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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노무현, 고졸 인권변호사 21세기 첫 대통령 당선
  • [edaily 조용만기자] "그래도 이겼다" 노무현 민주당 대통령 후보가 막판 정몽준 대표의 지지철회라는 역풍을 딛고 제 16대 대통령선거에서 당선자의 영예를 차지했다. 지역감정 극복이라는 소신을 굽히지 않았던 고졸, 인권변호사 출신이 국무총리와 감사원장을 거친 원내 1당 후보를 누르고 21세기 대한민국의 첫 대통령이 된 것이다. 노무현 당선자의 인생을 기승전결(起承轉結)로 볼 때 이번 당선이 전인지 결인지 정확히 구분하기 어렵다. 그만큼 인생이 파란만장했고, 앞으로도 어떤 변화를 겪을지 예상하기 어렵다는 얘기다. 노 당선자는 66년 부산상고 졸업후 9년만에 29세의 나이로 사법시험에 합격했지만 이전까지 고학생에 백수신세를 면치 못했다. 가난에 따른 좌절과 반항, 열등감은 성장시절 늘 그를 감싸고 있었다. 노 당선자는 1946년 8월 경남 김해 진영읍에서 10리쯤 떨어진 본산리에서 빈농의 3남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부모는 산기슭에 고구마를 심어 겨우 생계를 꾸려갔고 학생 노무현은 공부는 잘했지만 학비걱정이 끊이지 않았다. 중학교는 못갈 뻔 했고 고등학교 진학도 엄두를 내지 못하다가 3년 장학금 제안을 받고서야 부산상고에 들어갈 수 있었다. 술과 담배는 고등학교때부터 배웠다. 학교졸업후에도 사정은 나아지지 않았다. 농협 취직시험에 낙방하자 독학으로 고시에 도전하지만 책 살 돈이 없어 공사판에서 일하다 사고를 당하기도 했다. 당시 상처는 지금도 입가에 흉터로 남아있다. 고시패스는 열등감과 가난을 한꺼번에 뒤집을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었지만 합격의 영광이 쉽게 찾아오지는 않았다. 노 당선자는 군에서 제대한뒤 고향친구인 권양숙씨와 2년간 열애끝에 1973년 결혼식을 올렸다. 부인 권씨도 수업료를 못 낼 정도로 가세가 기울어 부산 계성여상 3학년을 중퇴했으며 장인은 좌익경력으로 복역하다가 71년에 옥사했다. 결혼후 권씨는 4년여동안 다닌 직장을 그만두고 고시공부를 도왔고 노 당선자는 학교졸업후 9년만에, 결혼후 2년만에 마침내 사시에 합격했다. 어려운 시절을 부인과 함께 한 노 당선자는 올해 국민경선 과정에서 장인의 좌익경력이 문제되자 후보를 버려도 아내는 버리지 않겠다며 정면돌파해 여성지지자들로부터 격려의 박수를 얻어내기도 했다. 노 당선자는 77년 대전지법 판사로 임용됐지만 8개월만에 그만두고 변호사로 개업했다. 변호사 시절 그는 상속세 반환소송 등 100억원대 이상 거액 소송에서 높은 승률을 보이며 재산을 모았고 부산상고 동창회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대선기간 동안 한나라당으로부터 공격의 빌미를 제공했던 요트타기도 이때의 취미생활에서 비롯된 것이다. 평범했던 법조인의 가치관에 큰 변화를 가져온 것은 1981년 부림사건을 맡으면서부터. 선배 변호사인 김광일 전 대통령 비서실장의 소개로 부산지역 운동권 대학생들이 연루된 `부림사건` 변론을 담당하면서 노 당선자는 불법구금과 고문을 직접 눈으로 목격했고 운동권 학생들과의 만나면서 민주화 운동에 대해서도 인식을 함께 했다. 고급술집 출입과 요트타기 취미는 끊어버렸다. 이후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 공동변론을 맡은 고 조영래 변호사와 교류하며 인권 노동변호사로 변신했다. 1985년 부산민주시민협의회에 발기인으로 참가하고 1987년엔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부산본부 상임집행위원장을 맡는 등 재야인사로서의 활동을 본격화한다. 1987년 2월에는 물고문으로 숨진 서울대생 박종철 군의 추도집회를 주도했으며, 6·10 항쟁직후 대우조선 사건때는 제 3자개입 혐의로 구속되기도 했다. 노 당선자의 두번째 인생전기는 1988년의 정치입문이다. 노 당선자는 당선과 낙선을 거듭하며 정치인으로서의 좌절과 성공을 함께 맛봤다. 노무현은 88년 김영삼 통일민주당 총재의 발탁으로 부산 동구에 출마, 5공 신군부의 핵심인물이었던 민정당 허삼수 후보를 누르고 13대 국회에 진출하는 이변을 낳았다. 노무현을 국민적 스타로 만든 것은 그해 국회에서 열린 5공 청문회. 노 당선자는 청문회에서 5공 실세와 정주영 당시 현대그룹 회장 등에게 송곳같은 질문과 논리적인 추궁으로 국민들의 뇌리에 깊이 각인됐다. 정치권에서 노무현의 행동은 때로는 소신으로, 때로는 이단으로 비쳐졌다. DJ-YS-JP 등 이른바 3김이 지역정서와 할거주의로 국내 정치를 좌지우지할 때 이에 편승하지 않고 맞서왔기 때문이다. 노무현의 소신이 빛을 발한 것은 3당 합당 거부. 1990년1월 노태우 당시 대통령과 김영삼 총재,김종필 총재가 3당 합당을 선언하자 노 의원은 단호히 이를 거부하고 YS와 결별한뒤 김정길 의원 등과 함께 꼬마 민주당을 창당해 야당잔류를 선언했다. 3당 합당을 시원스레 거부했지만 지역정서가 팽배한 상황에서 결과는 참담했다. 노 당선자는 92년 총선에서 YS가 미는 허삼수씨에게 패배했고 다음해 부산시장 선거에서도 낙선의 고배를 마셨다. 1996년 총선때는 서울종로에서 출마했지만 떨어졌고 98년 보궐선거에서 간신히 국회의원 배지를 달았지만 2000년 16대 총선에서는 부산에서 다시 출마했다가 낙선했다. 노 당선자는 97년 15대 대선을 앞두고 정권교체와 동서통합이라는 명분을 걸고 DJ와 다시 손을 잡았다. 노 당선자는 "머리는 DJ에게서, 행동은 YS에게서 배웠다"는 평가도 받는다. 개혁노선은 상당부분 DJ의 것과 일치하고, 저돌적이고 공격적인 정치스타일은 YS와 닮았다는 것이다. 거듭된 낙선은 그에게 좌절을 안겨줬지만 국민들에게는 소신있는 정치인이라는 인식을 심어줬고 지역감정 극복을 위한 노력에 대해 국민들은 `노사모`로 보답했다. 2000년 4월13일 그가 낙선하자 노무현 홈페이지에는 낙선을 안타까워하는 네티즌들의 이메일이 쏟아졌고 이후 노무현 지지자들은 최초의 자발적 정치 팬클럽인 "노사모"(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를 만들어냈다. 이후 노사모는 정치인 노무현에게 심리적으로 뿐만 아니라 인적, 물적측면에서 뒷받침이 됐고 올해 국민경선과 대선에서는 정치인 노무현을 부각시키는데 큰 힘을 발휘했다. 지난 봄 민주당 경선때는 회원이 5만명으로 불어났고 노사모의 헌신은 그의 정치적 성공에 절대적으로 기여했다. 노사모와 함께 인터넷을 통해 발산된 젊은 세대의 정치열기는 노 당선자의 지지기반 확산에 기여했다. 재야 변호사 시절 노변으로 불리던 노 당선자의 별명은 노사모를 거치며 "노짱"으로 바뀌었다. 노 당선자는 국민경선에서 당초 예상과 달리 이인제 현 자민련 총재권한 대행을 누르고 민주당 후보로 뽑혔다. 예선도 힘들었지만 본선은 더 어려웠다. 국민경선 과정에서 치솟았던 노무현의 인기는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와 본격 경쟁이 시작되면서 급격히 추락, 지지율이 역전됐고 민주당은 후보교체 논의 등으로 내홍에 휩싸이면서 분당위기를 맞기도 했다. 하지만 노 당선자는 국민통합 21 정몽준 대표와의 후보단일화를 극적으로 타결지으면서 반전의 계기를 마련했고 이후 선거운동 과정에서 줄곧 이회창 후보를 압도해왔다. 인생에서 유난히 반전이 많았던 노 당선자에게는 이번 대선도 예외가 아니었다. 후보단일화후 공동유세 등으로 막판 대세몰이를 거들었던 정몽준 대표는 공식선거운동 7시간여를 남긴 상황에서 노무현 후보 지지철회를 전격 발표하면서 이번 선거에서 최대 파란을 불러 일으켰다. 정 대표는 미국과 북한에 대한 노선차이를 이유로 내세웠지만 차차기 보장에 대한 회의와 반감이 중요한 이유로 작용했다는 후문이다. 행정수도 이전공약에 대한 한나라당의 강한 반대논리와 이에따른 수도권에서의 지지율 변화 움직임 등으로 이회창 후보와의 격차가 좁아진 상황에서 터진 느닷없는 지지철회는 노 후보의 당선가능성에 짙은 먹구름을 드리웠다. 하지만 이같은 역경에도 불구하고 노 당선자는 지역감정 해소에 대한 노력과 정치개혁에 대한 젊은 세대의 지지 등에 힘입어 마지막 시험을 통과했고 학력과 지역정서, 사상 등 힘겨운 고비를 넘기며 마침내 청와대 입성에 성공했다. 