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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건희 회장 "혁신과 창의로 창조경영 완성하자"
- [이데일리 류성 산업 선임기자 황수연 기자] “실패가 두렵지 않은 도전과 혁신, 자율과 창의가 살아 숨쉬는 창조경영을 완성해야 합니다.”이건희(사진) 삼성전자(005930) 회장이 7일 삼성 신경영 선포 20주년을 맞아 그룹의 전 임직원에게 기념 메시지를 보냈다. 이 회장은 이 메시지를 통해 “앞으로 우리는 1등의 위기, 자만의 위기와 힘겨운 싸움을 해야 한다”면서 “신경영은 더 높은 목표와 이상을 위해 새롭게 출발해야 한다”고 임직원들을 격려했다. 최근 삼성전자등 그룹의 핵심 계열사들이 최고 실적을 거두면서 일부에서 지적되고 있는 자만과 안주하는 그룹내 문화에 대한 경계심을 표시한 것이다.이 회장은 이어 “어떠한 어려움에도 흔들리지 않는 영원한 초일류기업, 자랑스러운 삼성을 향한 첫 발을 내딛자”며 “다시 한 번 힘차게 나아가자”고 당부했다. 이날은 이 회장이 지난 1993년 6월 7일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그룹 임원 1800여명을 모아놓고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꾸라”며 ‘신경영’을 선언한 지 20주년 되는 날이다. 신경영은 기존 양적 경영에만 치중하던 삼성그룹을 ‘질’을 최우선시하는 기업으로 변모시키는 계기가 됐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이 회장은 “지난 20년간 양에서 질로 대전환을 이루었듯이 이제부터는 질을 넘어 제품과 서비스, 사업의 품격과 가치를 높여 나가야 한다”고 강조하기도 했다.그러면서 “열린 마음으로 우리의 창조적 역량을 모으자”며 “기업에 대한 사회적 책임은 더 무거워졌으며, 삼성에 대한 사회의 기대 또한 한층 높아졌다”고 말했다. 최근 사회적 이슈가 되고 있는 경제민주화와 대·중소기업 동반성장 등을 삼성도 적극 기업경영에 반영하겠다는 의지를 밝힌 것이다.이 회장은 이와함께 제2 신경영의 정의를 내리며 임직원들을 독려하기도 했다. 이 회장은 메시지에서 “우리의 이웃, 지역사회와 상생하면서 다함께 따뜻한 사회, 행복한 미래를 만들어 가자”면서 “ 이것이 신경영의 새로운 출발”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마지막으로 이 회장은 “임직원 여러분의 열정과 헌신으로 이제 삼성은 세계 위에 우뚝 섰다”고 임직원들에게 감사를 표시한 뒤 “오늘이 있기까지 삼성을 사랑하고 격려해주신 국민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며 국민을 향한 고마움을 나타냈다.◇다음은 이건희 삼성회장의 신경영 20주년 기념 메시지 전문사랑하는 삼성가족 여러분 오늘은 신경영을 선언한 지 20년이 되는 뜻 깊은 날입니다.그 동안 우리는 초일류기업이 되겠다는 원대한 꿈을 품고 오직 한 길로 달려왔습니다. 임직원 여러분의 열정과 헌신으로 이제 삼성은 세계 위에 우뚝 섰습니다.오늘이 있기까지 삼성을 사랑하고 격려해주신 국민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존경하는 임직원 여러분 20년 전 우리의 현실은 매우 위태로웠습니다.21세기가 열리는 거대한 변화의 물결 속에서 나부터 변하자, 처 자식만 빼고 다 바꾸자고 결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낡은 의식과 제도, 시대 흐름에 맞지 않는 관행을 과감하게 떨쳐 버리고, 양 위주의 생각과 행동을 질 중심으로 바꾸어 경쟁력을 키웠습니다. 세계 각지의 임직원 여러분지금 우리는 새로운 변화의 물결을 맞이하고 있습니다.개인과 조직, 기업을 둘러싼 모든 벽이 사라지고 경쟁과 협력이 자유로운 사회,발상 하나로 세상이 바뀌는 시대가 되었습니다.앞으로 우리는 1등의 위기, 자만의 위기와 힘겨운 싸움을 해야 하며, 신경영은 더 높은 목표와 이상을 위해 새롭게 출발해야 합니다.지난 20년간 양에서 질로 대전환을 이루었듯이 이제부터는 질을 넘어 제품과 서비스, 사업의 품격과 가치를 높여 나가야 합니다. 실패가 두렵지 않은 도전과 혁신, 자율과 창의가 살아 숨쉬는 창조경영을 완성해야 합니다.열린 마음으로 우리의 창조적 역량을 모읍시다.기업에 대한 사회적 책임은 더 무거워졌으며, 삼성에 대한 사회의 기대 또한 한층 높아졌습니다.우리의 이웃, 지역사회와 상생하면서 다함께 따뜻한 사회, 행복한 미래를 만들어 갑시다.이것이 신경영의 새로운 출발입니다.어떠한 어려움에도 흔들리지 않는 영원한 초일류기업, 자랑스러운 삼성을 향한 첫 발을 내딛고 다시 한 번 힘차게 나아갑시다.2013년 6월 7일회장 이 건 희▶ 관련기사 ◀☞ 이건희 회장 장모상에 삼성가 총출동☞ "신경영 성공비결은 이건희 회장의 배수진 전략"☞ 삼성전자, 신경영 20년 역사 한 눈에 본다☞ 삼성 ‘제2 신경영' 어떻게 전개될까☞ "신경영 성공비결은 이건희 회장의 배수진 전략"☞ '이신경영'의 성장기 ▶ 관련포토갤러리 ◀☞ 2013 호암상 시상식 사진 더보기
- 배우 유지태, 감독 유지태로 '마이 라띠마'(인터뷰)
