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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종섭, 아무리 웃으려해도… 그의 가슴은 울고 있었다
  • 백종섭, 아무리 웃으려해도… 그의 가슴은 울고 있었다
  • [조선일보 제공] 역대 최다인 13개의 금메달을 따고 돌아온 한국 올림픽 선수단이 떠들썩한 환영 속에 개선한 25일 오후, 백종섭(28)은 건국대학교 병원의 한 병실에서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올림픽 소식이 쉬지 않고 흘러나오는 TV 소리를 뒤로 하고 백종섭은 애써 웃어 보였다. "이제 다 지난 일이잖아요. 생각하면 마음만 아프죠." 열흘 전 그는 베이징에서 포효했다. 돌보다 단단한 복싱 60㎏급 올림픽 대표였다. 부전승으로 32강을 통과한 뒤 16강전에서 태국의 난적 피차이 사요타를 10대4로 가볍게 물리쳤다. 경기가 끝난 뒤 백종섭은 무어라고 소리쳤다. TV중계로 지켜보던 팬들은 잘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가 궁런(工人)체육관에서 외친 내용은 "민주 파이팅! 백민주 파이팅!"이었다. 백민주. 아테네 올림픽이 열리던 2004년 태어난 백종섭의 딸이다. 어느새 4살이 된 딸 민주에게 백종섭은 늘 '미안한' 아빠였다. 몸이 아파 자주 병원 신세를 져야했던 딸을 베이징올림픽 준비를 하느라 제대로 보살펴주지도 못했다. 베이징으로 떠나기 전 집을 찾은 백종섭이 "아빠가 뭘 해줄까"라고 묻자 민주는 "다치지 말고 건강히 돌아오고, 꼭 엄마 목에 메달을 걸어주라"고 했다. 병상의 백종섭은 눈시울이 붉어졌다. 백종섭은 아직도 현실이 믿겨지지 않는다고 했다. "16강전 후 늦은 저녁을 먹었습니다. 깍두기를 먹는데 느낌이 이상했어요. 가슴 속에 큰 덩어리가 있는 느낌이었죠." 그날 저녁 CT(컴퓨터단층촬영) 검사를 받았지만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8강전 전날인 18일 백종섭은 의무실로 불려갔다. 천인호 대표팀 감독은 백종섭에게 "더 이상 뛸 수 없겠다"고 했다. 눈 앞이 캄캄해졌다. 8강전만 넘으면 목에 거는 동메달은 20대 후반의 그가 병역 특례 혜택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메달을 딴 뒤 태권도 선수 출신의 아내 차문이(28)씨와 태보(태권도와 복싱을 혼합한 운동) 체육관도 차리고, 늦었지만 면사포도 씌워줄 요량이었다. "코 앞에 있던 꿈이 단숨에 달아나더라고요. 미처 잡을 틈도 없이…." 기관지가 찢어졌다는 진단이었다. 16강전에서 상대 펀치에 목을 얻어맞은 결과였다. 폐에서 나온 공기가 파열 부위로 새어 나와 심장을 비롯한 여러 장기를 압박하고 있었다. 과격한 운동을 할 경우 생명에 지장을 줄 수도 있다는 진단이 나왔다. "감독님께 '죽어도 좋다'는 각서를 쓰고 링에 오르겠다고 했어요. 울면서 애원했지만, 소용이 없었죠. 감독님인들 저처럼 메달에 대한 미련이 없으셨겠어요? 다 저를 보호해 주시려고 그러신 거죠." 백종섭은 결국 기권을 해야 했고, 21일 먼저 귀국했다. 휠체어를 타고 입국장을 빠져 나오는 아빠를 딸 민주가 맞았다. 민주는 "아빠, TV에서 봤어. 내가 응원했다. 메달 필요 없으니 얼른 낫기나 해"라며 오히려 아빠를 위로했다. 백종섭은 병실에서 후배 김정주(69㎏급)의 경기를 지켜보며 또 한번 울었다고 했다. "제가 먼저 떠날 때 정주가 '형의 한을 꼭 금메달로 풀어주겠다'고 했어요. 정주의 손등 뼈에 금이 간 걸 저도 알고 있었어요. 그런 정주가, 때리면 자기 손이 더 아픈 정주가 정말 처절하게 경기를 하는 걸 보니 저도 모르게 눈물이 흐르더군요." 백종섭은 3주 정도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퇴원할 예정이다. 올해 말이면 아내와 딸을 두고 군에 입대해야 한다. 백종섭이 군에 입대하고 나면 당장 남은 가족의 생계도 막막한 상황이다. "그래도 글러브를 낀 뒤로 가장 큰 성원을 받은 날들이었어요. 행복했던 만큼 더 많이 아팠던 올림픽이었던 셈이죠. 메달만 땄더라면 이렇게 힘들진 않았을 텐데…." 링거를 꽂은 채 애써 웃던 복서는 끝내 말을 잇지 못한 채 고개를 떨궜다.
(딸기아빠의 재무설계)ELW, 복합불황기에도 수익 내는 역발상 투자!
  • (딸기아빠의 재무설계)ELW, 복합불황기에도 수익 내는 역발상 투자!
  • [이데일리 김종석 칼럼니스트] 도대체 하락의 끝은 어디일까? 경제가 좀처럼 회복하지 못하고 오히려 침체국면에 진입하고 있어 복합불황기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라 발만 동동 구르고 있는 모양새다. 부동산, 펀드, 주식, 채권 어느것 하나 마음 편하게 투자할 수 없는 상황에서 최근의 주식시장 동향을 살펴보고, 주로 문의되는 펀드투자전략과 주가하락 기에도 수익을 낼 수 있는 역발상 투자에 대해 알아본다. ◈ 국내펀드, 장기투자모드로 전환하자! 외국인들의 공격적인 매도공세, 신용위기와 스태그플레이션이라는 악몽을 이겨낼 만한 꿈이 보이지 않는 시계제로에 갇혀있는 상황이 지속되고 있다. 국내증시는 지난해 11월 1일 2,085포인트를 기록한 후 지난 22일 기준 28%의 하락을 보이고 있다. 그나마 국내증시는 글로벌증시하락에 비하면 양반인 셈이다.  매년 10%가 넘는 고속성장으로 끊임없는 오를 것만 같던 중국증시의 하락세에, 뒤늦게 중국펀드에 뛰어든 투자자들의 심리는 문자 그대로 공포국면에 치닿고 있다. 지난해 10월 16일 기준 장중 6,124포인트를 기록하던 상해종합지수는 22일 현재 2,405포인트를 기록하며 지난해 고점대비 61%의 폭락세를 보이고 있다. 어떤 이에게는 대박의 꿈이었을 것이나 대다수 투자자들의 피와 땀의 대가가 수익은커녕 불과 1년도 안된 시간에 되돌리기 힘든 구렁텅이로 빠져든 것이다. 지난 22일 국내증시의 심리적 지지선인 1500포인트가 붕괴되자 투자자들의 문의가 이어지고 있다. 그 중 가장 많은 질문이 국내펀드와 중국펀드에 대한 매수와 환매이다. 신규 투자의 경우 현재의 경제위기상황이 진정되는 것을 확인 후 진입해도 늦지 않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주식가격이 높은지 낮은지를 나타내는 지표인 주가수익비율(PER)은 국내증시가 9.5배 수준으로 실적에 비해 낮은 수준의 벨류에이션을 보이고 있어 장기투자모드로 전환하면 그리 비관적이지 않지만, 지난해 실적대비 19배의 PER를 보이고 있는 중국증시에 대해서 고려해야 할 점이 많다는 것이다. 중국증시의 경우 향후 전망에 대해 저점에 이르렀다는 낙관론과 추가하락가능성이 크다는 두 개의 시각이 상존하고 있다. 증권사의 경우가 전자에 해당한다면 경제연구기관은 후자에 가깝다. IMF, World Bank, ADB 등 국제기관들은 유가상승, 세계 경기침체 등에 따른 중국경제 영향을 감안하여 최근 2008과 2009년의 중국 경제성장 전망치를 9%대로 하향 조정하고 있다. 이는 올림픽 밸리효과(Valley Effect; 올림픽 이후 경제가 빠르게 침체되는 현상으로 개최전의 각종 개발과 건설 붐으로 경기가 과열국면에 들어섰다가 올림픽이 끝나고 일정 기간이 지나고 나면 경기침체가 빠르게 진행되는 것)가 당초 예상보다 크고, 미국에 비해 상대적인 고금리와 위안화 절상으로 인한 환차익을 노리고 투자된 핫머니의 유출 등의 위험도 간과할 수 없는 요소이다. 따라서 지나친 낙관보다는 장기침체에 대비하여 증시부양책으로 인한 반등시 비중을 줄이는 것이 유효하다고 판단한다. ◈ ELW(주식워런트증권), 주가가 하락해도 수익을 낸다? ▶ELW, 미래가격을 매매한다. 기존에 주식투자에서 수익을 내기 위해서는 주식가격이 올라야만 수익을 낼 수 있었다. 그러나 2005년 12월부터 시행되고 있는 ELW를 이용하면 주가가 하락해도 수익을 낼 수가 있다. 하루에 거래대금만도 3000억원 가량 거래되고 있으며, 도입된지 2년 만에 세계 4위에 이를 정도로 고수라는 사람들은 약세장에서도 적잖은 수익을 내고 포트폴리오 관리차원에서의 헤지용으로 활용되는 상품 중 하나이다. ELW는 Equity Linked Warrant의 약자로 특정주식 을 사는 것이 아닌 특정시점에 특정가격으로 ‘사거나 팔 수 있는 권리’를 매매함으로써 수익을 낸다. 주가가 올라갈 것으로 예상한다면 지수나 개별종목의 콜(Call)워런트를 사고, 하락이 예상된다면 풋(Put)워런트를 매수하면 수익을 낼 수 있는 상품이다. 따라서 지금처럼 주가가 하락하는 상황에서 추가하락할 것으로 예상이 된다면 풋워런트를 매수하면 수익이 나는 것이다. 예를 들어, 현재 10000원인 주식이 3개월 후 15000원까지 오를 것이라고 예상하여 3개월 후에 15000원에 살수 있는 권리를 가진 ELW를 500원에 샀다고 하자. 3개월 후 A주식 가격이 20000원이 된다면 15000원에 사서 20000원에 팔 수 있으니 단순하게 500원을 투자하여 5천원을 벌게 된다. 그러나 15000원에 다다르지 못하면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숫자를 맞혀보고 버려지는 로또복권과 같은 신세로 전락하게 된다. ▶ELW증권의 종류, 3000종목이상이 상장되어 있다. ELW는 주가가 오를 것으로 전망한다면 콜워런트를, 주가하락을 예상한다면 풋워런트를 매수하면 되며, 크게 방향성에 따라 콜과 풋으로 나눌 수가 있다. 이처럼 방향성을 먼저 설정했다면 실제로 투자할 수 있는 종목을 선택해야 한다. ELW는 흔히 코스피지수가 기초자산이 되는 ‘지수형’과 개별 30개 종목등이 기초자산으로 구성된 ‘종목형’이 있다. 지수와 각 종목의 콜과 풋이 증권사별로 발행된다. 코스피200을 기초자산으로한 지수형 ELW의 경우 8월 22일 기준 상장종목수가 334종목에 이르고 있으며, 개별종목을 포함한다면 3000개 이상의 종목이 거래되고 있다. 하지만 언제든 현금화 할 수 있는 환금성이 확보된 종목의 수는 많지 않으므로 거래량, 만기, 행사가격 등을 확인 후 종목을 선택해야 한다. ▶장점 vs. 단점 ELW는 주식투자에 비해 레버리지 효과가 큰 것이 특징이다. 다시 말해 적은 돈으로 큰돈을 벌 수 있는 기회가 있지만, 투자자산을 순식간에 날릴 수 있다는 리스크도 있다. 주식의 경우 하루에 상승과 하락할 수 있는 범위가 15%로 제한되어 있지만 ELW는 제한이 없이 움직여 전형적인 High Risk, High Return 상품으로, 이점이 ELW의 가장 큰 장점이자 단점이 된다. ▶거래방법, 주식처럼 HTS를 통해 거래가능 ELW거래방법은 주식과 같다. 다만 고위험 상품으로 반드시 ‘위험고지 등록’(인터넷에서도 가능)을 해야만 매매가 가능하다. 거래단위는 10주이며, 거래세(0.3%)가 없으며 가격제한폭(주식: 15%)이 없다. 매매주문은 HTS나 증권회사 영업점을 통하면 된다. ▶ELW 투자포인트 및 유의사항 1. 높은 변동성: ELW가격은 기초자산(코스피200, 개별종목)에 비해 훨씬 더 큰 폭으로 가격이 변동하므로 기초자산의 가격이 예상과 달리 움직이는 경우 투자원금의 전부나 일부를 잃을 수 있다. 2. 상품의 복잡성: ELW는 상품의 손익구조가 복잡하고 가치측정을 위한 투자지표들을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있다. 3. 높은 프리미엄: 투자자가 ELW를 구입하기 위해 지불해야 하는 금액(프리미엄)이 만기, 행사가격, 발행자 신용도, 상장비용 등이 반영되어 동일한 조건의 주식옵션보다 높게 형성되어 있다. 4. 높은 투자위험: 레버리지 효과의 양면으로 주식투자에 비해 위험성이 높다. 5. 의결권 행사 및 배당금 수령 불가: 주가변동에 따른 자본이득(Capital Gains)만 존재하므로, 주식에 직접투자 할 경우 주주로서의 의결권 행사 및 배당금 수령이 불가능 하다. ELW에 투자하기 위해서는 기초자산의 전망이 우선되어야 하며, 잔존일수가 길고 거래가 활발한 종목에 투자하는 것이 유리하다. ELW는 포트폴리오의 위험을 분산해주는 더없이 좋은 상품일 수도 있는 반면, 얼핏 보면 로또복권처럼 대박 혹은 쪽박상품이다. 물론 상품의 특징과 위험구조를 잘 안다면 전자일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후자일 가능성이 크다.  (본 칼럼은 우리투자증권의 공식적인 투자의견이 아닌 사견임을 밝힙니다.) (김종석 우리투자증권 용산지점 차장/ 딸기아빠의 펀펀 재테크 저자)
2008.08.25 I 김종석 기자
나이트클럽 화재가 부른 참사 `형제 소방관의 죽음`
  • 나이트클럽 화재가 부른 참사 `형제 소방관의 죽음`
  • [노컷뉴스 제공] 20일 새벽 5시 반쯤 서울 은평구 대조동의 한 나이트클럽에서 불이나 화재 진압에 나섰던 소방관 세 명이 숨졌다. 순직한 소방관은 조기현 소방장(45), 김규재 소방장(41), 변재오(35) 소방사로 확인됐으며, 모두 은평소방서 화재진압팀 소속이다. 조 소방장 등은 나이트 클럽 화재를 진압하기 위해 건물 외벽을 뚫고 2층으로 진입했지만, 일명 '샌드위치 판넬'로 된 건물 천장이 조명장치 등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무너져 내리면서 건물 안에 고립됐다. 은평소방서 권병용 대응관리 과장은 "소방관들이 건물에 고립된 뒤 공기통의 공기가 모두 떨어지면서 연기에 질식한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이들은 다른 소방관들에 의해 구조돼 인근 병원으로 긴급 후송됐지만 끝내 숨졌다. 권 과장은 또 "소방관들이 건물 내로 진입할 당시에는 안에 사람이 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어, 일단 진입 작전을 펼쳤다"고 설명했다. 이날 불은 3층 건물 가운데 나이트 클럽으로 운영되던 건물 2층과 3층, 1200㎡를 태운 뒤, 화재 발생 1시간 30여 분만인 6시 50분쯤 진화됐다. 하지만 10시 현재까지도 일부 잔불이 남아 있어 소방당국은 잔불 정리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국과수 등의 정확한 화재 조사는 잔불 정리 작업이 마무리된 이후 시작될 예정이다. 경찰과 소방당국은 "새벽 4시쯤 모든 정리를 마친 뒤 클럽 문을 닫고 나왔다"는 종업원의 진술과 목격자들의 진술을 바탕으로 정확한 화재 원인을 파악하고 있다. 경찰은 특히 "건물 내부 한 구석에서 보수공사를 진행하고 있었다"는 종업원의 진술에 따라, 현재 '누전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있다. 화재가 난 건물은 지난 1992년 지어졌으며, 2,3 층은 나이트클럽으로 1층은 옷가게 등 일반 상가로 이용돼 왔다. ◈유족들 오열…형제 소방관, 동생 죽음에 안타까움 키워 한편 순직한 세 소방관들의 빈소는 신촌 연세 세브란스 병원에 차려졌다. 특히, 숨진 조기현 소방장의 형님도 동대문 소방서에 현직 소방관으로 근무하고 있는 형제소방관인 것으로 확인돼 주위 사람들의 가슴을 아프게 하고 있다. 형제가 모두 소방에 투신해 '형제' 소방관으로 널리 알려져 있었는데, 동생이 먼저 유명을 달리했다는 소식에 소방 가족들 모두 슬픔을 감추지 못하는 표정이다. 조기현 소방장은 지난 91년 소방사로 소방관에 임용돼 올해로 17년째 근무를 해왔다. 순직한 김규태 소방장은 40살 부인 사이에 11살, 13살 자녀를 뒀다. 김 소방장은 칠순의 노모를 모시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또 순직한 35살 변재오 소방사는 지난해 소방에 투신해 꿈을 제대로 펼쳐 보지도 못한 채 첫 발령지에서 사고를 당해 주위 사람들의 가슴을 아프게 하고 있다. 소방관계자들은 빈소에 유족들이 모인 뒤 유족들과 보상 등 향후 대책을 논의할 방침이다.