다음은 노무현 당선자 프로필 ▲대선표어 : 새로운 대한민국 ▲생년월일 : 1946년 8월 6일(음력) ▲출생지 : 경남 김해 진영 ▲본관 : 광주 ▲가족관계 : 부인 권양숙(55)씨와 1남 1녀 ▲체격(키와 몸무게) : 168cm, 62kg ▲혈액형 : O형 ▲학력 : 김해 대청초등, 진영중, 부산상고 ▲주요경력 : 변호사,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부산본부 상임집행위원장 ▲정치경력 : 13·15대 의원, 통합민주당 부총재, 해수부 장관, 민주당 상임고문·최고위원 ▲병역 : 육군 상병 만기제대 ▲재산 : 2억6263만원 ▲납세(최근 3년간) : 소득세 446만 1천원 ▲주택 : 45평형 빌라 ▲승용차 : 체어맨 ▲종교 : 없음(천주교 영세는 받았음) ▲저서 : `여보, 나 좀 도와줘` `내일을 준비하는 오늘`(공저) `노무현의 리더십 이야기` ▲존경하는 인물 : 링컨, 김구 ▲좌우명 : 자신에게 엄하고, 타인에게 너그럽게 ▲별명 : 돌콩, 노천재, 노짱 ▲성격 : 직선적, 솔직 ▲취미 : 등산 ▲특기 : 없음 ▲좋아하는 스포츠 : 등산 ▲좋아하는 음식 : 삼계탕, 추어탕 ▲즐겨입는 옷차림 : 콤비 스타일 ▲주량·흡연 : 소주 반병, 금연했다가 최근 반갑 정도 ▲외국어 능력 : 영어 중급 ▲자격증 : 변호사, 주산2급·부기2급, 독서대 실용신안 ▲홈페이지 : www.knowhow.or.kr
2002.12.19 I 조용만 기자
  • (화제)신한은행 양신근 부장, 은행 M&A 책 출간
  • [edaily 김병수기자][미국 머린내셔널은행 매입 체험기 "그럼, 미국은행 하나 사 볼까"] 조흥은행 인수를 위해 전력을 다하고 있는 신한지주회사. 이 금융그룹의 핵심인 신한은행 양신근 자금부장이 은행 M&A에 대한 책을 내 화제가 되고 있다. 지난 94년 말 추진됐던 신한은행의 미국 머린내셔널 은행 인수과정을 담담하게 써 내려간 필자의 소회가 최근 조흥은행 인수전과 맞물려 묘한 뉘앙스를 풍기고 있다. 물론 필자가 머린내셔널 은행 인수과정을 책으로 엮은 것은 조흥은행과는 무관하다. 필자 스스로 밝히고 있듯이 그는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미국은행을 인수했던 과정을 있는 그대로 생생히 보여주려 노력했다. 그래서 책 제목도 "그럼 미국은행 하나 사 볼까?"다. IMF 경제위기를 극복해가고 있는 지금 "세계 은행에 눈을 돌리자"는 메시지도 담겼다. 마침, 국내 최대은행이라는 국민은행이 미국의 여러 동포은행들로부터 은행 매입의사를 타진받고 있는 상황이어서 더욱 실감난다. 필자는 "M&A를 공부하는 학생들에게 하나의 나침반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머린내셔널 은행 인수 전 과정에 실무적으로 참여하면서 과정과정마다 발생한 현실적인 문제들의 극복과정을 소상히 소개한만큼 필자의 기대는 상당부분 충족되고 있어 보인다. 책의 전 과정을 통해 필자는 "M&A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이 책의 가장 핵심적인 화두이기도 한 이 질문에 필자는 "타이밍(Timing)"이라는 답을 제시하고 있다. 상대가 있는 게임인만큼 항상 자신이 원하는 대로 진행될 수 없기 때문에 타이밍에 주력하라는 권고다. 실제로 신한은행이 인수했던 머린내셔널은행은 맨 처음 조사보고서(Work Paper)에서는 30개의 후보은행 가운데 10위를, 당시 신한은행의 전략을 감안해 순위를 매겼을 때도 6위에 머물렀던 은행이다. 신한은행의 입맛에 딱 맞는, 필자의 표현대로 "미스코리아와의 결혼"은 결코 쉽지 않다는 현실을 보여준다. 필자는 "이 책을 쓰면서 당시의 신한은행 전략이 그대로 나타난다는 점에서 약간 망설였다"고 말하고 있다. 아마도 "전략"이라기 보다는 신한은행의 "조직문화"라고 표현하는 것이 나을지도 모르는, M&A 과정에서의 의사결정 과정을 엿볼 수 있다는 점도 흥미롭다. 필자는 "8년전의 스토리, 그것도 인수후 2년뒤인 98년말에 280억원의 자본이득을 보고 팔아버린 은행의 이야기에 걱정한다면 소가 웃을 일"이라고 적고 있지만 시기가 시기인만큼 충분히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특히 당시에 머린내셔널은행 매입과정의 최고 의사결정권자였던 라응찬 행장과 최영휘 이사(뉴욕 지점장) 등은 현재 신한지주회사의 회장과 부사장으로 이번 조흥은행 인수과정을 주도하고 있다. 75년 옛 상업은행에서 은행원 생활을 시작해 14년만에 신한은행으로 옮긴 필자가 "신한은행엔 무언가 있다"고 말하고, "기업문화나 기업의 경쟁력에 관심이 있는 분들에게 하나의 사례로써 길잡이 역할을 기대하는 욕심을 갖는 것"도 비슷한 맥락으로 풀이된다. 필자는 이 책에서 "94년말에 왔던 미국은행 매입 기회가 다시 오고 있다"고 정리했다. 95년 이후 미국 경제는 사상유례 없는 호황을 구가했으나 작년부터 급격히 나빠지기 시작했다는 것이 이유다. 그러나 필자는 "은행 매입을 추진하는 타이밍이 중요한데, 지금은 그 타이밍이 아니다"고 적고 있다. 경기침체로 주식시장은 폭락했으나 부동산 시장은 아직 살아있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그래서 "불경기가 조금 더 진행되고, 실업자가 늘어나고, 소비심리가 얼어봍으면서 부동산 가격이 떨어지면 은행의 부실대출금이 커지게 되는 바로 이 때가 미국은행 매수 타이밍"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최근 미국을 비롯한 세계 경기 논쟁에서는 "회복"에 대한 희망섞인 분석이 다소 우세해지고 있다. 그러나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는 지난 달 6일 공개시장정책위원회(FOMC)를 열어 1.75%인 연방기금금리를 1.25%로 50bp 인하했고, 유럽중앙은행(ECB)은 이달 5일 3.25%인 기준금리를 2.75%로 50bp를 내렸다. 미국 은행 인수과정을 현장에서 직접 겪은 필자는 이 타이밍을 언제로 보고 있을까. 필자는 "그 시기는 어쩌면 내년 하반기나 내후년 상반기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고 예측하고 있다. [저자 양신근 부장은] -52년 : 남원 출생 -70년 2월 : 전주고등학교 졸업 -74년 2월 : 서울대학교 사범대 불어과 졸업 -76년 : 서울대학교 경영대학원 수료 -75년 4월 : 한국상업은행 입행 -85년 8월 : 상업은행 시카고 지점 대리 -89년 3월 : 신한은행 입행 -89년 4월 : 신한은행 뉴욕지점 과장 -93년 4월 : 신한은행 국제부 차장 -95년 6월 : 미 서부지역 은행 인수팀장 -96년 9월 : 머린내셔널 은행 Chief Operating Officer -98년 3월 : 신한은행 런던지점장 -01년 2월 : 신한은행 국제부장 -01년 8월~ 현재 : 신한은행 자금부장
2002.12.09 I 김병수 기자
  • 대한생명, 사이버 "웨딩클리닉" 개설
  • [edaily 문병언기자] 대한생명(사장 이정명)은 19일부터 자사 홈페이지에 결혼에 대한 모든 정보를 담은 사이버 웨딩클리닉인 결혼정보 서비스를 실시한다. 따라서 예비 신혼부부나 미혼 남녀들은 결혼에 대한 다양한 정보를 쉽고 편리하게 얻을 수 있다. 결혼정보 서비스는 웨딩메이트, 웨딩컨설팅, 웨딩 인포, 내짝찾기, 찜하기 등으로 구성돼 있다. 웨딩메이트는 드레스부터 스튜디오, 뷰티숍, 여행 등 결혼식에 관한 모든 정보가 들어 있다. 웨딩컨설팅은 고객의 재정능력과 눈높이에 맞춰 결혼식 및 신혼생활에 대한 무료 견적서비스와 함께 원스톱 웨딩쇼핑도 가능하다. 웨딩인포는 신혼부부들이 놓치기 쉬운 혼수 및 결혼식 준비부터 신혼여행, 신혼생활 등에 필요한 상식을 결혼식 100일전부터 일자순으로 상세히 설명해 놓았다. 또 내짝찾기와 찜하기 코너를 만들어 미혼남녀들이 부담없이 만나고 교제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했다. 이용 방법은 대한생명 홈페이지 회원으로서 홈페이지에 접속해 정보광장내 "결혼정보 서비스"를 클릭하면 된다. 대한생명 관계자는 "이번 콘텐츠의 개발로 대한생명은 고객의 인생주기와 함께 하는 맞춤서비스를 강화하는데 크게 기여하게 됐다"고 말했다.
