은 '종이 피아노'로 음계와 화성을 깨우쳤다. 음악에 대한 조용필의 자부심이 워낙 강하다 보니 주변에서 '금기 질문' 중 하나로 꼽는 게 있다. 조용필을 '한국 록의 대부' 신중현과 비교하는 투의 질문을 싫어한다는 것이다. 그는 그러나 의외의 대답을 했다. ―신중현씨 음악을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정말 훌륭한 음악이지. '노란 샤쓰의 사나이'가 나왔을 때, 이게 컨트리인지 뭔지 잘 모르겠는데 지금까지 오고 있잖아. 신중현씨가 작곡한 김추자와 펄시스터즈 노래들은 정말 훌륭하다고 생각해. 그 당시에 누가 그런 음악을 하려고 했어." ―그런데 왜 신중현씨와 관련된 질문을 싫어한다는 말이 나오나요. "싫어한 적 없어요. 다만 나와는 음악 색깔과 정서가 달라. 물론 근본적으로는 같지. 추상적인 감정을, 사랑과 기쁨, 슬픔을 음악으로 만들어 내고 뿌리가 록 음악에 있다는 것이 같아요." 그의 40주년 기념 공연(문의 1544-1555)은 5월 24일 잠실 올림픽주경기장에서 열린다. 그 다음 주말 대전을 시작으로 전국 투어가 시작된다. 화제는 자연스레 지난 2003년 폭우 속에서 벌어진 35주년 공연으로 이어졌다. "이건 정말 처음 하는 얘기야. 공연 마지막에 트랙을 한 바퀴 돌았잖아. 그때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 '나는 승리했다. 내 인생에서 승리했다.' 그 감동은 아무도 몰라. 내가 음악을 한 이래 최고의 날이었어요. 평양 공연도 아니고 그날이 최고였어." 이 말을 할 즈음 조용필은 소주를 몇 잔 넘긴 상태였다. 기자는 엄두를 내지 못했던 질문을 해야 했다. 바로 그의 첫 결혼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는 최정상의 인기를 누리던 1984년 3월 박지숙씨와 느닷없이 결혼을 했으나 3년 뒤 이혼했다. ―박지숙씨와의 결혼의 실체에 대해서 정확하게 말씀하신 적이 없죠? "그건 나중에 내 회고록에 써야 할 내용이야." ―결혼식에 하객도 없고 기자만 잔뜩 있었잖아요. 뭔가 사연이 많은 것 같은데요. "나는 그게 결혼식인 줄도 모르고 갔었어." ―그럼 '이런 결혼식은 안 한다'고 했어야 할 것 같은데…. 표정이 약간 굳어진 조용필이 말했다. "그때는 매스컴이 너무나 무서웠어." ▲ 지난 9일 서울 서초동에 있는 연습실에서 조용필이 혼자 기타를 조율하고 있다. 수만 명씩 모이는 화려한 무대에 서려면 이렇게 고독한 연습을 한 달 이상 해야한다. / 허영한 기자 younghan@chosun.com당시 조용필 나이 서른넷. 연말 방송사 가수왕을 모조리 휩쓸고 6집 '눈물의 파티'를 새로 내놨을 때다. 그 인기 주변엔 어김없이 스캔들로 먹고사는 연예 주간지들이 있었다. 갑작스런 결혼과 그의 일본 진출은 거의 비슷한 시기 이뤄졌다. 그는 이혼 후에 한동안 혼자 살다가 소개로 만난 재미교포 안진현씨와 94년 3월 재혼했다. 미국에서 컨설팅 회사를 운영하던 안씨와 한국에서 활동하는 조용필은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행복하게 살았다. 그러나 2003년 1월 조용필은 다시 한번 아내와 이별했다. 심장병을 앓던 안씨가 갑자기 숨진 것이다. 안씨는 조용필의 선산이 있는 경기 화성에 묻혀 있다. ―요즘도 꿈에서 부인을 보시나요. "요즘엔 안 나타나요. 마누라 가고 나서 한 2년 반쯤은 꿈에 자주 나타났어. 이제 그 사람도 안심이 되나 봐." ―선산엔 자주 가십니까. "요새는 좀 뜸해. 한 달에 한 두 번쯤 가요. 예전엔 일주일에 한 번씩 갔지. 주변에서 너무 자주 가지 말라고 해서…." 2년 전쯤 "조용필이 한 방송인과 사귄다더라"는 소문이 돌았었다. 조용필은 "내가 결혼한다는데?" 하며 웃었고, 그 방송인은 사석에서 불쾌감을 표하기까지 했다. ―다들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랴'는 식으로 받아들이던데요. "나도 애인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애인하고 밥도 같이 먹으러 다니고 그러고 싶어. 중매 선다는 사람도 있고." ―그럼 결혼할 생각이 있긴 하세요. "아니지. (하늘에 있는) 마누라한테 혼나. 이제 혼자 사는 게 편하고." 조용필은 안씨가 저 세상으로 간 후 "앞으로 심장재단을 만들고 죽을 때는 전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겠다"고 했다. 그만큼 아내에 대한 사랑이 깊었던 것이다. 조용필의 5월 공연은 작년 12월 28·29일 체조경기장 공연 후 5개월 만이다. 당시 공연을 마친 조용필은 지인 몇 명과 집 부근에서 뒤풀이를 했다. 피로에 알코올이 겹쳐 녹초가 된 그를 부축하고 집 앞에 당도한 시각이 새벽 2시40분. 골목에 서 있던 승용차 문이 갑자기 열리더니 여자 다섯 명이 뛰어나왔다. 팬들이었다. 이들은 "오빠, 왜 이렇게 술 많이 드셨어요", "건강하셔야 돼요" 하며 울먹였다. 사실 조용필의 팬은 없는 데가 없다. 집 전화번호를 바꾸면 전화국에 있는 팬이 번호를 알아내고 비행기를 타려면 항공사에 있는 팬 때문에 공항에 꽃다발을 든 팬들이 나타난다. 조용필 팬은 끊임없이 자기증식하고 있다. 2004년엔 중3과 고1 학생들로 이뤄진 '광클(광적인 팬클럽)'이 생겼다. 이'어린 팬들' 덕에 조용필은 오랜만에 종이학 수천 마리를 선물로 받았다. ―잊을 수 없는 팬 이야기 좀 해주시죠. "80년대 초 부산 공연을 갔을 때야. 공연 끝나고 호텔에 가서 씻으려고 속옷만 입고 욕실 문을 열었는데, 그 안에서 여자애들이 와장창 쏟아져 나오는 거예요. 한 열 명은 되겠더라고." ―어떻게 거기 있을 수 있죠? "몰라, 그건 나도. 하여튼 내 방에 들어와서 숨어있다가 내가 나타나니까 겁이 나서 그랬겠지." 그는 "팬들이 밤늦게 집 앞에서 기다릴 때는 고맙기도 하지만 걱정도 된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조용필은 "팬들에게 항상 감사한다. 팬이 멀어지면 나는 끝이다"라고 했다. 늘 팬들에 둘러싸여 있을 것 같지만 사실 조용필의 사는 모습은 '외로움'을 연상시킨다. 결국 매일 그가 돌아오는 곳은 혼자 살고 있는 서울 서초구 방배동의 방 다섯 개짜리 빌라다. 그곳에는 사람 대신 운동기구만 가득하다. 그는 매일 아침 이곳에서 빨리 걷기 운동으로 땀을 빼며 하루를 시작한다. 조용필의 스태프를 제외하면 이 집을 드나드는 사람은 출퇴근하며 가사를 돌봐주는 아주머니가 유일하다. 국가대표 축구팀 허정무 감독이 바로 위층에 사는 이웃이다. 그의 집 거실에는 대형 TV가 있지만 조용필은 화면 없이 음악만 틀어주는 위성방송 음악채널을 듣거나 동물 다큐멘터리를 본다. 그는 "복잡하고 시끄러워서 드라마나 쇼는 보지 않는다"고 했다. 차 안에서는 미군방송(AFN)이나 KBS 1FM을 늘 켜놓는다. 이렇게 시간을 보내는 것 외에 몇 안 되는 그의 도락(道樂)은 술과 담배, 싱글 실력의 골프다. 그 가운데 담배는 3년 전 끊었다. 조용필은 '앳킨스'라는 밴드로 데뷔해, '파이브 핑거스', '김 트리오', '조용필과 그림자'를 거쳐 오늘의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을 꾸렸다. 일본 활동 때는 일본인 밴드 이름은 '조용필과 괜찮아요'였다. 18집의 정규앨범을 냈고, 94년에 이미 음반 총 판매량이 1000만장을 돌파했다. "밴드 이름을 '그림자'로 했다가 너무 어둡지 않나 해서 '위대한 탄생'이란 이름을 내가 지었어요. 주변에서 '별로'라고 했는데 '지금은 그런 것 같아도 유명해지면 진짜 좋은 이름'이라고 주장했어. 무지하게 건방질 때였지. 하하." 그는 '건방지다'고 말했지만 그것은 자부심의 겸손한 표현이다. 작사가 양인자씨는 조용필 데뷔 초기인 70년대 일화를 소개한 적이 있다. "방송국 대기실에서 조용필씨를 봤는데, 밴드 멤버 한 명이 늦게 왔어요. 그때 용필씨가 그 사람에게 달려가 사정없이 발로 걷어차면서 소리쳤지요. '정신 차려! 안 그러면 우리 모두 끝이야!'" ―처음 가출할 때 40년이나 음악을 할 거라고 생각했나요. "절대로 생각 못했지. 우리는 비틀스 세대니까 그냥 하고 싶은 건 해야 했을 뿐이지. 모든 게 관객의 힘이에요. 무대라는 게 관객과 음악을 공유하면서 즐거워하는 거잖아. 관객이 기뻐하면 그렇게 좋고 힘이 날 수가 없어." ―데뷔 40년을 맞는 감회가 있을 텐데요. "나는 현재진행형이에요. 한창 음악하고 있는 사람한테 왜 자꾸 40년을 물어봐. 40년은 숫자일 뿐이지." 관객 4만5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이번 공연 티켓은 이미 2만장 가량 팔려나갔다고 한다. 기자가 조용필을 처음 만난 건 2002년 10월이었다. 오후 7시30분 한 일식집에서 시작한 인터뷰는 새벽 3시 그의 집에서 끝났다. 빈 맥주 캔이 40개쯤 됐다. 7시간30분 동안 조용필은 오로지 음악 이야기만 했다. 그는 음악을 좋아하는 기자를 좋게 본 모양이었다. 이후 수시로 "어디 있느냐"는 전화가 왔다. 한 잔 하자는 뜻이었다. 처음엔 "조용필이 부르는데 가봐야지"라고 했던 아내는 그 주기가 짧아지자 "조용필은 친구 없어?"라고 물었다. 그의 주변에 있는 음악인들은 수십 년을 그와 알고 지냈으나 여전히 그를 어렵게 생각한다. 불 같은 성격을 알기 때문이다. 조용필이 오십 줄에 들어선 후배 음악인에게 "네가 음악에 대해서 뭘 알아?" 라고 호통을 치는 걸 본 적도 있다. 그런데도 혼쭐난 후배들은 며칠 뒤면 실실 웃으며 조용필 앞에 나타난다. 그 카리스마를 감당할 수 없을 뿐더러, 조용필과 함께 작업하면 자신들의 음악도 완벽해진다는 것을 그들은 알고 있는 것이다. 국민가수, 가왕, 라이브의 제왕… 그를 부르는 호칭은 많지만, 미당(未堂) 서정주가 칭한 '당대 최고의 명창'이 소박하고 명쾌하다. 30년을 한 세대로 치면, 그는 이미 한 세대를 10년이나 넘겨 여전히 최고의 자리에 서 있다. 그래서 그는 그 어떤 이름보다 '조용필'로 부를 때 가장 정확하게 묘사된다. 조용필이 테이블 건너편에서 "더 물어볼 것 없느냐"고 빙그레 웃으며 잔을 건넸다. ■ 가수 조용필...1950년 3월 21일 경기도 화성군에서 태어난 조용필은 고3이던 68년 미8군 클럽 무대에서 기타리스트로 활동을 시작했다. 곧이어 타악주자 김대환(2004년 작고)의 눈에 띄어 '김트리오' 멤버이자 가수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1980년 정규 1집을 내기까지 다양한 편집음반을 내놓았다. 첫 히트곡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76년 발표했다. 1980년 '창밖의 여자'로 스타덤에 올랐고, 함께 실린 '단발머리'는 당시 국내에서 처음 시도된 전자음으로 충격을 줬다. 1981년 한국 대중가수로는 처음 미국 카네기홀 무대에 섰으며, 1983년부터 일본 NHK 방송에 출연하는 등 해외 진출을 본격화했다. 1990년대 초까지 일본과 미국을 돌며 라이브 무대에 섰고, 그 사이 '촛불' '고추잠자리' '못 찾겠다 꾀꼬리' '친구여' '킬리만자로의 표범' '그 겨울의 찻집' 등 숱한 히트곡을 쏟아냈다. 1993년 방송 출연 중단을 선언한 조용필은 대형 공연장 투어에 나섰다. 라스베이거스와 브로드웨이 쇼를 두루 섭렵하며 무대연출에 공들이기 시작한 것도 이때다. 1999년 대중가수로는 처음 예술의전당 오페라홀에서 3일간 공연한 뒤, 2004년까지 매년 말 예술의전당 무대에 섰다. 특히 2004년 공연은 11일간 연속 매진이었다. 2003년 올림픽 주경기장에서 35주년 공연을 성공적으로 끝낸 그는 2005년 전국 월드컵 스타디움 투어를 전석 매진시키는 괴력을 발휘했다. 현재 40주년 기념공연과 19번째 새 음반을 준비하고 있다.