(인물탐구)박경철③ "시장의 고통은 1년 이상 갈 것"
  • (인물탐구)박경철③ "시장의 고통은 1년 이상 갈 것"
  • [이데일리 이의철 논설위원] -칼럼 쓰면서 시장과 관련된 코멘트가 좀 줄어들었는데. “원래 별로 하지 않았다. 지금도 시장 관련 전망은 거의 하지 않는다. 기자들이 물어보면 답하는 정도. 시장을 예측한다는 것은 무의미하다. 다만 내 입장이 중립지대이기 때문에 이해상충 문제 없이 내 생각을 얘기할 수 있다. 내가 기관에 소속된 사람도 아니고, 그렇다고 소위 말하는 재야 고수도 아니지 않는가. 시장과 관련된 코멘트로 내가 돈을 버는 일은 없는데, 그런 이해관계를 만드는 순간 내가 책임질 수 없는 상황으로 빠진다는 것을 너무 잘 안다”  -개미투자자들의 수호신이란 이미지도 그래서 생긴 것인가. “그런 측면도 있겠지. 그렇지만 시장에서 기관과 개인을 구분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기관투자가들이 굴리는 돈은 개인들이 맡긴 돈 아닌가. 지금의 시장은 상당히 체계화돼 있다. 전문적인 리서치 집단이 아니고선 누구도 함부로 말할 수 있는 여건이 아니다. 2000년 이전과는 분명 차별화 돼 있다. 다만 시장이 너무 과도히 나갔을 때, 극단으로 치달을 때, 그리고 내 생각에 이건 아니다는 확신이 들 때는 강하게 얘기한다. 예를 들어 지난해 하반기 중국시장에 대해선 ‘이건 아니다’는 강한 확신이 있었다. 표현이 뭣하지만 ‘똥밭에 눈이 내린 격’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점들이 개인투자자들에게 어필한 측면이 있는 것 같다” -우리 증시에 대해 물어보지 않을 수 없다. 한국의 증시 상황에 대해 어떻게 보는가. “시장 전망이 51% 맞으면 재벌 되는 거다. 나도 통계적으로 보면 50% 정도 맞는다. 동전을 던져도 그 정도는 나오는 것 아닌가. 크게 실수한 부분이 있는데 지난해 말 다우지수 1만선, 상해지수 2500선까지 내려간다고 경고하면서 한국시장 차별화 가능하다고 했는데, 결과적으로 틀렸다. 미국은 서브프라임 같은 신용위기, 중국은 설비과잉에 따른 재고조정을 우려했다. 한국에 대해선 1500을 바닥으로 반등할 것이라고 예상했었는데, 이렇게까지 무너질 지는 몰랐다. 향후를 전망한다면 미국은 지금 1단계 하락 정도만을 통과한 것 같고, 중국도 회복되려면 2-3년 정도 지나야 할 것 같다. 한국 경기는 내년 하반기 정도부터 좋아지지 않을까. 주식시장은 이보다는 좀 빨리 반등하겠지. 현재 한국 주식시장은 현저히 싸지도 않고, 그렇다고 고평가된 상태도 아닌 어정쩡한 상황이다” -박 원장이 생각하는 투자란 무엇인가. “투자란 잉여를 늘리려는 행동이고, 투기는 결핍을 메우려는 행동이다. 잉여의 크기가 기회의 크기라면, 결핍의 정도는 리스크의 크기다. 쉽게 말해서 여윳돈을 갖고 투자해야 한다는 얘기다. 빚내서 주식하면 불안해지고, 불안해지면 정상적인 판단을 못한다. 가능성만으로 돈을 빌리는 것은 악마에게 영혼을 파는 행위다” -개인이 현 상황에서 돈을 벌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집도 마련하고, 차도 사고 싶고, 교육비도 마련하고 싶어서 주식 투자하면 백전백패다. 집도 있고 차도 있고, 애들도 웬만큼 컸고 ‘이제 남은 돈으로 뭘 좀 해볼까’ 이렇게 돼야 성공한다. 개인투자자들이 크게 착각하는 게 있는 데 결핍은 투자로 메꾸는 게 아니다. 땀과 노력으로 채우는 것이다. 부족분을 투자로 메꾸겠다는 생각 자체가 잘못된 것이다” - 박원장의 땀과 노력은 무엇이었나. “아버님이 경찰공무원이었는데, 5공 시절에 과로사 하셨다. 가세가 급격히 기울었고, 어머님이 사기까지 당하면서 큰 빚을 졌다. 종합병원 그만두고 개업한 이유도 월급으로는 빚을 갚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충남 공주에서 93년에 병원을 개업했는데 첫날 환자가 28명 오는 것 보고 이제 망했구나 싶었다. 그런데 한달 지나니까 200명, 6개월 지나니까 300명으로 불어났다. 5년간 병원을 열면서 단 하루도 쉬지 않고, 24시간 365일 병원 문을 열었다. 야전침대 놓고 병원에서 먹고 자면서 환자를 봤다. 당시 공주 같은 소도시에선 밤에 아프면 갈 병원이 없었다. 소문이 나니까 논산에서까지 환자들이 찾아왔다. 1년 반 지나니까 빚을 다 갚게 되더라. 개업 3년차 땐 의사 1인당 환자 진료실적으로 전국 5위권에 들었다. 그러면서 환자들한테 고마웠다. 내 빚도 갚게 해주고, 내 삶도 다시 희망을 갖게 만들어주었으니...” -계속 의사만 했어도 돈 더 벌었을 텐데. “빚 갚고 남는 돈으로 투자해서 투자수익도 꽤 올렸다. 병원 건물 계약이 5년 이었는데, 병원이 너무 잘 되니까 건물주가 나가라고 하더라. 그때 생각했다. 더 이상 돈에 욕심내선 안되겠다. 그래서 다시 병원을 열지 않고 안동으로 왔다. 1년 이상 푹 쉬다가 2001년 지금의 신세계병원을 열었다. 놀 때는 매일 같이 사람 만나고 다녔다. 매일 전화해서 밥사는 게 일이었다. 새로운 이를 만나서 새로운 트렌즈를 듣고, 그러면서 세상에 대한 눈을 더 틔었다” -민주당 공천심사위원으로도 활동했는데, 정치에 관심은. “추호도 없다. 당시 민주당에서 비례대표의원으로 날 추천하겠다고 해서 픽 웃고 말았다. 그렇다면 심사위원 맡아달라고 해서 그건 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자격 없는 사람들이 정치하는 것은 막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런 점에서 나는 시민으로 살고 싶다. 50이 되면 내 아호는 ‘시민’이다. 지금은 ‘시골의사’ 박경철이지만 그 땐 ‘시민’ 박경철이 되는거다” -시민이란 개념은 무엇인가. “시민은 백성과 대비되는 개념이다. 비판적으로 사고하는 능력을 가져야 한다. 굳이 영어로 표현하자면 capacity for critical analysis 가 되겠다. 비판적 분석만 하고 행동을 하지 않으면 사이비다. 흔히 야만적 지식인들이 하는 행위다” -자녀 교육에 대한 철학이 있나. 경제교육 같은 것도 따로 시키는지. “자녀들은 부모를 따라하게 마련이다. 부모는 자녀들에게 앞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지만 실제 자녀들은 부모의 뒷모습을 보면서 쫓아온다. 사람의 뒷모습은 추하기도 하고, 때가 묻어있기도 하다. 자녀들에게 내 뒷모습을 보여주겠다는 생각으로 살고 있다” -개인의 비전은 무엇인가. “이상한 얘기 같지만 목표가 없다. 과거에도 목표는 없었다. 무엇이 되겠다는 목표를 한번도 생각해 본 적 없다. 닥친 일을 성실히 했고, 다행히 지금까진 그 이후에 할 일이 반드시 생겼다. 기회가 닿으면 농사짓고 살고 싶다는 바램은 있다” @박경철 원장과의 인터뷰는 2시간 남짓 진행됐다. 처음엔 30분 정도만 예정됐었는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인터뷰 시간이 길어졌다. 인터뷰어로써, 또 인터뷰이로써도 박원장은 프로였다. 인터뷰를 마치고 난 후 내가 인터뷰를 한 것인지, 당한 것인지 알쏭달쏭할 정도였으니까. 시시콜콜한 가정사와 개인사까지 솔직히 말해준 박 원장에게 지면을 빌어 감사를 전한다. ▶ 관련기사 ◀☞(인물탐구)박경철② "같이 행복해지는 사회가 꿈"☞(인물탐구)박경철① "나의 관심사는 시장의 건강"
2008.08.19 I 이의철 기자
도전, 자유, 용기... 서태지 키즈 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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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빅뱅, 이준기, 최송현, 이하나(사진위부터 시계방향)[이데일리 SPN 최은영기자] 연예계 전반에 서태지 키즈가 강세를 보이고 있다. 1992년 서태지의 등장은 충격 그 자체였다. 대중문화사에 한 획을 그으며 등장한 서태지는 90년대를 대표하는 문화 아이콘이자 도전의 상징으로 통했다. 그런 서태지를 보고 자란 일명 '서태지 키즈'는 기성세대의 고정관념을 과감히 깨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나름의 성공을 일궈나간다. 서태지 키드의 가장 큰 공통점은 세상이 정해놓은 형식의 틀에 얽매이지 않는다는 데 있다. 정형화된 틀을 거부하고 제도권 안에서 놀기를 꺼려한다. 대표적인 가요계 서태지 키드로는 빅뱅을 꼽을 수 있다. 빅뱅은 아이들 그룹이지만 여느 아이들과는 분명 그 노선을 달리해왔다. 스스로 작곡에 프로듀싱 능력까지 갖추고 음악에 패션 트렌드까지 리드하고 있다. 서태지의 컴백 방송 타이틀은 '북공고 1학년 1반 25번'이었다. 서태지는 17살 때 음악에 대한 열정으로 재학중인 서울북공업고등학교를 자퇴했다. 지금의 음악인 서태지는 남들이 모두 무모하다 손가락질할만한, 그런 상황 속에서 탄생됐다. 빅뱅 멤버들도 자신들의 꿈을 일찌감치 간파하고 학업 대신 음악을 택하는 과감함을 보였다. 빅뱅의 멤버 대성과 승리는 빅뱅으로 데뷔하기 전인 2006년, 가수 활동에 전념하기 위해 과감하게 고등학교를 자퇴했다. 학업과 가수 활동을 동시에 잘 해낼 수 없다는 판단에서 내린 결정이었다. 대성은 당시 2학년, 승리는 1학년 때의 일이다.그렇게 성장한 빅뱅은 자신들의 음악적 꿈을 키우며 우상으로 삼았던 서태지와의 맞대결도, 연예계 휴지기로 불리는 올림픽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서태지와 맞대결을 오히려 기회로 생각했고, 올림픽이 무서워 피하기는 커녕, 올림픽을 덤으로 즐기며 정면돌파하는 무소의 뿔과 같은 꿋꿋함을 보였다. 그리고 멘토와 멘티 관계였던 이들은 나란히 가요계를 이끌며 승승장구하고 있다. 서태지는 4년6개월만에 선보인 싱글 '모아이'로 싱글 사상 첫 10만장 돌파라는 값진 성과를 거뒀고, '스탠드 업(Stand Up)'으로 컴백한 빅뱅은 타이틀곡 '하루하루'를 비롯, 앨범에 수록된 전곡을 오프라인 차트 상위권에 올려놓는 동시에 발매 열흘만에 8만장을 팔아 치우는 괴력을 발휘해 보이고 있다. 서태지 키드가 여느 키드 세대들과 다른 점은 가요, 영화 등 어느 한분야에 국한되지 않고 무한 영향력을 과시한다는데 있다. 요즘 두각을 나타내 보이고 있는 서태지 키드로는 빅뱅 이외에 이준기, 이하나, 최송현 등을 들 수 있다. 서태지 키드들은 '도전' '용기' '자유' 등의 단어로 압축되는 서태지의 정신은 이어 받돼 자신만의 활동 분야에서 이를 응용해 무한 진화를 거듭해 가는 특징을 지닌다. 서태지가 컴백할 무렵 스스로 태지 마니아임을 밝혀 화제를 모은 최송현은 지난 6월 돌연 KBS의 차세대 간판 아나운서의 자리를 박차고 나와 세상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아나운서로 승승장구하던 그녀의 선택은 분명 뜻밖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연예계 진출이라는 과감한 선택으로 세상을 또 한번 놀라게 했다. 서태지의 공식 컴백무대로 화제를 모은 ETP FEST 현장에 노란 우비를 입고 '영웅의 귀환'을 반긴 이하나도 서태지의 정신을 이어받은 '튀는 20대'임엔 틀림없다. '연애시대'의 지호, '메리대구 공방전'의 메리, 영화 '식객'의 진수에 이르기까지 한창 예뻐 보이고 싶을 나이 이하나는 망가짐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리고 극과 극의 캐릭터를 오가며 스스로를 시험하고 또 자신의 가능성을 타진했다. 최근 '태양의 여자' 윤사월로 일군 성공은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았던, 도전의 산물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하나는 최근 모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나 스스로도 내 반전이 기대된다'고 말한 바 있다. 이하나는 '태양의 여자'로 자신의 가치를 충분히 인정받은 이후에도 스스로의 반전이 만족스럽지 못하다, 약했다며 더 큰 포부를 드러내고 있기도 하다. 서태지 팬임을 자처해오다 서태지 컴백방송의 일일 여행 파트너가 되는 행운까지 거머쥔 이준기도 대표적인 연예계 '서태지 키드'. 얼마전 화제 속에 종영한 드라마 '일지매'로 영화 '왕의 남자'로 일군 천만 배우의 저력을 다시 한번 입증해 보인 이준기는 중학교 때부터 가수 서태지의 열혈 팬이었다. 서태지는 당시 방송 녹화를 마치고 "이준기는 겸손하고 생각이 깊은 친구였다. 또 한편으로는 나와 닮은 점도 많았다. 한때 나의 중학생 팬이었던 사람이 이렇게 멋지게 성장한 모습이 자랑스러웠다"고 이준기의 첫 인상을 말한 바 있다. 이준기는 이후 자신의 미니홈피에 서태지로부터 휴대폰 케이스에 받은 친필 사인과 사진 등을 공개하며 서태지처럼 나도 누군가의 젊은 날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아티스트가 되고 싶다는 말로 한때 영웅이었던 서태지의 기대에 화답한 바 있다. 전문가들은 "서태지 키즈는 단순히 그를 따라하거나 모방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정신을 바탕으로 보다 다양한 분야에서 새롭게 진화하는 특징을 지닌다"며 "독창성과 창의성을 기본으로 하는 연예계에 서태지식 도전정신으로 무장된 이들의 활약은 어찌보면 당연하고, 또 이들의 성공은 연예계 전반에 신선한 자극으로 받아들여져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상된다"고 분석했다. ▶ 관련기사 ◀☞[90's 스타워즈①]가요계 강타 '90 스타...'우리는 30대 아이들!'☞서태지, 계속되는 신화창조...'싱글 사상 최초 15만장 돌파'☞서태지 내년까지 '롱런' 활동 예고...12월께 '싱글-정규' 추가 발매☞서태지, 광복절에 선보인 '무대혁명'..."잊을 수 없는 밤"☞서태지, "내게 영향 준 뮤지션은 들국화"▲ 서태지
2008.08.19 I 최은영 기자
애국심 스타 뜬다..."사랑합니다! 대한민국"
  • [윤PD의 연예시대①]애국심 스타 뜬다..."사랑합니다! 대한민국"