2002.11.19 I 문병언 기자
  • (스케치)대선후보 토론회 마감.."3人3色"
  • [edaily 김상욱기자] ㅇ 한국인터넷신문협회와 하나포스닷컴이 주최, 지난 13일부터 시작된 대선후보 토론회가 15일 정몽준 후보를 마지막으로 막을 내렸다. 이번 대선후보 토론회는 기존 방송사들의 토론회와 달리 실시간으로 네티즌의 의견을 반영했다는 점에서 차별화를 보였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번 토론회에 참석한 노무현, 정몽준, 권영길 후보는 대선을 위한 바쁜 일정속에서도 적극적으로 참여해주는 모습을 보였다. 다만 이회창 후보가 바쁜 일정을 이유로 토론회 막판 불참의사를 통보해 온 점이 아쉬움으로 남았다. 이회창 후보는 지난달 28일부터 31일까지 열린 한국기자협회 초청 대선토론회에도 불참했으며 합동토론도 거부한 바 있다. 반면 노무현 후보의 경우 당일 오전일정이 바빠 당초 2시간으로 예정됐던 토론회 시간을 30분 줄이고 시작시간도 앞당기면서까지 토론회 참여에 대한 애착을 보였다. 정몽준 후보도 오늘 오후 토론회와 저녁에 모 방송에서 예정된 토론회, 그 이후에는 노무현 후보와의 단일화를 위한 국회회동 등으로 빡빡한 일정이었지만 토론회에 참석하는 모습을 보였다. 정 후보의 경우 오늘 토론회 준비 등으로 식사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고 수행한 보좌관이 전했다. 권영길 후보도 이번 토론회 참여제의를 기꺼이 수용하고 토론회 첫날부터 평소 주장해온 진보주의적 정책들을 마음껏 피력했다. 한 네티즌은 "이번 대선토론으로 대선후보들의 면면을 새롭게 평가하는 계기가 됐다"며 "다만 정치, 사회, 경제 등의 각분야를 총체적으로 다루기엔 시간이 좀 짧아 아쉽다"고 밝혔다. 또 "이회창 후보가 토론회에 참석하지 않은 것도 아쉬운 점"이라며 "선거가 치뤄지기 전에 이같은 기회가 또 있었으면 좋겠다"는 입장을 보였다. ㅇ 토론회의 마지막을 장식한 정몽준 후보는 오늘도 이른바 "정몽준 화법"으로 민감한 질문들을 비켜나갔다. 세간의 관심이 되고 있는 노무현 후보와의 단일화문제에 대해서도 "국민의 뜻에 따르겠다", "최대한 노력하겠다"며 두리뭉실한 답변을 했다. 중공업 지분 신탁문제에 대해서도 "이미 신탁이 끝난줄 알았다"며 "알아보겠다"고 답변, 자신의 책임을 피해나갔다. 또 낙선이 되면 어떻게 하겠냐는 질문에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생각나지 않는다"며 "꼭 대통령이 되겠다"고 답변하기도 했다. 정몽준 후보는 오늘 토론회중 질문의 요지와 거리가 있는 답변을 하기도 했다. 가령 벤처기업에 대한 정책을 묻는 질문에 "벤처기업을 경영하는 사람들이 잘 하는게 중요하다"라는 답변을, 교사 체벌에 대한 질문에 대해서는 "질문이 너무 막연하다"며 "교사들이 나쁜 사람이냐, 좋은 사람이냐 라고 묻는 질문과 같은 것"이라고 답했다. 다만 현대전자 주가조작 사건과 관련해선 이익치 전 현대증권 회장을 강력하게 비난했다. 또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에 대해서도 "판사까지 지낸 사람이 검찰조사를 못 믿는다"며 "법을 공부한 사람들이 변호사도 되고, 검사도 되고, 판사도 되는데 왜 서로 못믿는지 모르겠다"고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ㅇ 이번 토론회는 각 대선주자들의 면면을 새롭게 평가할 수 있는 기회가 됐다는 의견들이 많았다. 각 후보들은 토론회를 통해 자신의 평소 생각과 비전 등을 솔직하게 피력하는 등 후보들마다 각기 다른 색깔을 보였다. 다만 증시와 부동산가격 안정, 정치구조 개혁, 교육문제 등에 있어서는 다소간의 입장차에도 불구, 공감하는 모습을 보였다. 첫날 토론회에 참석한 권영길 후보는 부유세권 부과, 주한미군 단계적 철수, 호주제 철폐, 교육제도 개혁 등에 대해 다소 진보적인 주장들을 펼쳤다. 특히 자녀의 동성동본 결혼과 관련한 질문이 나오자 그 당시 상황을 언급하며 "처음에는 반대했지만 진정한 진보주의자가 되기 위해 동의했다"고 회고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노무현 후보는 평소 스타일대로 직설적인 화법을 구사하면 민감한 질문들에 대처해 나갔다. 토론회 전날 농민집회에서 달걀세례를 받은 것에 대해 "정치인들은 한번씩 맞아줘야 한다", "달걀을 맞고 나면 일이 잘 풀리더라"며 순발력 있는 대답을 하기도 했다. 지난 대선때 누구를 찍었냐는 질문에 대해서도 "87년엔 김영삼 전 대통령, 그 이후에는 김대중 대통령을 찍었다"고 답변, "비밀투표의 원칙을 지키기 위해서 답변하지 않겠다"고 답변한 정몽준 후보와 차이를 보였다. 특히 교육문제에 있어서 "과거에 자녀교육을 위해 한달에 60만원씩 하는 과외를 한 적이 있다"는 고백을 하기도 했다. 이에비해 정몽준 후보는 민감한 질문들에 대해 대체적으로 중도적인 입장을 견지했다. 정 후보는 사회, 교육, 외교 등의 문제에 대해서는 대체적으로 "국민의 뜻에 따라", "전문가들과 상의해.."라며 구체적인 자신의 정책을 제시하지 않은 점이 아쉬웠다.
2002.11.15 I 김상욱 기자
  • (edaily리포트) “합병은 미친 짓이다(?)”