  • 이재오 "조각배를 함선으로 알고 침몰시켜…"
  • [조선일보 제공] 한나라당 이재오 의원(서울 은평을)이 4.9총선에서 창조한국당 문국현 후보에 패해 낙선한 심경을 토로했다. 이 의원은 지난 10일 홈페이지에 올린 ‘JOY(재오사랑) 회원들께 드리는 첫 번째 편지’에서 “4월 9일은 참으로 서러운 날이기도 했다”며 “정말 고맙다. 달리 할 말이 없다”고 했다. 이 의원은 “세상은, 민심은 우리의 뜻대로만 되지 않는 것,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면 받아들여야 한다”며 “이제 지난 일은 옛일로 돌려버리자”고 낙선 심경을 털어놨다. 이 의원은 “텅 빈 유세차를 아들과 타고 낙선인사를 돌았다. 그렇게도 참고 참았던 눈물이, 시장노점상들이 손을 흔들면서 격려할 때 그냥 쏟아졌다”며 “그러나 어쩌랴, 이것이 민심인 것을, 성난 민심의 바다는 사실은 조각배인데 거대한 함선인 줄 알고 침몰시켜 버렸는데…”라고 했다. 그는 향후 행보와 관련,“‘정치인의 길을 걸을 것이냐, 자연인의 길을 걸을 것이냐’ ‘낙향해서 정치와 단절하느냐, 재기를 도모하느냐’ 결론이 나지 않았다”면서 “내 마음 속에 조그만 아집도, 다 벗어 던지겠다. 인간 이재오 그대로 남겠다”고 말했다. -다음은 이 의원이 홈페이지에 올린 편지 전문4,300여 JOY 회원들께 드리는 첫 번째 편지사랑하는 JOY 회원여러분,4월 9일은 참으로 서러운 날이기도 했습니다.정말 고맙습니다. 달리 할 말이 없습니다.낯선 골목골목 어귀에 밤늦도록, 새벽 일찍, 서 있는 모습들을 보면서 내가, JOY에게 무엇일까? 내가 저 귀한 한분 한분들께 과연 무엇을 줄 수 있을까?생각을 함께 한다는 것, 누군가를 주체로 세워 나라를 더욱 새롭게 만들겠다는 것,서럽고, 가진 것 없는 이웃들과 함께 좋은 세상 만들어 보겠다는 것,그것 하나만으로 JOY를 만들고, 먼 제주도에서 강원도까지,곳곳에서 모여든 4,300여의 재오사랑, 나에겐 하나같이 귀한 분입니다.아! 그러나,세상은, 민심은 우리의 뜻대로만 되지 않는 것,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면 받아들여야 합니다.이제 지난 일은 옛일로 돌려버립시다.우리가 걸어온 길이 어떤 길이었든, JOY가 있어 세상은 조금씩 좋아진다는 진실을 믿고어제는 과거이고, 과거는 빨리 털어버릴수록 미래에 대한 꿈과 도전이 힘을 받습니다.텅 빈 유세차를 아들과 타고 낙선인사를 돌았습니다. 그렇게도 참고 참았던 눈물이, 시장노점상들이 손을 흔들면서 격려할 때 그냥 쏟아졌습니다.은평에 들어온 지 40년, 국회의원을 한 지 12년, 자전거로 골목을 누빈 지 15년, 눈물방울 속에 그대로 녹아났습니다.그러나 어쩌랴,이것이 민심인 것을, 성난 민심의 바다는 사실은 조각배인데 거대한 함선인 줄 알고 침몰시켜 버렸는데,세상을 살만큼 살았고, 12년간의 정치라면 결코 짧지도 않습니다.정치 입문 12년 만에 정권도 교체했고, 대통령도 만들었습니다.내 역할이 여기까지인지,아직 역할이 남아있는지,이제는 JOY님들이 판단할 때입니다.삼베옷에 맥고모자 쓰고 몇 평의 땅을 구해서 땅과, 바람과, 하늘을 벗 삼아 살고도 싶습니다.청풍이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한다사랑을 버리고,미움도 버리고,살다가 가라 한다는 글귀가 생각났습니다.오늘 아침에는 자전거를 타고 불광천을 지나 한강을 따라 행주산성까지 혼자 다녀왔습니다. 자전거 위에 비친 한강은 변함없이 흘렀습니다.밤사이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개나리, 진달래만 더욱 고왔습니다.정치인의 길을 걸을 것이냐?자연인의 길을 걸을 것이냐?결론이 나지 않았습니다.낙향해서 정치와 단절하느냐,재기를 도모하느냐?결론이 나지 않았습니다.내 마음 속에 조그만 아집도, 다 벗어 던지겠습니다.인간 이재오 그대로 남겠습니다.JOY 회원들의 의견을 듣겠습니다.텅 빈 유세차가 지역구를 짧게 한 바퀴 돌아 왔습니다.세 번씩이나 저를 키워서 정권교체를 하도록 도와준 지역구민들께 깊은 감사를 드리고JOY 회원들께도 한없는 애정을 보냅니다.우선 오늘은 첫 편지를 드립니다. 감사합니다.
''대박의 꿈'' 10대(代) 쇼핑몰 창업 "중고생 사장님 최소 1만5천명"
  • ''대박의 꿈'' 10대(代) 쇼핑몰 창업 "중고생 사장님 최소 1만5천명"
  • [조선일보 제공] 경기도 안산시에 있는 모 고교의 3학년 최모(18)군은 상표법 위반과 소비자보호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로 검찰이 불구속 기소하는 바람에 수원지법에서 재판받을 날짜를 기다리고 있다. 최군은 6개월 전까지만 해도 인터넷상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던 G인터넷쇼핑몰의 '10대 사장님'이었다. 그는 지난해 4월 인터넷쇼핑몰을 열고, 버버리·나이키·아디다스 등 유명 브랜드의 '짝퉁' 옷과 신발을 팔았다. 쇼핑몰을 연 지 6개월 만에 2만여 점, 4억6000만원어치 매출을 올릴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최군이 인터넷상에서 '성공한 10대 사장'으로 한창 이름을 날리던 지난해 10월, 안산단원경찰서 형사들이 최군이 사무실로 사용하던 방으로 들이닥쳐 최군을 현행범으로 체포했다. "외국 유명 브랜드를 도용해 상표법을 위반했다"는 이유였다. 최군은 "물건을 사는 사람들에게 '짝퉁'인 것을 알리고 팔았는데 왜 죄가 되느냐"고 항변했지만, '짝퉁'을 파는 것 자체가 범법행위인 것을 몰랐던 것이다. ▲ 지난 3월 28일 오후 서울 동대문구 신평화시장에서 고등학교 학생들이 쇼핑몰에서 판매할 아이템을 고르기 위해 사전조사를 벌이고 있다. /이태경 기자 ecaro@chosun.com ◆10대 '대박' 꿈, 자칫하면 악몽으로 인터넷과 몇몇 TV 프로그램에서 10대들의 쇼핑몰 창업 성공기가 소개되면서 '대박'의 꿈을 좇는 10대들이 적지 않다. 자사(自社) 홈페이지에서 개인 쇼핑몰을 무료로 개설해주는 솔루션 업체 '카페24' 한 군데에 등록된 10대 쇼핑몰 운영자만 5200여명. 'G마켓'이나 '옥션' 등에 개설된 것까지 합치면 '10대 사장'이 최소한 1만5000여 명이 넘을 것이라고 쇼핑몰 창업컨설팅 업계에서는 추산한다. 그러나 10대 쇼핑몰 운영자들 중에는 상거래 관련 법규를 몰라 무심코 범한 실수로 범법자로 전락하거나, 사기 피해를 입는 경우가 많다. 쇼핑몰 운영에 매달리다, 학교 생활에 큰 타격을 받는 학생들도 적지 않다. 인천에 사는 이영우(17·고2)군은 영어·수학 등 유명 학원강사의 인터넷 강의 동영상을 녹화해 쇼핑몰을 통해 판매했다가 저작권법 위반으로 처벌받을 뻔했다. 이군이 판매했던 동영상의 저작권자인 학원 강사가 지난 1월 이군을 형사 고소하겠다고 통보해왔기 때문이다. 이군은 그 학원 강사에게 동영상 판매금액보다 더 많은 합의금을 주고 형사처벌을 면할 수 있었다. 경기도 성남에 있는 모 중학교 3학년생인 김은미(15)양의 경우 지난 5개월 동안 '구제 청바지(빈티지 청바지)'를 파는 쇼핑몰을 운영해오다, 100여 만원 사기를 당하고 최근 쇼핑몰을 닫았다.  김양은 쇼핑몰 사이트를 통해 주문을 받고, 물건 배송은 동대문시장의 한 상인이 맡는 방식으로 운영했다. 그런데 청바지를 주문했던 40여명으로부터 "왜 돈만 받고 청바지를 보내지 않느냐"고 항의가 들어와서 확인해보니, 거래했던 상인이 김양으로부터 돈만 받고 물건을 배송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 상인과 거래 내역을 증명할 서류도 만들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김양이 고객들에게 일일이 환불해줬다. 김양은 "쇼핑몰 운영에 시간을 빼앗겨서 반에서 5등 안에 들었던 성적이 5개월 사이에 20등으로 떨어졌다"며 "쇼핑몰 운영이 공부와 병행하기엔 너무 벅차 쉽게 뛰어들 일이 아니라는 걸 뼈저리게 느꼈다"고 말했다. ◆"미성년자 쇼핑몰엔 법정 대리인 필요" '10대 사장'의 꿈을 좇다가, 덫에 빠지는 학생들이 적지 않지만 10대들의 쇼핑몰 창업에는 사실상 아무런 규제장치가 없다. 인터넷상에서 무료로 쇼핑몰을 설치해주는 업체도 있고, G마켓이나 옥션 등에서도 1만2000원만 내면 개인 온라인 상점을 열 수 있다. 사업자등록을 할 때 나이 제한도 없기 때문에 인터넷 사용에 능숙한 10대들이 너도 나도 뛰어들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10대들은 전자상거래 관련 법의 '청약철회'(소비자가 물품을 구입한 뒤 마음이 변하거나 물건이 마음에 안 들 때 14일 이내 계약을 취소할 수 있도록 한 제도) 조항 등 관련 법규에 대한 지식이 거의 없어, 고객의 환불·교환 요구에 응하지 않거나 고객과 다투면서 법적인 문제로 비화되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경기도 화성 삼괴고등학교의 비즈쿨 담당 이난희(여·49) 교사는 "중·고등학생들이 극소수의 성공담에 현혹돼 준비 없이 창업에 뛰어들 경우 낭패를 보기 쉽다"며 "인터넷쇼핑몰도 하나의 사업이므로 관련 법규를 꼼꼼히 살피고 프로가 되겠다는 열정이 있어야 성공할 수 있다"고 말했다. 서울특별시 전자상거래센터 정지연 팀장은 "미성년자가 쇼핑몰을 운영할 경우에는 법정대리인의 감독이 뒤따르도록 하는 등의 대책 마련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50년 음악외길, 패티김...또 다른 꿈을 가슴에 품다
  • [그들의 10년은 특별하다⑤]50년 음악외길, 패티김...또 다른 꿈을 가슴에 품다
  • ▲ 패티 김[이데일리 SPN 최은영기자] 가요계의 살아있는 전설 패티김(70). 무대를 압도하는 강렬한 카리스마와 스타로서의 자존심은 세월이 지나도 바램이 없다. 고희의 나이에도 스타는 아름다워야 한다며 절식을 생활화하고 있는 그녀다. 무엇보다 음악에 대한 남다른 열정과 자부심은 그를 영원한 현역가수로 존재케 했다. 지난 3월24일 오전 11시 서울 소공동 웨스틴조선호텔. 가수 패티 김의 음악인생 50주년을 기념하는, 가요사에 길이 남을 행사가 열렸다. 연보라 재킷에 화사한 패턴의 스카프... 패티김은 외모에서부터 활기가 넘쳤다. 어느 누가 그녀를 일흔의 나이로 볼 것인가. 주인공은 그렇게 생기 가득한 모습으로 자신의 가수 인생 50주년을 축하하는 무대에 섰다. 그리고 노래로 자신의 반세기 음악인생을 자축했다. 수많은 취재진이 모인 가운데 울려퍼진 노래는 바로 '마이 웨이'. 무려 반세기 동안 음악이라는 한길만을 꾸준히 걸어온 패티김은 그렇게 노래로 자신의 지난 인생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1958년 미8군 무대에서 시작된 패티김의 노래 인생이 가요계에서 꽃을 피우기 시작한 것도 바로 이날 회견장으로 쓰인 조선호텔에서였다. 패티김은 59년 조선호텔의 사교클럽 전속가수로 활동하며 가요계에 공식 데뷔했다. 1958년 가요계에 데뷔한 패티김은 '9월의 사랑' '가을을 남기고 간 사랑' '초우' '연인의 길' '서울의 찬가' '가시나무새' 등 수많은 노래를 히트시키며 한국을 대표하는 국민가수로 활약해왔다. 패티김과 같은 해에 데뷔한 이미지가 '동백아가씨' '섬마을 선생님' 등을 히트시키며 한국의 전통적 감성을 노래해왔다면 패티김은 도회적 감성을 대표해온 한국 가요사의 대스타로 통한다. 