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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로운 시작 준비하는 '골프여왕' 박세리의 꿈과 미래
- 박새리, 사진=하나금융그룹[이데일리 스타in 이석무 기자] 내년 시즌을 끝으로 은퇴를 선언한 ‘골프여왕’ 박세리(38·하나금융그룹)가 올 시즌 첫 대회인 혼다LPGA타일랜드 대회에 앞서 출전 소감과 향후 계획에 대한 소감을 밝혔다.박세리는 소속사 하나금융그룹을 통해 공개한 인터뷰에서 향후 행정가로서의 바람, 은퇴 후의 소감과 브라질 올림픽 골프종목 감독에 대한 생각을 전하며 남은 선수 생활 동안 바쁜 일정을 보낼 것임을 예고했다.아울러 소속사 대회인 LPGA 하나·외환 챔피언십의 발전상과 메이저 대회로의 발전 가능성, 지난 선수생활에 대한 평가를 곁들였다.다음은 박세리 프로와의 인터뷰 전문이다.- 시즌 첫대회를 맞았는데, 소감이 어떤가?▲지난 해는 미국 투어 생활 17년 동안 가장 오랫동안 쉰 것 같다. 사실 큰 부상은 아니었지만 생각보다 회복 시간이 많이 걸렸다. 선수생활을 하면서 부상이 없다는 것도 말은 안 되지만, 나름 관리를 많이 한 편이었기 때문에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다른 한편으로는 그 덕분에 가족들하고 시간을 많이 보낼 수 있었던 것은 정말 좋았다. 조카를 유치원에 데려다주기도 했었고, 식구들하고 식당도 가서 맛있는 것도 먹는 등 은근히 바쁘게 보냈다. 그런 소소한 일상들이 좋았다.어쨌든 작년에 공백이 긴 탓에 올랜도로 돌아온 다음에는 정말 열심히 했다. 어차피 은퇴에 대한 의견도 밝혔으니, 이제 처음부터 시작한다는 기분으로 훈련을 알차게 했다. 기대는 크다. 올해는 즐거운 마음으로 시즌을 받아들이고 있다. 그동안 대회에 참가를 못했으니 완전히 100퍼센트라고 얘기하지는 못하겠지만 차근차근 찾아나가면 될 문제다. 다만 스윙은 확실히 편해지고 좋아져서 기대는 크다. 올해는 새로운 스폰서인 하나금융그룹과 함께한다. 이런 점도 새로운 기분이 들게 하는 요인일 것 같다.▲계약 조인식 때도 ‘또 다른 시작’이라고 얘기했는데, 확실히 내겐 새로운 기회라고 생각한다. 우선은 심리적으로 든든하다. 스폰서라는 자리가 굉장히 크기 때문이다. 나를 믿어주는 편이 있다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올해가 기대된다. 기대하시는 만큼 기대를 저버리지 않도록 열심히 하는 일만 남았다.- 내년에 선수생활을 마무리하고 한국골프의 발전을 위해 힘쓰겠다는 이야기를 했었다. 그런 와중에 LPGA 선수회 이사를 하겠다는 소문이 전해져왔는데, 현재 진행 중인 이야기인가?▲사실 그동안 관심이 많았다. 하지만 내 개인적으로 모든 일에는 책임이 따라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책임과 기대만큼 해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예전에 LPGA측으로부터 투표권이 없는 임시 이사가 아닌 정식 이사 자리를 제안받기도 했었다. 그렇지만 내가 하고 싶은 것이라면 책임감을 갖고 잘 해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어설프게 책임감 없이 할 바에는 안하는 게 낫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이사회의 경우는 거의 매주 한두시간 씩 이런 미팅을 갖는다. 정해진 시간에 한두시간 씩 꼭 이런 미팅을 갖기 때문에 사실 시간을 많이 잡아먹는다. 일정하게 정해진 시간이 아니라 유동적이기 때문에 이것에 맞춰서 아침 일찍 나와서 연습을 할 때도 있고, 전화통화도 많다. 아니면 수 많은 선수들과 LPGA 상황, 스폰서 관계 등에 관해 직접 소통해야하는 상황에 대처하기 어렵다.예전에 일미 언니가 했을 때도 고생 많이 하는 것을 봤다. 할 수 있다는 자체가 대단한 것 같다. 봉사하는 마음도 있어야 한다. 만약 기회가 된다면 아직도 관심이 많다. 올해에 제의가 들어온다고 해도 이젠 충분히 관심이 있다.- 그렇다면 박세리 프로가 그런 행정적인 부분에 대해 배운 후에 펼치고 싶은 꿈은 무엇인가?▲사실상 LPGA에서나 KLPGA에서나 일년동안 논의되는 사항은 비슷한 것 같다. 여기도 전체 선수 미팅 때 나오는 얘기는 30퍼센트 정도는 흘려들을 수 있는 뻔한 이야기이고, 30퍼센트 정도는 들을만한 이야기이다. 나머지 부분이 심각하게 논의가 될 만한 이야기들이다. 단, LPGA는 이런 논의점에 대한 대처가 확실하다. 완전히 만족할 수는 없지만, 제도적으로 논란을 보완하는 장치가 마련되어 있기 때문에 서로간에 이해를 하고 넘어가는 것들이 많다. 이런 점들을 배워나가면서 은퇴 후에 선수들이 대회를 하면서 대회장에서나 스폰서에게 확실한 선수로서의 대우를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쉬워 보이는 길은 아닌 것 같다.- 짧은 시간에 바뀌지는 않을 것이다. 10년이 걸릴 수도, 20년이 걸릴 수도 있다. 하지만 한국의 상황이 변한 것을 생각해보면 미국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다. 좋은 것을 받아들이고, 변화시키는 것은 전세계 어디와도 비교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내 생각은 선수 생활 중, 은퇴 시점과 은퇴 후의 계획을 착실하게 만들 수 있는 여건이 갖춰지면 좋겠다는 것이다. 그러면 좋은 선수들이 좀 더 오랫동안 선수생활을 할 수 있고, 어느 나라에서든 대우를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대한민국의 운동선수들은 이뤄낸 업적에 비해서 은퇴 후에는 아무것도 없다. 골프에만 제한해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스포츠에 공통되는 것이다. 이런 점들만 보완이 되면 운동선수들이 은퇴 후에도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부분이 더 많아질 것이다.나는 지금 이런 부분을 생각하고 있고, 배워나가고 싶다. 아직은 부족하고 많은 것을 배워야하겠지만 꼭 이 분야에 기여를 하고 싶다. 목표를 세워서 시작하게 된다면, 무책임하게 그만두지는 않을 것이다. 책임감을 갖고 해 볼 것이다.- 행정가로서의 면모도 그렇고, 지난 번에 큰 화제가 된 것이 브라질 올림픽에서의 골프 감독을 해보고 싶다는 바람이었다. 진행하고 있는 사항이 있는가?