  • [뉴욕=edaily 공동락특파원] 기업들의 합병은 남녀간의 결혼에 비유될 정도로 많은 준비와 사후관리가 필요한 작업입니다. 힘들여 노력한게 많은 만큼 얻는 것도 크겠지만 반대로 “차라리 그냥 있었더라면”하고 후회할 수도 있겠죠. 합병 당시 화려한 조명을 받았던 거대 미디어 기업 AOL-타임워너와 비벤디 유니버셜도 역시 지금 고민이 한참인가 봅니다. 국제팀의 공동락 기자가 "세기의 사건”으로까지 불렸던 이 합병들이 현재 어떤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는지 살펴봤습니다. 지난 2000년 전세계 미디어산업은 엄청난 지각변동을 겪었습니다. 새로운 밀레니엄의 시작이라는 들뜬 기대 속에서 인터넷의 보급으로 과거에는 상상하지도 못했던 전혀 다른 미디어의 영역이 탄생했고 새로운 환경 변화에 적응하기 위해 미디어 기업들은 이합과 집산을 통해 자신들의 생존전략을 다시 재편해 나갔습니다. 신문과 방송에서는 연일 미디어 기업간의 짝짓기를 소개하는 기사, 사진과 함께 향후 업계의 판도 변화에 대한 예측과 분석을 마치 전시 브리핑처럼 내놓았습니다. 그리고 항상 끝에는 초대형 미디어 공룡의 탄생으로 인간이 조만간 미디어에 의해 지배될 수도 있다는 우려섞인 지적도 빼놓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2년이라는 시간이 훌쩍 지난 지금 인간이 미디어에 의해 지배될 수 있다는 우려섞인 목소리는 과연 이 공룡(?)들이 제대로 밥벌이라도 해서 생존을 계속할 수 있을까하는 불안감으로 180도 방향을 선회해 버렸습니다. 일부에서는 경기침체로 미디어 기업의 가장 큰 수입원인 광고시장이 침체의 늪을 헤어나오지 못하면서 수익성이 악화됐다고 지적하기도 하고 수익성이 애초부터 보장되지 않은 불안한 동거였다는 혹평을 내놓기도 합니다. 물론 다 근거가 있는 분석이지만 저는 합병이라고 하는 특수한 상황 역시 두 거대 미디어 기업들을 부진하게 만든 원인 중에 하나라고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서 간단한 몇가지 사례를 들어 두 미디어 공룡의 합병후유증이 어느 정도 심각한지 한번 말씀드려볼까 합니다. AOL-타임워너,직원들의 신뢰감 상실 2000년 11월. 미국의 온-오프라인을 통합하는 거대한 미디어 기업 AOL-타임워너가 탄생했습니다. AOL-타임워너의 탄생은 그 출발부터 숱한 화제를 뿌렸습니다. 인터넷과 컨텐츠의 조화에서 부터 발빠른 호사가들은 신경제와 구경제의 만남이라는 최고의 미사여구를 쏟아부으며 두 기업의 합병을 축하했습니다. 정말 시작 만큼은 심히 장대했었죠. 그러나 불과 30개월도 채 지나지 않은 지금. 그 당시 화려했던 미사여구는 우려와 불안으로 변해 앞날을 내다 볼 수도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회사의 주가는 연일 바닥을 모르고 추락하며 각종 신기록을 양산해내는 불명예스런 기록의 제조기로 전락해 버렸습니다. 지난 3월 AOL-타임워너 경영진들은 직원들이 굳이 회사의 이메일 계정을 사용하지 않고 다른 경쟁사의 메일 계정을 사용해도 좋다고 밝혔습니다. 얼핏 들으시면 한 회사에서 같은 메일 계정을 사용하지 않으면 도대체 어떻게 하겠다는 거냐고 반문하실 수도 있겠지만 그 배경은 그리 간단하지 않았습니다. 두 회사가 통합하면서 당시 경영진들은 경비 절감과 함께 두 회사 통합의 상징적인 의미로 AOL계정으로의 메일 통합을 결정했습니다. 그러나 사전 준비작업의 미흡으로 새로 통합된 회사 메일계정은 하루도 조용하고 편할 날이 없었습니다. 당연히 업무의 효율성은 떨어질 수 밖에 없었고 직원들 사이에서는 “합병이 없었다면…”하는 볼멘소리들이 여기 저기 터져 나왔습니다. 결국 거듭된 항의로 다른 메일 계정의 사용이 승인되긴 했지만 직원들 사이에서는 “AOL메일=사고뭉치”라는 인식과 “직원들의 메일계정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는 회사”라는 불만이 지금도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비벤디 유니버셜,국경은 넘어도 문화는.. 프랑스 최대의 미디어 기업인 비벤디의 유니버셜스튜디오의 모기업인 시그램의 음악 및 영화사업 인수도 역시 언론의 집중조명을 받은 사건 중에 사건이었습니다. 그렇지만 비벤디 역시 AOL-타임워너과 마찬가지로 상황이 별반 다르지는 않습니다. 합병한 이후 주가가 60%가량 폭락하고 부채도 천문학적인 숫자로 불어난 이중고를 겪고 있기 때문이죠. 비벤디의 문제는 서로 다른 기업들이 합쳤다는 문제점 이외에도 국경을 달리하면서 오는 문화적인 갈등과 충격이 합병 후유증으로 확장된 경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소비자들이 자국에서 만들어진 영화나 음악을 더욱 선호할수 밖에 없는 미디어 산업의 특성을 감안할 때 프랑스와 캐나다라는 대서양을 넘어선 비벤디의 합병은 마케팅이나 경영면에서도 당연히 파괴력이나 효율성이 다른 경쟁사에 뒤질수 밖에 없습니다. 더구나 세계 최고의 문화대국이라는 자부심으로 똘똘 뭉친 프랑스 국민들의 정서를 생각한다면 이 문제의 심각성은 앞으로도 절대 간과할 수 없어 보입니다. 합병은 과연 미친짓인가? 흔히 기업간의 인수합병을 결혼에 비유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오랫동안 서로 다른 환경에서 형성된 두 가지 기업 문화가 하나로 융합된다는 것이 쉽지않다는 점을 빗댄 표현일 겁니다. 그러나 기업의 인수합병은 결혼에서의 신랑과 신부처럼 서로의 이해와 인내를 기다릴 여유가 없습니다. 수익이라는 옥동자가 탄생하지 않는다면 신랑도 신부도 존재의 이유를 상실하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기업들의 인수합병은 그 준비만큼 결과를 얻기도 힘든가 봅니다. 결혼만큼 합병도 과연 미친짓일까요?
2002.05.13 I 공동락 기자
  • 한투증권, "부자아빠펀드" 내일 시판
  • [edaily 김희석기자] 한국투자신탁증권은 은행, 보험 및 투신상품의 장점만을 융합하여 만든 "부자아빠펀드"(아래사진)가 3일부터 판매에 들어간다고 밝혔다. 부자아빠 펀드는 배타적 우선권을 획득한 상품으로 자녀의 라이프 사이클에 따라 교육자금, 유학자금, 결혼자금 및 주택마련자금 등을 맞춤식으로 인출할 수있는 상품이다. 한투증권은 보험상품과 달리 중도에 해약하더라도 수당수수료 등 사업비집행에 따른 납입원금 손실이 없고, 연체에 따른 연체료 지불 및 부활이라는 절차를 거치지 않아도 된다는 점도이번 상품의 큰 장점이라고 설명했다. 적립형 및 거치형으로 가입 가능한 이 상품은 대학의 학자금 뿐만 아니라 만20세 때에는 청약예금 가입자금을 지급한다. 또한 총 4회에 걸쳐 해외연수비, 유학자금, 결혼준비 자금 및 주택구입자금 등을 지급하여 자녀를 부모로부터 완전히 독립시킬 수 있는 맞춤식 상품이다. 한국투자신탁증권 최인규 금융상품총괄팀장은 "이제까지 보험회사의 변액보험으로부터 영역을 침해 당했고 은행으로부터는 펀드의 수탁판매에 의해 침해를 당했는데 이번 상품으로 보험시장 및 은행의 적금시장에 대공격을 시행할 것"이라고 의욕을 드러냈다.
2002.05.02 I 김희석 기자
  • 엔씨소프트, `리니지` 정기 이벤트 새단장
  • [edaily 권소현기자] 엔씨소프트(36570)는 이달부터 리니지 게임 마스터(GM)가 게임에 직접 참여해 고객과 함께하는 다양한 이벤트를 시작하는 등 리니지의 게임 속 이벤트를 새단장했다고 4일 밝혔다. 엔씨소프트는 지난해 5월 게임 모니터링과 별도로 투명운영을 취지로 리니지 GM 운영시스템이 도입했다. 이후 게임 속에서 모습을 감추었던 리니지 운영자는 이번 이벤트를 계기로 10달여만에 고정 이벤트 진행자로 새롭게 선보이게 됐다. 이번 리니지GM 이벤트는 게임 내 결혼식 주례를 비롯, 전투 대전과 가면무도회등 총 7가지 주제를 가지고 각 서버(월드) 마다 월 1회 정기적으로 진행해 고객들에게 색다른 즐거움을 선사할 예정이다. 엔씨소프트는 GM이벤트 오픈을 기념해 오는 21일 대구에서 실제 결혼할 예정인 리니지 커플의 사이버 결혼식을 주최하고 예식준비부터 촬영을 비롯한 사회, 주례까지 모든 진행을 지원하게 된다. 6일 오후 7시 데포로쥬 서버 콜롯세움에서 개최되는 사이버 결혼식에는 장내 혼잡을 대비해 각 리니지 성의 군주와 혈맹원, 10개 혈맹의 혈맹원 등 신랑, 신부측으로 부터 사전에 초청을 받은 120~130여명의 하객만이 참석할 수 있다. 한편 엔씨소프트는 이들 예비부부에게 결혼 축하선물로 특별히 제작된 리니지 커플링 아이템을 증정, 서로 예물로 교환할 수 있도록 할 예정이다.