  • ▲ 추성훈, 김장훈, 이승엽(왼쪽부터)[이데일리 SPN 윤경철 객원기자] '아이 러브 대한민국' 대한민국을 사랑하는 연예인들이 대중의 사랑을 받고 있다. 국가대항전 성격이 강한 올림픽과 8월15일 광복절 그리고 독도문제가 맞물리면서 대한민국을 사랑하는 연예인들이 온,오프라인에서 각광을 받고 있는 것. 스타들의 애국심에 대해 일부에서는 마케팅 또는 홍보수단으로 활용하는 것 아니냐는 지적도 있지만 이들은 진정성과 묵묵히 자신의 길만을 가는 무소의 뿔같은 모습으로 국민들의 많은 호응을 이끌어 내고 있다. 올림픽 기간임에도 불구하고 스포츠스타 못지 않는 사랑을 받는 스타는 가수 김장훈이다. 얼마 전 뉴욕타임즈에 독도광고를 개제해 화제를 모은 김장훈은 자신의 이미지를 기부 연예인에서 나라사랑 연예인으로 바꿔놓았다. 그는 최근 '민족사적 애국가'를 불러 화제가 되고 있기도 하다. 광복절을 맞아 독립군가로 만든 애국가를 온라인 음원 사이트에 무료배포해 뜨거운 반응을 얻고 있는 것. 독립군 애국가는 국가보훈처에서 2005년 제작한 광복60년 독립군가 다시부르기 앨범에 수록된 곡으로 광복을 다시 새기고 독립군을 추모하기 위해 만들어졌으며 보훈처의 요청으로 김장훈이 애국가를 불러 수록하게 됐다. 김장훈은 여기에 독도 논문 페스티벌까지 열겠다고 밝혀 눈길을 끌고 있다. 김장훈의 이런 모습에 대해 일부에서는 애국심 마케팅이라고 폄하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에 대해 그를 잘 아는 지인들은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를 지독히 사랑하는 김장훈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며 "몇 년 전부터 연예인들이 대부분 무관심했던 대한민국 알림이 반크(VANK : Voluntary Agency Network of Korea) 등에 관심을 가져온 점이나 민족주의에 조예가 깊은 그만이 할 수 있는 행동"이라고 반박했다. 지난 17일 올림픽 중국전에서 끝내기 안타를 친 이승엽 역시 남다른 애국심으로 팬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그의 출중한 실력도 찬사를 이끌어낼만 하지만 조국을 위해 헌신하는 모습은 그를 우러러 보게까지 한다. 이승엽은 지난 2000년 이후 온갖 개인적인 불이익을 감수하면서도 각종 국제대회에 참가해 맹활약을 떨쳐왔다. 그런 그에게 사실 어느 누구도 올림픽 출전을 강요할 순 없다. 하지만 메이저리그 사무국의 40인 로스터 올림픽 출전 불허가 내려지면서 올림픽 대표팀이 어려움을 겪자 고민 끝에 이승엽은 아무런 조건없이 올림픽호 승선을 결정했다. 그의 이번 결정은 엄청난 자기 희생의 결과다. 요미우리 자이언츠 소속의 이승엽에게 사실 이번 올림픽 출전은 현실적으로 득보다 실이 많을수 있다. 고액 연봉 선수가 팀내에서 기여가 약하다는 비난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국가가 부르자 아무런 조건없이 합류했고 묵묵히 자신의 일을 하고 있다. 이승엽의 이런 모습에 대해 OBS 구경백 해설의원은 "어린 시절부터 이승엽의 애국심은 남달랐다"면서 "국민이 자신에게 보내준 성원을 국가대표 활약을 통해 갚아야겠다는 사명감 등이 이번 결정을 내리는데 큰 역할을 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올림픽 중계로 화제가 된 추성훈 또한 애국심으로 팬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재일교포 4세인 추성훈은 일본으로 국적을 바꾸고도 올림픽에서 금메달의 꿈을 이루지 못했던 비운의 선수다. 모 방송사 유도해설의원으로 나섰던 추성훈은 얼마전 왕기춘 선수의 경기를 중계하기 전 "이번 올림픽에선 일본 선수들이 아닌 한국 선수들을 응원하겠다"고 강한 애국심을 보여 시청자들의 환호를 받았다. 일본에서 활약하지만 그는 도복에 새겨진 태극기를 두드리는 세레머니를 하는가 하면 "나에게 한국의 피가 흐르고 있다"며 변함없는 조국에 대한 애정을 드러내 사랑받고 있다.  애국심 강한 스타들에 열광하는 최근 현상에 대해 전문가들은 "대중이 맹목적 애국심에 찬사를 보내기 보다는 그들의 나라를 생각하는 진정성과 과정에 찬사를 보내고 있는 것"이라며 "올림픽이 막바지로 치달을 수록 이런 현상은 더욱 가속화 될 전망"이라고 분석했다./OBS경인TV '윤피디의 더 인터뷰' '쇼영' 프로듀서(sanha@obs.co.kr) ▶ 관련기사 ◀☞[윤PD의 연예시대③]이배영, 남현희...베이징 '우생순' 스타에 방송계 관심☞[윤PD의 연예시대②]'월드스타' 비-김윤진-이영애, 그들만의 나라 사랑법☞[윤PD의 연예시대③]연예인이여~ 박태환에게 배워라!☞[윤PD의 연예시대②]박태환에 울고 웃는 가요계☞[윤PD의 연예시대①]'아이 러브 마린보이'...연예계 강타 박태환 신드롬
2008.08.18 I 윤경철 기자
(인터뷰)"소득격차 해소에 기여하고 싶다"
  • (인터뷰)"소득격차 해소에 기여하고 싶다"
  • [이데일리 양효석기자] "올해 IT 서포터즈는 단순 교육에 그치지 않고 소외계층의 삶의 질 향상을 위해서도 노력중입니다" KT(030200)의 IT 서포터즈 총책임을 맡고 있는 한동훈 기술지원본부장은 "작년 1기 봉사활동 때는 IT 소외계층을 중심으로 교육을 했지만, 올해부터는 봉사활동을 다각화를 하고 있다"면서 이같이 말했다. 우리나라는 인터넷 강국이지만 아직까지 국민 4명중 1명은 인터넷 소외계층인 것이 현실.  장애인, 중장년층, 노소년층 중 정상적인 환경에서 생활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꽤 많다. 문제는 이러한 정보격차가 소득격차로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한 본부장은 "정보격차를 줄여 소득격차도 줄여주는 것이 관건"이라며 "올해 2기부터는 소외계층이 컴퓨터 교육을 통해 취직 등 경제자립을 할 수 있도록 교육프로그램도 운영중"이라고 설명했다. 자격증 취득이나 취직에 필요한 컴퓨터기술을 익힐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다. 한 본부장은 또 "소외계층 뿐만 아니라 대학생들에게도 기업의 IT 실무지식을 전달하고 있다"면서 "폴리텍대학과 협조해 이론중심 교육에서 벗어난 통신시스템 실무를 강의하고 있다"고 밝혔다. 400명 KT 인력을 빼내 봉사활동에 투입한다고 했을 때 내부에서 반대의견도 많았다고 회상하는 한 본부장. 그러나 그는 최근 IT 서포터즈를 통해 KT의 기업이미지도 올리고 사회에서 긍정적으로 봐주는 덕에 힘이 난다고 말한다. 한 본부장은 "기업은 비용을 최소한으로 줄이려 하는게 생리이지만, 과연 사회봉사활동을 비용측면 만으로 볼 수는 없을 것"이라며 "장기적으로 보면 IT 서포터즈는 IT 관련 고객의 꿈을 실현시키고 고객가치를 제고시켜, 기업가치를 높이게 될 것"이라고 자신했다. 한 본부장 이어 IT 서포터즈를 운영하면서 가장 인상 깊었던 인물로 김정대씨를 꼽았다. 김씨는 고등학교 졸업 후 취업, 미국으로까지 파견 나가게 된 촉망 받는 컴퓨터 설계 기사였다. 그러나 한국으로 3년 만에 돌아온 지 불과 한 달도 안 되 교통사고를 당해 뇌병변 1급 장애인 판정을 받았다. 소아마비 환자처럼 언어표현과 보행이 자유롭지 못하며 학습능력도 현저하게 떨어진 그에게 IT 서포터즈가 다시 컴퓨터를 가르치기 시작한 것. 사고 이후로 기초적인 컴퓨터 활용만 할 수 있던 그는 이후 홈페이지를 관리하는 웹마스터가 되겠다는 희망을 갖게 됐다. 한 본부장은 "IT서포터즈의 나눔활동은 단순한 정보 전달뿐만 아니라 희망을 나누는 것"이라고 말했다.▶ 관련기사 ◀☞(르포)KT '서포터즈', 기업가치도 높이다☞KT, 5년간 IPTV 2조 투자..전국 97% 커버☞(단독)KT·KTF 합병주관사에 JP모간체이스
2008.08.18 I 양효석 기자
'2년만의 컴백' 김범수, "군 제대 후 오히려 회춘했다네요"
  • '2년만의 컴백' 김범수, "군 제대 후 오히려 회춘했다네요"
  • ▲ 6집으로 돌아온 가수 김범수[이데일리 SPN 박미애기자] ‘얼굴 없는 가수’ 김범수가 돌아왔다. 2006년 5집 발표 후 나라의 부름을 받고 군에 입대, 잠시 가요계를 떠나 있었던 그가 19일 6집 앨범을 들고 다시 팬들 곁을 찾는다. 새 앨범 발매를 몇일 앞두고 팬들과 다시 만날 생각에 가슴이 벅차다는 그를 만났다. 지난 3월 제대하고 5개월만이다. 아직은 군발이 티를 덜 벗은 모습에 군기가 덜 빠져 다소 뻣뻣하리라는 기자의 예상은 어김없이 빗나갔다. 김범수는 "군대에 갔다 왔더니 사람들이 오히려 회춘했다고 하더라"며 한층 여유있는 모습으로 말을 이었다.  ◇6집 '슬픔활용법', 진짜 내 것 같은 느낌군대에 있으면서 2년 넘게 묵혀온 음악에 대한 갈증이 이번 앨범으로 단번에 해소될 순 없을 터였다. 하지만 김범수는 이번 앨범에 자신이 직접 작사에 참여할 만큼 많은 공을 들였다. “그동안 활동하면서 제 자신이 정말 하고 싶었던 얘기들을 이번 앨범에 담았어요. 지금까지는 프로듀서에 의해 수동적으로 움직여 왔었다면 이번에는 작사에도 참여하면서 프로듀서와 공동으로 작업을 많이 했죠. 제 입김을 불어넣고 제 손때를 묻혔기 때문에 애착이 안 갈 수 없는 앨범이에요.” 앨범에 대한 그의 애정은 표면적으로도 드러난다. 이번 앨범에는 총 15곡이 수록돼 있으며 타이틀곡 ‘슬픔활용법’은 지금껏 그가 해온 음악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그의 타고난 보컬 실력에 ‘역시’라는 감탄사를 절로 자아낸다. 또한 일렉트로닉 사운드의 ‘쉬운 이별’, 컨트리풍의 ‘님아’, 가스펠 넘버 ‘은혜로’ 등 발라드뿐만 아니라 다양한 장르를 시도함으로써 음악적 스펙트럼을 넓히려고 노력한 점도 높이 살만하다. “걱정해주시는 분들도 있었어요. 저 역시 다양한 음악을 한다는 것이 자칫 제 색깔을 퇴색케 하는 건 아닐까 고민이 많았죠. 하지만 바로 앞의 상황만 보고 달릴 순 없잖아요. 인순이 선배님이나 이승철 선배님처럼 ‘롱런’하는 가수가 되고 싶거든요. 당장은 쉽지 않고 결과 또한 제 생각과 다를 수 있겠지만 멀리 내다보는 차원에서 조금씩 변화를 시도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뿐만 아니라 그는 인터뷰를 통해 여자친구의 존재에 대해서도 깜짝 고백했다. 김범수는 ‘님아’라는 곡을 소개하며 10년간 자신의 곁을 한결 같은 마음으로 지켜준 여자친구에 대한 고마움을 표현한 곡이라고 수줍게 전했다. ◇'얼굴 없는 가수', 군대서 인지도 업~ 김범수는 군대에 있을 때 연예병사로 복무했다. 일주일에 한 번씩 공연을 다니며 군인들의 사기를 진작시키는데 동원되곤 했단다. 그는 군입대 전 ‘얼굴 없는 가수’로 활동한 탓에 자신을 알아보는 사람이 거의 없었는데 군대에 있으면서 인지도가 상승했다고 웃으며 말했다. “물론 여전히 저를 알아보시는 분들은 많지 않아요. 하지만 군대에 있으면서 공연 다니고 사진도 찍히고 그러면서 이전보단 얼굴이 많이 알려졌죠. 군 시절이 사실 힘들긴 했는데 사람을 얻었다는 흐뭇함도 있어요. 원래 소극적인 편이라 사람들과 잘 어울려 지내는 성격이 못 되거든요. 군대는 싫든 좋든 한 공간에서 같이 생활을 해야하고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친해지게 되더라고요.” 탤런트 지성과의 인연도 그렇게 맺어졌다. 군대에서의 인연으로 김범수는 지성의 일본 팬미팅에 게스트로 초대받아 무대에 섰으며, 이번 6집 타이틀곡 뮤직비디오에선 지성이 주인공으로 나서 의리를 과시하기도 했다.  ◇제대 직후 성대 결절, '롱런' 목표 되새기는 전화위복의 시간 제대 후 첫 앨범, 그런만큼 부담감도 적지 않았다.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자" 수차례 자신 스스로를 가다듬었지만 욕심을 버린다는 게 말처럼 쉽지만은 않았다. 데뷔곡 ‘하루’로 2001년 미국 빌보드 차트 ‘핫 싱글즈 세일즈’ 부문에서 51위를 차지한 바 있고 2004년에는 드라마 ‘천국의 계단’의 주제곡으로 많은 사랑을 받은 '보고싶다'라는 히트곡도 가지게 됐다. “멀리 내다보자 하며 마음을 추스렸지만 그게 쉽지만은 않더라구요. 대중은 항상 부담스런 존재예요. 게다가 제대 직후 목 상태가 극도로 악화돼 병원에서 성대 결절 판정을 받은 후엔 한 동안 우울증 아닌 우울증까지 알아야 했어요.” 성대 결절, 가수들이 두려워하는 병 중 하나다. 특히 목소리 하나로 지금의 자리에까지 오른 김범수에게 있어선 그 순간 ‘여기서 끝인가’라는 공포마저 엄습해왔다. 김범수는 새 앨범을 빨리 내고 싶은 욕심이 있었기에 더욱 힘들었던 시기였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한 달 동안 아무 것도 안 했어요. 사람들도 만나지 않았죠. 병원에서 치료받고 회복하면서 다시 발성 연습을 하고 예전의 컨디션으로 끌어올리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어요.” 하지만 제대 직후의 이 혹독했던 시련기가 오히려 롱런하는 가수가 되자라는 자신의 오랜 꿈을 되새길 수 있는 계기가 됐다고 그는 말했다. 시련의 순간을 '위기'라 생각치 않고, 자신 스스로를 단련시키는 전화위복의 시간으로 삼을 수 있었던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지금까지의 저는 발라드 가수라는 이미지가 컸던 것 같아요. 앞으로는 자타가 인정하는 보컬리스트로 대중을 선도하는 뮤지션이 되고 싶어요.” (사진=한대욱기자)▲ 가수 김범수▶ 관련기사 ◀☞김범수 "10년 사귄 여자친구 있다"
2008.08.18 I 박미애 기자
  • (전문)이명박 대통령 8.15 경축사
  • [이데일리 이진우기자] “위대한 국민, 새로운 꿈 ” □ 위대한 국민, 기적의 역사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재외동포와 국가유공자, 그리고 내외귀빈 여러분! 60년 전 오늘, 바로 이 자리에서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 선포되었습니다.5천년 한민족의 역사가 임시정부와 광복을 거쳐 대한민국으로 계승되는 순간이었습니다.그러나 한 때 이 자리에는 동족상잔으로 붉은 깃발이 올라가기도 했습니다.용맹한 우리 국군이 태극기를 다시 꽂았지만 수백만의 목숨이 스러지고 국토는 폐허가 되었습니다. 어느 참전 장군은 “이 나라는 백년이 지나도 복구되지 못할 것”이라고 했습니다.하지만 우리는 일어섰습니다.경제규모는 그 때보다 750배나 커졌고 1인당 소득도 300배 넘게 늘어났습니다.우리의 발전은 경제에 그치지 않았습니다.4.19 혁명과 5.18 민주화운동, 6.10 항쟁을 거치며 인권과 민주주의는 굳건히 뿌리를 내렸습니다. 올림픽을 치르고 월드컵 4강 신화를 이루며 유엔 사무총장까지 배출하였습니다.비록 시련과 굴절은 있었지만 우리는 줄곧 전진해 왔습니다.저는 오늘 분명히 말하고자 합니다. 대한민국 건국 60년은 ‘성공의 역사’였습니다.`발전의 역사` 였습니다.`기적의 역사` 였습니다. 위대한 국민 여러분!‘기적의 역사’는 국민 여러분이 모두 함께 써내려간 것입니다.그 주인공은 바로 국민 여러분입니다.조국의 광복을 위해 목숨을 던진 순국선열들이 계셨습니다.6.25전쟁에서 장렬히 산화한 수많은 무명용사들이 있었습니다. 이 분들이 없었다면, 자유 대한민국은 없었을 것입니다. 일자리를 찾아 이역만리에서 고생한 간호사와 광부가 있었습니다.동생의 학비를 대기 위해 밤새 재봉틀을 돌리던 우리의 누이가 있었습니다.열사의 땅에서 비지땀을 흘린 산업역군들이 있었습니다. 자식교육을 위해 손발이 닳고 허리가 휘어도 내색 않던 우리의 부모님이 있었습니다. 이 분들이 없었다면, 한강의 기적은 결코 없었을 것입니다. 불의와 독재에 맞서 싸운 수많은 학생과 시민, 선거 때마다 한 표로 선거혁명을 이룬 유권자들,이 분들이 없었다면, 민주화의 길은 아직도 멀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위기 속에서 단합했고 시련을 겪을수록 더 강해졌습니다.금융위기에 장롱 속 금붙이를 선뜻 내놓은 서민들, 기름으로 뒤덮인 태안 바닷가에 내 일처럼 뛰어온 자원봉사자들. 여러분이 아니었으면 오늘은 없었을 것입니다.기적의 역사를 남들은 신화라고 하지만, 그것은 피와 땀, 그리고 눈물의 산물이라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위대한 국민 여러분!저는 국민 여러분이 참으로 자랑스럽습니다.나라의 회갑을 맞은 오늘, 우리 선조께 감사의 박수를 보냅시다.우리 모두에게 긍지와 자부심의 박수를 보냅시다.우리 후손에게 격려의 박수를 보냅시다.저는 이 역사가 기록되고 새롭게 이어질 수 있도록 ‘현대사 박물관’을 짓겠습니다. 광화문 앞에서 숭례문까지 거리를 ‘국가의 얼굴’로 가꾸어 우리의 자긍심을 높이고 미래를 여는 새로운 원동력이 되도록 하겠습니다.□ 자유를 향한 여정자랑스러운 국민 여러분,저는 건국 60년을 맞아 국가의 독립과 영토를 보전하고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발전시켜 국민의 복리를 증진하라는 헌법의 명령을 엄숙히 받아들이며 그 책무를 다할 것을 다시 한 번 다짐합니다.역사는 구경하는 사람들의 것이 아니라 실천하는 사람들의 것입니다.자유는 결코 저절로 얻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건국 60년 우리는, <자유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 자유를 위협하는 모든 것들과 당당히 싸워왔습니다.경제적 자유를 얻기 위해 빈곤과 싸웠습니다.정치적 자유를 얻기 위해 억압과 독재와 싸웠습니다. 사회적 자유를 얻기 위해 차별과 싸웠습니다.그리고 문화적 자유를 얻기 위해 편견과 싸웠습니다.자유는 우리가 숨 쉬는 공기와 같습니다. 