- 영화 ‘마이 라띠마’ 연출 맡은 감독 유지태가 이데일리와 인터뷰를 갖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사진=김정욱 기자)[이데일리 스타in 최은영 기자]“카메라 뒤에 선 계기요? 대학 때 연극배우가 꿈이었는데 키가 너무 크다고 무대에 설 기회를 안 줬어요. 뒤에서 스태프로 일하는 경우가 많았죠. 자연스럽게 연출에 눈을 뜨게 됐어요.” 오는 6일 영화 ‘마이 라띠마’ 개봉을 앞두고 이 영화의 ‘감독’인 유지태(37)를 서울 사당동 아트나인에서 만났다. 감독으로 선보인 첫 장편영화. 여주인공의 이름이기도 한 ‘마이 라띠마’는 태국어로 ‘새로운 삶’이라는 뜻이다. 1998년 영화 ‘바이준’으로 데뷔해 영화 19편, 드라마 1편을 찍었다. 그렇게 스무 고개를 오르고 내린 뒤 감독으로 선보인 첫 작품이 바로 ‘마이 라띠마’다. 그래서일까. 영화는 흡사 유지태의 드라마 같다. 돈도 없고 직장도 없는 청년실업자(배수빈 분)와 한국인과 결혼한 태국인 이주 여성(박지수 분). ‘마이 라띠마’는 세상이 등 돌린 외로운 두 남녀의 힘겨운 삶과 사랑에 카메라를 바짝 들이댄다. 15년 전부터 매달려온 이야기다. 어촌 마을 아이들에서 이주여성으로 대상은 바뀌었지만, 유지태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그대로다. ‘소외된 사람들의 이야기’.“제가 어렸을 때 독립적인 성향을 갖게된 환경적인 이유가 있었어요. 그래서 더 ‘소외된 사람들’의 이야기에 끌렸는지 모르죠. 좁은 어깨의 아이들이 현실의 벽에 부딪혔을 때 이겨내지 못하고 좌절하는 모습이 안타까웠어요. 그들이 살면서 느꼈을 피눈물 섞인 아픔을 함께 나누고, 상처를 보듬어주고 싶었습니다.”그의 숨은 재능은 외국에서 먼저 알아봤다. 지난 3월 프랑스에서 열린 제15회 도빌아시아영화제에서 영화 ‘마이 라띠마’로 심사위원 대상을 받았다. 당시 제롬 클레멘트 도빌아시아영화제 심사위원장은 “예민한 소재임에도 감독의 뛰어난 통찰력으로 아름답게 표현됐다”며 “‘마이 라띠마’가 그의 첫 영화라는 사실이 놀랍다”고 극찬했다. 하지만, 이것은 어느 한순간 얻어진 결실이 아니다. 외부로 드러나지 않았을 뿐 ‘배우 유지태’와 ‘감독 유지태’는 더불어 성장했다. 유지태의 첫 장편영화 연출작 ‘마이 라띠마’“첫 영화 ‘바이준’을 촬영할 때에도 단편영화를 찍고 있었어요. 차에 싣고 다니던 제 개인 장비를 영화 촬영에 쓰기도 했고요. 시작부터 전 배우 겸 감독이었던 셈이죠.” 2003년 단편 ‘자전거 소년’으로 감독 데뷔해 2005년 제작사 유무비를 설립한 이후에도 ‘장님은 무슨 꿈을 꿀까요’, ‘나도 모르게’, ‘초대’ 등 4편의 중·단편 영화를 연출했고, 2편의 연극도 제작했다.그가 이끄는 영화제작사 ‘유무비’는 영어로 ‘Yoo Movie’, 한자로는 ‘有無飛’라고 쓴다. 유지태는 “있거나, 말거나, 뜨거나, 말거나, 창작은 계속된다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영어로 ‘유필름’이 아닌 ‘유무비’라고 칭한 것은 “좀 더 대중적인 영화를 만들겠다는 뜻”이라고 부연했다. 이는 감독이자 배우인 유지태의 지향점이기도 하다. 배우로 한창 활동할 때에도 그는 “나는 상업배우이고, 그러므로 연기력을 인정받는 것 못지않게 작품의 흥행 역시 중요하다”고 말했다.유지태는 겉은 부드러우나 속이 단단하다. 데뷔 초에는 ‘모델 출신 배우’라는 꼬리표를 연기력으로 떼어냈고, 지금은 ‘배우 출신 감독’이라는 또 다른 편견에 작품으로 당당히 맞서고 있다. 균형 잡힌 삶에 대한 갈망도 여전했다. “저예산·독립영화는 상업영화의 방부제 역할을 한다”면서도 정작 자신은 “규모 있는 상업영화를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그의 꿈은 ‘상업 작가 감독’이 되는 것. 보다 큰 예산을 움직이는 감독, 그러면서도 제 색깔을 확실히 내는 감독이 되는 게 목표다. “카메라 앞에서나 뒤에서나 전 제 몫을 다 할 거예요. 한국을 대표할 수 있는 영화배우 그리고 영화감독이 되고 싶어요. 두 가지를 다하려니 정말 바쁘기는 합니다. 하지만, 제가 만드는 다음 영화는 ‘마이 라띠마’처럼 15년은 걸리진 않기를 바라죠.” 유지태는 남들보다 머리 하나가 더 큰 키만큼 영화를 보는 눈높이도, 꿈의 크기도 컸다. 데뷔 초에는 ‘모델 출신 배우’라는 꼬리표 때문에 어려움을 겪었다. 유지태는 “지금은 ‘배우 출신 감독’의 편견을 극복해야 하는 게 또 다른 숙제”라고 말했다.(사진=김정욱 기자) ▶ 관련기사 ◀☞ ‘감독’ 유지태, 예능나들이..‘힐링남’이 뜬다▶ 관련포토갤러리 ◀☞ 유지태, `마이 라띠마` 감독 사진 더보기☞ 영화 `마이 라띠마` 언론시사회 사진 더보기☞ 배우 소유진 사진 더보기
- [여의도 칼럼]여성들을 위한 라이프디자인
- [박기출 삼성생명 은퇴연구소장] 직장 새내기 정모 씨(24세)는 사회생활을 막 시작한 자신감 넘치는 여성이다. 어렵게 얻은 직장이라서 그런지 무슨 일이든 잘 해내고 싶고, 자신의 인생도 멋지게 설계해 보고 싶은 마음이다. 정 씨와 같은 당찬 여성들이 꿈을 실현하기 위해 꼭 필요한 것 중 하나가 바로 자신을 위한 라이프디자인, 생애설계다. 생애설계는 인생을 살아가며 맞게 되는 여러 이벤트들, 즉 결혼과 내 집 마련, 자녀 출산, 자녀 교육, 은퇴 등 일생 동안의 여러 단계에 필요한 재무적, 비재무적 준비를 말한다. 사실 사회생활을 막 시작한 사회초년생들에게 은퇴까지 생각하라고 하는 것은 너무 이르다고 할 수도 있으나, 멋진 라이프디자인을 위해서는 노후준비가 반드시 고려돼야 한다. 그렇다면 인생 디자인을 어떻게 멋지게 할 수 있을까? 젊은 세대는 남녀 구분 없이 일찍 시작하는 것이 유리하다. 일찍 시작해야 이자에 이자가 붙는 복리효과를 최대한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 시기에는 소비를 철저히 관리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돈을 처음 벌게 되는 시기이기 때문에 지출을 통제하지 못해 무분별한 소비로 이어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1년에 150만원 정도의 명품 핸드백을 하나씩 사는 대신 이 돈을 30년간 모아 운용하면 약 1억 2000만원(수익률 연6% 가정) 정도가 된다. 