2002.04.04 I 권소현 기자
  • (화제)하나 김승유행장, 고객자녀 결혼식 주례
  • [edaily] 김승유 하나은행장이 오는 9일 은행 고객의 자녀 결혼식 주례를 맡기로 해 화제를 모으고 있다. 하나은행은 지난해 6월 창립 30주년을 기념해 "사랑의 네트워크"라는 우수고객 자녀 맞선 이벤트를 개최했는 데 이 행사에서 만난 커플이 9일 첫번째로 결혼식을 올린다. 이번 결혼식의 주인공은 매봉지점 고객의 아들인 최모(31)씨와 잠원역 지점 고객의 딸인 김모(29)씨로, 이번 첫번째 결실을 기념하기 위해 평소에 주례를 사절해 온 김승유 행장도 이번 만큼은 흔쾌히 주례를 맡기로 했다. 또 하나은행 대고객 서비스부문 협력회사들도 리무진 서비스, 국민관광상품권, 미술작품 및 잡지 정기구독권 등 다양한 축하선물을 제공할 계획이다. 한편 하나은행 김희철 PB지원팀장은 이번 행사와 관련해 "고객 자녀의 결혼 그 자체보다는 생활의 동반자로서의 역할이라는 의미가 더 중요하다"며 "프라이빗뱅킹 서비스가 종합자산관리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라이프 케어(Life Care)로 발전하고 있다"고 말했다. 즉 프라이빗뱅킹이 고객의 생활속의 모든 솔루션을 제공하는 것으로 발전해 결혼 이외에도 여행 유학 건강 문화 교양 등 모든 분야에서 고객의 동반자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은행은 이전에도 사내 통신망을 이용해 고객의 자녀를 신랑감, 신부감으로 소개하고 서로 연결시켜 주는 서비스를 제공해 왔다. 고객들의 적극적인 요구에 따라 공개적인 맞선행사를 추진, 지난해 6월과 11월 2회에 걸쳐 "사랑의 네트워크행사"라는 우수고객 자녀 맞선행사를 실시했다. 한편 이같은 공개 맞선행사를 통해 현재 여러쌍의 커플이 결혼을 준비하고 있을 정도로 고객들의 만족도가 높게 나타남에 따라 하나은행은 이 행사를 정례화할 계획이며 오는 5월쯤 또 한번의 맞선행사를 준비하고 있다.
2002.03.07 I 문병언 기자
  • (화제)오리온전기 과장의 세번째 결혼식.."국경넘은 사랑"
  • [edaily] 세번의 결혼식. 남자와 여자가 정식 부부로 인정받기 위해 세 번을 결혼했다. 오리온전기에 근무하는 박익훈 과장(36세)과 베트남 여인 뷔티밍후에가 그 주인공. 박익훈 과장과 그의 신부 뷔티밍후에는 지난 20일 서울 강남에서 세 번째 결혼식을 올렸다. 이 결혼식은 3년간 베트남과 한국을 오가는 아주 각별한 사랑의 결실이기도 하지만, 한 여자와 한 남자가 세 번 결혼해 마침내 정식 부부가 되는 특별한 결혼식이기도 했다. 오리온전기의 베트남 공장인 OHPT에서 주재원으로 근무하던 박익훈 과장이 뷔티밍후에양을 만난 것은 지난 99년초. 뷔티밍후에양은 오리온전기 현지공장에 신입사원으로 입사했고 박익훈과장은 신입사원 채용 담당이었다. 사랑을 키워오던 두사람은 그러나 6개월 만인 99년 7월 박 과장이 본사로 귀임하면서 끊어질 위기에 처했다. 이때 두 사람을 연결해 준 것은 국제전화였다. 국제전화비만 한 달에 50여만원. 박 과장은 전화비를 마련하기 위해 좋아하던 술마저 끊어버렸다. 1년여 동안 국경을 넘어 사랑을 이어온 두 사람, 마침내 결혼을 약속하지만 연애기간보다 결혼 준비기간이 더 걸렸다. 베트남과 한국 두 나라 정부에 결혼을 허가받기까지 1년. 양가 부모님을 설득하는데 1년…. 그러다가 마침내 지난 9월13일 신부 고향에서 첫 번째 결혼식을 올렸다. 베트남 관습에 따라 치러진 이 결혼식에서 두 사람은 하객 300여명에게 일일이 술을 대접하며 부부로 인정받았고, 신부 친지와 신랑 하객들을 위해 OHPT가 소재한 베트남 하노이에서 두 번째 결혼식을 올림으로써 친지·동료들로부터 부부로서 인정받았다. 그리고 지난 20일 서울에서 세 번째 결혼식을 올리면서 마침내 두 나라의 친지가 모두 인정하는 정식 부부가 될 수 있었다. 신부 뷔밍티후에 양은 무역 전문인력을 양성하는 베트남 대외무역대학을 졸업한 후, OHPT와 JAICA(일본업체) 베트남 지사 등에서 근무했으며 영어는 물론 일본어에도 능통한 재원이다. 오리온전기 관계자는 "두 사람의 애틋한 사랑이 오리온전기 베트남 현지공장을 매개로 결실을 맺게 돼 기쁘다"며 "오래오래 사랑을 키워나가는 부부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2001.09.25 I 이의철 기자
  • (초점) 메가와티, 독자적 국정운영 능력은 부족할 것
  • [edaily] 인도네시아 사태가 메가와티 수카르노푸트리 부통령의 대통령 임명으로 가닥을 잡아가면서 전세계의 관심은 메가와티가 과연 인도네시아의 정국을 어떻게 운영할 것인가로 쏠리고 있다. 우선 메가와티에 대한 일반적인 평가는 스스로 국정을 운영해 나갈만한 인물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녀가 인도네시아 `건국의 아버지"로 불리는 수카르노 초대 대통령의 맏딸로서 국민들과 정치권으로부터 비교적 폭넓은 지지를 받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국정을 독자적으로 운영할 수 있는 능력은 부족하기 때문에 어떤 형식이든지 연정이 불가피해 보인다. 이는 메가와티가 인도네시아 국민협의회(MPR)로 부터 대통령으로 지명되고 나서 제일 처음강조한 말이 각층의 화합이었다는 사실만 놓고 보더라도 그대로 입증된다. 현재 자신의 입장을 밝히기보다는 군부나 이슬람 종교 지도자들에게 도움을 요청함으로써 차기 정권에서는 계파나 종교의 뛰어넘는 내각의 구성과 같은 정국구상을 염두한 발언이었던 것이다. 그녀는 반둥 소재 파자자란 대학 농업부를 중퇴한 뒤 2차례에 걸쳐 가정을 꾸렸으나 모두 파경으로 끝났다. 그리고 지난 1970년 자카르타 소재 국립 인도네시아대학 심리학부에 입학했다가 3년만 에 다시 학업을 중단하고 1973년 현재 남편인 사업가 타우픽 키에마스와 결혼해 평범한 가정주부로서 생활해 왔다. 그리고 평범한 가정주부의 역할을 벗어나 정치무대에 본격 투신한 것은 민주당(PDI)의 공천을 받아 국회의원에 당선된 1987년부터였다. 바꾸어 말하면 그녀가 정치적인 역할이나 집권을 처음부터 준비해온 인물이 아니라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그녀가 지난 1999년 국민적인 지지에도 불구하고 와히드에게 권좌를 넘긴 것은 이같은 상황이 크게 반영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외에도 세계에서 가장 큰 이슬람국가에서 2번에 걸친 이혼경력 역시 보수적인 종교지도자들의 공공연한 반감을 피할 수는 없어 보인다. 현재의 상황을 종합해 볼때 메가와티 신임 인도네시아 대통령은 군부나 이슬람교도들의 포괄적인 지지를 위해서라고 국가적으로 신망이나 지지도가 높은 인사들은 대거 기용해 정국을 운영해 나갈 것으로 보인다.
2001.07.24 I 공동락 기자
  • 유니텔, 온-오프라인 통합 웨딩서비스 "메리안" 오픈
  • [edaily] 유니텔(http://corp.unitel.co.kr)이 온-오프라인 통합 웨딩서비스 "메리안"(www.marrian.co.kr)을 오픈하고 웨딩시장에 진출한다고 27일 밝혔다. 유니텔은 웨드넷-마로니에 웨딩클럽과 함께 토털 웨딩상품을 제공하는 동숭동 메리안 직영 매장을 운영하고 다양한 웨딩정보 제공을 위한 사이트를 운영하게 된다. 유니텔은 온라인을 통해 ▲예비 신랑신부를 위한 다양한 웨딩상품 등 결혼정보 제공 ▲둘만의 사랑과 추억이 담긴 홈페이지 제작 ▲인터넷 결혼예식 생중계 서비스 ▲회원들에 대한 지속적인 관리 및 정보제공 등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한다. 또 삼성동 아셈빌딩 8층에 오픈한 메리안 고객센터와 동숭동 직영매장을 통해 ▲메리안 직영매장과 제휴사 상품들에 대한 무료 컨설팅 ▲전문 결혼 도우미들의 결혼준비 상담 등 오프라인 서비스를 제공한다. 메리안 직영매장은 27일 대학로 동숭동 학전 블루(소극장) 1,2층에 새로 오픈하며 웨딩드레스, 사진, 폐백, 혼수, 예물에 이르는 토털쇼핑을 즐길 수 있다. 유니텔은 메리안 가입회원을 대상으로 "혼수품 공동구매" 및 "청첩장 만들어 주기" 등 다양한 이벤트를 진행하는 한편, 올 가을시즌 결혼을 준비하는 회원에게는 "전문디자이너의 웨딩드레스 저가 구입"과 "부동산 컨설팅" 등의 행사도 펼칠 예정이다. 유니텔은 향후 일대일 100% 맞춤서비스 제공을 위해 금융, 주택, 재테크, 뷰티 등 다양한 상품 개발을 위한 관련 업체와의 공동 마케팅 진행과 전문 웨딩 매니저 교육 및 웨딩드레스 교육에 이르는 웨딩 아카데미 운영도 추진할 방침이다. 회원 가입신청 및 자세한 서비스 내용은 매리안 홈페이지(www.marrian.co.kr)에서 확인할 수 있다.