▲아직 특별한 진행사항은 없다. 내가 하고 싶다고 해서 할 수 있는 자리는 아니기 때문이다. 관심은 있지만 그렇게 되기 위해서 무엇이든 거쳐야 하는 단계는 있는 법이다. 다른 것 보다 골프를 한 이래로 골프가 올림픽 종목에 들어간다는 소문은 많았지만 그게 몇해 전에 공식적으로 결정이 됐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관심을 갖게 된 것이다.골프가 개인종목이다보니 하나로 팀을 이루기 어려운 종목이다. 몇해전에 렉서스컵 대회 캡틴을 하면서 느낀 것이 이런 점이었는데, 반면 굉장히 재미있었다. 선수들 간에 성향이 있고, 특히 한국에서 온 후배들은 내가 같이 플레이해보지 못한 선수도 많았다. 하지만 어느 정도 게임을 아는 선수들이기 때문에 결국 중요한 것은 작전이더라. 개인간의 호흡을 맞추는 과정이 쉽진 않았지만 굉장히 매력이 있었다. 우리나라 선수들의 경우, 팀을 짜주면 그 순간 굉장히 호흡이 좋다는 것을 느꼈다. 이런 점은 외국 선수들에게서는 볼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에 신선했다. 골프를 완전히 다른 각도에서 바라볼 수 있는 경험이었다.이런 경험에 비추어볼 때, 올림픽 감독이란 자리가 선수생활을 마감하면서 동기부여가 될만한 또다른 시작점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욕심이 나는 것이다.-박세리를 능가하는 선수가 쉽게 나오기 어려운 단적인 일면이 명예의 전당이다. 일반인은 물론이고 선수들조차도 그게 얼마나 이루기 어려운 업적인지 잘 모르는 것 같은데.▲그건 당연한 것이다. 어쨌든 명예의 전당에 들어가던 그 순간은 정말 잊지 못할 순간이었다. 특히 태극기가 올라가던 그 순간은 여러 가지 생각이 많이 들었다. 이제 어떤 선수가 명예의 전당에 들어온다고 해도 다시 태극기가 올라가는 일은 없기 때문에 ‘최초’라는 의미가 와 닿는 순간이었다. 내가 대한민국 국민으로 태어나서 이 자리에 올 때까지의 많은 과정들이 기억이 났고, 혼자만의 힘으로는 올 수 없는 자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인 최초로 통산 상금 1천만 달러를 넘었고, 메이저 5승을 포함해 통산 25승 등 기록도 많다. 하지만 아직 그랜드 슬램에 대한 점은 남겨진 숙제다. 에비앙 챔피언십을 포함해 이제 네 번의 기회가 남아있는데, 준비는 잘 되어가고 있는가?▲물론이다. 은퇴하기 전에 꼭 해야할텐데 말이다. 내 경우 모든 컨디션의 초점은 메이저 대회에 맞춰져 있다. 그걸 17번 반복해 왔다는 것이 문제라서 그런 것 뿐이다(웃음).내 코치는 훈련을 하면서 메이저대회 코스에 대한 시뮬레이션을 항상 주문한다. 샷을 해도 ‘다이나쇼어 코스 몇 번 홀을 생각하면서 하라’는 주문이 많다. 그 정도로 준비는 항상 하는 편인데도 어렵다. 열심히 준비를 하고 있으니 결과가 좋기만을 바랄 뿐이다.-박세리가 큰 역량을 갖추면 소속사 대회이자 우리나라에서는 유일한 LPGA대회인 LPGA 하나·외환 챔피언십도 좋은 영향이 있을 것 같다. 대회 초대 챔피언으로서 이 대회에 대한 애정도도 남다를 것 같은데...▲오랜 시간 많은 대회를 했지만 우리나라 대회가 정말 좋다는 생각은 있다. 워낙 손님 대접에 후한 특성이 있어서 그런지 몰라도 이 대회에 불만을 갖는 선수는 없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대접이나 음식이 다른 대회와는 확실히 다르다. 일년 중 벌어지는 대회 가운데, 이 대회 음식이 가장 좋다. 이건 다른 선수들도 모두 공감하는 내용이다.골프장 위치가 공항에서 가깝다는 점도 큰 장점이다. 안전도 다른 나라보다 월등히 높은 편이다. 다만 한가지 걸리는 것이 날씨인데, 이 부분은 앞으로 대회가 커지고 발전한다면 해결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하나금융그룹이 바라는 것처럼 메이저대회 규모의 상금을 갖추고, 출전 선수 수를 늘리고 예선 제도를 도입하는 부분이 차근차근 진행되면 좋겠다. 이런 부분만 개선된다면 아시아에서도 메이저 대회가 열리지 말라는 법은 없다. 조금씩 개선이 되는 모습이 보인다면, 아시아에서 (메이저 대회를) 하게 된다면 분명 우리 대회가 우선이다.사실 초반에 싱가포르에서 열리는 HSBC 대회가 투자를 많이 하면서 좋은 모습을 보였고, 두 번째가 한국이었지만 지금은 완전히 역전이 된 상태다. 역사는 아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만큼 앞으로 좀 더 전통이 쌓이고 거기에 걸맞는 수준의 규모가 된다면 좋을 것 같다.
- 故신해철 팬클럽, '신해철법' 제정 촉구..서명 운동 재개한다
- 신해철[이데일리 스타in 강민정 기자] 고(故) 신해철의 팬클럽이 ‘신해철법’ 제정을 촉구하는 릴레이 서명 운동을 재개한다. 소속사 관계자에 따르면 신해철 팬클럽 ‘철기군’은 오는 28일 서울에 이어 부산에서 ‘민물장어의 꿈’이란 부제로 개최되는 ‘2015 넥스트(N.EX.T) 유나이티드 콘서트’현장에서 ‘신해철법’ 제정을 촉구하는 서명운동을 다시 열기로 결정했다. ‘신해철법’은 ‘의료분쟁조정법 개정안’으로, 의료 분쟁시 환자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한 취지를 담고 있다. 고인의 사망 이후 이 법안의 필요성이 강력하게 대두돼 왔으나 의료계의 강한 반발로 현재 법 제정에는 뚜렷한 진전을 보이지 않고 있는 상황이다. 관계자는 “고인의 사망 사건에 대한 경찰의 수사 발표를 기다리고 있는 시점에서 ‘신해철법’ 또한 다시금 불씨를 살리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며 이번 서명 운동은 미약하나마 나비의 날개짓을 펼치고 싶다는 팬들의 바람이다”고 전했다.넥스트 유나이티드 콘서트는 오는 28일 오후 7시 부산 롯데호텔 아트홀에서 열린다. 이번 공연을 위해 보컬 이현섭을 비롯해 드럼에 이수용과 신지, 베이스에 김영석과 박종대, 건반에 장기순, 그리고 기타 김세황까지 넥스트 멤버들이 또 한 번 뜻을 함께했으며, 여기에 홍경민과 K2 김성면, 에메랄드 캐슬 지우가 스페셜 보컬로 합류해 탄탄한 라인업을 완성했다. 현재 인터파크에서 티켓 예매가 가능하다. ▶ 관련기사 ◀☞ ''속사정쌀롱'' 장동민, "유재석은 내 인생을 바꿔준 사람" 눈물 고백☞ ''파랑새의 집'', 첫주 시청률 연속 상승..''가족끼리'' 여운 달랬다☞ 이영돈PD, 역시 발로 뛰는 탐사계의 1인자..시청률 2배 ''껑충''☞ ''K팝스타4'', 톱10 휩쓴 ''女風''..올해는 차원이 다르다☞ ''슈퍼맨'' 엄태웅 "결혼 후 발레리나 포기한 아내, 미안하다"