그런데 여성들이 특히 결혼 후에 꼭 기억해야 할 것이 노후준비에 있어서 남편에게 너무 의존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남편 명의로 연금에 가입한 것이 본인의 노후준비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남편의 연금만으로는 은퇴 후 생활비로 충분치가 않고, 그마저도 남편의 병원비나 간병비 등으로 써버릴 가능성이 크다. 결국 남편 사망 후 홀로 남은 아내는 별다른 소득도 없이 10년 이상을 홀로 살아가야 하는 상황을 맞게 된다. 따라서 여성들은 노후에 경제적으로 큰 어려움을 겪지 않도록 미리부터 자신의 노후를 준비해야 한다. 실제로 통계적으로만 보면 여성이 남성보다 은퇴 후에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게 될 가능성이 크다. 여성들의 사회진출이 점차 높아지고는 있지만,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여성의 경제활동참가율은 49.7%로 남성보다 23.4% 포인트 낮다. 반면 여성의 기대수명은 84.1년으로 남성보다 6.9년을 더 산다. 노후 생활의 큰 버팀목인 국민연금 가입현황을 살펴봐도 여성에게 불리한 통계들이 눈에 띈다. 국민연금공단의 조사에서 베이비부머 세대(1955년에서 1963년 출생)의 국민연금 가입자 56.4%의 가입기간이 연금을 수급하기 위한 최소 요건인 10년 미만인 것으로 나타났다. 이 중에서도 여성의 가입현황은 더욱 열악한 것으로 조사됐다. 베이비부머 세대 남성의 87.3%가 국민연금에 가입되어 있었지만 여성은 59.9%에 불과했고, 이 중 절반이 넘는 여성들의 국민연금 가입기간이 5년 미만이었다. 이런 점을 고려할 때 여성들이 노후준비를 꾸준히 해 나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정책적 지원도 필요하다. 현재 국민연금에서 두 자녀 이상에 대해서 국민연금 가입기간을 추가로 인정해 주는 출산 크레딧 이외에도 출산이나 자녀 양육으로 직장을 잠시 쉬게 됐을 경우 노후준비의 흐름이 끊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한 추가적인 배려도 필요하다. 이와함께 아내가 전업주부인 남성의 경우 아내의 이름으로 가입한 연금에도 추가로 소득공제를 해주는 것도 생각해 볼 수 있다. 현재 영국이나 독일에서 사적연금에 대해서도 국가가 지원을 해주는 것처럼 저소득층 여성이나 재취업한 여성들을 중심으로 사적연금 일부를 지원해 주는 방안도 있다. 이러한 제도적 뒷받침은 여성들이 노후준비의 사각지대에서 벗어나 더욱 멋진 인생을 설계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 '대한민국 이문세' 5만 관객 '감동과 환호' 속 빠져든 추억
- 가수 이문세가 1일 서울 올림픽주경기장에서 열린 ‘대한민국 이문세’ 콘서트에서 자동 연주가 되는 피아노에 기대 고 이영훈이 작곡한 ‘사랑이 지나가면’을 부르고 있다.[이데일리 스타in 김은구 기자] 이문세의 눈에는 눈물이 맺히는 듯했다. 목소리는 노래가 언제 끊겨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메여갔다. 지난 2008년 세상을 떠난 고 이영훈 작곡의 노래 ‘사랑이 지나가면’을 부를 때였다.이문세는 이 노래를 부르기에 앞서 “무명 가수와 무명 작곡가였다. 30분 만에 만든 노래도 있지만 작업실에서 서로 머리를 맞대고 단어 하나하나를 만들어간 노래도 있다”고 소개하며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것을 수줍어하는 사람이었지만 살아있었다면 이 노래만은 직접 연주해줬을 것 같다”고 말했다.이날 공연의 세트리스트에 ‘사랑이 지나가면’에는 ‘위드(with) 이영훈’이라고 돼 있었다. 이문세는 자동으로 연주되는 피아노 옆에서 마치 피아노를 연주하는 이영훈을 보는 듯한 표정으로 노래를 불렀다. 몇몇 관객들도 이문세와 이영훈의 추억을 공유하듯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이문세의 노래에는 추억이 있다. 40대 전후의 많은 대한민국 사람들이 인생을 살아오며 맞는 여러 상황에서 이문세의 노래가 마치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게다.1일 서울 올림픽주경기장에서 열린 이문세 콘서트 ‘대한민국 이문세’에서 객석을 가득 메운 5만 명의 관객들이 하늘색 야광봉을 흔들고 있다.2013년 6월을 여는 첫날 서울 잠실 올림픽주경기장에 운집한 5만 관객에게 이문세는 또 하나의 추억을 선사했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큰 공연장, 최다 관객이 모여 푸른색 형광봉을 흔들며 함께 밤을 수놓는 것부터 이문세 콘서트 ‘대한민국 이문세’는 흔하게 할 수 없는 경험이었다. 이문세의 지휘로 5만 관객들이 애국가를 제창한 오프닝 무대부터 독특했다.올해 서울 상암동 월드컵경기장에서 열렸던 ‘국제가수’ 싸이의 콘서트와는 또 달랐다. 싸이는 댄스곡 위주의 가수인 반면 이문세는 밝고 경쾌한 노래도 있지만 발라드 곡도 많은 가수다. 몇몇 가수들은 공연에서 발라드를 부를 때 감정을 잡는 데 방해가 된다며 관객들에게 따라 부르지 말아줄 것을 요청하기도 한다. 애초 5만명을 통제하는 것부터 쉽지 않아보였다. 이문세는 아랑곳없었다. 이문세가 ‘난 아직 모르잖아요’, ‘그대와 영원히’ 등 발라드곡을 부를 때 관객들은 너나할 것 없이 노래를 따라 불렀다. 관객 각각은 낮은 톤이었음에도 5만명의 목소리가 모이자 선명해졌지만 이문세는 흔들림 없이 공연을 이어갔다. 오히려 그런 분위기를 즐기는 듯했다.“심장이 터질 것 같습니다. 이런 기분 아십니까?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은데 꿈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게 5만 명의 함성을 질러주세요.”