2001.06.27 I 김윤경 기자
  • (300조를 움직이는 사람들)⑨박성진 삼성투신 차장(중)
  • [edaily] 이번주 “300조를 움직이는 사람들”은 삼성투신운용의 스트레티지스트인 박성진 차장입니다. (인터뷰 상편에서 이어짐) <운명의 장난(?) 교수의 꿈이 증권사 채권맨으로> -그럼 신영증권에 입사한 것은 어떤 계기에서입니까. ▲아까 말씀드렸듯이 유학을 가려고 했는데요. 제가 준비했던 학교가 인디애나 주립대였어요. 미국 내에서도 빅 10에 들어가고 무엇보다도 한국학자들 중 여기서 학위받은 분들이 많은 곳이죠. 제 석사논문을 영어로 번역해서 원서를 넣었더니 그 쪽에서 “좋다. 너는 바로 박사과정에 진학해도 된다”고 하더군요. 이게 왠 떡이냐 싶었죠. 돈도 없는데 미국에서 다시 석사부터 시작하려면 좀 시간이 많이 걸리겠습니까. 의기양양 비자를 받으러 대사관에 갔더니 아까 그 여자 면접관이 “your job responsibility is not enough guarantee to come back. Your financial status is not enough guarantee to finish your coursework” 이라고 하더군요. 기가 막혔죠. 그때가 12월이었어요. 1월에 미국으로 가서 2월부터 시작하는 강의를 수강해야 하는데 말입니다. 저는 그 때 이미 결혼을 해서 기혼자용 기숙사에 제 피 같은 돈 100불을 예치금으로 송금까지 한 상황이었어요. 눈앞이 캄캄해졌습니다. 그래서 사정을 했죠. 그런데 전혀 안 통해요. 안 통하는 정도가 아니라 전경을 불러서 끌어낼 태세에요. 하늘이 노래진다는 것 느껴본 적 있으십니까. 한 남자의 꿈과 인생이 일개 미 대사관 직원의 손에서 박살이 난 겁니다. 인디애나 주립대에 전화를 했습니다. 창피해서 비자가 리젝트됐다는 소리는 죽어도 못하겠고 개인적인 사정이 생겨서 다음 달에는 못 가겠다고 말했어요. 그랬더니 “괜찮다. 2년 안으로만 다시 하면 된다. 그렇지만 2년이 지나면 토플과 GRE를 새로 시험 봐서 최신 성적을 보내주면 또 된다”고 친절히 알려주더군요. 그래서 낙담한 마음을 조금은 지울 수 있었죠. 그 때 병도 좀 앓았는데 가장이니 어떡합니까. 먹고는 살아아죠. 신문을 탁 펼치고 구인광고를 막 뒤졌어요. 취직을 하기로 결심하고 보니 12월에 신입사원을 뽑는 곳이 딱 두 군데였어요. 신영증권이랑 디지털조선. 처음에는 당연히 디지털조선에 가고 싶었습니다. 대기업공채는 이미 가을에 끝났고 신영증권은 회사 자체에 일이 있어서 12월로 늦춰졌다고 하더군요. 신영증권의 일정이 먼저 시작됐는데 모집분야에 연구/조사 분야가 있었어요. 일단 두 곳에 모두 원서를 넣었죠. -증권이 무엇인지는 아는 상태에서 입사를 결정한 것은 아닐텐데요. ▲그런 건 아닙니다. 사실… 유학준비를 하면서 잠깐 토플학원 강사로 일했는데 그 학원 바로 옆에 동서증권이 있었어요. 학원에서는 초급반 영어랑 주부회화를 담당했습니다. 아침에만 좀 바쁘고 오후에는 내리 놀아요. 그리고 학생들 수업끝나고 직장인들 하루 일과가 끝나는 저녁시간에 연이어 수업이 계속되는 거죠. 학원강사가 참 고달픈 직업입니다. 건강도 많이 망쳐요. 낮에 시간 많겠다 바로 옆에 증권회사 있겠다. 그래서 순진한 집사람을 꾀서 주식을 하겠다고 졸랐어요. 당시 집사람이 피아노 레슨을 20개나 해서 2000만원을 모았거든요. 그 돈으로 주식투자를 시작했습니다. 이 돈을 불려서 유학가자는 결심을 하고 증권계좌를 만들었더니 처음에는 잘 되더라구요. 금방 2500만원으로 돈이 불어났거든요. 저는 주식의 ‘주’자도 몰랐고 기업에 대해서도 전혀 아는 바가 없었어요. 들어본 회사라고는 아버님이 다니셨던 동아건설이 고작이었어요. 당시 성수대교 붕괴사태 때문에 동아건설주가 무척 쌌어요. 그래서 “음 저건 낙폭과대주야” 라고 매입했죠. 하하. 그리고 당시 금성이라는 이름을 가진 LG계열사 주식도 샀고요. 그런데 첫끗발이 개끗발이라고 그 다음부터는 폭락하기 시작하는 겁니다.(웃음) 그 후 손절할 때가 왔는데도 그걸 못했어요. 개미투자자의 전형적인 실패사례죠. ‘손절하지 않고 기다리면 언젠가는 오를거야’ 라는 말도 안되는 류의 생각들. 되긴 뭐가 됩니까. 유학 갈 날짜는 다가오고 점점 돈은 줄어드는 지경이 됐어요. 대충 정리를 해보니까 1500만원이 조금 안되는 돈이 남았더군요. 속으로는 “그래도 선방했다. 이게 다 내가 블루칩과 낙폭과대주를 산 덕택이야” 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하하 유학이 취소되고 나니까 오기가 생기더라구요. 내가 왜 주식투자에 실패했는지 증권회사에 들어가서 몸소 알아봐야겠다는 오기죠. 전 그 당시만해도 증권회사 직원들은 그 이유를 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제 딴에는 인생의 막다른 골목에 몰렸는데 그 길밖에는 방법이 없다고 믿었습니다. 디지털조선은 어떻게 됐냐구요? 제가 학부는 놀아서 학점이 나쁜데 대학원은 all A였어요. 대학원 all A지, 토플 점수 우수하지…나름대로는 서류는 문제없다고 생각하고 디조에 원서를 보냈어요. 그런데 서류에서 떨어졌습니다.(웃음) 그래서 지금도 조선일보는 감정이 좋지 않아요. <우연의 연속, 채권분석가가 되기까지> -신영증권에 들어자마자 바로 채권부로 갔습니까? ▲연수를 받고 신입사원들에게 지원부서를 적으라더군요. 1순위는 무조건 조사부 적었죠. 한 게 그것 밖에 없으니까요. 그리고 두번째는 국제부. 폼 나잖아요. 3순위. 주식부. 왜 주식을 하다가 망했는지 알고 싶어서였습니다. 그런데 발령을 하는데 인사부장이 “박성진 채권부” 하고 부르는 겁니다. 인상 팍 쓰면서 ‘도대체 채권부가 뭐하는데야?’ 라고 생각했어요. 인사부장께 물었죠. 채권부가 뭐하는 곳이냐고. 그랬더니 인사부장이 “아파트 분양하잖아. 거기서 채권받거든. 분양하고 나오는 사람들 앞에서 채권, 채권 하면서 소리지르고 가서 팔아. 너 명동이나 주택가에서 채권, 채권하면서 팔러다니는 사람들 본 적 없냐? 그거하는 거야” 라고 말했습니다. 정말 토씨하나 다르지않게 전해드리는 거에요. 반은 농담이라고 생각했지만 정말 황당했어요.(웃음) 채권이 뭔지도 몰랐고 관심도 없었던 데다 신입사원 교육 때 채권시간이 무지 재미없었거든요. 수학공식 막 쓰고 계산도 복잡하고. 채권부에 갔더니 지금 LG투신에 있는 최원녕 과장이 “네가 채권부냐?” 라고 인상을 쓰면서 말하는 거에요. 그런데 알고 보니까 초등학교 선배더라구요. 그것 때문에 꽉 잡혀서 찍 소리도 못하고 살았죠. 하하. -결국 전공이나 희망사항과는 전혀 상관없이 채권판에 들어왔군요. 처음에는 무슨 일을 했습니까. ▲수도결제죠뭐.(증권사가 채권매매 중개시 현물 채권과 대금을 교환, 결제해주는 것) 처음 증권사 채권부에 가면 하는 일이 그거 밖에 더 있겠습니까. 속된 말로 인생이 완전히 골로 가더라구요. 그전까지는 알튀세르, 레비스트로스와 라캉을 논하던 나름대로 먹물먹은 지식인이라고 제 딴에 자부했는데 말이죠. 하하. 인생이 이렇게 꼬이고 저렇게 꼬이는데 정신을 못 차리겠더군요. 그냥 전공살려서 기자나 됐으면 폼이라도 날 거 아니겠어요. (웃음) -수도는 얼마나 했습니까? ▲9개월 정도? 한 일년 가까이 했습니다. 제가 신입사원 동기들보다 나이가 좀 많았어요. 다행인 것은 저랑 한 조가 된 친구가 운전을 전혀 할 줄 몰랐어요. 그래서 제가 운전을 하고 그 친구가 막 뛰어다니는 일을 했죠(웃음) 제가 어떤 건물 앞에 차를 탁 세우면 그 친구는 미친 듯 뛰어올라가서 도장 찍어오고. 