- 김현수가 말한다, FA에 대한 진심
- 사진-두산베어스[미야자키=이데일리 스타in 박은별 기자]두산 김현수는 올시즌 리그에서 가장 주목받고 있는 타자다. 그가 타격에서 얼마만큼 진화하는 모습을 보여줄지, 중심타선에서 어느 정도의 존재감을 보일 수 있을지도 관심사지만 올해 그의 행보에 유독 관심이 쏠리는 이유는 따로 있다. FA라는 점에서다. 그는 올시즌을 마치면 FA 자격을 얻는다. FA 시장에서 가장 주목받는 대어. 그는 타구단에서도 탐을 낼 수밖에 없는 타자다. 2015시즌을 준비하는 김현수가 올시즌 후 맞게 될 FA, 그리고 해외진출에 대한 솔직한 속내를 전했다. ▲해외진출? 우승이 더 간절해해외 진출에 대한 생각이 전혀 없는 건 아니다. 선수라면 누구나 국가대표라는 마음으로 해외 무대에서 뛰고 싶어 한다. 김현수도 물론 그렇다. 그는 “일본, 이런 곳에 오는 것도 꿈이다”고 했다. 그러면서 “사실 돈보다는 환경이 더 중요한데, 솔직히 여긴 한국보단 야구하기 더 좋은 환경이다. 한국은 이것저것 도와줘야 할 것들이 많은데 일본은 다 갖춰져있는 상태에서 내가 하고 싶은 야구를 집중해서 할 수 있다”고 해외 진출을 원하는 이유를 설명했다. 그렇다고 아직 해외 진출과 관련해 결정된 것은 없다. 김현수는 “현재로선 해외진출을 단정 지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우승하고 간다고 단정할 수도 없다. 에이전트가 할 문제다. 가장 중요한 건 올 시즌 잘 치르는 것이다”고 강조했다. 그에게 중요한 건 해외진출 여부보다 시기다. 아직 두산 유니폼을 입고 이뤄내지 못한 꿈이 있기 때문이다. 그는 미련을 남기고 싶지 않다. 김현수는 “팀에서 하고 싶었던 걸(우승) 못 이뤘기 때문에 그래서 FA를 뒤로 미뤄두고 있다”고 솔직하게 말했다. ▲돈보다 더 중요한 건…김현수가 내년 시즌 국내에 남는다고 가정한다면 가장 관심사는 몸값이다. 프로는 몸값으로 자신의 가치를 증명해 보인다. 그를 두고 벌써부터 “100억 시대를 기대해봐도 좋다”는 예상까지 흘러나오는 이유다. 김현수는 과연 어떤 생각을 갖고 있을까. “내가 지금까지 해 온 것에 대해 숫자로 말할 수 있을지, 돈으로 환산할 수 있을지, 구체적인 금액에 대한 목표가 생길까에 대해선 생각을 해봤다. 그런데 1억, 혹은 10억을 주더라도 내가 야구를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는 곳이 가장 좋지 않을까 생각한다.”정말 최악의 상황까지 가정했을 때, 불의의 사고로 1년을 쉬어야한다고 하자. 그때도 자신을 믿어주고 도와줄 수 있는 팀을 원한다는 것이다. 그가 숫자에 신경 쓰지 않는 이유다. 그는 “지금 연봉도 솔직히 충분하다. 먹고 사는데 큰 지장이 없다. 연봉 1,2억을 받을 때도 많이 부족하다고 못 느꼈다. 야구는 내가 좋아서 하는 건데 돈을 쫓아간다는 말이 난 제일 싫다”면서 “지금은 내가 많은 연봉을 받고 있는 입장이라 내가 저연봉을 받았다면 이런 생각이 들었을까 싶지만 나는 야구가 좋아서 하고 있으니까 내가 언제까지 야구를 할 수 있느냐가 중요하고 그렇기 때문에 구단의 믿음이 더 중요하다고 본다”고 말했다.김현수는 “내가 정말 이 팀에서 크게 부상을 당하더라도 재기를 도와줄 수 있는, 구단의 진정성 말이다. 은퇴는 내가 정말 마음먹었을 때 하고 싶으니까…”라고 설명을 이어갔다. 사실 FA 최고 기록 갱신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는 건 아니었다. 어렸을 때만 해도 “나도 한 번 해볼 수 있을까”에 대해 막연히 생각하긴 했지만 그는 결국엔 본질로 돌아갔다. 야구다. “‘얼마를 받기 위해서 야구를 한다?’ 이런 것보다 ‘야구를 왜 했을까?’에 대해서 많이 생각하게 되더라. 주변에서 ”연봉 많이 받아 좋겠다“라고 이야기 하시는 분들도 있는데 물론 돈을 벌기 위해 야구를 하는 것도 없진 않지만 내가 처음 아빠에게 ”야구를 하겠다“고 했을 때 과연 내가 당시 돈의 가치를 알았을까. 돈이 많고 적고를 떠나 야구 선수로 야구할 수 있는 환경을 얼마나 잘 만들어주느냐만 생각하고 있다. 얼마의 시대의 열겠다? 숫자로 말하기보다 내가 앞으로 얼마나 야구를 즐겁게 할 수 있느냐가 중요하다.”▲타구단 이적? 내가 동료들을 떠날 수 있을까FA를 앞둔 김현수에 대한 또 하나의 가능성. 타구단으로의 이적이다. 김현수는 두산의 프랜차이즈 스타다. 두산 유니폼이 아닌 다른 유니폼을 입고 있는 김현수의 모습을 스스로 상상은 해봤다고 했다. 머릿속에 다양한 그림을 그리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자신은 없다고 했다. 정든 두산, 그리고 좋은 동료들, 팬들의 함성소리를 과연 떠날 수 있을지에 대해선 쉽게 상상이 되지 않았다.김현수는 “물론 상상은 해봤다. 이 팀이 그리울 수도 있다고 생각은 했다. 룸메이트를 했던 (박)건우, (허)경민이, (양)의지 형 등 그런 사람들을 떠날 수 있을까 생각한다. 내가 과연 건우랑 이야기 안하고 살 수 있을까. FA가 되서 그게 가능할까, 꼭 남아야겠다 이런 생각보다 사람들의 응원소리, 함성소리가 그리울 것 같다. 사실 다른 유니폼을 입는 건 상상이 쉽게 되는데 여기 자체를 떠난다는 게 상상도 되지 않는다. 다른 유니폼을 입고 있어도 잠실로 와야 할 것 같고 그렇다”고 말했다.이것이 2015시즌 FA를 준비하는 김현수의 솔직한 마음이었다.
- 세종시 고깃집 사장의 기부 고집
- [이데일리 정태선 기자] “정희씨의 초심을 잃지 않고 기부를 계속할 겁니다. 그래서 세종시에서 가장 기부 많이 하는 음식회사의 사장이 되는 게 꿈입니다”38세의 젊은 고깃집 사장이 고집스럽게 기부활동에 매달리고 있다. 최근에는 설 명절을 맞아 강원도 심향영육아원에 기부화환 사업 ‘정희씨’로 모은 기부금으로 육아원 신축에 필요한 냉장고 설비와 과일세트 등을 전달했다.권혁기 워낭 대표이사(사진)는 지난 2011년부터 공익재단(기부포털) 해피빈, 기프토와 함께 ‘정을 나누는 희망의 씨앗’이라는 이름의 ‘정희씨’ 캠페인에 참여했다. 꽃이나 화환을 보내면 해피빈의 기부화폐인 콩을 통해 도움이 필요한 단체에 투명하게 기부금을 전하는 사업이다. 실제로 해피빈 포털 내에서 유기동물, 난치병 어린이, 아프리카 식수시설 설치 모금함을 여는 등 모금을 위해 많은 노력을 해 왔다. 하지만, 기부에 대한 부정적 인식과 무관심, 홍보부족 등으로 어려움도 많이 겪었다.“공익사업, 기부사업은 뭔가 크고 대단한 걸 기대하면 안 되는 것 같아요. 반응이 주춤하자 사람들은 조금씩 무관심해졌습니다. 