자유를 향한 우리의 여정은 인류 보편의 가치를 구현하고 있기에 더욱 값진 것입니다.우리가 추구하는 자유의 가치는 이제 더 넓고 더 깊어져야 합니다.자유는 자율과 창의, 책임과 신뢰, 배려와 협력 속에서만 뿌리를 내릴 수 있습니다. 자유는 행복한 가족과 따뜻한 공동체 없이는 꽃 피울 수 없습니다.자유는 폭넓은 자아실현의 기회가 없이는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건국 60년이 기본적 자유를 얻는 시간이었다면, 앞으로 60년은 성숙한 자유를 구현하는 시간이어야 합니다. 그 때 비로소 대한민국의 건국은 완성될 것입니다.□ 새로운 60년을 열며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이제 새로운 60년이 열립니다.‘성숙한 자유’의 시대가 열립니다.우리 모두가 열망하는 선진화의 문이 활짝 열립니다.우리가 꿈꾸는 선진일류국가는 개인의 행복과 국가의 발전이 조화를 이루는 나라입니다. 물질적 풍요와 정신적 성숙이 균형을 이루는 나라입니다.‘잘사는 국민’, ‘따뜻한 사회’, ‘강한 나라’입니다.인류의 모범이 되고 세계로부터 존경받는 나라입니다.선진일류국가가 되려면 무엇보다도 <기본>부터 다시 돌아보아야 합니다.기본이 충실하지 않으면 사상누각일 뿐입니다. 압축 고도성장 과정에서 우리가 소홀히 한 것, 우리가 놓친 것들을 다지고 채워야 합니다.저는 무엇보다 우리 사회의 <안전>부터 확고히 하겠습니다. 우리 사회의 안전 수준은 선진국과 큰 격차를 보이고 있습니다.저는 식품안전만큼은 반드시 확보하겠습니다.국민들이 먹거리로 불안해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어린이와 부녀자가 폭행과 납치의 두려움을 느끼지 않도록,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하겠습니다.국민 개개인을 지키는 ‘인간 안보’는 ‘국가 안보’ 못지않게 중요합니다.일상생활과 산업·교통 등 사회전반에 걸쳐 대한민국을 안전 선진국으로 만들겠습니다.우리 사회의 <신뢰>도 선진국 수준으로 올려놓아야 합니다.개인 간의 신뢰, 법질서의 준수, 정부의 투명성, 윤리경영과 노사관계, 이 모든 분야에서 한국은 현재 OECD 최저 수준입니다.신뢰가 없으면 갈등이 깊어지고 통합은 멀어집니다. 신뢰가 없으면 규제가 많아지고 거래비용이 높아집니다.그래서 신뢰는 그 어느 것과도 바꿀 수 없이 귀한 사회자본, 정신자본입니다.<법치>도 확고히 하겠습니다.지키기 어려운 법령은 지킬 수 있도록 고치고, 합의된 법과 원칙은 반드시 지켜지도록 하겠습니다. 정부부터 투명성을 높여나가겠습니다.사회지도층부터 솔선수범하는 풍토를 만들겠습니다.법을 어기는 행위에 대해서는 저를 포함해 누구에게도 관용이란 있을 수 없음을 실천으로 보이겠습니다. 건국 60주년의 새로운 출발과 국민 통합을 위해 사면을 단행했습니다만, 이제 제 임기 동안 일어나는 비리와 부정에 대해서는 관용을 베풀지 않을 것입니다. □ 새로운 60년의 비전: 저탄소 녹색성장존경하는 국민 여러분!지금 우리 경제는 에너지 위기로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양극화와 일자리 부족, 민생의 어려움이 가중되고 있습니다.이대로 주저앉을지도 모른다는 위기의식이 커지고 있습니다. 이를 돌파하고 선진화의 문턱을 뛰어넘기 위해서는 더욱 창의적인 발상과 대담한 결단이 필요합니다.지금 우리는 문명의 변화를 보고 있습니다. 세계는 농업혁명, 산업혁명, 정보혁명을 거쳐 환경혁명의 시대로 접어들고 있습니다.나무와 석탄과 석유의 시대를 지나 새로운 에너지의 시대가 열리고 있습니다. 기름 한 방울 나지 않는 우리에게 이 같은 변화는 위기인 동시에 기회입니다. 돌이켜 보면 우리는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저력을 발휘해 왔습니다.1차 석유파동은 해외건설 진출과 산업고도화의 계기로 삼았습니다.2차 석유파동은 안정 속의 성장과 대외개방의 촉매로 만들었습니다.최근의 고유가 사태도 우리 경제체질을 바꾸고 신성장동력을 창출하는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대한민국 건국 60년을 맞는 오늘, 저는 ‘저탄소 녹색성장’을 새로운 비전의 축으로 제시하고자 합니다.녹색성장은 온실가스와 환경오염을 줄이는 지속 가능한 성장입니다.녹색 기술과 청정 에너지로 신성장동력과 일자리를 창출하는 신국가발전 패러다임 입니다.녹색기술은 정보통신기술, 생명공학기술, 나노기술, 문화산업기술을 아우르면서도 이를 뛰어 넘습니다.녹색기술은 좋은 일자리를 많이 만들어 ‘일자리 없는 성장’의 문제를 치유할 것입니다.재생에너지 산업은 기존 산업에 비해 몇 배나 더 많은 일자리를 창출할 것입니다.정보화시대에는 부의 격차가 벌어졌지만 녹색성장시대에는 그 격차가 줄어들 것입니다.녹색성장은 한강의 기적에 이어 한반도의 기적을 만들 미래 전략입니다.우리가 처음 자동차를 만들 때 선진국과의 기술격차는 50년 이상이었습니다. 반도체는 20년 이상이었습니다.그러나 지금은 자동차 세계 5위, 반도체 세계 1위, 조선 1위 이렇게 기술국가로 성장했습니다. 우리가 먼저 결단하고 행동에 나선다면 녹색성장을 이끌고 새로운 문명을 주도할 수 있습니다.저는 이 녹색성장을 통해 다음 세대가 10년, 20년 먹고 살 거리를 만들어내겠습니다.□ 에너지 패러다임을 바꿀 총력투자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에너지 위기를 극복하고 녹색성장의 발판을 마련하기 위해 우선 에너지 안보를 확고히 다지겠습니다.5% 남짓한 에너지 자주개발률을 임기 중에 18%, 2050년에는 50% 이상으로 끌어올려 에너지 독립국의 꿈을 실현하겠습니다. 자원의 보고인 북극해와 남극에 대한 탐사와 연구도 적극 추진하겠습니다.우리 민족이 미지의 세계를 개척하는 진취적이고 창조적인 DNA를 가졌음을 안팎으로 알리겠습니다.신재생 에너지 사용비율을 현재의 2%에서 2030년에는 11% 이상, 2050년에는 20% 이상으로 높이도록 총력투자에 나서겠습니다. 녹색기술 연구개발 투자를 두 배 이상 확대하여, 2020년이면 3천조 원에 달할 녹색기술 시장의 선도국이 되겠습니다.새만금을 비롯해 국토 곳곳이 태양과 바람, 꽃과 바다 에너지가 만개하는 신천지가 될 것입니다.집집마다 신재생에너지를 쓸 수 있도록 ‘그린홈’ 백만호 프로젝트를 전개하겠습니다.LED와 무공해석탄과 같은 새로운 그린 에너지 기술도 개발하겠습니다.아울러 친환경 고효율 ‘그린 카’를 신성장 동력산업으로 중점 육성하겠습니다. 임기 중에 세계 4대 ‘그린 카’ 강국으로 도약시키겠습니다.기후변화종합대책도 9월 중에 마련하여, 올해를 저탄소사회로 가는 원년이 되도록 하겠습니다.돌이 없어서 석기시대가 끝난 것은 아닙니다. 석유시대도 석유가 없어서 끝나지는 않을 것입니다.설령 앞으로 유가가 떨어진다고 하더라도 이제는 과도한 석유의존시대와 결별해야 합니다.비록 탄소시대에는 뒤졌지만 다가올 수소시대에는 앞서 나가야 합니다. 그 길은 어려운 일임에 틀림없습니다. 단절의 고통과 불편도 따를 것입니다.산업화는 늦었지만 정보화를 앞당겼듯이 대담하고 신속하게 나아간다면, 반드시 녹색강국으로 거듭날 수 있습니다.□ 삶의 질 선진화와 생활공감 정책사랑하는 국민 여러분!고령화는 우리에게 또 하나의 거대한 도전입니다. 1948년, 우리의 평균 수명은 50세에 미치지 못했습니다.그때는 생존이 문제였습니다.지금 우리의 평균기대수명은 80세에 달합니다.생애는 점점 더 길어지고 있습니다.이제 생존이 아니라 삶의 질이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일과 교육과 여가를 통합할 수 있는 새로운 복지 모델을 만들어야 합니다.고령 인구도 활발히 경제활동을 할 수 있는 새로운 일자리 모델을 설계해야 합니다. ‘개인의 행복’을 정책의 중심에 두는 국가 경영을 해 나가겠습니다.이를 위해 교육과 문화, 복지 분야의 혁신을 서둘러야 합니다.저는, 대한민국에 태어나 사는 것이 큰 행운이 되도록, 반드시 만들어 나가겠습니다.정부는 고령화 사회에 근본적으로 대응해 나갈 것입니다. 이와 함께 민생과 직결되는 작지만 가치 있는 ‘생활공감정책’을 대폭 발굴하고 실행할 것입니다.소득이 적더라도 생활하는 데 불편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가난 때문에 공부 못하는 사람이 없도록 하겠습니다.이미 새 정부 들어 빈곤층 자녀에게는 대학 등록금을 대폭 지원하고 있습니다. 치매 중풍 환자는 국가가 책임져서 자식이 못하는 효도를 국가가 대신하도록 하겠습니다.‘장애인 정책발전 5개년계획’을 통해서 장애인이 불편없이 생활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마음놓고 아이를 낳고 기를 수 있도록 보육만큼은 국가가 책임지도록 하겠습니다.집 근처에서 편리하게 이용할 있는 문화시설과 체육시설이 촘촘히 들어서도록 할 것입니다.국민 생활의 불편을 가져오는 각종 규제는 신속히 풀겠습니다.모든 국민이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며 살 수 있는, 살맛나는 나라 대한민국을 만들기 위해 우리는 착실히 전진할 것입니다.국민성공시대를 넘어서 국민행복시대를 열어나가겠습니다.존경하는 국민 여러분!한국인이 세계에서 존중받도록 하는 것도 대단히 중요합니다.대한민국의 국가브랜드 가치는 우리 경제력의 30 퍼센트 대에 그치고 있습니다. 미국과 일본의 수십분의 1에 불과합니다. 세계 최고 수준의 반도체 국가이지만 외국인들은 한국 하면, 노사분규와 거리시위를 먼저 떠올립니다. 우리가 선진국을 원한다면 우리의 이미지, 우리의 평판도 획기적으로 높여야 합니다. 저는 조만간 대통령 직속으로 국가브랜드위원회를 설치하겠습니다. 임기 중에 한국의 국가브랜드 가치를 선진국 수준으로 올려놓겠습니다. 이제 우리도 국제사회에서 친구를 많이 만들어야 합니다.공적개발원조(ODA)를 우리 위상에 맞게 늘리고 평화유지군 활동에도 적극 참여할 것입니다.우리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소중한 발전의 경험을 `글로벌 코리아 모델`로 승화시켜 세계와 공유해 나가겠습니다.십만명의 우리 젊은이들을 세계 곳곳에 보내 일하고 배우며 봉사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7백만 재외동포와 글로벌 네트워크를 구축하여, 세계를 무대로 활약하도록 지원하겠습니다. 아울러 백만 외국인 시대를 맞아 전 세계의 인재들이 한국에서 일하고 생활할 수 있도록 출입국관리와 이주정책을 개선해 나가겠습니다.비록 땅은 좁지만 마음은 넓은 나라가 되도록 하겠습니다.□ 세계로 뻗어가는 통일 한국의 꿈존경하는 국민 여러분!새로운 60년을 여는 오늘, 우리에게는 또 하나의 꿈이 있습니다.남과 북 8천만 겨레가 하나 되어 세계로 뻗어나가는 꿈입니다.북한이 국제사회의 흐름에 동참하고 나아가 남과 북이 하나가 되면 우리는 유라시아-태평양 시대의 중심에 설 수 있습니다. 미국을 포함한 환태평양권은 세계 총생산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세계 인구의 과반이 몰려있는 유라시아는 세계 총생산의 3분의 1, 세계 무역의 절반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바야흐로 유라시아-태평양 시대가 활짝 열리고 있습니다. 남북한이 통일되면, 해양과 대륙이 연결되어 한반도는 닫힌 공간에서 열린 공간으로 바뀌게 될 것입니다. 바닷길, 땅길, 그리고 하늘길로 유라시아와 태평양을 잇는 번영의 관문이 될 것입니다.부산에서 화물을 싣고 대륙횡단철도를 따라 중앙아시아, 서유럽까지 갈 수 있습니다. 해양시대와 대륙시대를 동시에 열면서 통일한국은 세계중심국가로 도약할 것입니다. 국민 여러분, 그리고 북한 동포 여러분!저는 그 꿈을 8천만 겨레와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다른 길이 있다 하더라도 북한을 우회하거나 뛰어넘고 싶지 않습니다.남과 북 모두가 함께 잘사는 꿈을 결코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평화가 정착되어야 합니다. 불신과 갈등의 원천이 되는 핵무기가 완전히 사라지고 그 자리를 상생과 공영의 기회로 채워 나가야 합니다.저는 얼마 전 부시 미국대통령과 만나서 “북한이 하루빨리 국제사회의 일원이 되어 한국과 미국이 국제금융기구를 통해 대북지원에 적극 나설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유감스러운 금강산 피격사건에도 불구하고, 북한이 전면적 대화와 경제 협력에 나서기를 기대합니다. 왜냐하면 지금이야말로 북한이 놓쳐서는 안 될, 변화의 호기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6자회담과 국제협력의 진전에 따라 실질적인 대북 경제협력 프로그램을 본격 추진하여 한반도 경제공동체를 실현해 나갈 것입니다.미래는 꿈꾸는 자의 것입니다.혼자 꾸는 꿈은 꿈에 그칠 수 있지만 8천만 겨레가 같은 꿈을 꾸면 그것은 현실이 될 수 있습니다. 한민족이 하나가 되면 이토록 위대할 수 있음을 후손들에게 보여줍시다. 존경하는 국민여러분!지금으로부터 63년 전 우리는 일제의 억압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하였습니다.우리가 나라를 빼앗겼던 것은 무엇보다 우리가 스스로를 지킬 힘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비극의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 스스로 부강한 나라를 만들어야 합니다.이로써 우리의 영토를 부당하게 넘보는 일도 없어질 것입니다.일본도 역사를 직시해서 불행했던 과거를 현재의 일로 되살리는 우를 결코 범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 위대한 국민, 새로운 꿈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우주 로켓은 처음 발사될 때 연료의 90%를 쓴다고 합니다.일단 중력의 한계를 돌파해서 하늘로 솟구치면 연료가 거의 들지 않습니다.선진국과 만년 중진국을 가르는 이치도 이와 같습니다.우리도 로켓처럼 3만 달러의 고비를 넘는다면 더 쉽게 4만 달러, 5만 달러 시대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지금이야말로 선진국으로 도약할 수 있는 중요한 시기입니다.우리는 이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됩니다.국민 여러분!좌절과 분열로는 우리의 목표를 달성할 수 없습니다.용기와 화합으로만 우리의 목표를 이룰 수 있습니다.지금 세계는 치열한 생존 경쟁을 벌이고 있습니다.안에서 소모적인 대립과 갈등으로 낭비할 시간이 없습니다. 이제 눈을 세계로 미래로 돌려야 합니다.선진일류국가를 위해 모두 힘을 합해야 합니다. 우리는 안전과 신뢰, 그리고 법치를 통해 선진국의 기초를 다질 것입니다.녹색성장으로 수소시대의 중심에 설 것입니다. 생활공감정책으로 행복한 삶을 추구할 것입니다.조금 전 여기에 섰던 아이들이 자신의 적성과 자질에 맞는 교육을 받고, 지구촌의 미래를 함께 설계하는 자랑스러운 지구시민이 될 수 있도록 우리 모두 힘을 합칩시다. 우리 아이들이 누리는 자유와 번영이 우리 세대보다 더욱 크고 의미 있도록 합시다.오늘 이 자리가 새로운 꿈이 시작되는 출발점이었음을 이 아이들이 60년 뒤 후손들에게 증언할 수 있도록 합시다.건국 60년, 기적의 역사가 새로운 꿈과 만납니다. 건국 60년, 기적의 역사는 새로운 60년에도 이어질 것입니다. 대한민국의 신화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위대한 대한민국의 시대가 열릴 것입니다.위대한 통일의 시대가 열릴 것입니다.그리고 위대한 한민족의 시대가 열릴 것입니다.우리 모두 함께 앞으로, 앞으로 나아갑시다. 감사합니다.