한국인 최초 '리사이틀' 공연 가수, 일본정부의 공식 초청을 받아 NHK 방송국에서 공연한 최초의 한국 가수라는 기록도 가지고 있다. 한국 대중가수로는 최초로 세종문화회관과 미국 카네기홀 무대에도 섰다. 패티김은 이렇듯 반세기동안 늘 개척자로서의 삶을 살았다. 가을 노래가 유난히 많은 데다 매년 가을이면 자신의 단독 콘서트를 열어 '가을의 연인'으로 불리기도 했던 그녀다. 그런 그녀가 데뷔 50주년을 맞아 햇살 가득한 봄, 4월 팬들 곁을 찾는다. 바로 50주년 기념 음반과 공연을 통해서다. 4월30일부터 5월2일까지 서울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펼쳐질 50주년 기념 콘서트 '꿈의 여정 50년, 칸타빌레' 대공연을 비롯해 올 한해동안 전국에서 무려 50회 이상의 공연이 예정돼 있다. 이후 미국, 영국, 일본, 캐나다, 호주 등 세계를 돌며 공연은 내년까지 계속된다. 몇해전 패티김은 "40주년 기념공연도 무사히 치뤄냈으니 이제 50주년을 향해 달려가야죠"라며 꿈을 이야기한 바 있다.  하지만 패티김은 그 거대한 꿈의 실현을 목전에 둔 지금 주저없이 또 다른 꿈을 이야기했다. 바로 평양에서의 단독공연이 그것. 패티김은 "부모님의 고향이기도 한 북녁에서 83년 이산가족 상봉의 주제가였던 '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를 비롯해 김정일(66) 국방위원장의 애창곡인 '이별'도 선보이고 싶다"고 소망했다. 패티김은 도도하다. 하지만 인간 패티김은 다르다. 어머니처럼 부드럽고 한없이 따뜻하다. 얼굴 가득 환한 미소로 가슴 속 부푼 꿈을 이야기할 때면 마치 10대 소녀의 낮빛을 보이기도 한다. 여자로서의 인생도 한차례 굴곡을 겪었다. 패티김은 작곡가 고 길옥윤씨와 이혼 후 76년 이탈리아인 아르만도 게디니와 재혼해 둘째 딸 카밀라를 낳았다. 이혼에 이른 재혼, 아버지가 다른 두 딸을 키운 경험으로 패티김은 여성단체연합 후원회장으로 활동하며 호주제 폐지를 위해 앞장서기도 했다. 하지만 가수로서의 인생에선 빈틈이라곤 찾아볼 수가 없다. 완벽하고 도도하며 또 강렬한 카리스마로 일관된다. 패티김은 자기 관리가 철저한 가수로 유명하다. 고희의 나이에도 철저한 체력 관리로 젊은이들 못지 않은 건강을 유지하고 있는 것만 봐도 그렇다. 매일 4~5km씩 걷기 운동을 하고, 틈이 날 때마다 수영과 요가로 체력을 관리한다. 평생 '배부르게 먹어보는 것이 소원’일 정도로 절식도 생활화하고 있다. 패티김은 체력관리 못지 않게 목소리 관리에도 각별한 주의를 기울여왔다. 공연 전에는 탄산음료를 비롯, 맵거나 짠 음식은 되도록 삼가며 목소리 관리를 위해 평상시 말을 아끼는 생활 또한 50년째 이어오고 있다. ▲ 패티 김패티김은 최근 모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나, 김혜자는 패티김을 위해 70~80% 희생하며 살아왔다"고 밝힌 바 있다. 철저한 자기관리, 그리고 노래로 점철된 삶. 강산이 다섯번이나 피고 지고, 또 새 옷을 갈아 입는 동안 늘 한결같이 최정상의 자리에서 대중과 함께 할 수 있었던 비결이 바로 여기에 있다. 50주년을 맞은 소감을 묻자 패티김은 "너무나 사랑했기에~"라는 노래로 대답을 대신했다. 패티김은 50주년을 맞은 자신을 '저무는 해'에 비유하기도 했다. 온 세상을 붉게 물들이며 절정의 화려함과 신비감을 자랑하는, 일몰 직전의 태양. 자신의 열정을 모두 소진하고 주위를 잔잔하게 물들이며 절정의 아름다움을 발산하는 저무는 해처럼 그녀의 노래인생 50년도 아름답게 빛나고 있다. 자존심 하나로 지켜온 노래인생이다. 무대에 설 수 있는 한 패티 김의 꿈은 계속될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말한다. 비록 꿈을 이루지 못하더라도 무대에 설 수 없는 목소리가 되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은퇴하겠노라고 말이다. 패티김의 말처럼 크고 붉게 빛나는 황혼의 해는 아름다웠다.▶ 관련기사 ◀☞[그들의 10년은 특별하다④]가왕 조용필의 40년, 전국민의 오빠였던 사나이☞[그들의 10년은 특별하다③]데뷔 30년 인순이, 아직 끝나지 않은 '거위의 꿈'☞[그들의 10년은 특별하다②]신해철,'아이들'에서 '교주'로 '무한궤도' 20년☞[그들의 10년은 특별하다①]신화 10년, 최장수 아이들그룹의 역사를 쓰다
2008.04.10 I 최은영 기자
가왕 조용필의 40년, 전국민의 오빠였던 사나이
  • [그들의 10년은 특별하다④]가왕 조용필의 40년, 전국민의 오빠였던 사나이
  • ▲ 가수 조용필[이데일리 SPN 유숙기자] 1980년대 중반 브라운관 앞에 앉아있던 한 꼬마아이는 TV 속에서 노래하는 조용필을 보고 객석에서 환호하던 언니들을 따라 “용필오빠”를 부르며 조용필의 노래에 빠져들었다. 그렇게 조용필은 전국민에게 ‘조용필’이기보다 ‘오빠’였다. ‘원조’라는 말이 너무 흔해진 요즘,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원조 오빠이자 가왕(歌王) 조용필이 데뷔 40주년을 맞았다. 조용필은 1968년 록그룹 애트킨즈를 결성했고 미8군 무대에서 음악 활동을 시작했다. 1969년 파이브 핑거스 기타리스트로도 활동했던 조용필은 1971년 3인조 그룹 김트리오를 결성, 선데이 서울컵 팝그룹 콘테스트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하고 그해 ‘사랑의 자장가, 님이여’를 타이틀로 첫 번째 앨범을 발표했다. 이후에도 그룹 생활을 해오던 조용필은 1976년 ‘돌아와요 부산항에’가 포함된 앨범을 발표, 타이틀곡은 아니었지만 이 곡이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며 조용필의 이름 석자를 세상에 알리는데 한 몫을 했다. 특히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부산을 시작으로 인기를 얻었고 재일동포들에게 큰 사랑을 받았다. 하지만 조용필은 이듬해 대마초 사건에 연루되면서 활동이 금지됐다. 가수 활동을 하지 못했던 시간, 그는 판소리를 연습해 한국민의 정서인 한(恨)을 목소리에 싣기 시작했고 활동 정지가 풀린 후 1980년 3월 1집 ‘창밖의 여자’로 방송사 가요 시상식을 휩쓸고 국내 가수 최초로 미국 카네기홀에서 공연을 갖는 등 성공적으로 재기했다. 또 그해 말에는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을 결성하기도 했다. 1981년에도 조용필은 3집 ‘고추잠자리’와 1982년 4집 ‘못찾겠다 꾀꼬리’로 연속 히트를 시키며 ‘국민 가수’로 거듭났다. 특히 1982년 일본 문화방송 30주년 기념 공연, 미국 11개 도시 순회공연과 1983년 일본 NHK 후원 일본 15개 도시 순회공연 등으로 이어지며 이때부터 해외에서의 공연도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당대 최고의 인기가수라는 서태지와 아이들이나 동방신기의 인기도 조용필의 끊임없는 그리고 폭발적인 인기에는 비할 것이 못됐다. 조용필은 5집 ‘나는 너 좋아’(1983), 6집 ‘눈물의 파티’(1984), 7집 ‘미지의 세계’(1985), 8집 ‘허공’(1985), 9집 ‘그대 발길 머무는 곳에’(1987)까지 꾸준히 사랑을 받았다. ▲ 가수 조용필(사진=SBS)그 결과 조용필은 1980년부터 1986년까지 MBC 10대 가수 가요제의 ‘가수왕상’을 연속 수상했다. 물론 조용필의 가수왕 ‘독식’은 어느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당연한 일이었지만 조용필은 1987년 “후배들을 위해 더 이상 상을 받지 않겠다”며 수상을 거부했다. 한편 그의 인기는 재일동포들을 따라 일본으로까지 건너가 조용필은 1987년 일본 NHK 연말 가요 프로그램 가요 홍백전에 외국인 최초로 무대에 올랐고 이후에도 1992년까지 총 5회(1991년 제외)를 출연했다. 서울 올림픽이 열린 1988년 발표된 조용필 10집 파트1의 ‘서울 서울 서울’은 올림픽을 맞아 전국민의 애창곡이 됐고 조용필은 그해 8월 한국 가수 최초로 중국 북경에서 공연을 갖기도 했다.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조용필은 방송보다는 공연 위주로 활동을 해왔다. ‘가수가 있어야 할 곳은 무대’라고 늘 말해왔듯이 한국뿐만 아니라 미국, 일본 등 해외 팬들을 직접 만나기 위해 쉼 없이 공연을 펼쳐왔다. 또 대중가수들에게 벽이 높은 예술의 전당 오페라하우스는 1999년 최초로 조용필에게 문을 열었고 2005년까지 매년 조용필은 이곳에서 콘서트를 열었다. 2003년에는 데부 35주년을 기념해 서울 잠실 주경기장에서 열어 이제는 아줌마들이 된 원조 오빠부대들을 다시 한번 불러 모았다. 또한 조용필의 노래 ‘친구여’와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리기도 했으며 앞서 거론된 곡들 외에도 ‘단발머리’, ‘비련’, ‘킬리만자로의 표범’ 등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히트곡을 불러온 조용필은 국내 가수 최초로 음반판매량 1000만장을 넘긴 기록도 갖고 있다. 한편 조용필은 오는 5월 24일 서울 잠실 주경기장 공연을 시작으로 진행되는 데뷔 40주년 기념 공연 ‘더 히스토리-나의 노래’는 부산, 대구, 광주, 대전 등 18~19개 도시와 해외 공연으로 이어지게 된다. 조용필은 이번 공연을 위해 야외 공연장에 70~80억원의 제작비를 투입해 약 35층 높이의 무대를 짓고 3D 영상을 위한 스크린도 준비할 계획이다. 무대와 음악에 대한 조용필의 ‘욕심’은 여기서 끝이 아니다. 조용필은 올해 공연인들이 마음껏 연습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하기 위해 실제와 같은 조명과 음향 등이 설비된 ‘YPC종합예술연구소’를 착공하고 19집 앨범도 발표할 예정이다. 이처럼 우리나라 대중가요, 공연문화를 살찌우게 하는 조용필의 욕심은 계속 되어야만 한다. ▶ 관련기사 ◀☞[그들의 10년은 특별하다⑤]50년 음악외길, 패티김...또 다른 꿈을 가슴에 품다☞[그들의 10년은 특별하다③]데뷔 30년 인순이, 아직 끝나지 않은 '거위의 꿈'☞[그들의 10년은 특별하다②]신해철,'아이들'에서 '교주'로 '무한궤도' 20년☞[그들의 10년은 특별하다①]신화 10년, 최장수 아이들그룹의 역사를 쓰다
2008.04.10 I 유숙 기자
데뷔 30년 인순이, 아직 끝나지 않은 '거위의 꿈'
  • [그들의 10년은 특별하다③]데뷔 30년 인순이, 아직 끝나지 않은 '거위의 꿈'