이문세는 객석의 호응을 이끌어내는 것은 물론 “5만명 앞에서 노래를 불러본 적 있느냐”며 “나중에 기회가 되면 생일 때라도 친구들 5만 명을 모아 노래를 불러보라. ‘그 때 이문세 기분이 그랬구나’라고 느낄 것”이라고 눙치는 등 입담으로 ‘별이 빛나는 밤에’를 비롯해 다년간 라디오 DJ로 활동해온 관록도 공연에 녹여냈다.가수 이문세가 1일 서울 올림픽주경기장에서 열린 ‘대한민국 이문세’ 콘서트에서 ‘할말을 하지 못했죠’(위)로 뮤지컬 같은 무대를 선보인데 이어 성시경과 함께 ‘소녀’를 불렀다.‘할 말을 하지 못했죠’와 ‘조조할인’ 무대는 다수의 댄스들이 함께 무대에 올라 뮤지컬처럼 꾸며졌다. 이문세는 댄스도 마다하지 않았다. 1959년생으로 50세를 훌쩍 넘긴 나이임에도 빠른 곡과 느린 곡을 적절히 섞어 완급조절을 해가며 수시로 무대를 뛰어다녔다.게스트도 ‘초특급’이라는 말이 아깝지 않았다. ‘소녀’는 성시경이 함께 했고 ‘이 세상 살아가다 보면’은 ‘대한민국 이문세 합창단’이라는 타이틀로 배우 안성기와 박경림, 방송인 이금희, 김주우, 박슬기, 하지영, 최유라, 영화감독 류승완, 개그맨 박수홍, 가수 가희, 김완선, 김태우, 노을, 로이킴, 소냐, 알리, 양동근, 이수영, 이정, 정준영, 허각, 요리사 에드워드권, 사진작가 조세연, 스포츠스타 박찬호, 우지원, 송종국 등이 참여했다.‘그녀의 웃음소리뿐’은 MBC ‘나는 가수다’에서 격돌했던 김범수와 윤도현이 함께 불렀다. ‘솔로예찬’ 무대는 MBC ‘댄스 위드 더 스타’에 출연했던 김규리와 박지우가 선보이는 열정적인 댄스와 함께 했다.관객들은 공연 전 영상을 통해 소개된 율동을 함께 하며 ‘이 세상 살아가다 보면’ 공연을 즐기는 등 이문세가 만들어가는 새로운 공연의 역사 하나를 완성했다.(사진=무붕)▶ 관련기사 ◀☞ 이문세, 故 이종환 추억 "나를 무조건 예쁘다고 해준 분"☞ `라디오 스타` 이종환 별세, 이문세-윤종신 등 ★ 추억에 감사▶ 관련포토갤러리 ◀☞ 콘서트 `대한민국, 이문세` 사진 더보기☞ `대한민국 이문세` 제작발표회 사진 더보기
- 김영란 교수 “이제는 누군가 해야 할 이야기…불신의 문화 깨야”
- 지난 15일 마포구 서강대에서 김영란 서강대 법학전문대학원석좌교수는 ‘소수자적 감성’을 강조했다. (사진= 이데일리 한대욱 기자)[이데일리 박보희 기자] 대학을 취업학원이 아닌 학문의 전당으로 지켜내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진정한 ‘대학인’(大學人)들이 있다. 명강의로, 학문적 성취로 존경받는 교수들을 찾아 그들의 가르침을 들어봤다. [편집자주]“모든 문제가 사회의 신뢰도와 연결되는 것 같아요. 엘리트들끼리 연줄을 쌓아서 모든 것을 독식한다는 의심이 있고, 실제 그런 부분들이 있죠. 하지만 그렇지 않은 부분까지도 의심이 드는 건 결국 우리 사회의 신뢰도가 낮기 때문일 거에요. 그런 사회적 불신을 깨야 해요. 이 책도 결국 우리 사회의 신뢰도를 높이기 위한 시도라 볼 수 있겠죠.”‘김영란’이라는 이름이 다시 화제의 중심에 올랐다. 국민권익위원회가 ‘김영란법’이라 불리는 ‘부정청탁금지 및 공직자의 이해충돌방지법’ 제정을 연내에 추진하겠다고 나서면서다. ‘김영란법’은 공직자가 직무관련성과 상관없이 100만원이 넘는 금품을 받으면 처벌하도록 하는 법안이다. 이에 발맞춰 권익위원장 시절 이 법안을 추진한 김영란(57) 서강대 법학전문대학원 석좌교수가 대담집 ‘이제는 누군가 해야 할 이야기’를 펴냈다. 이 책에서 김 교수는 ‘부패의 고리를 끊기 위한 고민’을 주제로 대중에게 말을 건넸다. 김 교수의 삶은 1978년 여성 최초로 서울대 법대 재학 중 사법고시에 합격하는 순간부터 화제의 중심에 있었다. 그녀의 결혼은 첫 검사와 판사 부부 탄생으로, 2004년에는 첫 여성 대법관 임명으로 세간의 이목을 끌었다. 30여년 몸담았던 법관에서 물러날 때는 관행처럼 이어지던 로펌 행을 마다하며 또다시 화제가 됐다. 평범한 삶으로 돌아간다던 그녀를 세상은 다시 권익위원장으로 불러냈고, 그녀는 ‘김영란법’으로 다시 한 번 조용한 파장을 일으켰다. 교수로 새 삶을 시작했지만, 사람들의 관심은 여전하다. 그녀는 당연하다고 말하는 선택들을 세상은 남다르다고 평가하기 때문일 것이다. “대중적이면서 쉽게 전달할 수 있는 책을 써야겠다는 생각으로 대담이라는 형식을 택했어요.”책 얘기를 꺼내자 김 교수는 정치자금 문제로 말문을 열었다. “책에서 정치자금 부분이 확실하지 않다는 지적이 있더군요. 저는 법을 연구하는 사람이에요. 현실 정치 부분에는 부족한 점이 많겠죠. 제가 어떤 제도를 제안하는 건 적합하지 않다는 생각이었어요. 다만 근본적인 성찰이 필요한 부분에 대한 문제제기를 잔뜩 던져놨어요. 어떻게 해결해나갈지는 함께 고민해 봐야 할 문제인 것 같아요.”김 교수의 남편인 강지원 변호사는 지난 12월 대선에 출마했다. 이를 옆에서 지켜본 입장에서 누구보다 현실 정치의 한계를 체감했을 터다.“모든 것이 양 당의 주자 중심으로 가더군요. 새로 출발하는 제삼자가 새로운 정책을 내도 사람들에게 전달할 길이 막혀있어요. 결국 정책과 무관한 이미지로 후보를 찍게 되는데, 사람들이 정책 선거 마인드를 갖기 힘든 구조가 아닌가 싶어요.”그동안 김 교수가 주목을 받아온 이유는 화려한 이력보다 사회적으로 예민한 사안에서 보여준 남다른 선택들 때문이다. 그녀는 대법관 시절 가장 기억에 남는 판결로 학교 내 학생의 종교의 자유 인정 판결을 꼽았다. 김영란 서강대 법학전문대학원 석좌교수는 지난 15일 서강대 연구실에서 법조인이 갖춰야 할 덕목으로 다른사람의 입장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고 말했다.(사진=이데일리 한대욱 기자)“믿지 않는 종교의 학교에 배정을 받은 학생, 선교를 목적으로 만들어진 학교 사이에서 종교의 자유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가에 대한 판결이었어요. 