심지어 같이 기획해놓고 빠지면서 뒤에서 손가락질하는 사람도 있었죠. 하지만 처음부터 해피빈과 함께 정희씨를 기획했던 김모 전 대표와 그를 후원하는 사람들은 변치 않고 저를 믿어줬습니다. 앞으로도 이렇게 소박하게, 꾸준하게 갈 겁니다”권 대표는 어린 시절부터 사업의 꿈을 키웠지만,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20대 후반의 권혁기 대표이사는 잘 나가던 떡집 사장이었다. 창조떡방이라는 이름으로 백화점에서 승승장구하는 날도 있었다. 그러나 제대로 된 떡 설비를 들여놓고 대량생산을 준비하던 시점, 외환위기가 터져 상권은 순식간에 무너졌고, 결국 부도를 냈다.그 이후로 경호회사, 식당 매니저 등 궂은 일 마다하지 않고 하면서 재기를 노렸다. 그러던 중 언론사 기자였던 김씨와 함께 정희씨라는 기부사업에 몸을 담았다. 하지만 기부사업만으로 생계를 이끌기는 어렵다고 판단, 홀로 세종시로 내려가 식당사업에 뛰어들었다. 부산 용호동에서 ‘자연이 주는 밥상’이라는 식당을 운영하는 이모님의 권유였다. 홀로 어렵게 식당을 운영하면서도 정희씨 사업은 부인과 함께 열심히 계속했다.“대안이 없었습니다. 3살짜리 딸, 8개월짜리 아들과 부인을 서울에 두고 홀로 세종시에 뛰어들 수밖에 없었죠. 2년만 혼자, 아니 가족 모두 고생해보자. 애들한테 미안하지만, 정말 모험이었습니다”권 사장은 처음에는 수가성이라는 이름의 작은 한정식집으로 시작했다. 요리 명인인 이모의 정성이 들어간 음식들이라 손님들은 좋아했지만 많이 팔아도 적자였다. 세종시는 주로 점심장사 한때에 의지해야 하는 만큼, 작은 가게로 이익을 내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주변 사람들의 도움으로 어렵게 자본을 구해 가게를 키웠고, 직접 한우를 썰고 보리굴비를 재우는 것으로 콘셉트를 바꿔 성공했다. 성장률 만큼은 세종시 식당 중에서 1등이라 주변에서 부러움을 사고 있다. 바쁜 와중에도 권 사장은 부인과 함께 정희씨 기부화환 일을 계속하며 네트워크를 넓혀갔다. 덕분에 적립된 기부금은 2000만원을 훌쩍 넘어섰다.“꽃을 취급할 때에도 느꼈지만 구매 자체에 기부를 포함하는 건 정말 어렵더라구요. 물론 기업을 대상으로 했지만, 소비자에게 기부액을 부담시킬 순 없다는 걸 깨달았죠. 그래서 제가 열심히 벌어서 계속 기부를 하는 쪽으로 마음을 굳혔습니다.”권 사장은 고기를 직접 자르고 분류하고 저장하고 숙성할 줄을 안다. 보리굴비 맛 역시 그가 몇 달간 원산지를 찾고, 수 백번 염도와 시간을 달리하며 재우고 먹어보면서 겨우 찾은 방법으로 탄생했다. 음식사업처처럼 기부활동도 그는 직접 처음부터 끝까지 책임지고 해갈 각오다.“저는 어린 시절 어머님을 먼저 하늘나라로 보내야 했습니다. 저는 기부를 받아야 할 대상이기도 했죠. 그래서 일회성 기부를 받았던 사람들의 마음의 후유증도 잘 압니다. 그래서 앞으로는 세종시의 어려운 아이들 소수라도 확실하게 지속적으로 돕고 싶습니다” 권 대표는 정희씨를 꽃 뿐 아니라 여러 식품이나 선물 등에도 기부를 적용하는 방안을 고민하고 있다. 정을 나누는 상품이라면 무엇이든 소비자에게 부담을 주지 않고 나눔으로 이끄는 가교가 되겠다는 생각이다.“정을 나누는 희망의 씨앗이라는 브랜드는 정말 저와 집사람, 그리고 김 전 대표의 눈물이 배인 기부 브랜드입니다. 제 꿈은 세종시에서 가장 기부 많이 하는 음식회사의 사장이 되는 겁니다”▶ 관련기사 ◀☞ 세종시 맛집 '워낭', 정희씨와 따뜻한 기부행진
- 임성언 "닮은 꼴인 정형돈 부인 한유라, 대학 땐 얼굴도 못 쳐다봐"
- [이데일리 e뉴스 김민정 기자] 배우 임성언의 패션 화보가 공개됐다.임성언은 최근 bnt와 ‘여배우의 24시간’이라는 주제로 진행된 이번 화보에서 그는 여배우가 가진 다방면의 면모를 여과 없이 발휘했다.이번 화보는 나인걸, 주줌, 스타일난다, 룩옵티컬 등으로 구성된 총 네 가지의 콘셉트로 진행됐으며 임성언은 부스스한 아침 속에서도 빛을 잃지 않는 여배우의 루즈한 모습부터 레드로 가득한 고혹함, 세련되고 카리스마 넘치는 커리어 우먼, 우아함으로 드레스업한 연출까지 스스럼없이 소화해냈다. 사진 속 그는 카리스마 넘치는 커리어 우먼의 모습이 드러나는 모노톤의 블라우스와 팬츠로 차가운 도시녀로서의 여배우 콘셉트를 확실하게 완성했다. 이마를 훤히 들어낸 깔끔한 포니테일 헤어가 더욱 세련미를 강화시켰다.이어진 인터뷰에서 임성언은 최근 ‘청담동 스캔들’ 종영 후 바로 단막극을 준비하게 돼 출연진들끼리의 뒷풀이 여행에 참여하지 못했던 아쉬움을 토로했다. 다리역할을 했던 최정윤을 중심으로 이중문, 강성민, 서은채, 사희, 김정운은 단체 채팅창을 만들어 자주 모임을 가질 정도로 돈독해졌다고 전햇다.어린 시절부터 남들 앞에서 춤과 노래 같은 재롱부리기에 주저함이 없었다며 배우의 꿈을 키웠던 지난 날을 얘기하기도 했다. 막상 여배우가 되고 보니 누구에게 쉽게 추천할만한 일은 아닌 것 같다는 그. 그래도 쉴 때 보다는 일할 때가 컨디션이 더 좋아진다는 모습에서 이 직업이 그에게 천직임을 알 수 있었다.환상적인 비율을 자랑하는 그의 다이어트 비법은 바로 식이요법. 샐러드와 닭가슴살로만 버텼던 지난날을 전하며 사실 본인은 식탐이 굉장히 많은 사람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연예인 크리스찬 합창단인 ‘액츠29’ 모임의 송년 모임에서 멤버 노사연을 제치고 ‘밥 상’을 받았을 정도라고. 넘치는 식욕에 그는 음식을 자주, 많이, 오래 먹는다고 말했다.빼놓을 수 없는 이야기인 2003년의 KBS ‘산장미팅 장미의 전쟁’에 대해선 감사하는 프로가 아닐 수 없다고 답했으며 당시 조연출이었던 나영석 PD 작품의 원조 출연자로서 지금도 꼭 다시 뵙고 싶다는 마음을 전했다. 당시 함께 출연했던 김빈우와는 일년 후 드라마 ‘때려’에서 만났다는 말과 함께 지금 연락하고 지내진 않지만 최하나, 이윤지, 윤정희 등의 동료들이 드라마에 나오면 스스로도 모르게 응원하게 된다고 밝혔다.닮은 꼴 정형돈의 부인 한유라와는 대학 초기 얼굴도 똑바로 못 쳐다봤던 선배였지만 지금은 너무 친해졌다며 그들을 보며 결혼에 관한 언급을 하기도 했다. 우선은 일을 열심히 하면서 때를 기다리고 있단다.단막극 ‘놓지말자 정신줄’ 촬영 중 극 속에서 감정을 이끌어낼 수 있도록 스탠바이 때도 같이 울어주던 박순철을 기억에 남는 파트너로, 롤모델로는 김희애를 뽑기도 했다. 앞으로 사랑스러움을 최대치로 표현할 수 있는 로코물의 주인공역을 맡고 싶다는 그는 올해는 대중들의 사랑을 듬뿍 받아 상 욕심을 내 보겠다는 포부를 밝히기도 했다.▶ 관련포토갤러리 ◀☞ 배우 임성언, 패션 화보 사진 더보기
- 군청 사무관에서 국무총리까지..이완구는 누구?