2008.08.16 I 이진우 기자
`건국 60년`..오줌에서 반도체 기적까지
  • `건국 60년`..오줌에서 반도체 기적까지
  • [이데일리 오상용기자] "오줌도 귀중한 외화자산이다." 수세식 변기 세대에게는 뭔 소리인가 싶다. &nbsp;하지만 불과 30년전만 해도 공중 화장실 벽마다 붙어있던 안내문이다. 유로키나제라는 중풍치료제가 있었다. 사람의 오줌에서 주요성분을 추출했는데, 당시 유로키나제 1Kg은 2000달러 넘게 거래되던 고가 약품이었다. &nbsp;딱히 수출할 게 없던 우리나라로선 오줌 한방울도 귀한 외화벌이 자산이었던 셈이다. 오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환갑을 맞는다. 지나온 60년의 발자취를 돌아보면 어느 하나 예사롭지 않은 변화가 없다. 사람도 강산도 살림살이도 나라경제도 몰라보게 변모했다. ◇내 시작은 미약했으나..첫 시작은 미약했으나 갈수록 창대해진 역사(役事)는 역시 수출이다. 14일 통계청이 내놓은 `통계로 본 대한민국 60년의 경제·사회상 변화`에 따르면 우리나라가 수출이라는 걸 처음 시작한 1960년대 초만 해도 주요 품목은 자연광물이나 수산물이 전부였다. 오징어 활선어 돼지털을 비롯해 다람쥐와 갯지렁이도 외국으로 실려나갔다. 이후 70년대 가발과 스웨터의 전성기를 지나 80년대로 넘어오면 철강판과 선박이 주요 수출품목으로 등장한다. 88년 올림픽을 전후한 3저 호황(저달러 저금리 저유가)은 우리나라의 자동차와 전기전자제품을 세계에 알리는 기회였다.특히 80년 4억3400만달러에 그쳤던 반도체 수출은 지난해 390억4500만달러어치 수출되며 한국의 주력 수출품목으로 자리잡았다. ◇부동산 대책 만큼 어려웠던 전화 대책 전화 한대가 아파트 한채 값과 맞먹던 시절이 있었다. 1955년 전화가입자는 3만9000명으로, 인구 1000명당 2대꼴이었다. 장·차관이나 국회의원 정도 아니면 꿈도 못꾸는 문명의 이기였다. 1962년부터 정부가 경제개발 5개년 계획과 함께 통신사업 5개년 계획에 착수하면서 전화 수요는 급증했다. 공급이 따라가지 못하는 상황에서 전화의 매매가 허용되자 전화 값은 천정부지로 뛰기 시작했다. 전화를 사고팔거나 전·월세를 놓아주는 `전화상`이 서울에만 600여 곳에서 성업을 이뤘다. 전화를 둘러싼 부조리가 심각한 사회문제로 떠오르자 정부는 `전기통신법`을 개정, 전화 매매를 금지시키기에 이른다. 그러나 정치권과 언론은 공급이 턱없이 모자란 판에 매매를 금지시키면 실수요자의 피해가 커진다며 반발했고, 결국 1970년 9월 1일 이전에 가입한 전화는 매매할 수 있도록한 반면, 새로 가입하는 전화는 금지하는 선에서 타협이 이뤄졌다. 그렇게 귀했던 유선전화는, 삐삐와 시티폰을 지나 본격적인 모바일 시대를 맞으면서 휴대전화에 맹주의 자리를 넘겨주고 있다. ◇"나, 미군에서 타자 쳐".."와~오빠 짱" 달라진 시대상 만큼 직업풍속도의 변화도 다채롭다.1945년 광복 직후 미 군정 시절에는 미군 부대에서 일하는 타이피스트가 최고의 인기를 누린 직업이었다. 또 고물상과 광산개발업자도 주목 받는 직업이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교사는 제때 현금으로 보수를 받을 수 있는 몇 안되는 직업이자 존경받는 직업인으로 선망 받았다. 1950년대는 전차운전사 전화교환원 라디오조립원 등이 유망 직종으로 떠올랐고, 60년대에는 은행원이 손꼽히는 신랑감, 우체국 경찰서의 전화교환수가 인기 신부감이었다. 70년대로 오면 해외 주재원으로 나갈 수 있는 종합상사맨이 선망의 대상이었고, 해외여행이 자유로운 항공승무원도 여성의 인기 직종이었다. 2000년대 들어서면서 우리사회에는 예상치 못한 다양한 직업군이 탄생하고 있다. 오락실에서 게임으로 소일해 부모 속을 썩이던 소년이 `프로게이머`가 되고, 인터넷 학습사이트 교사인 `사이처` 등이 등장했다.
2008.08.14 I 오상용 기자
‘ 잔류 선언’ 호날두의 미래는?
  • [유럽축구 확대경]‘ 잔류 선언’ 호날두의 미래는?
  • [이데일리 SPN 송지훈 객원기자] 유럽을 대표하는 두 명문 클럽 레알 마드리드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이하 맨유) 사이에서 펼쳐진 ‘호날두 전쟁’이 결국 원 소속팀의 승리로 일단락됐다. 크리스티아누 호날두(23.맨유)는 지난 7일 포르투갈 일간지 '푸블리코'와의 인터뷰를 통해 “현 상황에서는 맨유에 잔류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선택임을 깨달았다”며 “최소 1년 이상 팀을 위해 뛸 것”이라고 공식 선언했다. 한때 레알 마드리드가 9000만유로(1400억원)에 달하는 파격적인 이적료를 제시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이적 협상이 급물살을 탈 것이라는 기대감이 높아지기도 했지만 결국 역대 최고 이적료 신기록은 탄생하지 않았다. 알렉스 퍼거슨 맨유 감독이 “호날두의 거취와 관련한 논란은 이제 끝났다”며 득의양양한 미소를 짓는 사이 레알 마드리드측은 네덜란드 국가 대표 출신 미드필더 라파엘 반 데 바르트를 영입하는 등 전력보강을 위한 차선책을 실행에 옮기기 시작했다. “축구계에는 현대판 노예들이 많이 있다”는 제프 블라터 국제축구연맹(FIFA) 회장의 발언과 맞물려 세계 축구계에 큰 파장을 불러일으킨 바 있는 호날두 이적 사태가 두 달 여 만에 ‘해프닝’으로 마감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소속팀 변경과 관련한 논란과 설전이 종료되었다고 해서 상황이 모두 잠잠해진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맨유 클럽하우스 안팎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이적협상이 답보상태에 머물던 무렵 호날두가 잇따라 내놓은 수위 높은 발언들이 이제 스스로의 발목을 잡는 족쇄로 작용하고 있다. 당시 호날두는 “내 오랜 꿈은 스페인 프리메라리가 무대를 밟아보는 것이었다”, “결국엔 레알 마드리드에서 뛰게 될 것으로 믿는다”, “그간 최선을 다해 뛰었으니 이제 맨유가 나를 놓아줘야 한다”는 등 강경 발언을 서슴지 않아 홈팬들의 분노를 샀다. 앞서 언급한 블라터 회장의 발언에 대해 “바로 내가 현대판 노예”라며 적극적으로 공감을 표시한 것 또한 구단 관계자들을 씁쓸하게 했다. 일부 현지 언론이 “주급 12만파운드(2억4000만원)를 받는 노예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놀라울 뿐”이라며 비난을 퍼부은 건 탐탁지 않은 현지 분위기를 보여주는 좋은 예다. 이적 논란의 불씨가 여전히 남아 있다는 사실 역시 불안한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호날두는 레알 마드리드행 포기를 선언하면서도 “맨유에 최소 1년 이상 머물겠다”고만 밝혀 언제든 다시금 소속팀 변경을 추진할 수 있는 길을 열어뒀다. “장기 계약을 원한다”는 퍼거슨 감독의 발언에 대해 침묵을 지키고 있는 점 역시 의구심을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실제 스페인 언론들은 여전히 “올 시즌이 끝나면 다시 호날두에 대한 레알 마드리드의 러브콜이 시작될 것”이라는 보도를 내놓고 있는데, 이 또한 ‘호날두의 마음은 이미 스페인으로 기울었다’는 판단에 뿌리를 두고 있다. 문제는 올 시즌 잔류를 선택하면서 호날두의 어깨가 그 어느 때보다도 무거워졌다는 사실이다. 지난 시즌 20대 초반의 포르투갈 청년이 맨유에서 이뤄낸 업적은 그야말로 화려하기 그지없었다. ‘명실상부’ 팀의 간판이자 구심점으로 거듭났을 뿐만 아니라 각종 대회를 통틀어 총 42골을 터뜨리며 리그 2연패와 유럽축구연맹(UEFA)챔피언스리그 우승을 이끌었다. 역량을 확인한 퍼거슨 감독 또한 과감하게 루니의 득점 비중을 줄이는 대신 호날두의 역할을 확대하는 전술 운용으로 화답했다. 이적 파문과는 상관없이 스포트라이트가 집중되는 인물로 발돋움했다는 의미다. 하지만 2008-09시즌은 다를 수 있다. 특히나 홈 구장 올드 트래포드에서조차 애정 어린 시선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심리적인 압박이 적잖을 것으로 예상된다. 준수한 활약상을 이어간다면 비난의 강도를 조금씩이나마 낮춰갈 수 있겠지만 혹여 지난 시즌에 못 미치는 플레이에 그칠 경우, 또는 팀 성적이 좋지 않을 경우엔 우선적으로 비난을 뒤집어 쓸 가능성이 높다. 현지 전문가들 또한 “슬럼프마저도 고의적인 태업으로 비쳐질 공산이 크다”며 “어린 데다 인내력이 강하지 않은 호날두에겐 결코 쉽지 않은 시즌이 될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고 있다. 한 가지 다행스러운 건 오프시즌 중 오른 발목 수술을 받아 시즌 초 몇 주간 필드에 나서지 않는다는 점이다. 팬들의 불편한 심기를 다소 누그러뜨리는 동시에 시선의 초점을 호날두 개인에서 클럽 전체로 확대시킬 수 있는 시간을 벌게 된 셈이다. 너무 일찍 세계 최고수 반열에 올라섰기에, 그리고 지난 시즌 더할 나위 없이 화려한 성과를 이끌었기에 지금 호날두가 겪는 시련은 더욱 깊고 뼈아프다. 어느덧 전 세계 팬들이 인정하는 ‘젊은 황제’로 우뚝 선 1985년생 축구영웅은 갑작스레 찾아온 시련을 어떤 방식으로 극복해나갈 수 있을까. 올 시즌 유럽 리그 개막에 즈음해 관심을 갖고 지켜 볼 화두가 아닐 수 없다./<베스트 일레븐>기자 ▶ 관련기사 ◀☞[유럽축구 확대경]반 데 바르트의 레알行, 그리고 뉴 오렌지 커넥션☞[유럽축구 확대경]김두현, 급하지 않게 호들갑 없이 가기를☞[유럽축구 확대경]유럽축구, 남미의 피를 수혈하다☞[유럽축구 확대경] 터키 축구를 주목하라☞[유럽축구 확대경] 짝수 해 거물들의 이동, 올해는?