대법원이 본연의 역할을 한 판결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요.”그녀의 판결들은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의 권리 신장을 위한 사회 시스템을 한 단계 발전시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녀는 무엇보다 ‘소수자적 감성’을 강조했다. “소수자를 지켜야 하는 것은 배려의 차원을 넘어 사회가 건강하게 유지되기 위해서이기도 해요. 다수자들만 있는 사회에서는 새로운 아이디어를 얻기가 어렵죠. 소수자들이 사회에 새로운 활력을 주는 공급원이 될 수 있어요. 다수의 사회가 잘못된 길로 가지 않도록 하는데 귀중히 모셔야 하는 존재들인 거예요. 또 어떤 면에선 다수인 사람이 다른 면에서는 소수자이기도 하죠. 나의 소수자적 관점을 보호하려면 남들도 보호해줘야 해요. 서로 함께 살기 위해 당연히 해야 할 문제인거에요. 끊임없는 성찰이 필요해요.”70년대 판사의 자리에 오른 그녀 역시 소수자였다. 절대 다수가 남성인 법조계에서 판사이자 아내, 며느리, 엄마로 살아남는 것은 쉽지 않았다고 회고한다. 여전히 남성적 문화 속에서 무거운 삶을 헤쳐 나가고 있는 후배 여성들에게 그녀는 현실 속에서 문화를 바꾸기 위한 노력을 강조했다. “저 자신도 모든 일이 힘들어서 어쩔 줄을 몰라 하며 살아낸 사람이에요. 우선은 개인의 노력이 필요한 것 같아요. 당장 눈앞에 힘든 것에 급급해서 흐름을 놓치면 나중에 큰 차이가 나요. 문화는 조금씩 바뀌어 나가는 거예요. 갑자기 바뀌는 게 아니죠. 제 책도 문화를 바꾸기 위한 책이거든요. 지금도 많이 바뀌었잖아요. 또 어느새 바뀌어 있을 거예요.”법관으로서 한국 역사에 한 획을 그은 그녀의 어릴 적 꿈은 사실 문학평론가였다. 직접 소설을 써 교지에 실리기도 했다. 부모님의 권유로 법관의 길을 걷게 됐지만, 이루지 못한 꿈에 대한 아쉬움은 없을까.“아쉽긴 했죠. 제가 판사가 되던 때는 여성이 독립적인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직업이 많지 않았어요. 그때는 부모님의 권유로 하게 된 일이었지만 해보니 나름대로 재미있었어요. 결국 지금까지 오게 됐죠. 지금 보니 아버지가 절 꿰뚫어 보신 것 같아요(웃음).” 문학인을 꿈꾸던 김 교수가 최근 가장 감명 깊게 읽은 책은 남아프리카공화국 초대 헌법재판관인 알비 삭스의 ‘블루 드레스’. 어쩔 수 없이 법관의 길을 걸었다는 그녀지만 여전히 법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고민의 깊이를 더 해 나가고 있었다. 후배 법조인에게 당부도 잊지 않았다. “법률가가 권력을 가지거나 돈을 많이 버는 자리라 추구하는 건 낡은 생각이에요. 어떤 직업이든 다양성과 차이를 존중하고 함께 살아간다는 생각 없이는 우리 사회의 좋은 밑거름이 될 수 없어요. 무엇보다 다른 사람에 다한 이해가 중요해요. 감정적 이해도 필요하지만 입장의 이해가 필요하죠. 타인은 적이 아니고 자기 생각의 폭을 넓혀주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자기 자신을 연장해 나가세요.”판사가 아닌 교수로 학생들을 만난 지 석 달 남짓한 시간이 흘렀다. “강의 준비하면서 전에 했던 판결들을 전체적인 시각에서 거리를 두고 보게 됐어요. 그게 참 재미있네요. 공부가 많이 돼요.”마침 스승의 날이었던 인터뷰 날, 학생 두 명이 들어와 카네이션을 건넸다. 카네이션을 받아든 김 교수는 “교수가 되니 또 이런 재미가 있네요”라며 밝게 웃었다.
- [현장in 기업]④가구가 아닌 공간을 팝니다
- [부산=이데일리 민재용 기자]“서재는 이렇게 꾸미는 게 좋겠는데, 아들방에는 이 책상이 잘 어울릴까?”결혼 후 15년 만에 내집 마련의 꿈을 이루고 이사를 앞두고 있다는 김성의(46·女) 씨의 발걸음은 한 없이 가벼웠다. 침실, 거실, 주방 등 테마별로 가구가 배치된 다양한 공간(room)을 이리저리 누비던 김 씨는 마음에 드는 가구를 발견하면 메모해 뒀다가 다시 다른 방으로 발걸음을 옮기기 바빴다.▲한샘 부산 센텀점 내부. 아파트 내부를 그대로 재현해 가구를 배치했다.지난 26일 가구·인테리어 매장으로는 국내 최대 규모(지하 5층, 지상 8층, 연면적 2만3600m²)인 한샘(009240) 부산 센텀점을 찾았다. 평소 ‘가구를 파는데 그렇게 큰 규모의 매장이 필요할까’라는 생각은 센텀점을 찾고 180도로 바뀌었다.한샘 부산센텀점의 가장 큰 특징은 ‘다양한 공간’으로 요약된다. 가구뿐 아니라 조명, 소품에 이르는 모든 인테리어 아이템이 침실, 거실, 자녀방, 부엌 등 주택을 구성하는 기본 공간별로 전시돼 있어 고객들의 원스톱 쇼핑을 돕는다.김무현 부산직매장 가구팀장은 “가구 단품이 아닌 공간을 판매한다는 모토로 센텀점에는 침실 거실 주방 등 100개의 공간(room)을 꾸며 놓았다”며 “고객들은 다양한 공간 속에서 여러 가구를 한꺼번에 만날 수 있어 집안 꾸미기 아이디어를 손쉽게 얻을 수 있다”고 말했다.한샘의▲고객들이 부엌을 재현해 놓은 공간에서 직원과 상담하고 있다. 공간 어필 전략은 매출 증대에도 긍정적 영향을 주고 있다. 침대나 소파 등 단품 가구를 사려고 매장을 찾은 고객들이 다양한 공간 속에 배치된 침대와 소파를 보고 이에 어울리는 옷장과 테이블 등도 덩달아 사가는 패키지 판매가 늘고 있는 것. 이러한 경향으로 센텀점은 지난해 분기당 110억원대 매출을 기록하며 한샘 매출 증대의 1등 공신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한샘 부산 센텀점은 국내에 곧 진출하는 글로벌 가구사 이케아에 대비한 측면이 강하다. 이케아는 교외 창고형 매장을 컨셉으로 전 세계 가구 시장을 석권하고 있으며 국내에도 경기 광명시에 내년 말 첫 매장을 여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한샘의 부산 센텀점이 이케아를 대비하고 있지만 이케아의 기존 매장과는 여러모로 대비되는 것도 사실이다. 