  • ▲ 인순이[이데일리 SPN 김용운기자] 지난 3월 5일 오전 인순이가 서울 강남의 한 호텔에서 기자들과 만났다. 오랜 무대경험으로 카메라 플래시 세례에 익숙할 법도 했지만 이 날은 전과 달라 보였다. 자신의 데뷔30주년 기념 전국 투어 콘서트 ‘레전드’ 기자회견이었기 때문이다. 1978년 인순이가 스물 한 살의 나이에 ‘희자매’의 멤버로 데뷔할 때 인순이(본명 김인순)가 훗날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여자가수로 성장할지 점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인순이는 폭발적인 가창력의 소유자였고 무대를 사로잡는 화끈한 춤 솜씨를 보여줬지만 당시 트렌드를 이끌던 포크 가수도 아니었고, 학사 가수도 아니었다. 오히려 인순이는 혼혈이라는 이질적인 존재로 더 눈길을 끌었다. 1957년 경기도 포천에서 주한 미군이었던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인순이의 외모는 단일핏줄을 강조하는 우리사회에서 ‘소외’와 ‘편견’ 그리고 ‘차별’을 안겨줬다. 가수자체로서 평가받기보다 혼혈이라는 외적 조건으로 주목을 받은 인순이의 가수 인생은 그래서 오래갈 것 같지 않았다. 하지만 인순이는 30년 동안 가수 외길을 걸어왔다. 그 길은 인기 정상에도 닿았고 밤무대를 전전해야 했던 어려운 순간으로도 이끌었다. 인순이는 묵묵히 그 길을 걸으며 인생이 선사하는 여러 가지 역경과 마주쳤다. 그 와중에 인순이는 자신의 꿈과 희망을 노래했다. 그동안 강산이 세 번이나 변했고 인순이를 앞서 가던 숱한 가수들이 명멸했다. ◇혼혈의 편견과 차별도 인순이를 막지 못해 지난 해 12월 인순이는 서강대학교에서 '거위의 꿈-우리는 누구나 꿈꾸는 자가 될 수 있습니다'라는 주제로 재학생들을 비롯해 교직원들을 상대로 2시간 동안 특강을 펼쳤다. 이 자리에서 인순이는 “혼혈로 인해 아직도 근본적인 정체성을 고민하고 있다”고 털어놔 객석을 숙연하게 했다. 인기 정상의 가수이기 전에 혼혈로 인한 남모를 고민을 평생 지니고 사는 한 명의 사회적 소수자임을 고백해서다. 인순이는 데뷔 30주년을 맞이해 서울 세종문화회관을 비롯해 전국에서 순회 콘서트를 할 만큼 가요계 정상의 자리에 올랐지만 여전히 혼혈이라는 정체성 때문에 고민하는 한국사회의 소수자다. 인순이는 자신의 홈페이지에 “학교 다닐 때는 남들 앞에 나서는 것이 가장 두려웠다”고 적을 만큼 혼혈로 인한 여러 가지 마음고생을 에둘러 표현했다. 그러나 인순이는 ‘노래’로써 자신에게 주어진 역경을 극복했다. ▲ 인순이인순이가 “공개적으로 남들 앞에 나서서 뭔가 할 수 있다는 용기가 생기고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이 스스로 느낀 가장 큰 놀라움 입니다”고 밝힌 것은 가수라는 직업이 그에게 단순히 생계 이상의 의미였음을 방증 한다. 인순이는 가수라는 직업을 통해 스스로의 삶을 변화시켰고 성장시켰다. 인순이가 특별한 이유는 단순히 가수라는 타이틀 외에 차별을 극복하고 성공한 소수자들의 상징적인 존재가 됐기 때문이다. ◇ 가수 30년,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변화를 추구하다 인순이는 희자매로 데뷔 이후 1980년 1집 앨범 ‘인연’으로 솔로로 나섰다. 인순이는 1981년에 KBS 7대 가수상 수상을 비롯해 1984년 KBS 7대 가수상을 수상하며 가수로서 인기를 구가했다. 당시 히트한 노래는 경쾌한 디스코풍의 ‘밤이면 밤마다’다. 이후 인순이는 약 10여 년간 밤무대를 전전하는 힘든 시기를 보낸다. 인순이가 약 10여년 간의 슬럼프를 극복하는 데는 90년대 중반 KBS의 열린음악회가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인순이에게 열린음악회는 라이브와 댄스를 모두 소화할 수 있는 가수 인순이의 실력과 가치를 재발견 할 수 있었던 계기가 됐다. 인순이는 1996년 박진영의 권유로 소울과 댄스가 결합된 ‘또’를 선보인다. 그리고 마흔이 다 된 나이에도 불구하고 인순이는 젊은 가수들 못지않은 파워풀한 가창력과 무대매너로 제2의 전성기를 시작한다. 인순이는 이때 결혼을 통해 인생의 새출발도 함께했다. 가수로서는 드물게 화장품 CF에도 출연하며 여자로서 미모를 뽐내기도 했다. 데뷔 20년을 넘어서 자신의 이미지만을 복제하며 편하게 갈 수 있었던 인순이는 다시 변화를 추구했다. 인순이는 2004년 조PD와 함께 ‘친구여’를 불러 가요계의 충격을 안겨줬다.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았던 래퍼 조PD와 함께한 노래는 음악적으로도 좋은 평가를 받았다. 인순이 자신도 세월의 흐름 속에 노회하지 않는 가수임을 증명해 보였다. 한국 가요사에서 전례가 드문 일이었다. ◇ ‘거위의 꿈’으로 데뷔 30주년을 완성하다 그러나 인순이의 데뷔 30주년의 대표곡은 ‘밤이면 밤마다’내지 ‘또’나 ‘친구여’가 아닌 ‘거위의 꿈’이 됐다. 1997년 이적과 김동률의 프로젝트 그룹 카니발이 부른 ‘거위의 꿈’은 인순이를 통해 국민가요로 거듭나게 됐다. “난 난 꿈이 있었죠. 버려지고 찢겨 남루하여도 내 가슴 깊숙이 보물과 같이 간직했던 꿈”이라는 가사로 시작하는 ‘거위의 꿈’은 인생의 숱한 어려움 속에서도 자신의 꿈을 믿고 이를 실천하는 사람들을 위한 노래다. 이 노래는 인순이의 인생사와 결부되면서 사람들에게 보다 큰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인순이는 ‘거위의 꿈’에 대해 “꿈을 꿈이라고 할 수 없었고 꿈조차 가질 수 없었던 저의 인생과 노래가사가 너무 일치해 놀랐다”며 “노래를 통해 희망과 어떤 길을 보여줄 수 있길 바랐고 ‘거위의 꿈’이 마침 그런 곡이었다”고 설명했다. 인순이는 이적에게 ‘거위의 꿈’ 리메이크 허락을 받았고 2007년 정식 싱글 앨범으로 선보였다. 인순이의 ‘거위의 꿈’은 지난해 연말 원더걸스의 ‘텔미’ 열풍속에서도 공중파 가요차트프로그램에서 1위에 올랐다. 가수 인순이에게 처음 벌어진 일이었다. ‘거위의 꿈’이 현실이 되던 순간이었다. ◇ 인순이, 전설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인순이는 지난해 연예인 학력위조 파동 당시 당사자 중 한 명이 됐다. 중졸 학력을 고졸 학력으로 속여 왔던 것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인순이는 “가난으로 인해 고등학교에 입학하지 못했다”며 자신의 과거를 솔직하게 털어놨고 스스로와 팬들에게 정직하지 못했다며 용서를 구했다. 그러면서도 인순이는 “저는 동정을 받고 싶지 않습니다”며 사람들의 이해의 시선에 선을 그었다. 인순이는 자신이 외부에서 평가하는 것처럼 “착하지만도 않고 이기적인 부분도 있고 거짓으로 포장된 부분도 있다”며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봐 달라고 부탁했다. 당시 구차하게 변명하던 다른 연예인들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인순이의 이런 모습은 공중파 드라마의 모티브가 되기도 했다. KBS 2TV 드라마 ‘인순이는 예쁘다’를 연출한 표민수 PD는 주인공 이름과 드라마의 전개가 인순이의 삶에서 모티브를 얻어왔다고 밝힌 바 있다. 표 PD는 주인공으로 출연한 김현주가 극중에서 ‘거위의 꿈’을 부르는 장면을 통해 인순이의 극적인 삶에 존경을 나타냈다.  ▲ 인순이인순이는 올해 데뷔 30주년 기념공연 타이틀을 ‘레전드’(legend)로 정했다. 한 시대를 함께 살아온 사람들에게 전설로 불리고 싶은 그의 바람이 담긴 제목이다. 스물 한 살의 나이에 데뷔해 쉰 살이 넘어서까지 현역가수로 활동하고 있는 인순이에게 부족함 없는 타이틀이다. 그러나 인순이는 아직 전설이 되기에 이르다. 전설이 되면 전설에 갇히게 되고 그 순간 과거가 된다. 인순이는 아직 가수로서 걸어가야 할 길이 많이 남았다. 환갑이 되도, 고희가 되도 무대에서 열정적이고 파워풀한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 그것이 '거위의 꿈'을 부른 인순이에게 바라는 팬들의 염원이다. 인순이가 전설로 불리는 것은 당분간 보류다. 그의 앞에는 데뷔 40주년, 데뷔 50주년 등 더 이뤄야할 꿈들이 기다리고 있어서다. ▶ 관련기사 ◀☞[그들의 10년은 특별하다⑤]50년 음악외길, 패티김...또 다른 꿈을 가슴에 품다☞[그들의 10년은 특별하다④]가왕 조용필의 40년, 전국민의 오빠였던 사나이☞[그들의 10년은 특별하다②]신해철,'아이들'에서 '교주'로 '무한궤도' 20년☞[그들의 10년은 특별하다①]신화 10년, 최장수 아이들그룹의 역사를 쓰다
2008.04.10 I 김용운 기자
신해철,'아이들'에서 '교주'로 '무한궤도' 20년
  • [그들의 10년은 특별하다②]신해철,'아이들'에서 '교주'로 '무한궤도' 20년
  • ▲ 올해로 데뷔 20주년을 맞은 가수 신해철(사진=신해철 미니홈피)[이데일리 SPN 양승준기자] 발라드 아이들 스타에서 ‘마왕’ 혹은 ‘교주’로 거듭나며 가요계에서 20살이란 나이테를 몸에 새겨온 가수 신해철. 지난 1988년 MBC 대학가요제에서 그룹 ‘무한궤도’를 통해 가요계에 데뷔한 신해철이 올해로 데뷔 20주년을 맞았다. 최근에는 음악적 활동보다 사회적 발언과 특유의 엔터테이너적 기질로 이슈가 되고 있는 신해철이지만 그가 남긴 음악적 결과물은 한국 대중음악사에서 결코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이다. 신해철은 솔로 활동에서 그룹 넥스트까지 발라드와 록음악 등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며 지난 20여년간 10여장이 넘는 정규앨범을 발매했다. 그는 이런 음악 작업을 통해 한국 대중음악신에 신선한 자극을 줌은 물론 아이돌에서 뮤지션으로 발돋움하려는 후배 가수들에게 또 하나의 롤모델로 남기도 했다.▲ 데뷔 시절 그룹 무한궤도(사진 오른쪽)와 솔로 활동 시절의 신해철(사진=신해철 미니홈피)◇ 발라드에서 록, 테크노에 이어 재즈까지…신해철의 음악적 ‘무한도전’ 신해철은 지난 20년간 마치 여행가가 오지탐험을 하듯 여러 음악적 장르에 대한 도전을 멈추지 않았다. 신해철이 처음 대중들에게 선보인 음악적 장르는 1988년 그룹 ‘무한궤도’가 들려준 ‘그대에게’ 같은 록음악이었다. 그러나 이후 그룹 멤버들간의 음악적 견해차이 등으로 밴드는 해체를 맞고 신해철은 2년 후에 솔로 활동을 하게 된다. 1990년대 초반, 신해철은 2장의 솔로 앨범을 통해 발라드 가수로서 제2의 가수 인생을 시작했다. 1집 ‘슬픈 표정 하지 말아요’와 2집 ‘재즈카페’의 ‘내 마음 깊은 곳의 너’,’연극 속에서’ 같은 주옥 같은 발라드는 당시 소녀 팬들의 마음을 녹이며 신해철을 일약 책받침스타로 떠오르게 했다. 신해철은 이후 돌연 음악적 성향을 바꿔 1993년 록그룹 넥스트를 결성하여 1990년대를 상징하는 대한민국의 록밴드를 이끄는가 하면, 1997년에는 그룹 해체 후 영국으로 건너가 ‘모노크롬’이란 앨범을 내며 테크노에 도전장을 내밀기도 했다. 또 신해철은 동료가수 윤상과 함께 ‘노 댄스’ 프로젝트 활동과 ‘비트켄슈타인’ 활동을 하며 테크노 작업을 이어오다 2007년에는 ‘더 송즈 퍼 더 원’이란 재즈 앨범까지 내며 음악적 장르의 폭을 넓혀갔다.이런 신해철의 음악적 행보에 대해 박은석 대중음악평론가는 “1990년대 당시 발라드 음반으로 정상을 차지했던 가수가 자신의 음악적 커리어에 대한 위험을 감수하며 록음반을 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라며 “도전에 대한 성공과 실패를 차치하고라도 뮤지션으로서의 다양한 장르의 음악에 대한 그의 시도는 높이살만한 부분”이라며 신해철의 음악적 행보를 높이 평가했다. ◇ 창작자를 넘어 기획자로…전람회, E.O.S, 엄정화 앨범 프로듀싱까지 이런 신해철의 다양한 음악적 장르에 대한 도전과 섭렵은 후배 가수들의 앨범 작업에 오롯이 그의 능력이 발휘되기도 했다.신해철은 가수 엄정화의 데뷔곡 ‘눈동자’를 작곡함은 물론 그녀의 1집의 프로듀싱을 맡기도 했으며, 지금은 토이의 객원가수로 활동하고 있는 김형중의 E.O.S 1집의 제작을 맡아 당시 가요 차트 정상에 올려 놓기도 했다. 