2008.08.12 I 송지훈 기자
노민상 감독 "태환이는 내 인생이고 꿈"
  • 노민상 감독 "태환이는 내 인생이고 꿈"
  • [조선일보 제공] "태환이는 내 인생이고 꿈입니다. 목숨을 걸었습니다." 노민상(52·사진) 수영 대표팀 감독은 '선수 박태환'을 올림픽 챔피언으로 만든 스승이자 은인이다. 정작 본인의 인생은 '잡초' 같았다. 오산중·고등학교에서 수영을 했을 뿐, 대표 선수같은 경력과는 거리가 멀었다. 가난 때문에 선수로서의 꿈은 싹을 틔워 보지도 못했다. 강원도에서 군 복무를 뒤 서울 강남의 한 초등학교에서 코치를 시작했다. 그때부터 공부를 시작했다. 서점에서 외국 전문서적을 한 권씩 사 모으고, 없는 책은 외국에 다녀오는 지인들에게 부탁해 구했다. 모르는 단어는 사전을 찾아가며 해석을 했다. 책장에 꽂히는 책이 늘어날수록 노하우가 쌓였다. 클럽 코치로 일하면서 지도자로 인정을 받아가기 시작하던 1992년, 큰 사고가 다시 한 번 그의 꿈을 꺾을 뻔했다. 운전을 하다 다른 차에 운전석 쪽을 들이받히는 사고를 당했다. 갈비뼈와 쇄골, 양쪽 발등 골절로 사지를 거의 움직이지 못한 채 병원신세를 져야 했다. 재활에만 몇 년이 걸렸다. 수영장 물 속에서 걷기 연습부터 다시 시작했다. 사고 후유증으로 노 감독은 지금까지 운전을 하지 않는다. 자동차를 좋아하는 박태환이 행여 운전하다 다칠까봐 노심초사하는 데는 이런 사연이 있다. 나이 마흔 즈음에 박태환을 만났다. 일곱 살 꼬마는 이미 기초를 배운 상태였다. "물에 들어가 보라고 했더니 수영을 곧잘 하더라고요. 가르치면 괜찮겠다 싶었죠." 제자의 가능성을 본 노 감독은 눈 앞의 성적에 연연하기보다는 유산소 운동을 꾸준히 시키며 지구력을 키우게 했다. 노 감독은 2004년 아테네 올림픽 때 유망주에 불과했던 박태환을 대표팀에 보내면서 자신의 꿈에 한 발 다가섰다. 하지만 박태환이 부정출발로 실격했다는 소식을 들은 날 밤, 박태환의 아버지와 밤늦게까지 소주잔을 기울여야 했다. 노 감독은 2006년 여름 대표팀 사령탑이 됐고, 박태환을 데리고 나간 첫 대회였던 팬 퍼시픽 챔피언십(캐나다 빅토리아)에서 금메달 두 개와 은메달 하나를 일궜다. 그해 12월 아시안게임에서 박태환이 금메달 세 개 등 메달 7개를 따며 대회 최우수선수로 뽑히자 노 감독은 베이징 올림픽까지 영광의 순간을 구상했다. 그런데 박태환이 작년 초 태릉선수촌을 떠나 후원사가 꾸린 전담팀으로 떠나면서 다시 한 번 좌절을 맛봤다. 우여곡절 끝에 2월에 박태환이 돌아온 뒤엔 서로 약속을 하나씩 했다. 박태환은 최대한 빨리 예전의 몸을 만들겠다고 다짐했고, 노 감독은 올림픽이 끝날 때까지 평소 즐기던 술을 끊겠다고 했다. 노 감독은 10일 박태환이 금메달을 따자 눈물을 흘렸다. 박태환의 훈련일지를 속에 넣어 뒀던 종이엔 '심장의 더운 피 식을 때까지'라는 글귀가 적혀 있다. 박태환 금메달의 공신 중엔 대표팀 우원기(34) 코치를 빼놓을 수 없다. 그는 1994히로시마 아시안게임 자유형 200m에서 한국신기록으로 동메달을 땄던 엘리트 선수 출신. 2004아테네 올림픽을 맞아 대표팀 코칭스태프로 발탁됐다. 자유형 선수들을 전담하던 우 코치는 노 감독이 '재야(在野)'였던 때부터 서로의 지도철학을 공유했고, 지금까지 호흡을 맞추고 있다. 박태환의 뒤엔 한국체육과학 연구원의 송홍선 박사도 있다. 노 감독과 밤을 새워 가며 맞춤형 훈련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생리학에 바탕을 두고 주기적으로 훈련 전후의 젖산 측정을 해 성취도를 분석했고, 영법과 잠영 영상을 찍어 동작 분석을 하는 등 기술적인 부분에도 이바지했다.▶ 관련기사 ◀☞박태환 "큰 응원 보내준 국민들께 감사 지금 그냥 한국 가면 안될까요☞'중국만의' 올림픽...각국 정상들 일반석 앉아 땀 뻘뻘☞'마린보이' 박태환의 어제와 오늘☞미(美) 농구, 31점차로 중국 완파☞여(女)양궁 '지존' 20년… 담력 키우려 옷 속에 뱀 넣는 훈련까지
'마린보이' 박태환의 어제와 오늘
  • '마린보이' 박태환의 어제와 오늘
  • ▲ 금메달에 대한 부담감 때문에 무거워진 어깨였지만, 물속에서 박태환은 누구보다도 자유로웠다. 올림픽 수영 자유형 400m 결승에서 박태환이 시원하게 물살을 가르고 있다. /올림픽사진공동취재단[조선일보 제공] "선생님…. 제가 은메달, 동메달 따도 대단한 건데…. 금메달 아니면 좀 그렇겠죠?" 경기 전날인 9일 밤. 박태환(19·단국대)은 스승 노민상 감독을 찾아 어렵게 입을 열었다. 노 감독은 "절대 그렇지 않다"고 당부했지만, 박태환은 좀처럼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이제 19세 소년이 견뎌내기에 국민들의 뜨거운 관심은 적지 않은 부담이었다. 4년 전 그때를 떠올리게 했다. 15세로 대표팀 최연소 태극마크를 달았던 까까머리 소년. 하지만 2004 아테네올림픽 400m 예선에서 부정 출발로 실격을 당하며 '부정 출발 소년'이란 단어가 꼬리표처럼 붙었다. 그 뒤 박태환은 한 달간 방에 틀어박혀 세상과 자신을 단절시켰다. 세상과 소통하기 시작한 소년은 부활했다. 2005년 동아시아게임 자유형 400m 한국 신기록(3분48초71)으로 우승한 뒤 각종 대회에서 아시아 신기록을 작성하며 승승장구했다. 지난해 3월엔 세계선수권 자유형 400m에서 3분44초30의 기록으로 금메달을 따냈다. 5살 때 기관지염 때문에 천식에 좋다는 수영을 시작한 연약한 꼬마가 한국의 수영 역사를 새로 쓴 것이다. 하지만 화려한 빛은 그림자를 만들어냈다. 2006 도하 아시안게임 3관왕에 오른 뒤인 지난해 1월 촌외 훈련을 결정하면서 7세 때부터 그를 가르쳤던 노민상 감독과 헤어졌다. 박석기 전 국가대표 감독 등과 '전담팀'을 꾸렸지만 우여곡절 끝에 11개월 만에 결별해야 했다. 호주 전지 훈련을 코치도 없이 홀로 다녀왔다. 잡음은 끊이지 않았다. 유명 댄스 그룹 '원더걸스'의 리더 선예와의 열애설도 튀어나왔다. 방송 프로그램에서 만난 뒤 압구정동 광림교회를 같이 다니며 친하게 지냈던 게 입방아에 오른 것이다. 결국 지난 2월 태릉선수촌에 다시 들어가기로 마음먹었고, 노민상 감독과 재결합했다. 5개월여의 짧은 시간 동안 흐트러졌던 그의 체력과 정신력은 다시 자리 잡아가기 시작했다. 어릴 적부터 생긴 자생력도 그를 담금질했다. 아버지 박인호씨의 사업 실패로 집안이 갑자기 기우는 바람에 어린 시절부터 물질적인 고통을 겪었고, 초등학교 5학년 때는 어머니 유성미씨가 유방암 수술을 받으며 투병하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다. 49.587㎡(15평) 전셋집에 살면서, 버스비를 아끼려 중학교 때 몇 ㎞를 걸어 다닌 적도 있다. 누나가 몇 백 원씩 용돈을 준 것을 꼬박꼬박 모아 어머니 약을 사드리던 아이다. 그는 자주 "성공하겠다. 돈 많이 벌면 부모님 집부터 사드리겠다"고 되뇌었다고 한다. 박태환 가족은 얼마 전 잠실에 이사했다. 마음 속의 약속을 지켜낸 것이다. 낯을 가린다고는 하지만 속정이 깊다. '전담팀'에서 홀로 훈련하면서 대표팀 친구들과 멀어져 외로움과 그리움을 느꼈다고 고백했다. 홀로 호주 전지 훈련을 떠나기 직전인 지난해 12월엔 태릉선수촌에 빵을 들고 찾아와 노민상 감독과 친구들과 오랜만에 수다를 떨었다. 한국의 역사를 바꾼 대단한 '소년'. 그래도 평소엔 19세 모습 그대로다. 캐릭터 인형(피규어)을 수집해 만지작거리며 심리적인 안정을 얻거나, 인기 그룹 '빅뱅'에 빠져있고, 밥보다는 스파게티를 즐긴다. 고기를 특히 좋아해 스테이크도 즐겨 먹는데, 10일 아침엔 노민상 감독이 마련한 곰국을 먹고 힘을 냈다. 지난해 가을 면허를 따자마자 베라크루즈를 구입해 드라이브를 즐기고, 한 달에 한 번은 단골 미용실에 들러 염색과 파마를 즐기는 발랄한 신세대다. 3년전부터 그를 담당한 압구정동 '쉬작' 미용실의 박정률 원장은 "곱슬머리인 데다 수영장 물 때문에 머릿결이 상해 트리트먼트를 자주 받는다"고 말했다. 동료들은 그를 '독종'이라 부른다. 자신과의 끊임없는 투쟁이 '대박' 금메달을 일궜다. 그는 '대박(大朴)'이었다.▶ 관련기사 ◀☞박태환 "큰 응원 보내준 국민들께 감사 지금 그냥 한국 가면 안될까요☞'중국만의' 올림픽...각국 정상들 일반석 앉아 땀 뻘뻘☞노민상 감독 "태환이는 내 인생이고 꿈"☞미(美) 농구, 31점차로 중국 완파☞여(女)양궁 '지존' 20년… 담력 키우려 옷 속에 뱀 넣는 훈련까지
  • 정보공개서 등록업체, 366개 브랜드 발표 (서울 185개) (1)
  • [이데일리 EFN 강동완기자] 브랜드명 검색은 'Ctrl + F' 를 통해 찾을수 있다.&nbsp;연번상호브랜드등록번호접수일등록일담당기관1(주)아시아스타넷웍스피아노스타200801000012008060520080726본부2프레임시스템(주)투엔디200801000022008060520080726본부3(주)고려이스쿨고려e스쿨200801000032008061220080726본부4(주)고려이스쿨고려e네트200801000042008061220080726본부5(주)이어도아이엔비e-어도참치200801000052008061920080726본부6(주)무무잉글리쉬 무무200801000062008061920080726본부7(주)오피스넥스officenex200801000072008062020080726본부8(주)미당프랜차이즈맛밥200801000082008062020080726본부9(주)미당프랜차이즈와우 돈가스1900200801000092008062020080726본부10이레F&C객잔차이나200801000102008062420080726본부11(주) 부자마을피부천사200801000112008062420080726본부12(주)미래지앤에스버담삼겹살200801000122008062420080726본부13(주)미래지앤에스럼보트200801000132008062420080726본부14(주)이디야이디야커피200801000142008062420080726본부15주식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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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8.06 I 강동완 기자
승천하는 용… 중(中) '제국의 부활 노래'
  • 승천하는 용… 중(中) '제국의 부활 노래'
  • [조선일보 제공] 어둠이 내려 깔린 2008년 8월 8일 오후 8시8분 몇 초 전. 9만 관중이 꽉 들어찬 베이징(北京)올림픽 메인 스타디움 냐오차오(鳥巢·새둥지)에는 산시(山西)지방의 힘찬 북소리가 사람들의 가슴을 때린다. 관중들이 일제히 카운트 다운을 시작한다. 북을 치는 2008명의 중국 젊은이들의 특수 복장은 거대한 아라비아 숫자 '3, 2, 1'과 함께 한자 '三, 二, 一'을 만들어낸다. 마침내 전광판 시계의 숫자판이 '20:08'로 바뀌자 냐오차오 사방에서 엄청난 굉음과 함께 노란색 불꽃이 밤하늘로 솟아오른다. 같은 시각 천안문(天安門)광장을 비롯한 베이징 시내 곳곳에서 굉음과 함께 불꽃이 터진다. 푸른 색으로 빛나던 냐오차오 바로 서쪽의 수영경기장 수이리팡(水立方)의 벽면에는 중국어로 '하나의 꿈, 하나의 세상(同一個世界, 同一個夢想)'이 붉은 색으로 새겨진다. 냐오차오 상공의 밤하늘에 터지는 불꽃은 오색의 올림픽 마크를 그리는가 하더니, 중국인들이 가장 귀하게 여기는 전설 속의 새인 봉황(鳳凰)도 그려내고, 아홉 마리의 용도 그려낸다. 봉황은 새 둥지 모양의 냐오차오로 돌아오고, 아홉 마리의 용은 하늘로 날아오른다. 하늘과 사람이 하나가 되는 '천인합일(天人合一)'을 보여준다. 돌연 하늘에 손오공의 얼굴이 그려지자 메인 스타디움 냐오차오 지상에는 중국 산수화가 펼쳐지고, 곧이어 산수화는 중국의 4대 발명품인 종이 화약 나침반 인쇄술을 형상화한다. 개막식 공연은 춘·하·추·동(春·夏·秋·冬) 사계절의 이름으로 나뉘어 4막으로 이어진다. 흰색 옷을 입은 허난(河南) 소림사(少林寺) 무술승도 나오고, 진(秦)나라 갑옷을 입은 병마용 복장의 병사도 나오고, 푸른 색 옷을 입은 한(漢)나라 선비도 나온다. 배경 음악으로는 당(唐)대의 전통음악을 비롯한 역대 중국 왕조의 예악(禮樂)과 고전 명곡들이 때로는 잔잔하게, 때로는 격하게 흐른다. 중국 정부가 베이징올림픽조직위원회(BOCOG)와 함께 지난 7년간 준비해온 베이징올림픽 개막식은 그렇게 시작된다. BOCOG는 지난달 30일에 이어 2일밤 두 번째로 실제로 7만의 관중을 동원한 개막식 리허설을 했다. 소개한 개막식 리허설 광경은 중국 사람들이 '차이파이(彩排)'라고 부르는 리허설에 참여했던 베이징 시민들에게 물어 모자이크로 재구성한 것이다. 개막식 식전 공연 광경을 전해준 베이징 시민들은 "봉황은 중국인들이 가장 귀하게 여기는 길상(吉祥)이며, 우리는 우리가 용의 후손이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개막식 총연출을 맡은 장이머우(張藝謀) 감독은 우리에게 중국인으로서 커다란 긍지를 느끼게 해주었다"고 말했다. 개막식 리허설을 두 차례나 했지만 아직도 가장 중요한 개막식 비밀은 아직 공개되지 않고 있다.▶ 관련기사 ◀☞'친황다오 입성' 박성화호 "첫 판 카메룬전에 올인"☞'마린보이' 박태환 "세계 기록에 맞춰 준비해왔다"☞[나도 올림피안] 근대5종 윤초롱☞스포츠는 돈!… 올림픽은 그 결정판☞[베이징 올림픽 D-7] '10-10 달성을 향해'...태극전사 본진 베이징 입성
권오중 “키스신 더 있으면 집에서 큰일 납니다”
  • 권오중 “키스신 더 있으면 집에서 큰일 납니다”
  • ▲ SBS 월화드라마 '식객'에서 봉주 역으로 출연 중인 권오중(사진=김용운 기자)[이데일리 SPN 김용운기자] "키스신 후유증을 겪고 있습니다" SBS 월화드라마 ‘식객’에서 운암정의 수석요리사로 출연 중인 권오중이 극중 윤주희(김소연 분)과의 키스신 후일담을 들려줬다. 지난 1일 강원도 정선군 고한읍 하이원리조트내 위치한 운암정의 ‘식객’ 촬영장에서 만난 권오중은 4일 ‘식객’ 15회에 방영될 키스신에 대해 “데뷔 15년여 만에 처음 해보는 키스신이었다”며 “아내가 키스신을 촬영하게 되면 미리 알려 달라 했는데 그렇지 못해 한동안 집안 분위기가 좋지 않았다”고 털어놨다. 권오중은 지난 1998년 6살 연상의 아내와 결혼해 현재 초등학교에 재학 중인 아들과 함께 단란한 가정을 꾸리고 있다. 권오중은 최근 이데일리SPN과의 인터뷰에서 “아내와 아들과 떨어져 있는 것이 싫어 해외촬영이나 지방촬영이 긴 작품은 사양했다”고 밝힐 만큼 가정을 우선시 하는 연기자다. 권오중은 “아들 녀석이 어디서 봤는지 ‘아빠 앞으로는 뽀뽀하지 마’라고 말할 정도가 됐다”며 “앞으로 키스신이 더 있으면 집에서 큰일 날 것”이라고 강조했다. 김소연과의 키스신에 대한 느낌을 묻자 권오중은 “나이가 들어 그런 건지 별다른 느낌이 없었다”며 “이번에도 다른 드라마에서처럼 키스신을 피해가려고 애를 썼지만 감독님이 극의 리얼리티를 위해 강요(?)하셔서 불가피하게 했다”고 덧붙였다. 권오중은 앞으로 남은 드라마의 전개에 전개에 대해 “봉주가 운암정의 후계자가 되겠지만 또 어떤 계기로 성찬과 함께 봉찬식품을 만들어 야채행상을 할 수도 있다”며 묘한 여운을 남겼다. ▶ 관련기사 ◀☞[SPN 현장출동]'식객'의 꿈이 영근 실제 '운암정'을 가다☞'식객' 원기준, "민우가 악역? 성찬과 봉주가 비현실적 인물"☞김소연 “운암정 후계자...주희가 될 수도 있죠?”☞김래원 "'식객', 한우 이어 김치 우수성 알린다"☞남상미, "'진수'처럼 실제 나도 성숙해져가는 느낌"
2008.08.04 I 김용운 기자
'식객' 원기준, "민우가 악역? 성찬과 봉주가 비현실적 인물"
  • '식객' 원기준, "민우가 악역? 성찬과 봉주가 비현실적 인물"