우선 센텀점의 도심 속 백화점식 고급 매장 컨셉은 교외 창고형 이케아 매장과 대비된다. 또 공간별로 가구를 전시해 패키지 판매를 유도하는 전략도 종류별로 같은 상품의 가구를 한데 모아놓고 싼값에 단품 가구를 구입하도록 하는 이케아의 전략과도 상이하다하지만 한샘은 이케아와 다른 자신들의 전략이 국내 소비자들의 욕구를 더 충족시켜 줄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다. 지난해 연간 30만명이 방문해 연 매출 500억원을 올린 센텀점의 성공이 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는 것.김무현 팀장은 “전문 영업사원의 1대1 맞춤 상담, 물류 시공 서비스 등 고객형 맞춤 서비스는 이케아가 따라올 수 없는 한샘 만의 장점”이라며 “이케아가 진출해도 한국 시장의 주도권은 한샘이 계속 쥘 것”이라고 강조했다.▶ 관련기사 ◀☞부동산 경기는 어려운데 인테리어株는 '훨훨'☞[특징주]한샘, 사상최대 실적 전망..나흘째 오르며 '최고가'☞한샘, 리모델링 수요 급증..목표가↑-한화
- "한국형발사체, 나로호와 달라..상업화돼야 진짜 성공"
- [이데일리 김혜미 기자] 지난 1월 말 나로호(KSLV-1)의 발사 성공은 온 국민을 감격에 들뜨게 했다. 완벽한 우리 기술은 아니었지만, 이제는 우리도 조금씩 우주강국으로 향하고 있다는 데는 모두가 공감했다. 두 번의 발사실패와 거듭되는 발사 연기로 국민들의 피로감은 상당했지만 한 번의 성공은 모든 것을 잊게 하는 데 충분했다.‘나로호 성공의 주역’ 김승조 한국항공우주연구원장을 만난 건 지난 13일 오후 대전 항우연 접견실에서였다. 월요일인데도 여느 때와 달리 피곤해보였기에 의아했는데, 알고보니 이틀 전 인간동력항공기 조종사 후보선발 1차 예선인 ‘4km 단축마라톤대회’에 참석한 뒤 몸살이 났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오는 26일 2차 400m 달리기에도 참여할 예정이다. 만 62세의 나이지만, 열정은 좀처럼 사그라들지 않는 듯 했다.요즘 김 원장의 최대 관심사는 지속가능한 항공우주산업을 어떻게 육성할 것인가 하는 부분이다. 나로호는 ‘발사 성공’ 만으로도 큰 의미가 있었지만, 한국형 발사체를 만들어 상업화해야 하는 또다른 숙제가 있기 때문이다. 그는 우리보다 훨씬 기술이 앞서있지만 상업화에 성공하지 못한 일본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큰 그림을 그리는 데 여념이 없었다.-잠잘 때도 한국형 발사체를 만드는 꿈을 꾼다면서요.“한국형 발사체 사업이 제 궤도를 잡는 일이 중요합니다. 올해 틀을 잘 짜야 합니다. 경쟁력있는 민간항공기를 개발할 수 있는 터전을 만들고, 무인항공기, 개인용 항공기(PAV) 기술 등을 개발해 미래 항공기술을 발전시켜야 합니다. 우리가 우주강국으로 가려면 로켓 완제품은 물론 관련 부품 등 전체 체계를 자신있게 만들 수 있는 기업이 있어야 하는데, 그 역할은 항공산업이 적합합니다.”-요즘 한국형 발사체의 ‘상업화’를 강조하고 있습니다.“한국형 발사체를 개발해 발사에 성공했다고 칩시다. 거기서 박수치고 끝낼 사업이 아니죠. 발사 성공한 이후가 더 중요합니다. 우리 인공위성이든, 남의 위성이든 지속적으로 우리 로켓으로 발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다만 첫 개발 이후부터는 다른 나라보다 가격 경쟁력을 갖추는 게 중요하죠. 처음엔 개발비가 좀더 들더라도, 나중에 상용화했을 때 저렴해질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해야 합니다. 처음엔 최상의 제품을 만들고, 두 번째부터는 가격을 낮출 수 있어야 한다는 얘기입니다.”-일본은 왜 상업화에 실패했습니까.“너무 초고급 로켓을 만들었던 탓이죠. 로켓을 두고두고 쓸 것도 아닌데…. 엔지니어들의 높은 기대수준에 맞춰 제작해 가격경쟁력을 잃었습니다. 비행기를 만들 때도 분야별 엔지니어 주장대로 만들면 해괴한 비행기가 나온다고 합니다. 발사체든 항공기든, 설계와 개발 과정에서 끊임 없이 협의하고 양보해서 가볍고 저렴하면서 성능 좋은 물건을 만들어야 하는 이유죠.”김승조 한국항공우주연구원장(항우연 제공)-올해 한국형 발사체 사업 예산이 줄어들었는데.“원래 이번 추가경정예산을 1500억원 받을 수 있을 걸로 봤는데 3분의 1 정도 받는 데 그쳤습니다. 하지만 없는 것보단 낫고, 아직까진 그렇게 급하진 않습니다. 내년에만 최소 3000억원의 예산이 필요하지만 계획대로 추진되는 데는 무리가 없을 걸로 봅니다. 이미 가설계는 끝났고 앞으로 연소실 시험, 엔진시험, 단 시험, 시험발사 등을 거쳐 2018년과 2019년에 75t급 엔진 4기를 하나로 묶어 300t급 엔진 연소시험을 진행하는 스케줄을 갖고 있습니다. 몇 번 실패하겠지만 반드시 달 탐사를 이룰 겁니다.”-항공우주기술 분야엔 인력난이 없나요.“우려하는 것 만큼 부족한 정도는 아닙니다. 지금 한국형 발사체나 달탐사로켓 제작한다고 해서 한꺼번에 인력을 많이 키워놓으면 나중에 이들의 진로도 걱정해야 합니다. 한국형 발사체의 경우 항우연에선 100명 정도만 더 있으면 충분하죠. 물론 인공위성은 나중에 시장이 커질 수 있기 때문에 인력이 더 필요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반드시 우주공학을 전문적으로 전공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관련 산업에 종사할 수 있습니다.”-항우연이 최근 인공위성 수출을 위해 ‘카리 솔루션(KARI Solution)’ 카탈로그를 제작했는데요.“인공위성은 항우연에서 가장 성공적인 사업 분야입니다. 