또 이후 김동률의 전신인 전람회 1집 앨범은 물론 문차일드 1,2집의 프로듀싱을 맡아 앨범의 완성도에 크게 기여하기도 했다. 이에 박준흠 대중음악평론가는 “신해철의 경우는 다양한 음악적 도전으로 인해 자신의 곡 작업 뿐만 아니라 남의 장점을 잘 잡아내는 곡 기획자로서의 능력이 탁월하다”고 그를 평가하기도 했다. ▲ 책 '쾌변독설' 기자회견에서의 가수 신해철(사진=YES24제공)◇ 새로운 팬문화를 만들다. 오빠부대에서 ‘마왕’,’교주’로 의식의 연대 신해철이 대중음악계 혹은 연예계에 의미있는 이유는 그의 음악 작업뿐이 아니다. 신해철은 1996년 MBC 라디오 ‘음악도시’로 DJ를 시작한 뒤 이후 ‘고스트스테이션’같은 프로그램을 진해하며 거침없는 입담으로 청취자들로부터 ‘마왕’ 혹은 ‘교주’라는 타이틀을 거머쥐며 새로운 팬층을 형성해갔다. 지난 1980년대의 오빠부대는 연예인의 외모와 특정 노래, 사생활에만 좌지우지되는 맹목적인 사춘기적 성향을 보였다면, 신해철의 팬문화는 음악을 넘어 뮤지션의 생각을 공유한다는 점에서 전과는 다르다고 볼 수 있다. 이는 신해철의 능동적인 사회 참여적 발언과 '쾌변독설'이란 사회,문화 이슈에 대한 대담집 발간을 통해 더욱 공고화되기도 했다.신해철은 시사 토론 프로그램에 출연해 간통죄 합법화와 대마초 합법화를 주장하는 등 대중가수치고는 이례적으로 자신의 의견을 강력히 개진해왔다. 또 최근에는 인수위의 '영어 공교육 강화 방안'에 대해 "차라리 미국의 51번째 주가 되라"고 주장해 팬들의 지지를 얻으며 신해철은 음악이 아닌 생각을 통해서 그의 팬층을 넓혀가기도 했다. 박은석 대중음악평론가는 이에 “신해철의 경우는 뮤지션과 팬이 음악 뿐이 아닌 생각의 교류를 통해 유대감을 형성해가는 특이한 케이스”라며 “신해철이 라디오 프로그램 고스트네이션을 통해 청취자들과 한국 인디 음악에 대한 고민을 같이 해나가는 등 스타의 일상만 공유하는 소극적 팬문화에서 사회적인 문제까지 확대해나가며 사회 변화를 기대하는 적극적 팬덤 문화를 낳기도 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데뷔 20주년을 맞은 요즘 신해철은 음악보다 그가 한 사회적 발언등이 주목받으며 뮤지션의 이미지가 많이 약해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에 신해철 소속사 관계자는 “신해철이 오는 5월이나 6월 경 데뷔 20주년 기념 앨범 발매와 그룹 넥스트 정규 6집 발매를 동시에 앞두고 있다”며 “이번 음반 활동을 통해 그간 소홀했던 음악 활동에 박차를 가한다면 뮤지션으로서의 신해철의 이미지는 자연스럽게 되살아날 것”이라고 기대감을 드러냈다.  지난 2007년 연말 공연 당시 "은퇴는 없다"고 팬들에게 선언한 가수 신해철. 그가 앞으로는 어떤 음악적 시도로 음악팬들의 귀를 즐겁게할지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관련기사 ◀☞[그들의 10년은 특별하다⑤]50년 음악외길, 패티김...또 다른 꿈을 가슴에 품다☞[그들의 10년은 특별하다④]가왕 조용필의 40년, 전국민의 오빠였던 사나이☞[그들의 10년은 특별하다③]데뷔 30년 인순이, 아직 끝나지 않은 '거위의 꿈'☞[그들의 10년은 특별하다①]신화 10년, 최장수 아이들그룹의 역사를 쓰다
2008.04.10 I 양승준 기자
`선량 추천` 끝내고 증시로 돌아온 시골의사 박경철
  • `선량 추천` 끝내고 증시로 돌아온 시골의사 박경철
  • [이데일리 임일곤기자] "공천심사하는 6주 동안 최선을 다했다. 죽을 힘을 다해서 일했다. 6주의 시간이 내 인생에서 가장 치열했다." 통합민주당 공천심사위원으로 국민들에게 `정치인 추천`을 끝낸 시골의사 박경철씨(사진·43세)가 다시 증시로 돌아왔다. 박경철씨는 18대 총선 다음날인 10일 여의도 증권선물거래소 1층에서 `증시 혼란기의 투자전략`이란 주제로 강연에 나선다. 증권선물거래소가 월간 매거진 `KRX` 창간 1주년을 기념해 초청한 행사다. 지난 8일 서울 충정로 사무실에서 이데일리와 만난 박경철씨는 증시에서 종목(투자할 기업)을 선정할 때도 사람을 판단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현재도 중요하지만 과거가 중요하며 과거 위기를 어떻게 극복하고 성장했는지, 위기를 관리하는 에너지가 있는지를 살펴야 한다는 충고다. 반면 `미래가치`에 대해선 보수적인 자세를 보였다. `현재는 미래가치의 할인`이라고 말들을 한다지만 미래는 기본적으로 알 수 없는 영역이라는 논리다. 기업은 언제 망할 지 모르고 과거나 현재로 추론할 수 밖에 없다는 것. 투자자의 자세로는 `부자의 마인드`로 움직여야 한다고 조언했다. 100억원을 가진 사람의 목표 수익률은 10%이지만, 100만원을 가진 사람의 목표는 100배인 1억원이기 때문에 100만원을 가진 사람이 질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다. `전공 영역`이 아닌 정치에 잠시나마 몸담게 된 이유에 대해서는 "먹고 살기 바쁘다는 이유로 거절하는 것은 시민 정신이 아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가 추천한 정치인이 앞으로 4년간 국민들에게 `얼마의 수익률`을 안겨줄까?  박경철씨는 안동신세계연합병원 원장이지만 `시골의사`라는 별명으로 더 유명한 투자분석가다. `시골의사의 부자경제학`, `시골의사의 아름다운 동행` 등 여러권의 베스트셀러를 펴냈으며, 경제 케이블TV 진행자로도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지난달 20일 통합민주당의 총선 공천심사위원으로 위촉됐다.다음은 박경철씨와 나눈 대화 내용이다. -어떤 종목을 사야하나. ▲ 상위 100대 종목 이하는 볼 필요가 없다. 이 외에는 우량주가 아닐 가능성 높다. 많은 개인 투자자들은 우량주가 아닌 종목에서 수익을 내려고 한다. 최근 모 증권사가 동양제철화학의 목표주가를 터무니없이 올려놓은 것은 우리 주식시장의 비극적인 모습이다. 주식은 넓은 의미에서 자산이다. 집을 사놓고 10년을 기다리는데 왜 주식은 그렇게 오랫동안 기다리지 못하나. -개인 투자자에게 조언 한다면. ▲ 시장을 이겨야 한다. 이기는 방법은 기본적으로 운이 좋아야 한다. 투자하는 시점이 대세 상승기이면 돈을 많이 벌 수 밖에 없다. 최근 5년 동안 투자한 사람들은 운이 좋았다. 지금은 운이 다하고 있는 시점으로 볼 수 있다. `시장을 보지 말고 종목을 보라`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건 사기꾼이 하는 말이다. 시장이 좋을 때는 아무거나 사도 좋다. -테마주는 어떻게 보나. ▲ 시장 자체가 원래 테마이다. 이중 모두가 공감하는 테마가 있다. 기업의 실적이나 경기, 금리 등이 하나의 테마다. 소규모 테마는 단편적 사건들이다. 이를테면 총선이나 대운하 등. 소규모 테마 문제는 시장의 맥락을 보는게 아니고 시장을 믿지 못한 패배자의 집합소이다. 이런 테마에 관심 기울이는 것은 자본시장에서 승리할 수 없다. 큰 테마에서 성공을 못한다면 주식을 안하는 게 낫다. -투자시 경계해야 할 것은. ▲ 투기는 항상 실패를 가져온다. 내가 100만원을 갖고 있어도 100억원을 가졌다는 마인드로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돈들이 뭉쳐져 결국 부자에게 흘러간다. 이런말 하면 투자자들은 잘 받아 들이지 못한다. 배부른 자의 말이라고 한다. 나는 주식 시장을 20년동안 경험했다. 살아남은 사람이다. 지옥과 천당을 다녀와봤다. 사람들에게 꽃이 펴 있는 저승으로 가는 길과 멀고 험하지만 천국이라고 가는 길을 가르쳐 준다. 하지만 투자자들은 대부분 모른다. 불건전한 시장에서는 흔히 고수라 불리는 사람들이 많다. 이들은 심하게 말하면 잡상인 같은 사람들이다. 운용사나 기관투자자들도 이러한 야바위꾼 같은 이들이 많다. ARS로 장사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카지노에서 블랙잭은 10번 중 1번의 빵빠레가 울린다. 노름을 하는 사람은 그 빵빠레 소리만 기억하고 나머지는 잊는다. 이처럼 잡상인의 유혹들이 시장을 후진적으로 만들고 있다. 선진국에서는 주식을 자산 투자의 개념으로 한다. 반면 우리는 주식이 팔자 고치는 데 이용되고 있다. 주식 정보를 파는 사람들은 사기꾼이라고 보면 된다. -총선일 직후 증권선물거래소에 투자 강연회 하는데 어떤 내용인가 ▲ 나의 강연에는 섹시한 내용이 없다. 그런 것을 들기 위해 찾아 온다면 차비가 아까울 것이다. 나는 강연을 주체하는 곳의 신뢰성이 있어야 참석한다. KRX는 장사하려고 강연을 개최한 게 아니니까 선뜻 참석키로 했다. 언론매체 등에서 자리를 만들면 기꺼이 참석한다. 하지만 증권사들이 고객을 상대로 연다면 싫은 소리를 한다. -좋은 종목과 좋은 후보를 선택하는 기준은. ▲ 사람을 판단할 때 그의 가치와 행적을 따져봐야 한다. 기업도 마찬가지다. 현재도 중요하지만 과거가 중요하다. 과거 위기를 어떻게 극복하고 성장했는지, 위기를 관리하는 에너지가 있는지를 살펴야 한다. 그 다음으로 현재의 모습을 봐야 한다. 현재 좋은 기업인지를 살펴 본다. 나는 미래 가치란 말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현재가치는 미래가치의 할인`이라고 말들을 한다. 하지만 미래는 기본적으로 알 수 없는 영역이다. 기업은 언제 망할 지 모른다. 과거나 현재로 추론할 수 밖에 없다. 기업이 나를 설득할 수 있어야 한다. 기업에게 도대체 무슨 꿈을 갖고 있냐고 묻는다. 내가 너를 사고 싶은데 너의 꿈을 나에게 설득해봐라하는 것이다. -기술적 분석 어떻게 보나. ▲ 기술적 분석을 지나치게 매도하는 것은 옳지 않다. 물론 차트만 보고 투자를 결정하는 것은 한심한 일이다. 일부 애널리스트들이 자기 책상의 컴퓨터를 치웠다는 말이 있는데 이는 오버하는 것이다. 대중은 짧은 시간에서는 어리석은 판단을 많이 한다. 지나치게 큰 기대를 하거나 적정가치를 못 볼때도 많다. 좋은 종목을 골랐다면 테이블에 올리고 지금 칼질하냐, 나중에 하느냐를 기술적으로 해야 한다. 나는 조화를 강조한다. -정치권에서의 활약(?)은 의외였다. 민주당에서 공천심사위원 제의를 받은 이유는. ▲ 개인적으로 시민(市民)이란 말을 좋아한다. 백성과 반대되는 개념이다. 백성은 패배주의에서 출발한다.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한다. 반면 시민은 더럽다고 생각하면 나서서 고친다. 시민은 지식인 보다 한단계 상위 개념이다. 시민은 자신의 생각을 이루기 위해 참여한다. 현재를 고칠 수 있다고 판단한다. 공천 심사 제의를 받았을 때 먹고 살기 바쁘다는 이유로 거절하는 것은 시민 정신이 아니어서 니다. -심사 과정에서 청탁도 많았을 텐데. ▲ 많았다. 청탁을 한 사람은 엄청난 손해를 봤다. 100점 만점에서 10점을 감점했다. 부탁했던 사람들은 서운한 감정을 느낄 것이지만 이해할 것이다. - 총선 전망은? ▲ 통합민주당이 얻을 의석은 40~50석 보단 많고 90~100석은 어려울 것으로 보고 있다. (총선결과 통합민주당은 81석을 얻었다-편집자주) -이번 공천에 대해 만족하나 ▲ 세상에 모든 것을 만족할 수 있나. 아쉬움이 남는다. 하지만 공천심사하는 6주 동안 최선을 다했다. 죽을 힘을 다해서 일했다. 6주의 시간이 내 인생에서 가장 치열했다. 심사 후 일주일 동안 몸살이 났다. 당이 가진 한계 속에서 충실히 맡은 일을 했다. 결과는 국민이 평가할 일이다.  