- [세종=이데일리 피용익 기자] 41년 전 충청남도 홍성군청에서 일하던 이완구 사무관을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가 국회에 입성하고 충남 도지사를 거쳐 국무총리에 오를 것으로 내다본 사람은 더 드물다. 그러나 이 총리를 가까이서 지켜본 사람들은 그가 “오래전부터 큰 꿈을 꾸어왔다”고 말한다. 중학교 시절 ‘평발’ 엑스레이 사진과 말단 공무원 시절 받은 급여명세서까지 보관하고 있는 것만 보더라도 그의 꿈은 어릴 때부터 범상치 않았던 것 같다. 이 총리가 충남도지사 시절 큰 아들의 결혼식을 극비리에 올렸다는 사실은 유명하다. 부친·장인·장모 별세 때도 주변에 알리지 않았다. 축의금 부담감을 없애기 위해서였다고 하지만 그만큼 ‘자기관리’에 철저한 것으로 해석된다. 그에 대해 김종필 전 총리는 ‘번개 치면 천둥칠지, 먹구름이 올지 아는 사람’이라고 했고, 손학규 전 경기도지사는 ‘적이 되고 싶지 않은 사람’이라고 했다. 물론 이번 청문회 과정에서 그의 ‘자기 관리’가 한계를 드러낸 것은 사실이다.(사진=이완구 공식 홈페이지)◇ 승부욕 강했던 어린시절1950년 충남 홍성에서 태어난 이 총리는 운수사업을 하는 아버지 덕분에 비교적 유복하게 자랐다. 학업 능력도 뛰어났다고 한다. 그는 2009년 한 인터뷰에서 “개구쟁이도,말썽꾸러기도 아닌 모범생이었다”고 회고한 바 있다.그는 승부욕이 강했다. 구슬치기나 딱지치기에서 지면 끝까지 도전해 반드시 승리하는 근성이 있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덩치 큰 중학생과 싸워 지고나서는 사흘간 돌멩이를 들고 대문 앞을 지켜 사과를 받아내기도 했다.태어난 곳에서 중학교를 다니던 그는 담임교사의 제안으로 대전중학교로 전학을 가게 됐다. 그는 주말에 통학열차를 타고 오갈 때마다 책만 읽을 정도로 학업에 충실했던 것으로 전해졌다.좌절도 있었다. 이 총리는 서울로 ‘유학’을 갔지만 경기고를 두 번 떨어지고 양천구 목동의 양정고등학교에 진학했다. 그는 “쓴 맛을 보기 전까지는 내가 최고라고 자부하며 살아왔다”고 했다. 그러나 좌절이 그의 승부욕을 꺾진 못했다. 이 총리는 당시 재수생 신분으로 사법행정예비시험에 합격해 주위를 놀라게 했다.서울대에도 두 차례 낙방했지만 성균관대에 입학한 그는 3학년 때인 1974년 제15회 행정고등고시에 합격했다. 권오규 전 경제부총리, 김용덕 전 금융감독위원장, 김성진 전 해양수산부 장관, 김규복 전 생명보헙협회장 등이 그의 행시 동기들이다.◇ 국보위 파견 후 최연소 경찰서장행시에 합격한 이 총리는 출생지인 충남 홍성에서 군청 수습사무관으로 첫 공직생활을 시작했다. 당시 그의 나이는 25세였다. 부인 이백연 여사와 결혼한 것도 이때쯤이다.이듬해 현역으로 육군에 입대했으나 신체검사에서 1년짜리 보충역 소집 판정을 받아 귀향조치됐다. 평발 변형을 불러오는 ‘부주상골’ 때문이었지만 군면제에 따른 의혹은 이번 총리 후보자 청문회는 물론 그의 공직생활 내내 약점이 됐다.이 총리는 이후 경제기획원 사무관을 거쳐 경찰로 전직한 뒤 1980년 경정 계급으로 국가보위비상대책위(국보위) 내무위원회로 파견됐다. 그는 그해 6월부터 10월까지 5개월간 하위직 실무 행정요원으로 일하며 새마을운동 관련 업무를 담당했다.이 총리는 과거 한 인터뷰에서 “어느 날 문득 좀 더 액티브한 일이 나한테 더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경제기획원에서 경찰로 전직한 배경을 설명한 적이 있다. 이 총리는 이듬해 31살의 나이에 홍성경찰서장을 맡았고, 1980년대 중반 3년간 미국 로스앤젤레스(LA) 총영사관 내무영사로 외교관 생활도 했다. 이후 1990년대에는 충북 지방경찰청장과 충남 지방경찰청장을 지냈다. 이완구라는 이름이 일반에 널리 알려지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다.◇ YS 눈에 띄어 정계 입문충청권에서 승승장구하던 이 총리는 김영삼 전 대통령의 눈에 띄었다. 그는 민자당 청양·홍성지구당위원장을 거쳐 1996년 신한국당으로 출마해 15대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당시 충남의 유일한 신한국당 의원이었던 그는 1997년 자민련으로 당적을 옮겨 2000년 16대 총선에서도 승리하며 내리 2선을 했다. 2002년에는 대선을 앞두고 자민련을 탈당해 다시 한나라당으로 이적하면서 그는 ‘철새 정치인’이란 소리를 듣기도 했다. 그 즈음 이 총리에게 정치적 타격을 준 사건이 일어났다. 이른바 ‘이적료 파문’이다. 그는 한나라당에 입당한 뒤 지원금 명목으로 2억원의 불법자금을 받은 협의로 기소됐고 그 결과 17대 총선에 불출마했다. 무죄 확정 판결을 받은 것은 그로부터 5년이 지난 2007년이었다.그러나 ‘철새 정치인’이라는 비난도, ‘이적료 파문’도 이 총리의 뚝심을 꺾지는 못했다. 그는 2006년 지방선거에서 한나라당의 공천을 받아 충남지사에 당당히 당선됐다. 이 총리가 박근혜 대통령의 눈에 띈 것은 그로부터 3년 뒤였다. 그는 이명박정부가 세종시 수정안을 추진하는 데 강하게 반발하면서 지사직을 던졌고 이를 계기로 박 대통령(당시 국회의원)과 뜻을 같이하게 됐다.◇ 친박 정치인 넘어 충청권 잠룡으로이 총리에게 위기는 또 한 번 찾아왔다. 그는 2012년 다발성골수종이라는 혈액암에 걸려 총선 불출마는 물론 생명의 위협까지 느꼈다. 그는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고 당시의 투병생활을 기억했다. 그러나 그는 1년간의 항암치료 끝에 암을 이겨내고 2013년 부여·청양 재보궐선거에서 77.4%의 압도적인 득표율로 19대 국회에 입성했다. 4년간의 정치적 공백을 일거에 해소하며 충청권의 ‘잠룡’으로 떠오른 순간이었다.3선인 이 총리는 2014년 5월 새누리당 원내대표에 선출됐고 세월호특별법 제정 등 여야 협상을 주도하면서 박 대통령이 흔들림 없이 국정을 운영할 수 있는 든든한 지지대가 됐다. 그리고 2015년 1월23일 박 대통령으로부터 후임 총리 후보자로 지명됐다.이 총리는 후보자 지명 직후부터 부동산 투기, 차남 병역, 언론사 외압 의혹 등으로 여론의 질타를 받았고, 이 같은 의혹들은 청문회에서도 그를 곤혹스럽게 했다. 우여곡절 끝에 국회의 임명동의를 가까스로 받은 이 총리가 임기 3년을 남겨둔 박 대통령과 어떤 관계를 형성하며 자신의 정치적 기반을 다지게 될지 주목된다. 그의 행보에 따라서 대권에 한 발 다가갈 수도, 또 다른 위기가 닥칠 수도 있다.