항우연이 하는 사업은 항공과 인공위성, 발사체 등 3가지인데 인공위성이 지금까지는 성과가 가장 좋았죠. 카리 솔루션에는 영상판매와 인공위성 조립, 테스트하는 시설, 장비, 지상국, 관제, 영상 시스템 등 우리가 보유한 인공위성 기술이 모두 집대성돼 있습니다. 특히 우리가 만들 수 있는 인공위성은 광학위성, 통신위성 등 100kg급에서 3t급까지 모두 50여가지를 수출할 수 있습니다. 이걸 토대로 하면 창조경제에도 일익을 담당해서 관련 회사도 많이 만들 수 있습니다.조만간 위성 영업을 전담할 연구소기업을 하나 만들 계획이다.국가적인 사업이므로 자금 조달도 해야 하고, 코트라(KOTRA)나 코이카(KOICA) 등과 협조도 필요합니다.”-연구소 기업이 이미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작년 2월에 ‘㈜인스페이스’와 ‘㈜나라’ 등 두 곳의 연구소기업이 문을 열었습니다. 인스페이스는 다중위성 신호·영상 처리 시스템과 영상 고부가처리 등을, 나라는 탄소 순환 연구 및 탄소지도 시스템 개발 업체죠. 국내 최초 민간위성 제작업체인 쎄트렉아이(099320) 내 영상판매 회사가 따로 독립해 연구소 기업으로 연구원 내에 사무실을 마련할 계획입니다.”-‘창조경제’가 화두입니다.“항공 분야에서 중형항공기, 민간헬기 개발 등을 추진하고 있는데 이 부분에서 곧바로 정보통신기술(ICT)이나 기계, 소재 등 융합 중심 신산업 창출을 유도할 수 있습니다. 중장기적으로 추진하는 전기비행기나 고고도 장기체공 비행기, PAV 개발은 세계적으로도 아직 시장이 형성되지 않은 신사업 분야이기 때문에 향후 국가 주력사업으로 성장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특히 PAV는 각종 전자장비의 총집합체로, 빨리 관련기술 개발에 나선다면 세계 1위의 IT기술을 자랑하는 우리나라가 세계 시장을 석권할 수 있는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봅니다.”-연구자들이 자유롭게 상상력을 개진할 수 있는 공간인 ‘다빈치 랩’을 만드셨는데요.“연구원들이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발산할 수 있도록 일종의 마중물을 뿌린 셈이죠. 일과가 끝난 뒤나 주말이나, 자유로운 시간에 이 곳에서 우리 연구원들이 셀프 모티베이션(self motivation)이 될 아이디어를 구현할 걸로 봅니다.”-‘빅 이벤트’를 준비하고 계신다면요.“올 가을 일산에서 우주와 항공을 테마로 한 에어쇼 ‘ADEX 2013’을 열 예정입니다. 나로호에서 벗어나 항우연이 우주항공분야에서 하고 있는 것들을 모두 보여줄 것입니다. 이때 상영관에서 상영할 3차원 영상물을 제작 중인데, 배우 이민우와 최재원이 출연합니다. 2040년에 항우연을 은퇴한 노신사가 우주호텔에 가서 금혼식을 올리는데, 나로호와 한국형 발사체 등을 회상하며 지난 날을 되짚어보는 내용이죠.블록버스터가 될 걸로 자신합니다.(웃음).”◇김승조 항우연 원장은자타가 공인하는 국내 항공우주 분야 최고 전문가로 지난 1월30일 나로호 발사 성공의 주역이다.1950년생으로 서울대 항공우주공학과를 졸업하고 미 텍사스주립대에서 기계항공공학과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1973년부터 1979년까지 국방과학연구소 연구원을 지냈으며, 1992년 서울대 공대 항공우주공학과 학과장, 2001년 서울대 항공우주신기술연구소장 등을 역임했다. 1995년부터 서울대 기계항공공학부 교수직을 맡고 있으며 2010년에는 미국 항공우주학회 펠로우(fellow)로도 선정됐다.그는 지난 2001년 PC 32대를 연결해 만든 슈퍼컴퓨터로 미 덴버에서 열린 ‘슈퍼컴퓨터 경진대회’에서 고든벨상(Gordon Bell Prize)을 수상했다. 2011년 6월부터 한국항공우주연구원장을 맡고 있다.
- [WSF 2013]카카오톡 "멀리 가려면 함께 가라"
- 이석우 카카오 공동대표 (사진제공:카카오)[이데일리 김인경 기자]“기획단계부터 ‘함께’를 고민했더니 서비스의 질이 달라지더군요.”이석우 카카오 공동대표는 ‘상생의 정신’이 카카오의 성공비결이라고 했다. 처음 카카오톡이 출시될 때만 해도 반짝 인기로 끝날 것이라는 시선이 많았다. 그러나 유사 어플리케이션이 쏟아지는 상황에서도 카카오톡의 독주는 계속됐다.‘애니팡’, ‘캔디팡’, ‘드래곤플라이트’ 게임기능이 인기를 끌며 중장년층까지 장악했다. 게임개발사, 콘텐츠 창작자들과의 윈-윈 전략이 ‘카카오톡’을 국내 스마트폰 사용자 중 95%가 이용하는 국민앱으로 만들었다.이 대표는 “‘게임하기’는 카카오의 상생을 실현하는 대표적인 플랫폼”이라며 “개발자들을 존중하면서 그들이 게임개발에 집중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카카오톡 가입자수는 9000만명에 육박한다. 카카오톡 PC버전 출시도 초읽기에 들어갔다. 테스트 참가자 1만명 모집에 21만명이 모여들 정도로 주목받은 카카오톡 PC버전은 이달 중 정식버전이 출시된다. ‘모바일을 넘어선 IT 생태계를 구축하겠다’는 카카오의 불가능해 보이던 꿈은 현실이 되고 있다. ◇“콘텐츠는 유료다” 카카오의 용감한 도전 카카오는 4월 유료화페이지인 카카오페이지를 정식 오픈했다. 카카오페이지는 누구나 쉽게 디지털 콘텐츠를 사고 팔아 수익을 내는 오픈 플랫폼이다. 앱이 아닌 콘텐츠를 사고파는 시장이라는 점에서 세계 최초다. 허영만 화백이 카카오페이지를 통해 ‘식객2’ 연재중이다. 소설가 정이현, 뮤지션 윤종신 등 500여명의 제작자들이 창작물을 올리고 있다. “아이디어가 있는 개인이나 사업자가 더 좋은 콘텐츠를 생산하는 데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고 싶습니다. 콘텐츠 자체가 가치를 인정받고, 수익이 되는 환경이 조성돼 제작자가 수익을 기반으로 다시 경쟁력 있는 콘텐츠를 제공할 수 있는 선순환구조가 만들어졌으면 합니다” 물론 비관적인 시선도 있다. ‘온라인 콘텐츠는 무료’라는 인식은 그동안 많은 인터넷 기업들을 좌절로 몰아넣었다. 