2008.04.10 I 임일곤 기자
서호주 ''바람, 햇살, 그리고 순수의 B l u e''
  • 서호주 ''바람, 햇살, 그리고 순수의 B l u e''
  • [노컷뉴스 제공] 한국에서 남쪽으로 11시간을 날아가면 닿는 곳에 서호주가 있다. '호주면 호주지 서호주라니?' 한국인에겐 아직 생소한 곳이지만 서호주는 호주 8개 주(州) 중 가장 서쪽에 위치한 주라는 위치적 의미를 넘어선 풍부한 함의를 지니고 있다. 여행이 팍팍한 일상을 떠나 꿈을 좇는 것이라면 서호주는 바로 그 해답이다. 눈이 시리게 푸르른 하늘과 낭만으로 일렁대는 바다, 따스한 햇살 가득한 와이너리(와인 양조장)에서의 와인 한 잔, 호주 원주민 아보리진(Aborigine)과 함께하는 카누 모험, 신이 창조한 사막의 만물상 피너클스(Pinnacles)… 서호주에는 'Real Austrailia'가 고스란히 담겨있다. 그중에서도 백미인 곳, 서호주의 보석 '마가렛 리버'에는 그토록 동경해온 '한없는 순수의 블루'가 당신을 기다리고 있다. ◈ 와인과 낭만이 흐르는 강, 마가렛 리버 마가렛 리버(Magaret River)는 서호주의 주도(州都) 퍼스(Perth)에서 자동차로 3시간 거리에 자리한 지역이다. 인도양으로 흘러드는 '마가렛 리버'를 중심으로 형성된 지역으로 호주인들에게 각별한 사랑을 받고 있는 곳이다. 서울의 4배에 이르는 면적(2,370㎢)에 인구는 1만2천 명. 정신없이 돌아가는 서울에서 온 불쌍한(?) 도시인은 불과 1분 만에 마가렛 리버에 흠뻑 빠져들고 말았다. 서호주는 와인 애호가에게 천국에 다름 아니다. 곳곳에 산재한 100여 개의 와이너리는 와인의 향연을 제공한다. 따사로운 햇살이 구석구석을 보듬는 싱그러운 포도밭과 내 몸 가득히 퍼지는 와인향, 마가렛 리버는 낭만이다. 와인과 함께 즐기는 스테이크도 여행자에겐 축복이다. 비옥한 대지의 풀을 먹고 자란 소고기의 부드러운 육질과 풍부한 육즙을 3만 원이 조금 넘는 가격에 만끽할 수 있다. 서호주관광청이 추천한 '컬른'(Cullen) 와이너리는 마가렛 리버 지역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와이너리로 모든 와인에 실패가 없다. 마가렛 리버에선 맥주 애호가도 섭섭하지 않다. 하늘을 찌를 듯이 치솟은 나무들이 늘어선 숲길을 타고 가다 만나는 '부트렉'(Bootleg) 브루어리(맥주 양조장)는 '와인의 사막 속 오아시스'란 재밌는 광고 문구로 길손을 맞는다. 맥주 컨테스트에서 수상한 밀로 만든 맥주에서 체코풍 필스너, 영국식 에일까지 다양한 맥주를 간단한 안주와 함께 맛볼 수 있다. ◈ 아보리진과 함께하는 모험 마가렛 리버는 모험의 고향이기도 하다. 직접 카누를 타고 마가렛 리버를 거슬러 올라가며 정글가이드와 함께 숲을 탐험하고 아보리진의 음식인 '부시터커'(Bush Tucker)를 맛보는 체험투어는 놓쳐서는 안 된다. 노를 저으며 강 주변의 절경에 감탄사를 연발하다 보면 조그만 섬에 도착하게 된다. '슬픔의 섬'(Sorrow Island)이라고 불리는 이 섬에는 얇은 종잇장을 겹친듯한 기이한 형상의 '페이퍼 바크(Paper Bark)'라는 나무들로 가득하다. 아보리진들은 슬픈 일이 있을 때마다 이 섬을 찾아 나무에 그 심정을 토로했고 나무는 괴로움과 아픔을 모두 가져간다고 그들은 믿었다. 다시 길을 떠난 모험가들은 기슭에 카누를 대고 휴식을 취한다. 강에 첨벙 뛰어들어 수영을 즐기다 보니 어느새 배가 출출해진다. 캥거루 고기와 야생초 샐러드, 그리고 애벌레까지 짜릿한 아보리진 전통 식사를 즐기며 세계 곳곳에서 찾아온 여행자들과 수다를 떨다 보면 해가 기우는 줄도 모른다. 마가렛 리버의 바다는 파도타기를 즐기는 전 세계 서퍼들의 성지(聖地)다. 영화 '폭풍 속으로(Point Break)'의 마지막 장면에서 은행을 턴 서퍼 패트릭 스웨이지는 평생 동경하던 마가렛 리버의 파도 속으로 몸을 던진다. 인도와 아프리카로부터 아무런 장애물 없이 인도양을 달려온 장엄한 파도에 서퍼들은 매혹되고 만다. 마가렛 리버는 지하 탐험에도 제격이다. 광활한 석회암 지대에 생성된 300여 개의 아름다운 동굴 중 6개가 일반에 공개되고 있다. 이 중 1899년 발견돼 처음 관광지로 개발된 닐기(Ngilgi) 동굴은 형형색색의 종유석과 석순이 창조한 태고적 신비를 간직한 지하궁전으로 신비감을 자아낸다. ◈ 어머니 대지에 별이 쏟아지다 마가렛 리버는 깨끗한 땅의 정기가 모이는 곳이기도 하다. 전 세계의 명상 수련자들이 어머니 대지(Mother Earth)의 기를 받고자 몰려든다. 마가렛 리버의 아늑한 숲 속에 100여 개의 로지(Lodge)와 리조트 등이 산재해 있다. 이 중 4년 전 문을 연 문댄스 로지는 여행잡지 등으로부터 5번이나 상을 받은 아시아풍의 고급 숙소다. 홍콩에서 13년간 생활한 퍼스 출신의 제랄딘 라일리 사장이 운영하는 명상 체험 프로그램은 달빛 아래에서 아보리진이 연주하는 전통악기 디저리두(Didgeridoo) 음악에 맞춰 명상을 하고 춤을 추며 치유의 시간을 가져다 준다. 대자연의 숨결을 느끼며 문득 올려다본 하늘. 남십자성과 은하수, 수많은 별들이 내 품으로 쏟아져 내린다. 서호주 마가렛 리버에는 낭만의 공기, 느림의 미학이 흐르고 있다. ◈ 여행 길잡이 ▲ 항공 = 서호주 직항편은 없다. 캐세이퍼시픽이 주 5회 홍콩 경유 퍼스행을 운항한다. ▷ 캐세이퍼시픽 서울사무소(www.cathaypacific.com/kr ☎ 02)311-2730) ▲ 통화 = 호주달러를 사용. 1호주달러는 =약 930원. ▲ 비자 = 방문비자가 필요하다. 한번 발급받으면 1년간 무제한으로 입국할 수 있다. ▲ 날씨 & 시차 =10월 말부터 3월 말까지는 서머타임제 시행으로 한국과 시차가 없다. 4월부터는 한국보다 1시간이 늦다. 남반구에 있어 계절이 한국과 반대로 4월부터는 가을이 시작된다. 겨울에도 영상의 기온이 유지된다. ▲ 교통 = 퍼스에서 마가렛 리버까지는 자동차로 3시간 정도 걸린다. 저렴한 렌터카나 현지 가이드를 이용한다. ▷ Just 'U' Me & Perth(www.justumeandperth.com) ▲ 와이너리 & 숙박 = ▷ 컬른 와이너리(www.cullenwines.com.au) ▷ 시에나 와이너리(www.sinnennaestate.com.au) ▷ 부트렉 브루어리 (www.bootlegbrewery.com.au) ▷ 문댄스 로지(www.moondancelodge.com) ▲ 체험거리 = ▷ 부시터커 투어 : 아보리진 체험 카누여행(www.bushtuckertours.com) ▷ 닐기 동굴(www.geographebay.com) ▷ 돌고래 생태투어(www.whales-australia.com) ▲ 여행정보 = 서호주관광청 한국사무소(www.westernaustraliia.com ☎ 02)6351-5156) ▶ 관련기사 ◀☞해외여행 클릭할수록 싸게 간다☞인천 개항장 일대 도보관광☞국내 첫 크루즈선 ''팬스타 허니호'' 취항(VOD)
'비행기' '빙고' '사계'로 돌아본 故 임성훈의 발자취
  • '비행기' '빙고' '사계'로 돌아본 故 임성훈의 발자취
  • ▲ 고 임성훈(사진=부기엔터테인먼트)[이데일리 SPN 김용운기자] “머리 위로 훨훨 날아가겠죠. 거북이 비행기 타고...” 2006년 10월 KBS가 주관한 제6회 한국어능력시험을 보던 응시자들은 듣기평가 문제를 풀다가 잠시나마 긴장을 풀 수 있었다. 듣기만 해도 박자에 맞춰 고개가 절로 끄덕여지는 거북이의 ‘비행기’가 문제로 흘러나왔기 때문이다. 4월 2일 오전 심근경색으로 사망한 혼성그룹 거북이의 리더 ‘터틀맨’ 임성훈은 사실 앨범 발매와 동시에 각종 음악 프로그램 정상을 석권하고 대중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는 톱스타는 아니었다. 하지만 임성훈은 밝고 경쾌한 멜로디와 즐겁게 흥얼거릴 수 있는 가사로 한국적인 랩을 구사하며 가요 팬들에게 꾸준한 사랑을 받아왔다. 거북이는 2001년 12월 1집 앨범 수록곡 ‘사계’의 히트로 가요계에 처음 이름을 알렸다. 거북이의 ‘사계’는 1980년대 운동권 가요의 고전인 노래를 찾는 사람들(이하 노찾사)의 ‘사계’를 힙합과 랩으로 재구성한 노래였다. 노찾사의 ‘사계’는 1980년대 가혹한 노동조건에서 사계절을 살아가는 공장노동자들의 일상을 담은 노래로 운동권 가요의 명곡이자 고전으로 불렸던 곡이다. 이를 상업적인 장르로 재해석한 거북이의 ‘사계’는 당시로서는 상당히 파격적인 시도였고 논란을 빚었다. 운동권 가요의 순수성이 훼손되는 것 아니냐는 의미에서였다. 그러나 임성훈은 힙합과 랩이라는 장르 자체가 미국에서도 비주류의 장르임을 강조하며 거북이의 ‘사계’가 노찾사의 ‘사계’와 결코 이질적이지 않다고 주장했다. 임성훈은 ‘사계’의 중간에 원곡에 없던 “언젠가 펼쳐질 내 꿈을 위해 세상을 향해 힘껏 모두 달려봐”라는 랩으로 ‘사계’를 재해석했고 결국 ‘사계’는 보다 많은 대중들이 편하게 들을 수 있는 곡으로 부활했다. 2003년 11월 2집 정규앨범에서는 ‘왜이래’가 팬들의 많은 사랑을 받았다. 임성훈은 “갑자기 왜이래 난데없이 왜이래 화만 내면 무슨 일이 잘되나 안된다면 내일 해, 화 내지 말고 내일 해”라며 쉽게 화를 내는 현대인들에게 여유로운 마음을 강조했다. 2004년 11월 발매한 3집 앨범에서도 역시 거북이의 희망적인 가사와 흥겨운 리듬은 계속 됐다. 3집 히트곡 ‘빙고’에서 임성훈은 “거룩한 인생 고귀한 삶을 살며 부끄럼 없는 투명한 마음으로 이내 삶이 끝날 그 마지막 순간에 나 웃어보리라 나 바라는 대로”라며 삶에 대한 긍정적인 모습을 보였다. ‘빙고’의 히트로 바쁜 활동을 이어가던 임성훈은 2005년 4월 응급실로 실려가 주위를 놀라게 했다. 그의 직접적인 사인이 된 심근경색이 발병한 것이다. 이후 임성훈의 앞에 놓인 것은 말 그대로 고난의 길이었다. 임성훈은 심근경색으로 두 번이나 수술을 받았고 소속사와의 갈등으로 육체적, 정신적 시련기를 겪은 바 있다. 그 속에서 탄생한 곡이 바로 거북이의 대표곡이자 한국어능력시험에도 출제된 4집 앨범 수록곡 ‘비행기’다. 2006년 7월 출시된 4집 앨범의 타이틀곡 ‘비행기’로 임성훈은 데뷔 후 처음으로 지상파 가요프로그램에서 정상을 차지했다. 임성훈은 ‘비행기’의 탄생과정에 대해 “1차 심근경색 수술 후 중환자실에 있는 동안 계속 그의 귓가에 맴돌았던 멜로디를 곡으로 만들었다”고 밝혀 눈길을 끌었다. 의식이 명확하지 않던 순간에 누군가 옆에서 흥얼거리는 듯 했던 멜로디를 듣고 이를 기억하기 위해 애를 쓰다 의식이 돌아왔다는 것. ‘비행기’는 어릴 적 누구나 한 번쯤 꿈꿨지만 쉽게 탈 수 없었던 비행기에 대한 추억을 회상하는 노래로 동심을 자극하는 분위기와 쉬운 노랫말 그리고 애잔한 정서가 묘하게 결합되어 팬들의 많은 사랑을 받았다. 거북이의 노래 중 ‘비행기’가 인터넷상에서 가장 많이 다운로드를 받은 곡으로 뽑히는 것이 그 증거다. 임성훈은 이후 소속사 문제를 매듭짓고 자신이 직접 차린 부기엔터테인먼트에서 2008년 1월 5집 앨범 ‘오방간다’를 발표하며 가요계로 복귀했다. ‘오방간다’에서도 ‘거북이’ 특유의 낙관적이고 밝은 분위기의 ‘싱랄라’로 거북이는 저력을 과시해 보였다. 그러나 이제 혼성그룹 거북이의 중심이었던 터틀맨 임성훈의 모습은 볼 수 없게 됐다. 거북이는 십장생에도 포함되는 장수의 상징이지만 임성훈은 만 서른 여덟의 아까운 나이에 세상을 떴다. 임성훈의 랩과 노래는 30~40대 아저씨들도 노래방에서 따라 부를 만큼 구수했고 편안했으며 어렵지 않았다. 랩과 힙합을 하는 가수들 대부분은 젊은 층에게만 환호를 받는다. 하지만 거북이는 유치원의 운동회나 홍대의 클럽, 아저씨들의 회식자리와 노인대학 장기자랑 같은 자리에서도 사랑을 받았다. 때문에 그의 노래와 그룹 거북이의 존재 의미는 더욱 특별할 수 밖에 없었다.  1970년 9월 3일 태어나 2008년 4월 2일, 개구쟁이 거북이 비행기를 타고 세상 모든 것이 점처럼 보여지는 하늘로 너무나 일찍 떠나간 거북이 ‘터틀맨’ 故 임성훈의 명복을 빈다. ▶ 관련기사 ◀☞방실이 터틀맨 죽음에 병상서 한없이 눈물만...☞이영자 김제동 등 연예인 터틀맨 조문행렬 잇따라...비통과 안타까움☞박경림, "너무 밝아서 아픈 줄 몰랐는데"...'터틀맨' 빈소서 '통곡'☞'터틀맨' 가족력인 심근경색으로 사망...어머니 '충격', 멤버들 '비통'☞터틀맨, 2년 전 방송서 심근경색 사실 털어놔 안타까움
2008.04.03 I 김용운 기자
꿈결 보다 아름다운 길에서 쉼표를 찍다!
  • 꿈결 보다 아름다운 길에서 쉼표를 찍다!