- 송창의 PD "홍대 젊음의 열기, 30년 방송 감각을 지켜낸 원동력"
- 송창의 제작본부장.(사진=TV조선 제공)[이데일리 스타in 강민정 기자] 방송사 출입 30년, 홍대 출입 40년. 송창의 종합편성채널 TV조선 제작본부장은 자신을 이렇게 설명한다. 한 평생 PD로 살았고, 앞으로도 그렇다. ‘현업’에 몸 담을 때 살아있음을 느끼는 송창의 본부장의 열정은 ‘홍대’라는 공간에서 나온다. 꿈을 좇는 20대의 공간, 마이너 음악인 인디나 록이 주 무대가 되는 곳이 홍대다. 문화 트렌드가 가장 빠르게 바뀌고 흡수되면서도 전통적인 향이 배어 있는 중심이기 한다. 송창의 본부장은 방송사와 홍대의 교집합에서 늘 숨 쉬었다.“난 10대 시절부터 팝 음악을 좋아했다. 70학번 서강대학교 들어가면서부터 본격적으로 듣기 시작했다. 지금도 음악을 좋아하고 특히 록을 즐겨 듣는다. 요즘 음악이 뭔지 늘 궁금해한다. 그런 음악을 접할 수 있는 곳이 홍대다. 40년째 전전하고 있는 곳이라 후배들은 날 ‘홍대맨’이라고 부르고 어떤 이들은 내가 홍대 야간학교를 다니는 게 아니냐고 묻는다. 홍대 젊음의 열기를 즐기면서 내 PD 생활도 감을 잃지 않았다.”송창의 본부장의 PD 인생에 중심엔 음악과 함께 후배가 있다. 그의 몸에 흐른다는 ‘록 스피릿(Rock Spirit)’을 나누고 싶은 이도 후배다. 처음 입사한 MBC에서 23년, 케이블채널 tvN 개국공신으로 9년을 재직하면서 그의 자산은 자연스럽게 후배들이 됐다. 어느 방송사에 있었든지 후배들에게 시 1편과 노래가 담긴 파일을 보내는 것이 그의 아침 업무였다.“30년 넘게 PD로 살다 보니 ‘어른’의 입장에서 이런 얘기도 하게 된다. 내가 아는 PD건 아니건 모든 후배는 다 똑 같다고. 난 선배가 기공사와 같다고 말한다. 바로 기(氣)를 불어넣는 사람이다. 어떻게 기를 듬뿍 공급해줄까를 고민하는 것이 어찌 보면 나의 진짜 일이다. 그 역할을 할 수 있는 방법을 끊임없이 고민한다. 실제로 나는 후배들에게 늘 ‘선배를 똥으로 알아라’라고 말한다. 인격적으로 존경하는 것은 좋지만 크리에이티브의 세계에는 선배가 없다는 뜻이다.”송창의 본부장은 후배에 대한 찬사도 스스럼이 내놓았다. “난 스타 PD가 아니다”라며 멋쩍은 듯 웃은 그는 크리에이티브 세계에 있어선 선-후배가 없음을 강조했다.“신원호, 나영석, 김태호 PD는 나에게도 배움을 주는 후배들이다. 신원호 PD가 ‘응답하라 1997’, ‘응답하라 1994’를 만들었을 때 ‘쟤는 정말 천재 같은 머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나영석 PD가 ‘삼시세끼’나 ‘꽃보다’ 시리즈를 내놨을 땐 발상 자체에 감탄 한 적도 많다. 김태호 PD도 ‘무한도전’이라는 하나의 프로그램으로 끊임없이 같은 멤버를 가지고 10여 년을 기획의 힘으로 시청자를 끌고 갈 수 있지 않나. 보통 친구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송창의 본부장은 MBC ‘일밤’의 전신인 ‘일요일 일요일 밤에’를 만든 주역이다. ‘남자 셋 여자 셋’, ‘세친구’ 등을 연출, MBC에 ‘시트콤 명가’ 자존심을 세워준 1인자다. 지난 2005년 CJ E&M으로 이적한 후 tvN 개국을 준비하며 10~30대를 타깃으로 한 콘텐츠를 전면에 배치하는 등 ‘젊은 채널’로 거듭나는 데 주력했다. tvN과 함께 ‘비(非) 지상파 채널’로 경쟁한 종편인 TV조선에서는 어떠한 변화의 물꼬를 틀지 방송가 안팎의 이목이 쏠리고 있다.▶ 관련기사 ◀☞ 유설아, 결혼 5개월만에 득남…웅진그룹 첫 손자☞ '삼시세끼' 손호준, 다시 한번 '정글의 법칙' 떠난다☞ 강균성, 4차원 매력으로 '라스' 초토화…예능 늦둥이 탄생 예고☞ '스타PD 1세대' 송창의 본부장 "나영석·김태호, 나도 배운다"☞ '삼시세끼' 나영석 "산체? 동물 안 쓰려했다"
- 유현미 작가부터 이정신까지..'고맙다 아들아', 관전포인트 셋
- 고맙다 아들아[이데일리 스타in 강민정 기자] KBS2 특집극 ‘고맙다, 아들아’가 방송을 앞두고 관전포인트를 공개했다. ‘왕의 얼굴’ 후속으로 방송된 ‘고맙다, 아들아’는 11,12일 오후 10시 전파를 탄다. 재수생과 삼수생을 둔 두 가정을 중심으로 입시 제도의 문제를 짚어보고, 수험생 자녀를 둔 부모의 욕심과 그에 따른 가정의 변화를 통해 인생의 참된 목표를 돌아보게 하는 드라마다. 가족의 의미를 돌아보게 하는 힐링 드라마로 시청자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데워 줄 전망이다.△대한민국 ‘입시 전쟁’ 교육 현실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고맙다, 아들아’는 이른바 강남 엄마와 강북 엄마의 교육법, 고3 수험생들의 사교육 실상, 자녀의 대학 진학에 인생을 쏟아 붓는 부모들의 기대와 실망 등을 소재로 한다. 또 입시 ‘전쟁’을 방불케 하는 대한민국의 교육 현실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도 녹여 냈다. 2015 대입 전형이 마무리 되고 설 연휴를 앞둔 시점에 다양한 세대를 아우르는 감동과 재미를 선사할 것으로 기대를 모은다.△믿고 보는 제작진들이 만들어내는 고품격 드라마‘고맙다, 아들아’는 ‘골든 크로스’(2014), ‘각시탈’(2012), ‘신의 저울’(2008) 등으로 시청자에게 강한 인상을 남긴 유현미 작가와 ‘새야 새야’로 제58회 이탈리아상 시상식에서 TV드라마부문 대상을 수상한 고영탁 감독이 연출을 맡은 드라마로 방영 전부터 화제를 모았다.유현미 작가는 “부모가 욕심을 버리면 모두가 행복해진다는 주제 아래 교육 현실을 냉정하고 리얼하게 바라본 드라마”라며 “기존 명절을 앞둔 특집 드라마가 유산이나 부양 등 부모 세대의 문제를 다뤘다면 이 드라마는 다음 세대인 수험생들의 이야기를 다루며 차별화를 둔다”고 밝히며 드라마에 대한 기대감을 높였다.고맙다 아들아△차세대 한류 스타부터 실력파 중견연기자까지 ‘열연’‘고맙다, 아들아’에서는 한류 아이콘으로 부상한 씨엔블루 베이시스트 이정신과 KBS1 일일극 ‘당신만이 내 사랑’에 출연 중인 안재민 등 차세대 한류 스타들과 이대연, 윤유선, 최진호, 이아현, 김지영 등 실력파 중견 연기자들이 호흡을 맞추며 작품의 완성도를 높였다. 특히 ‘강남’과 ‘강북’으로 대변되는 두 엄마의 갈등은 물론 가족을 위해 희생한 형과 가족의 기대 때문에 꿈을 희생한 동생의 갈등 등 ‘상극’ 캐릭터가 서로를 이해하는 ‘상생’의 순간을 맞기 까지 과정이 시청자들의 공감대를 형성할 것으로 기대된다. ▶ 관련기사 ◀☞ ''택시'' 김지우 "남편 레이먼킴, 잦은 설거지에 습진..눈물난다"☞ ''택시'' 김지우, 남편 레이먼킴에 서운함 폭발.."많이 울었다"☞ ''힐러'', 마지막회 시청률 9%..''3위''로 아쉬운 종영☞ 최우식, 이런 국보급 순정남!..''호구의 사랑'', 여심에 불붙였다☞ ''우리동네 예체능'', 족구로 거침없이 하이킥!