  • ▲ SBS 월화드라마 '식객'에서 공민우 역으로 출연 중인 원기준(사진=김용운 기자)[이데일리 SPN 김용운기자]"민우가 악역이라구요? 성찬과 봉주가 더 비현실적 인물이죠." SBS 월화드라마 ‘식객’에서 운암정의 3대 수석요리사 공민우로 출연 중인 원기준이 악역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보였다. 지난 1일 강원도 정선군 고한읍 하이원리조트 내 위치한 운암정의 ‘식객’ 촬영장에서 만난 원기준은 “사실 성찬(김래원 분)이나 봉주(권오중 분)같은 사람들보다 성공하려는 욕망으로 매사 열심인 공민우 같은 사람이 더 보편적인 인물이다”고 강조했다. 원기준이 맡은 공민우는 천재적인 요리감각을 타고난 성찬과 오숙수의 아들인 봉주 사이에서 오로지 자신의 노력과 실력만으로 국내 최고의 한식당인 ‘운암정’의 수석요리사로 자리 잡은 입지전적적인 인물. 하지만 운암정의 후계자가 되겠다는 야심 때문에 성찬을 곤경에 빠트리고 호시탐탐 봉주의 자리마저 노리는 캐릭터다. 원기준은 “공민우는 오로지 운암정의 후계자가 되겠다는 생각으로 온갖 난관을 뚫고 버티고 있는 인물”이라며 “비열한 모습도 많지만 어떻게 보면 다른 주인공들에 비해 현실에서 접하기 가장 쉬운 인물 아니냐?”고 되물었다. 원기준은 “‘식객’ 후반부 극의 반전에 민우가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며 “운암정의 후계자가 봉주라고 단정 지을 수만은 없다”고 여운을 남겼다. 1994년 SBS 공채 4기 탤런트로 데뷔한 원기준은 2006년 MBC ‘주몽’에서 영포왕자 역을 맡아 귀여운 악역(?)으로 시청자들에게 큰 관심을 받은 바 있다. ▶ 관련기사 ◀☞김소연 “운암정 후계자...주희가 될 수도 있죠?”☞권오중 “키스신 더 있으면 집에서 큰일 납니다”☞[SPN 현장출동]'식객'의 꿈이 영근 실제 '운암정'을 가다☞김래원 "'식객', 한우 이어 김치 우수성 알린다"☞남상미, "'진수'처럼 실제 나도 성숙해져가는 느낌"
2008.08.04 I 김용운 기자
MC몽, 내가 돈을 버는 이유..."어머니 웃는 게 가장 기뻐"
  • MC몽, 내가 돈을 버는 이유..."어머니 웃는 게 가장 기뻐"
  • ▲ MC몽[이데일리 SPN 김은구기자] MC몽은 무대, 예능프로그램에서 언제나 팬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한다. 그런 MC몽도 늘 행복할 것만 같지만 MC몽은 어려웠던 시기를 극복하고 현재의 자리에 섰다. 신인시절은 누구나 힘들다지만 MC몽의 어려움은 그 이전부터였다. “고교생이었던 1996년부터 집안에서 가장 역할을 해야 했어요. 교복도 커피숍에서 아르바이트를 해서 번 돈으로 사야 했으니까요.” 사실 MC몽은 부유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할아버지는 서울 청담동에 호텔을 갖고 있었고 아버지의 사업도 번창했다. 그러나 아버지의 사업이 무너지면서 가세는 순식간에 기울었다. ‘부자는 망해도 3년은 간다’는 말도 MC몽에게는 예외였다. 살고 있던 집도 넘어가고 MC몽은 이혼한 어머니, 형과 함께 반지하의 집에서 생활해야 했다. “10만원이든 20만원이든 벌어다만 드리면 어머니가 너무 좋아하셨어요. 그게 제가 돈을 버는 이유였죠. 연예인이 돼서도 마찬가지고요.” 1998년 연예계에 데뷔를 하고나서는 큰 돈을 만질 줄 알았지만 5년간은 월 100만원도 못벌었다고 했다. 꿈을 좇고 있었지만 어려움은 계속될 수밖에 없었다. 지성이면 감천이랄까? MC몽은 인기를 얻으면서 과거의 어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MC몽은 “솔로 1, 2집을 발매한 뒤 아버지의 사업 부채를 다 갚을 수 있었어요. 그 이후에 어머니 명의로 집을 사드렸죠”라고 자랑스러워했다. 하지만 MC몽은 자신을 위해서는 별로 돈을 쓰지 않는다. 그동안 CF도 20개가 넘게 계약을 했지만 개런티는 모두 어머니에게 갖다드렸다. 그런 면에서 보면 MC몽은 분명 누구 못지 않은 효자다. 어머니는 그 돈으로 주위의 어려운 가정을 돕는다. 결손가정 아이들이 생활을 하고 학교에 다닐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MC몽은 그런 어머니에 대해 한마디도 불평을 하지 않았다. “좋은 일도 다 아들 잘되라고 하시는 거죠. 사실 지금의 저는 다른 사람들 때문에 있는 거잖아요. 성원해주시는 팬들이요. 그 덕분에 나이에 비해 물질적으로 얻은 게 많은 것도 사실이고요. 제가 번 돈도 그런 팬들, 특히 어려운 팬들을 위해 사용하는 게 맞다고 생각해요. 저는 가정을 지킬 정도의 돈만 있으면 돼요.” (사진=김정욱 기자)▶ 관련기사 ◀☞MC몽, 어려운 후배 위해 4천만원 쾌척☞MC몽 "이제야 '1박2일' 정식 멤버 된 듯"☞MC몽, "무대 서면 병도 낫는 어쩔 수 없는 '딴따라!'"☞[포토]MC몽, '즐거워 미치겠어~'☞'스페이스 침스' MC몽, "녹음 10분하면 목소리 쉬어 고생"
2008.08.01 I 김은구 기자
부드러운 카리스마로 년대를 풍미한 외식업계의 풍운아
  • 부드러운 카리스마로 년대를 풍미한 외식업계의 풍운아
  • [이데일리 EFN 이덕철 객원기자] 먼지가 적당히 쌓인 옅은 밤색 007가방을 서재 창고에서 꺼낸다. 꽤 오래된 듯하다. 20여년은 족히 되어 보이는 가방이다. 그리고는 한참을 생각에 잠긴 듯 응시한다. 이내 찰칵찰칵 비밀번호를 돌린다.&nbsp;번호를 잊어버렸는지 아니면 잘못 돌렸는지 다시 시도한다. 덜커덩 소리를 내며 드디어 가방이 속을 드러낸다. 리비아 현지에서 국내로 송금한 돈의 기록표들이 여기저기서 나온다. 만감이 교차한다. 손의 움직임은 분주해지고 이것저것 뒤진다. 그리고는 이내 감회에 젖은 듯 말이 없다. 눈가의 고요에 잠시 물기가 얹힌다. 사업실패로 쫓기 듯 열사의 나라 아프리카 리비아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던 때가 언제였던가. 당시의 아픈 기억이 스멀스멀 떠오른다. 007가방 하나 달랑 들고 20대 중반에 무작정 떠나왔던 리비아. 돼지갈비와 함흥냉면으로 한때 외식업계의 살아있는 신화로까지 불린 (주)이학면옥 윤희원 대표(51)의 성장통의 한 페이지다. &nbsp;그리고 이 가방에는 오늘의 성공키워드를 제공한, 두차례에 걸친 리비아 3년의 흔적과 사연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가끔씩 그는 스스로 나태해졌다 싶을 때마다 가방을 꺼내보곤 한다. &nbsp;그는 지금 조용한 신도시인 인덕원 부근의 대지 1421.49㎡(430평) 저택에서 거주하고 있다. 10년 전 똥창(?)이 맞는 친구와 공기 좋고 경치 좋은 이곳에 둥지를 틀었다. 가맹점이 아닌 직영점으로 16개의 대형매장을 운영하며 외식업계의 기린아로 떠오를 때 이곳에 들어왔다. ◇ 전성기 시절 직원만 550여명 10년 전의 전성기 시절, 점포 전체 매출액이 200억원대를 넘나들 정도였다. 이학면옥 본점과 본사가 있는 인천 연수구의 대지 2281㎡(690평)에 연건평 3305.8㎡(1800평)인 3층 건물도 그의 소유다. 현재 그는 사업의 내실화를 위해 점포들을 정리하고 남은 직영점 6개를 운영하고 있다. 무서운 기세로 점포확장에 나섰던 전성기 시절에는 직원만 550여명이었다. 30대 후반에 일찌감치 외식사업으로 대성공을 거둔 그다. ◇ 16살때 심야 완행열차타고 서울행 감행 “괜찮을까” “괜찮을 꺼야” “혹시 잘못되는 것은 아닐까” “ 그렇지 않을 꺼야” “언제쯤 도착하지” “조금 있으면 도착하지 않을까” “서울은 무서운 사람들도 많다는데” “태연하게 자세를 잡아야 돼, 겁먹은 표정을 하지말고” 15~16세 쯤 되어 보이는 까까머리 두 소년의 표정에 불안한 그림자들이 가득하다. 겁을 잔뜩 먹은 얼굴이기도 하다. 두 소년은 연신 통로를 지나가는 사람들을 불안하게 쳐다보며 말을 주고받는다. 전남 나주에서 용산역으로 가는 완행열차에 몸을 실은 두 소년의 머리속에는 고향이 멀어질수록 부모 형제들의 얼굴이 더욱 또렷해져 가고 있었다. 1973년 6월 29일 16살 중학생이던 윤희원 대표는 친구와 가출해 야간완행열차를 타고 서울로 향하고 있었다. &nbsp;8남매의 5째인 그는 잎담배 농사를 짓는 부모님 돈 10만원을 슬쩍 해 서울행을 감행한 것이다. 집안은 6611.6㎡(2000평)이 넘는 잎담배 농사를 지어 그리 곤궁한 편이 아니었다. 하지만 워낙 많은 형제자매들과 많은 농사일로 어린나이의 그는 힘에 부쳤고 늘 배가 고팠다. 늘 쌀밥을 배불리 먹는 게 꿈이었다. 그는 학창시절에도 ‘짱’노릇을 주로 해 왔다. ◇ 사회에서 받은 첫 월급 3000원 받고 감회 이런 기질은 훗날 그가 외식사업에 뛰어들면서 어려운 일이 닥칠 때마다 대범하게 처신하는데 큰 영향을 미친다. 그래서일까. 어린 나이에 생면부지의 도시인 서울로 가출을 감행하는 용기를 발휘한 것도 같은 맥락으로 이해된다. 한 12시간 쯤 달려왔을까. 안내판이 눈에 들어왔다. 바로 용산역이었다. 두 소년은 고향에서 사전정보로 익히 들어 알고 있던 직업소개소 안으로 냉큼 들어선다. 그리고 그날 용산역 인근에 있는 평양냉면집에 취직한다. 사회를 알기에는 어린 나이에 사회인으로 변신하는 순간이다. &nbsp;그가 사회에서 받은 첫 월급 액수는 3000원이었다. “먹는 장사로 반드시 성공해서 돌아가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식당에 취직해서 쌀밥을 배불리 먹고 싶었다. 평양냉면집에 취직해서 받은 첫 월급 3000원은 나에게 상당한 의미가 있었다.” 지하철 4호선 인덕원역에서 하차해 마을버스로 약 10분쯤 가 ‘주공 4단지’에 내리니 윤 대표가 마을버스역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 아침식사를 자기 집에서 하자고 해 그의 집으로 가는 길이다. 만난 지 이번이 두 번째인데 자기 집에서 식사를 하자니 좀 당황스러웠다. 저녁도 아니고 아침을 같이하자니 보통 친하지 않으면 청하기 어려운 일이 아닌가. 그랬다. 그는 사람냄새 폴폴 나는, 꾸미지 않은 소박한 모습으로 다가왔다. &nbsp;외식업계에서 크게 성공한, 작은 거인답지 않게 수수하고 온정적이다. 그의 키는 162센티미터로 작다. 외식업계의 ‘오뚜기’, ‘등소평’이라 불리는 이유이기도 하다. &nbsp;투박하나 정겨움이 물씬 묻어나는 얼굴에 격의 없는 미소를 ‘씩’하고 띠우면 부처상이 따로 없다. 주변에 사람이 많이 몰리는 이유도 그가 나대지 않고 겸손하며 주위 의견에 경청을 잘하기 때문이다. 그의 눈빛이 그의 시골틱한(?) 외모에 견줘 형형한 이유는 사물에 대한 깊은 관조의 힘이 녹아있어서다. 이해와 배려는 그의 사람사는 방식이다. 그의 오늘을 만든 강철 같은 의지와 배포 그리고 일벌레 습성이 후덕한 인상과 버무려지면서 그만의 독특한 이미지로 살아난다. 전형적인 외유내강형이라고 주변에서 말한다. 그의 집을 방문하게 된 필자에게 리비아에서의 3년을 이야기 하면서 감정이 살아났는지 그 당시 가지고 갔던 007가방을 찾아가지고 왔다. ◇ 정겨운 모습에서 형형한 눈빛이 주는 관조의 미학 그를 리비아로 가게 만든 사연은 무엇일까. 16살에 서울 생활에 들어간 그는 부지런함과 성실함으로 단박에 주인의 눈에 든다. 아침 6시에 기상해 하루에 70~100 군데를 배달하고 나서도 저녁에는 틈틈이 요리를 배웠다. &nbsp;힘은 들었지만 일 벌레 습성이 그를 그냥 놔두지 않았다.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주인이 아예 혀를 내두를 정도로 요령을 피우지 않았다. 저녁에 문을 닫으면 혼자 식당 안을 깨끗이 청소도 했다. 훗날을 대비해 요리법도 어깨너머로 계속 익혔다. 이런 그를 보고 주인이 인심 쓰듯 한마디 던졌다. “지금까지 우리 식당에 일하러 온 많은 사람들 중에 너같이 일 잘하는 놈은 처음 본다. 나이도 어린데 정말 부지런하고 열심이다.” 그러나 1년쯤 되어갈 무렵 그는 가슴에 상처를 받고 자리를 옮긴다. 매장에서 분실한 돈 4만원의 범인으로 몰린 것. 물론 나중에 아니라는 게 밝혀졌지만 그는 더 이상 근무할 의욕을 잃었다. 자리를 옮겼다. 종로에 있는 한식집 ‘한일옥’에서도 그의 진가는 여실히 드러났다. 심지어 주방장이 다른 곳으로 이직을 하자 어린 나이에 주방장을 겸하게까지 된다. 한마디로 그는 올라운드 플레이어였다. 일찌감치 될성싶은 나무로 주변에서 인정받기 시작한 것이다. 여기서도 그는 주인으로부터 한마디를 듣게 된다. “이 다음에 나이가 들면 진짜 잘 살 것이다.” 그는 이 한마디를 가슴에 묻었다. 그리고 반드시 그렇게 되리라 결심한다. 의지력은 그의 오늘을 만든 동력이다. 어린 나이에 일찍 배운 담배를 18살 때 끊고 지금까지 금연을 한것이라 든지, 2전3기 끝에 오픈한 이학면옥 1호점부터 5~6년 동안을 1000원짜리 한 장 허투루 써 본적이 거의 없다라든지 서초 2호점을 오픈하고 나서 6개월 만에 3억원을 까먹고도 의연하게 대처한 것 등은 오늘날 그의 성공이 얼마나 자신을 갈고 닦으면서 이뤄진 것인가를 잘 대변해 준다. ◇ 세 번째 직장 ‘감미옥’에서 7년 보낸후 첫 가게 18살이 되던 해, 그는 세 번째로 자리를 옮긴다. 종로 4가에 있는 설렁탕 전문 음식점 ‘감미옥’이 그 곳이다. 작은 가게의 주방장 월급 수준인 2만5000원을 받았다. 3년 만에 월급이 8배로 뛰었다. 자신의 상품성을 키워놓은 것이다. 직원 30여명 중에서도 조리, 관리, 직원간 화합 등을 두루 잘하는 몇 안되는 직원으로 꼽혔다. 당연히 일 잘한다는 칭찬에 이어 “월급을 줘도 돈 안 아깝다”는 말까지 덤으로 들었다. 그는 어린 나이부터 ‘세상은 자기하기 나름’이라는 철학을 몸에 새기고 있었던 듯하다. 지금도 그는 주변 외식인들에게 “장사가 되고 안 되고 하는 것, 또 직원들이 자주 나가는 것 등은 모두 업주한테 책임이 있다”고 설파한다. 감미옥에서의 근무는 군대를 갔다 와서도 계속돼 모두 7년간 머물게 된다. 윤 대표는 이 시기 스스로 식당을 운영해 보고픈 유혹에 빠진다. 그는 군대 제대 후 1년 6개월간 500만원짜리 적금을 붓는다. 월급 25만원 중 24만6000원을 다 적금에 부었다. 한번 마음먹으면 해내는 의지력이 아닌가. 드디어 1981년, 서울로 뺑소니치듯 가출한 지 10년이 다 될 무렵인 25살의 나이에 가게를 오픈한다. 종로4가 서울극장 뒤편 생선구이 골목에 500만원을 투자해 생선구이 가게 ‘청송집’을 33.06㎡(10평) 규모로 문을 열었다. &nbsp;그러나 직원으로 일하는 것과 직접 경영을 하는 것은 달랐다. 경영에 대한 경험부족은 관리부재로 이어졌고 외지에서의 외로움을 고향친구들과의 잦은 만남으로 달래다가 결국 식당일에 소홀해졌다. 매일 술 마시고 노는 게 일일 정도였다. ◇ 친구와 술 그리고 경험부족으로 8개월만에 손들어 결국 8개월 만에 가게를 넘기고 손을 털었다. 리비아행은 그렇게 이루어졌다. 그는 재기의 사업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리비아로 향한다. 해외건설현장의 주방장으로 취직해 2년 동안 근무했다. 여기서 저축한 사업자금 3000만원으로 29살에 82.65㎡(25평) 규모의 두 번째 음식점을 방배동 부근에서 개업했다. 일명 기사식당이다. 그러나 ’86서울아시안게임과 ’88서울올림픽 개최로 택시 2부제가 시행되면서 손님들이 감소하기 시작하고 종전과 마찬가지로 친구와 술에 의지하면서 서서히 내리막길을 달리기 시작, 결국 가게를 팔게 된다. 1년을 두문불출했다. 어떻게 마련한 자금으로 창업한 가게인데 너무 허무하게 무너졌다는 자괴감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자책과 자학으로 스스로를 고문했다. 결국 가게를 넘겨주고 남은 돈도 1년이 지나자 다 떨어졌다. 그는 지인에게 150만원의 빚을 내 다시 리비아로 향한다. 장사의 실패와는 달리 인간적인 신뢰감은 지인들에게 여전히 잃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자신에 대한 원망으로 견딜 수 없을 정도로 힘이 들었다. 그러나 윤 대표는 두 번째 리비아 행에서는 자신을 완전히 180도 바꾸기로 결심한다. 지나친 온정주의나 술에 대한 집착 그리고 노름 같은 것들을 완전히 그의 몸에서 떼어내기로 한 것이다. 2년 계획으로 간 리비아 2차행은 회사 내부 사정으로 1988년 한 해만 보내고 1989년 초에 귀국했다. 그가 손에 쥔 사업자금은 이리저리 떼어내고 남은 500만원 가량이었다. 1989년 2월 세 번째 가게를 방배동에 오픈했다. 물론 부족한 자금은 지인들에게서 융통했다. 