  • ▲ 상라봉으로 오르는 흑산도 큰고개길<출처:한국관광공사>&nbsp;[조선일보 제공]&nbsp;팽팽한 고무줄이 툭 끊어진 것처럼 문득 아무것도 하지 않고 쉬고 싶어질 때가 있다. 멀리 있어서 더 그리운 곳. 그 곳으로 떠나는 한적한 여행은 완전한 자유다. 도시에서 벗어날수록 북적거리는 인파를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흑산도는 가는 곳마다 비경이 펼쳐진다. 그 비경 한편으로 소담스러운 섬마을이 있고 그곳에서 질펀하게 살아가는 뱃사람들의 향기도 물씬 풍긴다. 올 봄엔 꿈결보다 아름다운 흑산도에서 휴식을 위한 쉼표를 찍어보자. ▲ 정박지로도 유명한 흑산도 예리항<출처:한국관광공사>목포항에서 93km의 뱃길을 달려 흑산도 예리항에 닿는 순간 두 번 놀란다. 거대한 섬의 덩치에 한번 놀라고 예리항의 북적거리는 분주함에 또 한 번 놀란다. 흑산도는 한동안 이웃 섬인 홍도를 가는 길목의 징검다리 역할을 했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흑산도를 둘러싸고 있는 새끼 섬들의 비경이 알려지기 시작하면서 홍도에 버금가는 관광명소로 자리를 잡았다. 더군다나 톡 쏘는 듯한 맛이 별미인 흑산 홍어가 대표적인 특산물로 널리 알려지면서 ‘구경도 하고 홍어 맛도 보는’ 남해안 최고의 섬 여행지로 인정받고 있다. 또한 근해에서 조업하는 선박의 대피소 혹은 정박지 구실도 하고 있으며, 예전에는 중국과 일본 어선까지 접안하는 국제 항구 역할까지 담당했다. ▲ 흑산도의 명물, 해안 벽화도로<출처:한국관광공사>바닷물이 푸르다 못해 검어서 흑산도라 불리는 섬. 주변에 기암괴석과 해안동굴이 널려 있어 섬 전체가 절묘한 비경이다. 예전에는 조기, 고등어, 삼치 파시가 성황을 이루던 곳이기도 하다. 한시절 흑산도 홍어 파시 때는 60여 곳의 술집이 즐비했고 흥청거리는 밤풍경이 끊이질 않았다는 말이 빈말처럼 들리지 않는다. 진리로 오르는 길목에 높다랗게 서 있는 유서 깊은 흑산도 성당에 가서 예리항을 굽어보면 둥그렇게 항구를 감싼 풍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흑산도 여행은 크게 육로와 해상으로 나누는데 백미는 육로인 해안 일주도로를 따라 여행하는 것. 대중교통이 많지 않아 일주도로 전문 관광버스나 택시를 이용하는 것이 편하다. ▲ 사리마을 가는 비포장길<출처:한국관광공사>관광버스는 예리항을 출발해 죽항리 뒷대목-샘골-칠락봉 고갯마루-가는개-천촌리를 지난다. 사리마을과 상라봉을 보고 진리로 돌아온다.&nbsp;하지만 흑산도 일주도로를 제대로 즐기려면 걷는 것보다 좋은 방법은 없다. 섬마을 포구에 자그마한 배가 올망졸망 매어 있는 모습이 펼쳐지면서, 일주도로를 걷다보면 그림 같은 포구를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아직은 비포장도로가 남아 있으나, 길이 뚫리고 아스팔트 포장이 갖춰지면서 홍도 못지않은 멋진 풍경과 섬 곳곳을 장식한 아늑한 포구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예리에서 출발해 죽항리까지 작은 고갯길을 쉬엄쉬엄 가보면 해안선이 곁눈질로 보인다. 처음에는 시골길 같지만 점점 길은 바다로 향해 열린다. 천촌리를 벗어나면 모래해변인 샛개가 기다린다. 모래는 매우 고와서 손으로 만지면 먼지처럼 부서질 정도. 편의시설이 따로 없으니 음료나 간단한 준비물은 챙겨가도록. 비포장도로는 소사리를 지나고 사리마을(정약전 유배지)로 가는 길로 이어진다. 바다에 점점이 떠있는 낚싯배와 자그마한 두 개의 섬이 어우러진 해림은 가히 절경이다. 섬 사이로 수십 척의 배가 바다 위에 떠있는 풍경이 인상적이다. 사리 마을을 넘으면 가파른 고갯길이 이어진다. 강원도 산골보다 더 첩첩산중 오지길이라는 고갯길을 넘어서면 다시 바다와 접하고 섬의 서쪽으로 접어든다. ▲ 사리마을 정약전 유적지<출처:한국관광공사>예리 2구의 천촌리는 면암 최익현 선생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 천촌리 입구에는 면암 선생의 뜻을 기리기 위해 세운 ‘면암 최익현 선생 적거유허비’가 자리 잡고 있다. 흑산도에서 유배생활을 했던 대표적인 인물은 정약전 선생이다. 다산 정약용의 둘째 형으로 천주교 포교활동을 하다 붙잡혀 1801년에 이곳으로 유배되었다. 정약전 유적지가 위치한 사리마을은 흑산도의 대표적인 섬마을 풍경을 간직하고 있다. 흑산도에 와서 정약전이 처음 시작한 일은 사촌서당을 지어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이었다. 그는 무려 15년 동안이나 유배생활을 하면서 남서해안에 서식하는 155종의 물고기와 해산물을 채집해서 일종의 어류학 총서인 <자산어보>를 집필하기도 했다. 정약전은 흑산도에서 16년 동안 유배생활을 하다가 고향에 가지 못하고 일생을 마쳤다. 사리에는 정약전의 행적과 각종 기록물이 있다. ▲ 홍합치 해안<출처:한국관광공사>아름다운 해안을 벗삼아 심리~문암산의 가장 높은 깃대봉과 홍합치를 지난다. 홍합치는 낭떠러지 해안도로로 육로에서도 한참 비껴 나가 떠 있는 듯 보인다. 이어 가두리 양식을 많이 한다는 비리를 지나가면 서편 바닷가의 독특한 지도바위를 만난다. 바라보는 각도를 바꾸면 구멍이 한반도의 지도 모형으로 보인다. 지도바위 부근은 기암괴석이 빚어내는 으뜸 전망대로 통한다. 흔히 상라봉 전망대를 최고 전망대로 꼽지만 비포장 길과 절벽 같은 해안이 발아래로 펼쳐지는 지도바위 부근의 일주도로도 전망 포인트다. 이곳은 한반도 지도 모양의 구멍이 뚫린 지도바위와 간첩동굴 등 아름다운 해안선으로 잘 알려졌다. 또한 철골 구조로 만든 벽화도로는 흑산도에서만 볼 수 있는 명물이다. ▲ 흑산도아가씨 노래비(좌) / 상라봉에서 바라본 흑산도 앞바다(우) / <출처:한국관광공사>마리를 지나면 상라봉 전망대 입구에 닿는데 흑산도 아가씨 노래비 표지석이 있다. 이곳은 흑산도에서 가장 전망이 좋은 곳이다. 이곳에 서면 흑산도 전경과 함께 예리항 앞바다가 한눈에 들어오고, 뒤돌아서면 탁 트인 다도해를 배경으로 대장도와 소장도가 눈앞을 가로막는다. 상라봉으로 오르는 등산로에는 해상왕 장보고가 쌓았다는 반월성터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반월성과 봉화대는 흑산도뿐만 아니라 주변의 섬과 바다가 한눈에 들어오는 전망대다. 일주도로 여행의 핵심인 상라봉에서 10분만 더 오르면 흑산도 최고의 전망대, 봉화대가 나온다. 봉화대 정상 부근에 반달 모양의 성이 있다. 맑은 날이면 서쪽으로 20여㎞ 떨어진 홍도는 물론 80㎞ 밖에 있는 가거도까지 시야에 잡힌다고 한다. 전망대는 또 일출과 일몰을 모두 볼 수 있는 곳이다. 배낭기미해수욕장은 유리알처럼 맑아 흑산도에서 가장 깨끗한 해수욕장이다. 물이 유리알처럼 맑고 경사가 완만하며, 백사장이 자갈 반 모래 반이다. 물이 빠진 후 바지락을 주워 담는 재미도 맛볼 수 있다. 해수욕장 입구 송림 사이로 원목 테이블이 마련되어 있어 휴식과 야영이 가능하다. ▲ 유람선관광을 하면 만날 수 있는 기암절벽<출처:한국관광공사>흑산도의 참모습을 보고 싶다면 유람선 여행을 해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하루 3회(08:00, 13:00, 17:00) 운항되는 유람선을 타고 촛대바위를 비롯해서 학바위, 칠성동굴, 고래바위, 원숭이바위, 공룡섬 등과 같은 절경을 둘러볼 수 있다. 이 가운데서도 특히 다도해 해상국립공원의 관광자원 제1호인 촛대바위와 아침 햇살을 받으면 일곱가지 색깔로 빛난다는 칠성동굴 등이 유명하다. 흑산도에는 예리선착장이 있고 영산도, 다물도, 대장도, 소장도가 가까운 거리에 있다. 흑산도에서 쾌속선으로 30여 분을 더 달리면 홍도가 바다 위에서 떠오른다. 홍도는 섬 전체가 천연기념물(제170호)이며 다도해역의 신비를 오롯이 간직하고 있다. 총 24km의 11개의 섬마을을 만나는 흑산도 일주는 완연한 봄날의 풍취를 온전하게 보여준다. 아름다운 해변과 자그마한 포구 마을은 물론이고 다도해를 수놓는 아름다운 섬들은 오랫동안 가슴에 새겨지는 잊지 못할 여행지다. 흑산도 일주도로를 걸어서 완주하기란 쉽지 않다. 24km 정도의 긴 구간이니 예리에서 출발해 사리마을까지 택시나 버스를 이용하고 사리마을부터 상라봉과 진리까지 걷는 것이 좋다. ::: 여행 정보 ○ 관련 웹사이트 - 신안군청 : http://tour.sinan.go.kr ○ 문의전화 - 신안군청 자치관광과 : 061)240-8355 - 흑산면 사무소 : 061)275-9300 - 신안군청 관광안내소 : 061)240-8531 - 흑산농협 : 061)275-9220 - 흑산우체국 : 061)275-9442 - 흑산 예리 보건지소 : 061)275-9062 - 흑산해상관광 : 061)275-9115 - 목포역 안내소 : 061)270-8599 ○ 대중교통 - 목포항 여객선터미널 : 061)243-0116 - 흑산항 여객선터미널 : 061)275-9323 - 동양고속 : 061)243-2111~4 - 남해고속 : 061)244-9915 - (유)동양택시 : 061)246-5006 - 흑산교통관광 : 061)275-9744 - 목포여객선터미널 → 흑산도 (1일 3회 07:50, 08:00, 13:00, 1시간 50분 소요) - 흑산도 → 목포여객선터미널 (1일 3회 10:40, 13:00, 14:00, 1시간 50분 소요) - 용산역-목포역 | KTX 첫차 05:20, 막차 21:25, 45분 간격 운행 - 목포역 : 1544-7788 - 목포 종합버스터미널 061)276-0220 - 목포행 고속버스 (서울 고속버스터미널 호남선 - 목포 종합버스터미널) | 첫차 05:30, 막차 24:00, 40분 간격 운행 ○ 자가운전 정보 (1)서울 출발 | 서해안고속도로 - 목포나들목 - 목포 우회도로 - 목포여객선터미널 - 흑산도(※해상의 기상상태에 따라 여객선 운항 변동 가능.) (2)대전 출발 | 호남고속도로 - 장성분기점 - 고창분기점 - 서해안고속도로 - 목포나들목 - 목포 우회도로 - 목포여객선터미널 - 흑산도(※해상의 기상상태에 따라 여객선 운항 변동 가능.) (3)부산 출발 | 남해고속도로 - 호남고속도로 - 순천나들목 - 벌교 - 보성- 강진 - 영암 - 영산호방조제 - 목포 남악사거리 좌회전 - 목포여객선터미널 - 흑산도(※해상의 기상상태에 따라 여객선 운항 변동 가능.) (4)대구 출발 | 88고속도로 - 고서분기점 - 호남고속도로 - 서광주나들목 - 무안-광주간 고속도로 - 함평분기점 - 서해안고속도로 - 목포나들목 - 목포 우회도로 - 목포여객선터미널- 흑산도(※해상의 기상상태에 따라 여객선 운항 변동 가능.) ○ 숙박정보 <예리> - 흑산비치호텔 : 061)246-0090 - 남도장여관 : 061)275-9003 - 관광장여관 : 061)275-9915 - 개천장 : 061)275-9154 - 우리민박 : 061)275-9634 - 섬드리콘도민박 : 061)275-8505 - 보물섬 민박 : 061)271-0631 <사리마을> - 부두민박 : 061)246-3587 ○ 식당정보 - 성우정식당(홍어) : 061)275-9101 - 영생식당(해물찜) : 061)275-7978 - 우리음식점(홍어) : 061)275-9634 - 큰손식당(해물탕) : 061)275-6500 ○ 축제 및 행사정보 - 흑산도 개매기체험축제, 흑산 홍어축제 ○ 주변 볼거리 - 진리석탑 및 석등, 진리 지석묘군, 성황당, 배낭기미 해수욕장, 지도바위, 정약전유배지, 샛개해수욕장, 영산도, 다물도, 대둔도, 홍도 ▶ 관련기사 ◀☞도쿄의 인사동 100년이 통한다☞''온통 하얀 봄빛'' 섬진강 벚꽃축제 열려☞파도 따라 걷는다… 해안도로!