- 갈 곳 없는 글로벌 자금…`웃돈 내고 투자` 회사채도 등장
- <자료:inventingpatents.com> 네슬레 로고[이데일리 최정희 기자] 3일(현지시간) 유럽 채권시장에선 좀 처럼 보기 드문 광경이 펼쳐졌다. 독일 10년물 국채(분트채) 금리가 20년 장기불황에 허우적대는 일본 국채 금리 아래로 떨어지더니 스위스 식품업체 네슬레가 발행한 회사채가 마이너스(-) 금리를 기록했다. 둘 모두 역사상 처음있는 일어난 일이다. 투자자들은 네슬레에 투자하면서 오히려 수수료를 내게 되는 셈이다. 국채보다 더 위험한 회사채가 마이너스(-)금리를 기록하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그 만큼 투자자들은 돈을 버는 것은 꿈도 못 꾸고 자신의 자산을 지키는 일에만 몰두하고 있는 셈이다. 유로존에서 신용등급이 가장 높은 회사 중 하나인 네슬레가 발행한 만기 4년짜리 회사채 수익률이 -0.008%에 거래됐다. 이보다 앞서 지난주 석유 메이저인 로열더치셸이 지난주 잠시 마이너스를 기록했다. 이 회사채에 투자하면 이자를 받는 게 아니라 일정액의 수수료를 내야 한다. 이날 독일 10년물 국채 금리도 0.34%로 일본 10년물 금리 0.36%보다 낮았다. 유럽중앙은행(ECB)이 1조유로 이상의 유로를 푼다는 방침을 밝힌데다 그리스 채무 재협상이 난항을 겪으면서 안전자산에 대한 수요가 증가했기 때문이다. 독일은 6년만기 이하의 채권이 모두 마이너스 수익률이다. 프랑스는 4년만기 이하, 네덜란드, 덴마크, 스웨덴, 오스트리아 등은 5년만기 이하가 마이너스 수익률을 기록하고 있다. 스위스는 심지어 13년 만기의 채권도 마이너스다. JP모건에 따르면 만기 1년 이상의 유로존 국채 1조7000억달러가 마이너스에 거래되고 있다. 스위스, 스웨덴, 덴마크 채권까지 합할 경우엔 1조8000억달러 채권이 마이너스다. ECB가 지난해 6월 하루짜리 초단기 예금에 마이너스 금리를 도입하면서 국채금리가 마이너스 쪽으로 향하고 있다. 유럽 뿐 아니라 2주 전 일본 국채가 마이너스로 1조8000억달러가 거래된 것을 감안하면 전 세계 채권 중 3조6000억달러가 마이너스 수익률이다. <자료: 월스트리트저널(WSJ)> 주요국 10년물 국채 금리티보 콜레 UBS 채권전략가는 “최고 등급의 회사채 투자자들은 현금을 보호하는데 더 관심이 있다”며 “ECB의 돈 풀기 정책이 주식보다는 채권을 더 좋은 투자장소로 만들었다”고 밝혔다.낮은 금리는 ECB 등 채권을 매입하는 양적완화(QE)를 하는 정부에 상당히 유리하게 작용한다. 자금을 장기간에 걸쳐 싸게 조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살만 아메드 롬바르드오디어 전략가는 “높은 등급의 유럽 국채가 가까운 미래에 마이너스 수익률을 기록할 것”이라고 말했다. 수수료를 내면서까지 마이너스 채권에 투자하는 이유는 그나마 이게 좀 더 나은 투자처란 생각 때문이다. JP모건은 디플레이션 우려, 스위스프랑 및 덴마크 크로네 등 통화가치 상승을 노린 환차익, 중앙은행의 추가 부양책에 따른 마이너스 예금금리 확대 가능성, 마땅한 투자처 없음 등을 마이너스 채권 투자의 이유로 꼽았다. 특히 ECB를 비롯해 스위스, 덴마크 등 기준금리가 마이너스로 내려간 곳의 주요 금융기관들은 오히려 마이너스 국채를 사는 게 더 낫단 분석이다. 스위스 은행들이 중앙은행에 돈을 예치할 경우 -0.75%가 적용되는데 차라리 7년물 국채를 살 경우엔 -0.67%가 적용되기 때문이다. 더 나은 투자처라기 보단 ‘덜 최악’인 곳은 찾으려 한단 얘기다.
- 같은 명동, 다른 향기..'강남1970' vs '쎄시봉'의 묘한 닮은꼴
- ‘쎄시봉’ ‘강남1970’[이데일리 스타in 강민정 기자] 무모하게 꿈을 키우던 남자가 그곳에 있다. 그리고 바보처럼 사랑을 믿던 남자도 그곳에 있다. 같은 시대, 같은 공간, 같은 음악을 들었던 두 남자가 너무 다른 향기를 풍기며 그곳에 섰다.영화 ‘강남1970’과 ‘쎄시봉’. 지난 1월 21일 개봉된 ‘강남1970’과 오는 5일 개봉을 앞두고 있는 ‘쎄시봉’은 닮은 영화다. ‘강남1970’은 강남 지역 개발을 앞두고 그 땅을 차지하고 뺏고 지키려는 이들의 피비린내 나는 사투를 담은 영화다. ‘쎄시봉’은 1970년대 청춘의 낭만이 살아있던 공간인 명동 쎄시봉을 중심으로 젊은이들의 순수한 사랑을 노래한 작품이다. 가수 이장희의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가 ‘강남1970’에선 칼부림의 미화를 위한 노래로, ‘쎄시봉’에선 한 여자를 위한 마음을 담은 노래로 흐른다. 전혀 다른 색깔을 낸 두 영화는 그 시대 우리들의 모습을 관객으로 하여금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시간을 주고 있다.‘강남1970’△‘개천에서 용나던 시절’1960~70년대. 급속한 경제성장 속에 수 많은 시행착오가 낳은 폐해를 뒤로 ‘개천에서 용나던 시절’로 통했다. 1950년대 전쟁으로 고아가 된 이들이 청년이 돼 새 삶을 찾을 수 있는 기회의 시대였고, 더럽고 힘들여 일한만큼 신분의 사다리, 계층의 사다리를 오를 수 있는 시대이기도 했다. 부모 없이 고아원에서 만난 용기(김래원 분)와 종대(이민호 분)가 “따뜻한 아랫목에서 언제 한번 자보냐”던 신세한탄을 뒤로 “강남 땅 차지해서 멋진 건물 한번 올려보자”고 야망을 키울 수 있었던 것도 이 시대라 가능한 일이었다.‘강남1970’은 2일 오전 기준 약 180만명의 관객이 봤다. 50~60대 남녀 관객도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했다. 이들 세대가 ‘강남1970’을 보며 느낀 것은 영화의 폭력성, 선정성에 꽂힌 임팩트 보다는 그 시대에 깔린 배경이다. 상상 그 이상의 발전을 이뤄가고 있는 요즘, 교육 마저도 ‘빈익빈 부익부’ 시대가 열린 세상을 생각하면 ‘강남1970’ 속 남자들의 삶의 의지에 아련한 향수를 느끼기도 한다. 끝이 비극이었음에도 무모해서 창대했던 그 시작에 대한 부러움 때문이다.‘쎄시봉’△‘감정이 뜨거웠던 시절’아날로그라 참 좋았던 시절이었다. 한번 헤어지면 다시 찾기도 힘든 시절이라 사람에 대한 소중함은 더했다. ‘강남1970’에서 둘도 없는 형제처럼 자란 용기와 종대가 보여주는 끈끈한 감성은 요즘 트렌드로 불리는 ‘의리’를 뛰어 넘는다. 비록 총과 칼을 겨눈 새드엔딩이었지만 비극이란 같은 운명을 맞은 두 사람의 마지막 기억은 넝마주이여도 함께 꿈을 꿔서 행복했던 시간이었다.‘쎄시봉’에서는 사람과 사람 간의 애잔한 감성이 더욱 묻어난다. 영화의 모티브가 된 노래 ‘웨딩케익’에서 알 수 있듯, 극중 정우와 한효주가 그린 이뤄지지 않은 사랑은 감동의 파고가 크다. ‘썸’타느라 힘들고 계산하느라 바쁜 요즘 시대 연애방식에서는 느낄 수 없는 낭만이 살아있다. 무엇보다 20여년이 흐른 뒤에도 열병처럼 앓았던 첫사랑의 아픔, 그 사람에 대한 기억을 지우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마음을 울린다.‘강남1970’의 남자들이 서로의 목숨을 구해주며 우애를 확인한다면 ‘쎄시봉’에선 화음을 맞추는 목소리로 그 호흡을 자랑한다. 극중 정우와 조복래, 강하늘이 들려주는 노래는 절로 미소를 짓게 한다. 눈만 봐도 어떤 생각을 하는지, 뒷모습만 봐도 어떤 감정에 빠져있는지 아는 끈끈한 관계는 ‘SNS가 아니면 대화가 어색하다’는 요즘 사람들과 다른 진한 향기를 풍긴다.▶ 관련기사 ◀☞ FT아일랜드, 첫 유럽·북남미 투어 성황리 종료..'진심 通했다'☞ '슈퍼맨', 아빠들의 광대승천..아이들의 성장이 안긴 행복☞ 서강준·이태환 서프라이즈, 美드라마어워즈 공식초청..'뉴욕行'☞ '비밀' 최호철 신작 SBS '가면', 5월 편성..홍자매와 맞대결 성사
- 치킨과 함께해온 열정의 25년, 치킨 한류를 꿈꾼다!