보증금 1000만원에 월세가 70만원이었다. 그의 일거수일투족은 곧 신뢰로 통했다. 어려울 때마다 주변에서 그를 도와주는데 주저하지 않는 이유다. ◇ 두 번의 리비아행 자신을 송두리째 바꾸고 돌아와 그가 보여준 진실함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서울 방배동에 실평수 115.7㎡(35평)의 ‘이학숯불갈비’를 오픈했다. 오늘날 이학면옥의 시작을 알리는 서곡이었다. 대박이었다. 돼지갈비 1인분이 2500원이었다. 하루 잘 팔면 30만원정도 쯤으로 예상했다. 하지만 뚜껑이 열리자 매출 40~50만원은 손쉽게 올렸다. 시간이 흘러가자 70~80만원을 넘어 최고 140만원까지 매출이 올랐다. 1년만에 8000만원의 수입이 들어왔다. 더 큰 가게가 필요했다. 때마침 운영하고 있는 가게터 옆에 신축건물이 들어섰다. &nbsp;1년만에 규모가 두배 정도인 218.18㎡(66평) 가게로 1990년 3월에 옮긴다. 보증금 3000만원에 월세가 210만원으로 지출비용은 종전의 3배였다. 하지만 영업은 계속 승승장구했다. 1993년 서초 2호점을 오픈할 때까지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할 정도로 바삐 움직였다. 장사에 자신이 붙었다. 826.45㎡(250평) 규모로 서초동에 2호점을 과감히 오픈했다. 그의 인간성과 능력을 믿은 친구 5명이 신용대출해 준 자금으로 개업했다. 그러나 여기서 그는 참담한 패배를 맛본다. ◇ 이학면옥 1호점의 대박 … 서초 2호점서 3억 빚 져 입지선정의 잘못으로 6개월 만에 문을 닫게 된 것이다. 인테리어 비용 등 3억원의 빚도 떠 안았다. 이제 좀 일어서나 했는데 암초를 만난 것이었다. 세 번째 위기였다. 그러나 그는 태연했다. 아니 태연한 척했다. 복구할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통 큰 배포는 이렇듯 위기에서 더욱 빛을 발한다. “이학면옥 서초 2호점의 실패로 무려 3억원의 빚을 떠 안게 되자 집사람이 나보다 더 불안해했다. 심지어 나보고 그 큰 금액을 날렸는데 몸무게가 1킬로그램도 안 빠진다고 놀랄 정도였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인데 어찌할 도리가 없지 않겠는가 생각했다. 다만 이를 복구할 대안을 찾으려고 무진 노력했다.” 기회를 엿보고 있던 그는 1994년, 50년만에 찾아 온 최고의 무더위에 관심을 갖는다. 그는 다양한 방법으로 접근했다. 무슨 음식이 무더위를 날려줄 것인가. 윤 대표는 냉면으로 시선을 돌린다. 1994년 5월 시흥대로변에 이학면옥 시흥 3호점, 그리고 7월에 목동 1호점이자 전체 4호점을 잇따라 오픈했다. 선풍적인 인기였다. 그의 안목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매장 앞면을 통유리로 깨끗하게 단장해 오픈한 점포에서는 한 그릇 4000원의 냉면이 22개 테이블에서 1000만원어치가 넘게 팔려나갔다. 줄을 길게 서서 기다리는 것이 예사였다. 기다리는 사람의 줄이 너무 길다보니 손님이 매장에 들어와서 먹고 나가는 시간 10분도 채 되지 않는 형국이 발생하곤 했다. 3억원의 빚은 1년 안에 다 해결했다. 그리고 그는 여기서 여세를 몰아 직영점체제로 사업을 확장하기 시작한다. 1995년도 부평 계산 5호점, 수지 6호점, 중동 7호점, 인천 만수 8호점, 1996년도 목동 2호점/ 9호점, 중동 2호점/10호점, 송파 11호점, &nbsp;1997년도 인천 연수 12호점, 일산 13호점, 인천 부평 13호점, 요인 신갈 14호점, 1999년도 군포 산본15호점, 목동 3호점/16호점, 발산 17호점, 간석 18호점 등을 잇따라 오픈하면서 외식업계의 풍운아로 급부상한다. ◇ 대형직영점 18호점까지 90년대 잇따라 오픈 그리고 2002년 말 인천 연수동에 2281㎡(690평) 대지, 연건평 5950.44㎡(1800평)에 이르는 3층짜리 대형 건물을 구입해 이학 두부사랑, 이학수산, 이학면옥 등 3개의 이학식당들을 오픈시켰다. 대신 그는 점포정예화를 위해 6개 점포만 남기고 정리하는 결정을 단행한다. 그의 점포들은 큰 대로변에 주로 입지해 있다. 공격적 마케팅으로 당시로서는 선구자격이었다. IMF가 오기 이전인 1997년 전후가 최대 부흥기였다. 그의 나이 40세에 불과했다. 이 당시 전 매장 연매출액이 거의 200억원대에 이르렀다. 국내 토종브랜드 역사상 전무후무한 기록으로 남아 있다. 또한 종업원 수도 한 때 550여명에 달해 동종 경쟁업소들을 압도했다. 당시 외식업계로서는 가공할 숫자였기 때문이다. 그의 영엉방식은 줄건 다 주고 받을 건 받는 식이다. 고급식재에 후한 인심을 얹히고 가격은 제값을 받는 식이다. 저렴한 식재에 저렴한 가격으로 승부하는 방식을 거부한다. 그러나 잘 나가던 이학면옥도 최대의 시련기에 봉착하게 된다. 바로 광우병 파동이다. 매출이 곤두박질치다 못해 여태까지 경험해 보지 못했던 적자 상태까지 가기에 이른 것이다. 돼지갈비로의 전환과 마케팅강화로 어렵게 광우병터널을 빠져나왔다. ◇ 직원교육에의 열의와 관심 그의 오늘을 만들어준 비결중 하나는 교육에의 관심이다. 한참 사세가 뻗어 나가던 1997년도를 전후해 매년 우수사원 7~10명을 선발하여 외국에 보내 선진 음식문화를 배우도록 했다. 직원들의 서비스 개선과 음식문화에 대한 개념 등을 일깨워 주기위해서다. 지방의 음식축제, 김치축제 같은 곳에도 직원들을 수시로 파견해 다양한 음식조리법을 손님들에게 선보이도록 했다. 또 유명식당이나 세미나 등에도 직원들을 보내 공부와 함께 의식을 깨우치도록 하는데도 무척 신경 써 왔다. 그가 교육비를 아끼지 않는 이유는 이렇다. “교육비를 들여 직원들의 자질을 높이게 되면 본인들도 좋고 또 교육을 받은 입장에서 회사에 감사한 마음으로 더 열심히 일하게 돼 일거양득이다. 교육비에 대해 아깝게 생각하지 않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투자한 것에 비해 효과가 더 크다.” 그는 외식사업을 통해서 얻은 이익을 사회의 어려운 이들에게 돌려주는 데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연수구의 미화원, 양로원의 노인들, 소년 소녀 가장들을 초청해 음식을 대접하고 있으며 그가 직·간접적으로 어려운 이들을 위해 사회단체에 기부하는 경우도 여러번이나 된다. ◇ 호텔사업이 최종 목표 ‘60살 안으로 해결되겠지’ 희망 올해로 그가 외식업에 들어온 지 35년이 된다. 외식업을 무엇보다 매력적인 직업이라고 생각하는 그다. 장사를 해서 좋고 배고픈 사람에게 좋은 음식을 주어서 보람 있고 돈을 지불하면서도 인사하고 가는 그런 직업이 따로 없다는 것. &nbsp;그의 앞으로의 꿈은 호텔을 짓는 것이다. 어릴적 꿈인 음식점은 후회가 없을 정도로 해보았고 이제 호텔을 가지는 두번째 꿈이 남아있다. 6611.6㎡(2000평) 대지위에 20층 규모가 목표다. 그 시기는 60세쯤이 되지 않을까 싶다. [ 도움말 : 월간 외식경영 ]
2008.07.24 I 객원 기자
이효리가 말하는 이효리...'연예인으로 10년, 서른살 평범한 여자'
  • 이효리가 말하는 이효리...'연예인으로 10년, 서른살 평범한 여자'
  • ▲ 가수 이효리[이데일리 SPN 양승준기자] 이효리처럼 방송에서 극과 극의 매력을 보여주는 가수가 또 있을까? 예능프로그램에서는 일명 ‘몸빼바지’를 입고 ‘쌩얼’을 한 채 몸개그를 사리지 않지만&nbsp;무대에만 서면 카리스마 넘치는 얼음공주로 돌변한다. 장소에 따라 몸의 색이 변하는 카멜레온.... 이효리는 연예인의 숙명이기도 한&nbsp;변신의 미덕을&nbsp;너무도 충실히 펼쳐보이며 지난 10년을 대중과 함께 호흡했다.&nbsp;◇'잇츠 효리시'는 자기고백적 앨범...아버지, '이발소 집 딸' 노래에 '눈물' 23일 오후 서울 논현동 어느 한 카페에서의 인터뷰, 사석에서 만난 이효리는 더 없이 담백하고 솔직한 옆집 여인의 모습으로&nbsp;기자 앞에 섰다. 무대에서의 카리스마를 지우고, 예능프로그램에서 보인 약간의 오버스러움도 내려놓았다. 그리고 이효리는 지난 14일 발매한 새 앨범 ‘잇츠 효리시’에 녹아낸 지난 10여 년간의 연예인 생활과 이제는 30대가 된 평범한 여자 이효리의 이야기를 가감없이 털어놓았다. “데뷔 10년, 상당기간은 스타로도 살아왔지만 방송에서 보여지는 쿨하고 당당한 모습 뒤에 있는 평범한 여자 이효리의 모습도 보여주고 싶었어요. 다른 사람들의 생각과는 달리 연예계 10년의 생활동안 언론의 독을 품은 기사와 주위의 차가운 시선 때문에 흘린 눈물과 성장통을 고스란히 담은 앨범이죠.” 새 앨범 제목이 ‘잇츠 효리시(It’s Hyorish)’인 이유를 묻자 이효리가 건넨 말이다. 새 앨범에는 이효리가 작사한 노래가 여러 곡 있다. 그 중 ‘이발소 집 딸’은 이효리가 스타가 되기 전 자신의 평범했던 유년 시절에 대한 이야기고, ‘돈 크라이(Don’t Cry)’에는 주위의 가시돋힌 말에 생채기를 입었던 힘든 연예계 생활에 대한 자조 섞인 고백이 담겨있다. “이 앨범은 제가 어렸을 때부터 살아온 과정과 현재의 나 그리고 내면의 목소리를 솔직하게 털어놨다는 면에서 제일 저 다운 앨범이라고 할 수 있죠. 그래서 앨범을 받아 본 아버지는 ‘이발소 집 딸’이란 노래를 보더니 눈물을 보이기도 하시더라구요. 제가 어렸을 때는 솔직히 친구들이 우리집에 와서 머리 자르고&nbsp;가는 게&nbsp;좀 창피했는데 이젠 제가 커서&nbsp;그런 과거까지도 사랑하게 됐어요. 아버지께서도 그걸&nbsp;느끼셨던 것 같아요” ▲ 가수 이효리◇'따라올 테면 따라와 봐'....30대에도 여전히 스타일리시한 스타로 남고파그렇다고 이효리가 새 앨범을 통해 과거 한탄과 고백만 하고자 한 것은 아니다. ‘잇츠 효리시’의 앨범 제목은 사실 중의적 의미를 담고 있다. 새 앨범 제목은 이효리의 연약한 속내를 털어 놓은 인생의 일기장 같은 의미도 있지만 한편, 가수 이효리로서 자신감을 표현하는 의미도 동시에 담고 있다. ‘누구 할 수가 있었다면 그건 내가 아닌 걸. 다시 나를 보니 어떤지 크게 소릴 질러봐’라는 가사의 ‘천하무적 이효리’는 새로운 무대에 대한 이효리의 자신감을 오롯이 드러내고 있다. “앨범 제목은 저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기도 하지만 가수로서의 자심감을 표현한 제목이기도 해요. 다른 가수가 표현할 수 없는 나만의 음악을 선보인다라는 콘셉트의 제목을 찾다가 고안해 낸 제목이죠. 또 이제 이효리는 한물 갔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30대가 됐어도 여전히 스타일리시하게 무대를 연출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어요" 이렇게 새 앨범에 대한 자심감에 차 있는 이효리에게 컴백에 대한 두려움은 없었을까? 지난 2003년 발매한 1집이 ‘텐 미닛(Ten Minute)’으로 소위 대박이 나긴 했지만 2006년 발매한 2집은 타이틀곡 ‘겟차(Get Ya)’가 브리트니 스피어스의 ‘두 썸씽(Do Something)’과 표절시비 논란에 휩싸이며 음악 팬들의 외면을 받았다. “3집을 준비하면서 전 앨범의 성공과 실패에 대한 부담감은 없었어요. 많은 사람들이 2집 실패 후&nbsp;크게 좌절했을 거라 생각하는데 이번 앨범 준비하면서 오히려 저 자신에 대한 부담이 더 컸죠. 이제 어느덧 데뷔 10년 차 중견가수가 돼 디지털 싱글 형식으로 쉽게 앨범을 낼 수도 없었구요. 가수로서의 활동을 충실히 하고 있구나라는 점을 음악 팬들에게 각인시키는 게 부담이라면 부담이었죠” 이효리는 이런 부담을 털고 타이틀곡 ‘유 고 걸(U-Go-Girl)’과 ‘천하무적 이효리’를 들고 화려하게 컴백했다. 이효리는 최근 지상파 방송 3사를 통해 섹시함과 카리스마 넘치는 무대와 큐트한 무대를 동시에 선보이며 음악 팬들의 환호를 받았다. 또 모든 무대를 라이브로 소화하며 지난 앨범 활동에 꼬리표처럼 따라 붙었던 ‘가창력 논란’도 불식시켰다. “이전에는 노래를 부르면 숨소리가 많이 들린다든지 호흡 조절이 안된다는 지적을 많이 받았어요. 하지만 이번 앨범을 준비하면서 등산을 하며 노래 부르는 연습을 많이 했는데 폐활량은 물론 노래 부를 때 호흡이 많이 길어진 것 같더라구요. 역시 노래는 연습만이 살 길이라는 것을 절실히 느꼈죠” ▲ 가수 이효리◇'패밀리가 떴다' 이효리, '국민 요정'에서 '국민 예능인'으로새 앨범의 좋은 반응과 함께 요즘 가수 이효리에게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SBS ‘일요일이 좋다’의 ‘패밀리가 떴다’ 코너다. 이효리는 이 방송을 통해 케이블채널 Mnet에서 방송됐던 리얼리티 프로그램 ‘오프 더 레코드(Off The Record)’에서는 보여주지 않은 또 다른 ‘악동’ 이효리의 모습을 보이며 시청자들의 눈길을 끌고 있다. &nbsp;‘패밀리가 떴다’의 한 PD는 이효리가 ‘국민요정’에서 ‘국민 예능인’으로 거듭나고 있을 정도로 몸을 사리지 않고 있다고 말할 정도였다. ‘패밀리가 떴다’를 통해 이효리가 좀 더 팬들에게 친근하게 다가갈 수는 있었겠지만 신비주의를 버림으로써 가수 이효리에게는 오히려 독이 될 수도 있는 일. 이효리는 이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을까? “남자 친구 처음 사귈 때는 화장도 하도 꾸미고 그러지만 오랫동안 사귀고 나면 정말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다 보여주잖아요. 방송도 마찬가지죠. 제가 신인도 아니고 이제 팬 여러분들과 제가 미운정 고운정 들어가며 사귄지가 벌써 10년인데 저에 대한 환상도 없을 거라 생각해요. 또 예능프로그램에서 편한 모습 보여주고 무대에서는 색다른 모습 보여주니 팬 여러분들이 더 좋아하시는 것 같기도 하구요” 이효리는 ‘패밀리가 떴다’ 방송은 꼭 여행을 떠나는 기분이라고 설명했다. 혼자 살다보니 외로움을 많이 타는 편인데 유재석과 대성 등 오빠, 동생들과의 촬영이 꼭 엠티를 가는 기분이라는 것의 그녀의 말이다. 이효리는&nbsp;또한 방송에서 보여주는 엽기 표정과 몸개그에 대한 네티즌들의 캡처 압박도 없다고 털어놨다. “캡처의 압박요? 전혀 없어요. 그 동안 연예계 생활하면서 접한 엽기 캡처가 어디 한 둘인가요?(웃음) 이제 그런 것에 두려울 연차도 지났고 또 그것을 두려워해 몸을 사리는 것도 저다운 모습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새 앨범 10만장 넘기면 단독 공연 하고파"...드렁큰 타이거와 작업도 욕심 20대 초반에 데뷔 해 이제 나이 서른이 된 가수 이효리. 그렇다면 앞으로 이효리의 계획과 꿈은 무엇일까? “제가 라이브가 많이 늘었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또 파워풀한 가창력을&nbsp;지닌 가수라고도 할 수 없죠.&nbsp;그래서 앞으로 앨범을 낼 때도 보컬 중심으로 갈 수는 없겠지만 제 무대에서의 비주얼에 대한 팬들의 기대가 있는 만큼 보여줄 건 보여주 돼 음악적으로도 좀 더 농익은 모습을 선보이고 싶어요. 또 이번 앨범이 10만장 이상 팔리면 처음으로 단독 공연도 열 생각이구요.” 또 앞으로 기회가 되면 드렁큰 타이거와 함께 힙합 음악을 해보고 싶다는 이효리. 음악적 도전에 망설임 없이 당당한&nbsp;그녀가 앞으로는 또 어떤 모습으로 팬들을 놀래킬지,&nbsp;가수 이효리의&nbsp;성장을 기대해본다.▶ 관련기사 ◀☞이효리, "경쟁? 엄정화는 친언니 같은 선배...서인영의 성장은 기대돼"☞이효리, 새 앨범 '스타일-뮤비 표절 논란'에 대한 생각은?☞이효리는 제2의 박명수?...."유재석은 내 평생의 개그 파트너"☞이효리가 밝힌 '김건모-휘성-메이비'와의 앨범 작업 후일담☞이효리, "연기 욕심 여전...'미녀는 괴로워' 같은 영화 출연하고파"
2008.07.24 I 양승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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