"지구라는 별에 인간만 살진 않잖아요"
  • "지구라는 별에 인간만 살진 않잖아요"
  • ▲ 황윤 감독[조선일보 제공] 전신거울로 추레한 나신(裸身)을 처음 제대로 쳐다보았을 때의 느낌이 이럴까. 다큐멘터리 두 편을 보고 나서 종(種)으로서의 인간이 부끄러웠다. 지난 주말(3월 27일) 대학로의 작은 극장 하이퍼텍 나다에서 개봉한 생태 다큐멘터리 '작별'과 '어느 날 그 길에서'. 10년 가까운 시간 동안 차가운 아스팔트와 동물원을 쫓아다니며 영화를 완성한 황윤(36) 감독을 1일 만났다. '생태학적 감수성'이란 표현이 어떤 의미인지를 느끼게 해준 이 여성 감독은 "지구라는 별에서 인간만 사는 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으면 좋겠다"고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느 날 그 길에서'는 로드 킬(Road Kill·도로에서 죽음)을 당하는 야생 동물들의 이야기. '작별'은 아이들에게는 꿈과 낭만의 동산인 동물원이 갇힌 동물들 입장에서는 감옥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서 비롯됐다. 소재 자체도 한국에서는 유례를 찾기 힘들지만, 이 다큐멘터리의 힘은 그의 겸손한 시선에서 출발한다. '볼링 포 콜럼바인' '화씨 9/11'의 마이클 무어(Moore)였다면 자동차에 치여 죽은 삵의 시신을 상자에 담아 도로공사 사장이나 국토해양부 장관을 집요하게 쫓아다녔을 것이다. 하지만 황 감독은 '선동'하거나 '주장'하지 않는다. 대신 고속도로 위의 비명횡사와 동물원에서 서서히 미쳐가는 풍경을 야생동물들의 입장에서 담담하게 보여줄 뿐이다. 88고속도로 남원 근처에서 교통사고를 당했던 '팔팔이'의 비극에 가슴이 저린다. 도로 이름과 건강하게 살라는 의미를 겹쳐 '팔팔이'라는 이름을 붙여줬던 암컷 삵. 순천에서 응급 치료를 받고 구례에서 방사된 뒤 12개의 도로를 넘어 다시 고향 남원을 찾아간 팔팔이. 하지만 고향에서 당한 두 번째 교통사고와 죽음. 왜 위험하게 고속도로를 다시 건너갔냐고? 그들에게는 원래 수만 년 전부터 자기들 땅이자 터전이었던 것이다. 황 감독은 "선동은 순간적이지만, 성찰은 길다"면서 "욕하고 공격하기보다, 어떻게 하면 이 '인간의 동반자'들과 조화롭게 살 수 있을지를 한 번쯤 돌아보게 하고 싶었다"고 했다. 그가 꿈꾸는 '조화로운 삶'은 그리 멀리 있거나 실천하기 어려운 일이 아니다. 신문사 인터뷰실에서 그녀가 창 밖을 가리켰다. 하얀 목련이 막 피어나려고 안간힘이다. 그는 자신의 아파트 화단 이야기도 꺼냈다. 매화와 봄의 새순을 찾아온 주먹만한 작은 새들을 목격했을 때의 기쁨. 그 풍경의 '발견'과 그 새의 이름이 '오목눈이'라는 것을 알아내는 과정이 '조화로운 삶'의 시작이라고 했다. "자연과 함께 산다는 건 그리 거창한 게 아니에요." "함께 성찰하고 싶다"는 황 감독의 소망은 작지만 울림 깊은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생면부지의 소프라노 조수미는 영화를 본 뒤 친필로 응원 편지를 보냈고, 황 감독의 취지에 공감한 배우 조재현과 방송인 김미화는 보수도 받지 않고 예고편 해설을 도와줬다. 고속도로 건설의 주체인 도로공사가 개봉 하루 뒤인 28일 황 감독을 초청해 자체 상영회를 열었고, 황 감독 영화 최대의 기여자인 야소모(야생동물소모임)와 이 영화를 응원하는 모임인 '팔팔이의 친구들'에도 격려의 글이 쇄도하고 있다. 그는 "억울한 일이 있어도 표현조차 하지 못하는 이들의 통역자이자 영매(靈媒)가 되고 싶다"고 했다. 희디흰 목련이 막 터지려 하고 있었다.
(위기의 美경제)⑥"금반지 내다파는 중산층"
  • (위기의 美경제)⑥"금반지 내다파는 중산층"
  • [뉴욕=이데일리 김기성특파원] 미국의 동부지역인 뉴저지주 놀우드에 사는 게리 허쉬씨. 중산층에 속하는 그는 올해초 고심 끝에 혼다 소형차 `피트`를 부인에게 선물했다. 그녀의 생일도 됐고 해서 10년 이상된 렉서스를 귀엽고 하얀 새차로 갈아줬다. "몇년전 막내의 첫차로 기아 `리오` 중고차를 사준 적은 있어요. 고등학생에게 굳이 큰 차를 사줄 필요는 없었으니까요. 하지만 이번의 경우는 그 때와는 달랐어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 휘발유 가격 때문에 유지비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거든요"허쉬씨는 지난해 연말만 해도 부인에게 소형차를 선물하리라곤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며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미국의 전형적인 중산층 동네인 이 곳에선 어른들이 소형차를 끌고 다니는 모습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미국 경제가 ▲주택경기침체 ▲고유가 ▲신용위기 ▲고용악화라는 4중고를 겪으면서 미국 경제의 버팀목인 중산층이 지갑을 닫고 있다. 당장 필요없는 소비는 가급적 줄이고 어쩔 수 없는 소비도 등급을 한두 단계 낮추는 경향이 곳곳에서 뚜렷해지고 있다.&nbsp;미국 경제의 70%를 지탱하고 있는 소비가 어둠속으로 쉴새없이 빨려들어가고 있는 실정이다. `소비의 왕국`이 휘청대다 못해 곤두박질치고 있는 것이다. 평범한 미국인들에겐 `경기후퇴(recession)` 논쟁은 신문에나 나오는 현실과 동떨어진 얘기다. 그들의 체감경기는 이미 그 선을 넘어선지 꽤 오래됐기 때문이다. 향후 6개월 뒤 체감경기를 의미하는 컨퍼런스보드의 3월 기대지수가 닉슨 대통령의 워터게이트 사건과 오일 쇼크가 동시에 터져나온 지난 1973년 이후 35년래 최저치로 추락한 이유는 여기에 있다. ◇소비가 죽고있다..`줄이고 또 낮추고`뉴욕 플러싱에서 보석상인 `Im Jewerly`를 운영하는 교포 리키 임씨는 요즘 당황스럽다. 달러 약세로 금값이 치솟자 금반지 등을 팔겠다고 찾아오는 손님들이 부쩍 늘었기 때문이다. "평소에는 고작해야 하루 100~200달러 정도 였거든요. 그런데 최근에는 2만달러를 넘어설 때도 있어요. 특히 이자가 쌀 때 무리해 가며 부동산을 매입한&nbsp;사람들이 심각한 곤경에 처해있어요" 임씨 고객의 상당수가 교포인 점을 감안할 때 교포사회가 심각한 경제적 어려움에 직면했음을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 미국의 경기침체로 대형 할인점이 반사이익을 누리고 있다. 코스트코 매장.사정이 이렇다 보니 임씨가 운영하는 보석상의 결혼반지 매출이 지난해보다 30~40% 정도 뚝 떨어졌다. 그렇다고 판매량이 줄어든 것은 아니다. 고객들이 허리띠를 바싹 졸라매면서 한두단계 낮은 가격의 결혼반지를 구입하고 있다는 게 임씨의 설명이다. 이같은 현상은 임씨 가게에서만 일어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미국 경제의 4중고가 기승을 부리자 `대형차 왕국` 미국에서 조차 소형차가 인기를 끌고 있다. 허쉬씨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소형차가&nbsp;히스패닉 등 저소득층이나 고등학생들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몇년 전과는 분위기가 사뭇 달라졌다. 10년래 최악의 상황을 맞은 미국 자동차시장에서 올들어 두달동안 판매가 늘어난 차종은 소형차가 유일하다. 소형차 시장점유율은 지난해의 14%에서 16%로 늘어났다. 반면 `기름 먹는 하마`인 대형차와 픽업트럭의 판매는 각각 17%와 12%씩 급감했다.웬만한 고유가나 경기둔화에도 굼쩍도 하지 않던 미국 소비자들이 두손을 들기 시작한 것이다. 그 결과 올들어 미국의 휘발유 수요가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1% 이상 감소하는 이례적인 현상까지 발생했다. 지난 2000년 허리케인&nbsp;카트리나로 멕시코만의 정유시설이 심각한 타격을 받았을 때를 제외하고 미국에서 휘발유 수요가 줄어든 것은 16년만에 처음있는 일이다. 대형 소매업체중에선 월마트, 타겟, 코스트코 등 생필품을 저렴하게 파는 할인점만 그럭저럭 괜찮은 매상을 올리고 있다. 반면 백화점과 의류 유통업체들은 한마디로 죽을 맛이다. ◇몰아치는 감원 한파..`내일이 없다`맨해튼에 거주하는 마크 슐레이스너씨는 몇달전 소프트웨어 전문가의 꿈을 펼치던 직장에서 하루아침에 해고당했다. 그동안 십여개 회사의 문을 두드렸지만 일용직(파트 타임) 신세를 벗어날 수 없었다. "경제 상황이 너무 않좋아요. 괜찮은 자리가 나왔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가면 `우리는 벌써 200개의 이력서를 받아두고 있어요`라는 말이 돌아오기 일쑤였어요"▲ 세계 금융의 중심 월가. 신용위기로 감원 한파가 거세게 몰아치고 있다.미국이 감원 한파에 휩싸이면서 실직자들의 신음소리가 커져만 가고 있다. &nbsp;비농업부문 고용은 올들어 두달 연속 감소했다. 지난해말까지만 해도 미국 경제를 떠받치고 있던 고용시장이 동력을 상실했음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nbsp; 게다가 감원 행렬이 `디트로이트`의 고장난 자동차업체에서만 주로 발생하던 시기는 벌써 지나갔다. 이젠 메인스트리트(실물경제)와 월스트리트(금융권)의 구분이 없어졌다. 오히려 서브프라임 모기지발 신용위기로 된서리를 맞은 월스트리트의 고통이 더 심각해졌다. 지난해 여름 신용위기 발생 이후 월스트리트의 실직자수는 3만4000명에 달하고 있다. 심지어 앞으로 몇년동안 미국 금융권에서 10만명 이상이 일자리를 잃을 것이라는 암울한 전망도 흘러나오고 있다. 이같은 월가의 고용 위축은 2001년 닷컴 거품이 붕괴된 이후 7년만에 처음이다. 이에 따라 월스트리트가 위치한 뉴욕의 경제가&nbsp;타격을 받기 시작했다.&nbsp; ◇`그래도 희망을 건다`..미국은 미국이다하지만 미국사회가 비관적인 목소리로 온통 가득찬 것만은 아니다. 미국의 잠재력 및 회복력에 대한 믿음 역시 강하다. 허쉬씨는 "미국 사람들은 정직하고 성실하기 때문에 지금과 같은 혼란은 오래 가지 않을 것"이라며 "내가 소형차를 구입하는 것은 이번이 마지막일 것"이라고 희망했다. 포트 핏 캐피탈그룹의 에릭 그린은 "신용위기가 월가 역사에 오점으로 남게 됐지만 결국은 고통속에서 경쟁력을 높이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CCLA 인베스트먼트 매니지먼트의 최고투자책임자(CIO)인 제임스 베반은 "(경제 회복에 올인하고 있는) 미국 정부와 연준의 노력을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다"며 낙관적인 기대를&nbsp;잃지 않았다.
2008.03.28 I 김기성 기자
박경림 21대 별밤지기 낙점, 15년 꿈 이뤘다
  • 박경림 21대 별밤지기 낙점, 15년 꿈 이뤘다
  • ▲ 21대 별밤지기가 된 박경림[이데일리 SPN 유숙기자] 방송인 박경림이 MBC 표준FM ‘별이 빛나는 밤에’(이하 ‘별밤’) 21대 별밤지기가 됐다. 박경림은 10여 년 전 고등학생 시절 ‘별밤’ 여름 캠프인 ‘별밤 가족마을’에 참가해 캠프행 버스 안에서 좌중을 휘어잡는 재치를 발휘하며 담당 작가에 발탁, 청취자 참여 코너 사회를 보며 방송에 입문했다. 박경림은 “’별밤’은 나에게 단순한 라디오 프로그램이 아니다. ‘별밤’을 통해서 세상을 알았고 꿈을 키웠고 희망을 얻었다”며 “학창시절 내가 ‘별밤’을 들으며 키워왔던 꿈과 희망을, 이제는 많은 청소년들과 청취자들에게 돌려 드리고 싶다”고 각오를 밝혔다. 박경림 소속사 측은 “박경림이 지난 2년간 MBC 라디오 ‘심심타파’를 진행하면서 많은 체력소비로 인해 밤 시간대 DJ를 하차해야만 했다”면서 “그러나 15년간의 꿈이었던 별밤지기는 포기 할 수 없어 DJ 제의에 흔쾌히 응했다”고 출연 이유를 전했다. 새 별밤지기 박경림은 4월7일부터 ‘별밤’과의 새로운 인연을 이어간다.▶ 관련기사 ◀☞박경림 "요리 잘하는 남편 덕에 결혼생활 깨소금 맛"☞남성진-김지영, 이봉원-박미선...SBS 라디오 봄 개편 카드는 '부부 DJ'?☞[라디오의 재발견⑦]'별밤지기'박정아, "라디오는 제 2의 인생 배움터"☞[라디오의 재발견④]기록으로 돌아보다...최장수 프로그램, DJ는?☞[라디오의 재발견③]유희열 이소라에서 박명수 컬투로...DJ '격세지감'
2008.03.27 I 유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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