- [뉴미디어팀] “치킨업계의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맛’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가맹점주를 위한 제도나 서비스가 아무리 좋아도 치킨의 맛이 없으면 소비자들에게 선택 받을 수 없을 겁니다.”마냥 사람 좋은 미소로 ‘허허’하고 웃던 그가 치킨의 맛을 강조할 때만큼은 사뭇 진지한 표정을 짓는다. 치킨 프랜차이즈 시장에 뛰어든 것이 벌써 25년. 축산물가공업에 종사한 시간까지 더하면 벌써 30년이 넘었다. 바로 업계에서 ‘꼬꼬박사’로 통하는 ㈜압구정의 박의태 대표의 이야기다.1984년도부터 축산물가공 쪽에서 일했던 박 대표가 본격적으로 프랜차이즈 산업에 뛰어든 것은 1990년. 올해로 정확히 25주년을 맞았다. 치킨산업의 1세대라고 할 수 있는 그에게 25년은 어떤 느낌으로 다가올까.# 맛과 건강을 모두 잡아라!“처음 양념치킨을 납품하던 회사가 부도가 나서 그 회사를 인수한 것이 처음 시작이었습니다. 그게 벌써 25년이나 되었다니 새삼 놀랍기도 하고 감회가 새롭습니다.”처음 프랜차이즈 업계에 발을 들였을 당시의 치킨 시장은 지금처럼 활성화되지 않았기 때문에 박 대표에게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부실한 회사를 인수해서 시작해서 더 힘든 부분도 있었다.박 대표는 1996년 ‘압구정 김밥’을 론칭하며 업계에서 나름의 성과를 보이기 시작했다. 개그맨 이경규 씨와는 이때 인연을 맺게 되었다. 동갑내기인 두 사람은 평소 두터운 친분을 자랑한다. 사업으로 만난 인연이지만 주말에는 훌쩍 낚시여행을 함께 떠날 정도로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박의태 대표가 치킨 프랜차이즈 시장에 본격적인 행보를 보인 것은 1998년. 이경규 씨를 모델로 내세워 2000년 '마니주 귀뚜라미 닭한마리' 브랜드를 내놓았지만, 성과는 그리 크지 못했다. 하지만 실패는 돈치킨을 시작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되었다. 건강까지 생각하는 닭을 만들어야겠다는 박 대표의 생각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그리고 2007년 드디어 ‘돈치킨’이 론칭되었다. 오븐구이 치킨을 내세운 돈치킨의 전략은 ‘건강하고 맛있는 닭’이었다. 웰빙 바람을 타고 기름기를 뺀 여러 오븐구이 치킨 브랜드가 등장했지만, 수분이 적어 뻑뻑하다는 소비자들의 의견이 많았다. 박 대표는 건강뿐만 아니라 맛까지 잡기 위해 노력했다. 갖은 노력 끝에 열, 바람, 수증기 세 가지로 조리되어 고소한 육즙을 맛볼 수 있는 정통 오븐구이 ‘돈치킨’을 만들어냈다. 그에게 ‘꼬꼬박사’라는 별명이 붙은 것도 그 무렵이다.담백하면서도 부드러운 맛을 내는 돈치킨은 입소문을 타고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돈치킨 아웃(배달 전문점)과 돈치킨 호프(호프 전문 매장) 두 가지 형태의 매장으로 출점된 '돈치킨'의 프랜차이즈 시장 성장세는 남달랐다. 2008년 12월 30호점을 기록한 뒤 1년 만에 250호점을 넘어섰다. 2010년에는 한국프랜차이즈협회 회장상을 수상하기도 했다.그러나 시련도 있었다. 2010년 찾아온 글로벌 금융위기로 내수시장이 침체하고 유사 경쟁업체들이 우후죽순 등장하면서 돈치킨의 가맹점 수 증가세는 잠시 주춤하게 됐다. 그러나 끊임없는 치킨에 대한 연구와 신메뉴 출시 등으로 혁신을 거듭한 결과 전국 350호점에 육박하게 되었다. 가파른 성장세로 2015년 400호점 돌파 목표에도 청신호가 켜졌다.# 열정의 맛으로 세계시장까지 잡는다돈치킨의 재도약 뒤에는 ‘꼬꼬박사’ 박의태 대표만의 고집이 있었다. 박 대표는 돈치킨만의 강점을 질문에 ‘맛있기 때문에’라고 자신 있게 말했다. 물론 자기 브랜드의 맛을 자랑하지 않는 사람이 있겠냐만, 박 대표의 이런 자부심에는 그만한 노력이 담겨 있다.“밤새 고민하고 고민했습니다. 그때는 직원 모두가 전사적으로 움직였어요. 사람들이 모두 만족할 맛을 찾기 위해 조리사와 함께 수도 없이 연구했지요. 특히 우리만의 양념소스를 만들기 위해 여러 가지 시도를 해보았던 것이 기억에 남습니다. 국내산 냉장육 사용, 조리시간 15분 엄수 등 최적의 조건을 찾기 위해 안간힘을 썼었습니다.”누구나 만족할 수 있는 맛. 맛있는 제품을 만들어내는 것은 업계의 당연한 과제였지만 당연한 것은 당연하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돈치킨’의 주 메뉴는 구운치킨(15,000원)과 순살치킨(18,000원). 타 치킨관련업체와 판매가격대를 비슷하게 유지하면서도 맛에 대한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마케팅에 대한 투자보다 맛으로 경쟁하고자 했던 박 대표의 이런 고집스런 신념에 많은 이들이 우려를 표했지만, 결국 그는 그 고집으로 성공했다. ‘돈치킨’을 맛본 고객들은 맛에 있어 큰 만족감을 느낀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고객의 재방문율은 높다. 열정이 담긴 맛이 소비자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이다.이런 열정의 맛은 이제 대륙으로 전해지고 있다. 지난해 문을 연 베이징의 ‘산리툰소호점’을 시작으로 올 상반기에만 10여 개 이상의 ‘돈치킨’ 매장이 문을 열 준비를 하고 있다. 중국 1호점인 산리툰소호점은 20~30대 여성을 비롯해 많은 중국인 고객들이 찾고 있다. 이미 SNS 등을 타고 ‘한국 치킨 맛집’으로 손꼽히고 있다. 박의태 대표의 포부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중국 시장을 넘어 동남아, 미국까지 진출할 원대한 꿈을 갖고 있다.“경북 김천에서 제가 서울로 올라온 것이 스무 살이었습니다. 그때 목표는 오직 돈을 벌고 사업에 성공하기 위해서였지요. 무엇인가 하려고 했다면 무조건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신념이 있을 때 노력도 뒤따르고 성공할 수 있다고 봅니다. 결국 나의 가장 큰 경쟁자는 나 자신 아닐까요.”이런 억척스러운 그의 열정은 이제 고스란히 돈치킨의 맛으로 승화됐다. 앞으로의 25년을 묻는 질문에 그는 모두가 함께 잘 사는 세상을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상생과 소통이야말로 프랜차이즈 시장의 본질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눈앞의 이익을 쫓다가 점주와 고객에게 소홀하지 않으려는 박 대표의 마음가짐이 돋보였다.이미 그는 점주들에게 많은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다. 예비창업자들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창업자금의 50%는 공동으로 투자해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올 상반기에는 점포 계약 시 가맹비, 교육비, 기타 로열티 3가지 비용을 면제시켜 주는 3無 행사를 진행하고 있다.박 대표는 본사와 물류․생산현장의 직원들, 전국의 가맹점주들이야말로 자신의 열정을 식지 않게 해준 원동력이라고 말했다. 힘든 고비의 순간 속에서도 이들을 생각하며 브랜드를 키워온 박 대표. 이러한 절실함이 오늘의 ‘열정의 맛’ 돈치킨을 만들어주었다. 이제 열정이 담긴 최고의 맛 돈치킨은 세계 시장에서도 큰바람을 몰고 올 것이라고 박의태 대표는 당차게 말했다. 이제 글로벌 브랜드로 성장하는 돈치킨에 많은 기대를 걸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