수도를 직접 해 봐야 채권의 비애를 몸소 체험할 수 있어요. 길이 막힐 때는 원효대교를 뛰어서 여의도로 들어오기도 했습니다. 재미있는 일화가 많았어요. 그때 거래가 많았거든요. 선배들이 “야 이 자식아 빨리빨리 처리 못해? 느려터져 가지고선” 뭐 이렇게 혼이났죠. 저도 열이 받으면 “우리 회사에서 매매보고서 나보다 더 빨리 작성하는 사람있으면 나와보라 그래. 나보다 더 빨리 하는 사람없으니까 늦는다고 갈구지 마” (웃음) 이렇게 맞받았죠. <“너는 컴퓨터도 잘 다루니까 기술적 분석이나 한번 해봐라”> -채권의 기술적 분석을 시작한 건 언제인가요. ▲그것도 제가 하겠다고 한 게 아니라 신영증권 황 부장께서 “너는 컴퓨터도 잘 다루니까 이거 한번 해봐라” 이런 식으로 명령을 내리셔서 하게 된 겁니다. 입사하고 3개월 후부터 수도업무랑 채권분석을 같이하기 시작했어요. 채권단가, 이론부터 알아나갔죠. 실제로 해보니까 제가 한 것이 잘 맞아 떨어지더라구요. 잘 맞을 때까지 조정도 이리저리 해보고. 여하튼 재미있었습니다. -채권관련 책은 몇 종류나 봤습니까. ▲기술적 분석에 관한 책은 사실 그다지 많지 않아요. 거기에 나오는 공식들을 보는거죠. 제가 좀 컴퓨터를 다루니까 그 공식들을 프로그램으로 짜고 그것을 또다시 엑셀에서 구현하는 작업들을 했어요. 조정과정을 몇 개월 거치니까 신기할 정도로 잘 맞는 거에요. 그때 당시에는 족집게처럼 들어맞는다고 느껴졌을 정도니까요. -그게 몇 년도인가요. ▲입사하던 해였으니까 96년이군요. 그런데 이유가 있더라구요. 그 당시 시장은 지금처럼 시가평가(market to market) 시장도 아니었고 대부분 시장참가자들이 기관투자가다 보니까 현재에 비해 모멘텀이 훨씬 분명한 시장이었습니다. 지금처럼 변동성이 큰 것이 아니라 한 번 모멘텀이 생기면 관성에 의해서 일정 기간은 그것이 계속 유지가 된 거죠. 단기 딜링을 해서 돈도 벌 수 있을 것 같고 자신감도 막 생겨났습니다. 아침회의에서 “금리 어떻게 될 것 같나?” 라는 질문을 받을 때 신입사원임에도 불구하고 코멘트를 하고. 그러면서 “아 나는 이쪽 방면에 소질이 있는가봐. 분석의 천재라니까” 라는 착각에 빠지게됐죠(웃음). 그 시절에는 어디 인터넷이 있습니까. 나오는 모든 금융데이타를 일일이 손으로 작업했어요. 한국은행 데이터, 경기동향, 통계청 데이터를 수기로 입력했다는 거 아닙니까. 아주 초보적인 수준이었지만 재미있었어요. -재미를 느낀 것이 가장 큰 이유였군요. 그만두겠다는 생각도 안하고 말입니다. ▲물론 처음에는 번듯한 직장에 취직해 비자받을 때 흠 잡히지 않고 돈 모아서 곧 유학을 떠날 계획이었습니다.(웃음) 학원강사랑은 엄청난 차이가 있잖아요. 증권회사라면 미국사람들도 job responsibility가 어쩌니 저쩌니 못할 거 아니겠어요. 2년간 괜찮다는데 금방 떠나려고 했죠. 그런데 학위받는 일에 대해서 회의가 들기 시작했어요. 유학 갈 형편도 안됐지만. 사실 우리나라에서 학계만큼 정치적인 곳도 없잖아요. 물론 하고 싶은 일을 못했다는 것에 대한 자괴감이 없을 수는 없죠. 사람인데. 수도하면서 도장받으러 다니려고 내가 이때까지 공부했나. 이런 생각들. 그래서 대학때부터 다니던 교회에도 뜸하게 되고. 저는 토요일 교회모임 때문에 대학시절 내내 그 흔한 MT도 한번 안 간 사람인데 말이에요. ‘이렇게 열심히 살면서 하나님을 모셨는데 생 양아치 같은 애들은 다 잘되고 나는 남들 다 가는 유학 한 번 못 가나’속으로는 그런 생각을 해도 위에서 뭐하라고 시키면 죽어라 하거든요.(웃음) 제가 바로 그랬어요. 마음 속은 썩어 문드러져도 하라면 다 했으니까요. 그러다 지금 다니는 교회 목사님을 만났어요. 그 목사님께서 “하나님이 자네를 유학 보내시지 않은 이유가 있다. 이 세상에서 지금 자네가 해야 할 일이 있다. 지금 그 일을 시키시려고 일부러 여기 남게 하신 거다. 하나님은 당신에게 시장을 분석하고 예측하는 일에 관한 재능을 주신거다. 네가 경제학을 공부하지는 않았지만 그 부분은 하나님이 메꿔 주실거다.” 이렇게 설득을 하시더군요. -조직 안에서 전문적으로 분석을 시작한 건 언제인가요. ▲수도일이 끝나고 나서는 상품운용팀에 들어갔어요. 말이 상품운용이지 일반고객들을 상대로 채권을 파는 거였죠. 전자계산기도 무지 잘 써야했구요. 세금계산을 손으로 하는데 나중에는 손이 보이지않을 정도로 손동작을 놀려야 했습니다. -아니 엑셀이 있었을텐데 왜 그런 일을 했습니까. ▲관행이라는 것이 그렇게 쉽게 깨지는 것이 아네요(웃음). 엑셀쓰자고 어른들에게 건의하면 무조건 손으로도 할 줄 알아야 된대요. 컴퓨터 없을 때는 네가 어떡할거냐는 거죠. <”상상력과 재치” 시황으로 이름을 얻다> -그럼 시황을 본격적으로 쓴 건 언제입니까. ▲브로커팀으로 옮기면서 시황을 쓰게 됐습니다. IMF 외환위기가 터지기 3개월 정도 전이었어요. 97년 9월로 기억합니다. 그 당시 데일리 한편 조그만 귀퉁이에다가 제 이름으로 시황을 쓰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평이 너무 좋은 거에요. (웃음) -제 기억으로도 호평을 받았던 것이 생각나네요. 기술적 분석과 관련된 코멘트도 최초로 나왔었죠 아마? 지금도 그 얘기를 하는 분들이 있는데.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자체 제작한 툴을 가지고 하니까 제 예측이 잘 맞으니까 ‘이걸 다른 사람들에게도 알려주자’ 라는 마음에서 시작하게 됐어요. 나름대로 제가 생각한 아이디어도 많이 넣었죠. 확인도 안 해보고 “이런 건 아닐까? 저런 건 아닐까?” 를 집어넣은 겁니다. 그때는 그게 장점이었죠. 지금은 단점이 됐지만(웃음) 제가 지금도 “너는 확인해보면 간단한 일을 가지고 상상을 먼저 해. 그래서 안돼” 질책을 받아요. 그러면서 맨날 깨지거든요. 하지만 그 때 당시에는 그것이 재미있다고 받아들여졌다고 생각해요. -당시 데일리 말고 따로 리포트를 쓴 적은 없나요. ▲사실 저는 데일리를 쓸 만한 내공도 가지지 못했어요. 지금도 그렇구요. 배우는 과정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채권을 잘 알지도 못하는 애가 채권계에 입문해서 뭔가 쓴다고 하니까 사람들이 관심을 가져준 정도겠죠. DB 만들고 상관관계 분석하는 모든 일들이 재미있었고 지금도 도움이 많이 됩니다. -첫번째 프리젠테이션은 어디서 했습니까. ▲정말 기억이 안나요. 한때 많이 불려다니긴 했는데 어디서 처음 했는지가 기억이 잘 안 나는군요. 자주 갔던 곳은 외환, 한미은행 등 은행권이었습니다. -혼자 갔습니까. ▲아뇨. 담당부장님과 함께 갔습니다. 가서 상담하고 이것저것 말해주고. 사실 맞았던 적보다 틀린 적이 훨씬 많았어요. 틀렸을 때의 그 창피함, 짜증남이라는 건 말로 못해요. 틀린 것만 가지고도 많은 공부를 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 당시만해도 채권 프리젠테이션을 하는 곳이 거의 없었어요. 다른 곳에서는 프리젠테이션을 한다고 전해주는 정보가 채권시장 안에 있는 사람들에겐 너무 빈약하게 느껴진거죠. 시장도 좁고 돌아가는 메커니즘도 빤한 곳이 이 바닥 아닙니까. 그런데 제가 가서 이러저러 말을 하니까 “쟤는 채권수도도 해 본 녀석이고 말은 좀 통하네” 라는 평가를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아는 건 절대 아네요. 전 지금도 투신, 은행권이 어떻게 채권을 사고 파는지 잘 몰라요. 많은 선배들은 제게 “네가 말은 참신하고 조리있게 했지만 실상 은행이나 보험이 그렇게 단순하게 자산운용을 하는 곳이 아니다” 라고 충고를 해줬죠. -그 당시 가장 기억에 남는 건 뭡니까. ▲우리 시장이 좀 건조하다 보니..제가 장난기가 좀 심한 편이라 의도적으로 코믹하게 쓰려고 했어요. 그러면서도 내용의 본질은 놓치지않으려고 나름대로 애를 쓰긴 했는데. 별루 기억에 남는 것이 없네요. -시황제목을 무척 재미있게 달았던 걸로 기억됩니다만. ▲음 그런 건 있었어요. 외환위기 이후 IMF 고금리 정책을 계속 고수했잖아요. 그 후 분기마다 정책 내용을 바꾸게 됐는데 한번은 영문을 읽어보니까 이번엔 고금리 정책 완화기조로 간다 뭐 이렇게 느껴지더라구요. 그리고 진짜 금리가 내렸습니다. 마침 금리가 하락하는 날 IMF 서울사무소장의 금리하락 멘트도 나갔죠. 그 시점에서 제가 뭐라고 코멘트를 했냐면 “IMF는 Immediate Money-market Fever 다“ 라고 했어요. 사람들이 그런 걸 기억해 준 거죠. 분석을 잘해서가 아니라. (인터뷰 하편으로 이어짐)