100만개가 넘는 커뮤니티를 보유, 인터넷 커뮤니티업계의 공룡으로 불리던 프리챌은 2002년 유료화 전환을 선언했다가 대규모 이용자 이탈로 존폐위기에 내몰렸으며 결국 지난 2월 파산했다. 온라인 우표제를 통해 이메일 유료화를 추진했던 다음도 이용자 반발에 사업을 접았다.카카오는 모바일의 강점인 ‘소셜’ 기능을 앞세워 선구자들을 좌절시킨 유료화의 덫을 돌파하겠다는 계획이다. ◇“2015년까지 100만 파트너 만들겠다”카카오톡의 성장은 모바일업계 전체의 성장으로 이어졌다. 특히 첫 사업인 모바일 게임업계의 성장은 눈부시다. 국제시장조사기업 ‘뉴주’의 3월 조사에 따르면 위메이드, 선데이토즈, 핀콘 등 주요 모바일 게임사들은 카카오 게임을 기반으로 전세계 게임사 순위서 20위 안에 들었다. 애니팡, 다함께 차차차, 헬로히어로, 우파루마운틴 등 폭발적인 인기를 모은 카카오 전용 게임들은 모바일게임 인기순위 20위 안에 들었다. 이뿐만 아니라 카카오톡의 배경인 ’테마’, 대화창에 활용할 수 있는 ‘이모티콘’ 역시 캐릭터 디자이너들에게 새로운 기회가 되고 있다. “카카오톡의 방대한 친구관계와 트래픽을 활용해 제3의 개발사 및 중소업자, 콘텐츠 저작자들과 사용자를 연결시켜 줍니다. 우리의 역할은 이들이 카카오톡을 발판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돕는 겁니다” 카카오의 목표는 2015년까지 수익을 창출하는 100만 파트너를 만드는 것이다. 앱 개발사와 파트너, 콘텐츠 창작자 등 카카오를 둘러싼 주체들이 함께 성장해야 카카오는 물론 IT생태계가 함께 성장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 대표는 “‘빨리 가고 싶으면 혼자 가라. 하지만 멀리 가고 싶으면 함께 가라’라는 아프리카 속담이 있다”며 “상생하며 생태계를 키워야 업계 전체가 발전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 "오늘이 내 생에 가장 젊은 날입니다"
- [이데일리 송이라 기자] “살아가면서 ‘와…!’ 하는 감탄사가 나오는 순간이 있잖아요. 저는 이러한 감격의 순간이 많을수록 더 행복한 삶이라고 생각해요. 제게는 여행이 감격을 주는 최고의 수단이에요.”이해욱 전 KT사장이 지난 4월 서초구 서초동 사무실에서 최근 출간한 ‘이해욱 할아버지의 지구별 여행기’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사진=한대욱 기자)사무실은 단출했다. 작은 방 안에 책상 하나, 테이블 하나, 간이 주방이 전부였다. 으리으리한 소파도 향긋한 차를 내오는 비서도 없었다. 그러나 어쩐지 생기가 넘쳤다. 이 방의 주인은 이해욱(75) 전 KT 사장이다. 제19대 체신부 차관과 2대 한국통신(현 KT) 사장, 한화그룹 정보통신회장이란 화려한 명함이 있던 자리엔 한 쪽 벽면을 가득 채운 여행 책자들과 세계지도, 지구본이 놓였다. 은퇴 후 그에겐 전 세계 193개국을 여행한 최초의 한국인, 이상적인 은퇴 생활 롤모델 1위라는 수식어가 추가됐다. 그는 최근 여행경험을 바탕으로 ‘이해욱 할아버지의 지구별 여행기(두베)’를 출간했다.“인생 1모작이 사회와 경제, 국가를 위해서였다면 2모작은 온전히 나만을 위한 삶을 살고 싶었어요. 저는 학창시절부터 막연히 나라 밖 세상에 대한 꿈을 꿨습니다.”이 전 사장의 인생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오래전부터 ‘여행’이란 단어였다. 남들이 입시에 매달릴 때 이 전 사장은 서울에서 두 곳밖에 없는 영어회화학원의 문을 두드렸고, 유학자격시험 연령이 갑자기 고등학교 졸업에서 대학교 졸업으로 바뀌어 할 수 없이 한국 대학에 들어간 이후에도 외국영화를 보면서 꿈을 키웠다. “졸업 후 공무원이 됐는데 하늘이 도왔는지 해외출장이 잦았던 체신부에 발령받았습니다. 덕분에 은퇴 전까지 40개국을 다녔어요. 모든 게 흑백이던 시절, 해외에서 본 총천연색의 풍경은 정말 충격적이었습니다.다만 혼자만 즐기는 여행이 아내에게 늘 미안했다. 산부인과 의사인 부인 역시 해외출장의 기회가 많았지만 ‘공무원의 아내’라는 이유 때문에 포기해야 했다. 대신 두 사람은 은퇴 후 함께 배낭여행을 떠나기로 단단히 약속했다.결국 예순에 가까운 나이, 부부는 배낭을 둘러맸다. 유럽을 시작으로 중남미와 태평양, 아프리카까지 섭렵했다.“중남미국가인 베네수엘라의 호텔방에는 ‘직원이라며 호텔 방문을 두드려도 절대 열어주지 말고, 경찰이라고 해도 믿지 말 것’이라는 경고사항이 적혀 있었어요. 알고 보니 치안이 너무 불안해 한 시간에 한 명씩 강도로 죽어나가는 곳이더라고요.”국경지역에서 괴한에게 붙잡혀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패혈증으로 39도까지 열이 올라 응급실에 실려가기도 했지만, 여행이 주는 감격은 모든 위험을 감수하고도 넘쳤다. 그는 은퇴자들에게 배낭여행을 적극 추천했다. “보통 퇴직을 하면 찾아주는 사람이 줄어들면서 우울감에 빠지곤 하는데 이럴 때 배낭여행은 거추장스러운 의식을 훌훌 털어버릴 수 있는 좋은 기회에요. 아내와 손잡고 걷고, 길거리 음식을 사먹는 등 체면을 던지니 할 수 있는 일이 점점 많아지더라고요.”은퇴 후 여행이 경제적으로 부담되는 건 사실이지만, 싸고 좋은 여행방법을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고 했다. 그는 오늘도 또다른 여행을 꿈꾼다. “저는 아침에 눈을 뜨면 ‘오늘이 내 생에 가장 젊은 날’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무언가 모험을 해야 한다면 최적의 시기는 바로 오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