2001.05.04 I 정명수 기자
  • (초점) 축복받지 못한 국민·주택은행 합병 본계약 체결
  • [edaily] 23일 국민·주택은행의 합병이 축복받지 못한 "결혼"으로 출발하고 있다. 이날 두 은행은 합병 승인을 위한 이사회를 각각 개최했지만, 노조가 강하게 반발하면서 아침부터 각각의 행사 자체가 삐걱거렸다. 두 은행 모두 원래는 각 은행 본점에서 이사회를 개최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양 은행 노조의 반발을 의식해 이사회 장소를 시내 호텔로 바꿨다. 두 은행은 합병 본계약 장소와 시간도 변경했다. 어느 정도 예견됐던 일이다. 그럼에도 양 은행의 합병 승인과정이 이 처럼 점철되자 두 은행 관계자들은 씁쓸한 인상을 지우지 못하고 있다. 합병이란 게 쉬운 건 아니지만 노조도 설득하지 못하면서 무슨 시너지가 있겠냐는 원론적인 문제제기다. 여기에 합추위를 비롯한 양 은행 경영진의 대응 방법에 대해서도 불만의 목소리는 높다. 노조가 합병에 반대한 건 어제 오늘의 일의 아니다. 그럼에도 양 은행은 합병을 관철시켜냈고, 합병협상을 마무리지었다. 그렇다면 합병 승인 이사회와 조인식은 노조를 설득하고 당당하게 치뤄야 하는 게 아니냐는 주장이다. 주택은행 관계자는 "노조가 그렇게 무서운데 무슨 합병을 하느냐"고 꼬집었다. "노조도 설득할 준비가 돼 있지 않은 경영진이 무슨 합병을 하느냐"는 불멘 소리다. 이날 합병 이사회 장소가 철저히 보안에 지켜진 국민은행도 비슷한 분위기다. 보안이 철저히 지켜진 까닭에 노조와의 충돌은 없었지만, 많은 직원들은 합병 이사회를 왜 은행 밖에서 해야하는 지를 묻고 있다. 국민·주택은행은 합병을 발표하던 날도 한국은행 기자실에서 "증거를 위한 사진 한장 남기기"에 주력한 초라한 모습으로 시작했다. 합병 본계약 체결을 한 오늘도 양 은행은 본계약 체결 사진 한장을 위해 "숨바꼭질"을 해야 했다. 이 시각 현재 합병 본계약 체결장인 롯데호텔에서는 양 은행 노조와 경찰병력이 대치하고 있는 상황이다. 합병에 대한 우리 경제 주체들의 인식에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언제까지 이 같은 악순환이 반복돼야 하는 지, 우리 금융회사 경영인들은 언제 이 같은 모습에서 벗어날 지 안타까운 마음을 지울 수 없다.
2001.04.23 I 김병수 기자
  • (300조를 움직이는 사람들)⑦김경록 미래에셋투신 대표(하)
  • [edaily] 이번주 “300조를 움직이는 사람들”의 주인공은 미래에셋투신운용의 김경록대표입니다. (인터뷰 기사 중편에서 이어짐) -경력사항을 보면 채권시장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가지게 된 건 논문준비를 시작하던 95년입니다. 그다지 긴 시간은 아닌데요. ▲채권시장의 상당부분은 거시경제학과 관련돼 있습니다. 주식의 스트레티지스트와는 다르게 Fixed income쪽은 거의 메크로(macro: 거시경제)만 다루죠. 제가 장은연구소에 있을당시 금리 부분에서만 4년 정도 일했습니다. 옛날에는 모형 만드는 것을 참 좋아했어요. 가우스도 그래서 배웠고. 모형을 만들어서 이리저리 움직이면 뭔가 멋있어보인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어려운 일을 하는 것 같고. 한 2년 정도 모형을 정말 재미있게 만들었습니다. 얼마전 “국채지표물 교체과정과 스프레드” 라는 글을 하나 써놨는데 이런 식으로 채권시장의 미시구조나 데이터를 가지고 분석한 논문들이 계속적으로 나와야한다고 봅니다. 아직까지 거의 미개발된 분야라 파고들면 새로운 것이 많이 나올 수 있거든요. 저는 계량쪽에 기여할 부분은 없을 것 같고 이 분야를 열심히 해보려고 생각중입니다. 국채 경매방식에 대해 연구중 -박사논문의 아이디어는 뭡니까. ▲경제학자들이 제일 재미있어 하는 것이 바로 경매입니다. 우리나라 국채의 경우 복수가격방식으로 출발해 단일가격방식(dutch)으로 변경됐습니다. 복수가격(conventional)은 자기가 써낸 가격대로 받아가는 방식이니까 당연히 정부 입장에서는 이 방식이 좋겠죠. 비싸게 써낸 사람에게는 높은 값으로 팔 수 있으니까. 대부분의 정부는 컨벤셔널 방식을 선호하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60년대에 프리드먼이 경매와 관련해 이런 주장을 했습니다. 이 사람은 참 역발상을 잘하는 양반인데 유명한 것으로는 “자유변동환율제를 실시하면 스펙이 환율을 오히려 안정시킨다” 는 주장이 있습니다. 프리드먼은 “단일가격방식을 채택하면 경매수입이 지금보다 늘어난다” 라는 당시로선 파격적인 논지를 폈습니다. 어떻게 보면 패러독스의 극치죠. 복수가격방식을 사용하면 소위 “winner’s curse”현상이 일어나게 됩니다. 100원을 부르고 싶어도 혹시 낙찰가격이 낮게 되어 자신만 바보가 될까 봐 98원을 부르게 되는 현상이죠. 그러나 단일가격방식을 적용하면 그럴 위험이 없잖아요. 내가 100원을 써내도 다른 사람이 낮은 가격에 낙찰받으면 모두에게 그 가격이 적용되니까 말입니다. ‘자기가 선호하는 대로 적극적으로 응찰할 수 있으면 수요는 자연스럽게 늘어나게 되고 그것에 의해 가격도 올라간다’ 라는 것이 프리드먼이 내세운 논리의 핵심입니다. 제 논문의 포인트는 ‘우리나라 경매시장에서 단일가격과 복수가격 방식 중 어느쪽이 경매수입을 늘리는데 효과적인가’에 맞춰져 있습니다. -동양학에 관심이 많다고 하셨는데요. 독특합니다. ▲도올강의 같은 것도 자주 보고 동양학에 흥미가 있습니다. 책도 좀 읽은 편이고. 선(zen)에 관심이 아주 많습니다. -결혼은 언제 하셨나요? 얘기 좀 들려주시죠. ▲93년에 결혼했습니다. 소개로 만나서 8년 정도 연애한 다음 결혼했죠. 첫째는 8살 남자아이고 둘째는 곧 출산예정입니다. 채권시장, 비약적으로 발전중 -아직도 우리 채권시장이 메이저들의 움직임에 이리저리 휘둘리는 경향이 좀 있는 편인데요. 채권시장에 본격적으로 입문하고 나서 어려움을 겪었다거나 좌절한 경험은 없습니까. ▲그런 경험은 없습니다. 개인적으로 시장이 많은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고. 전 사람이 첫술에 배가 부르려고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제가 보기에 우리 채권시장은 단기간에 깜짝 놀랄 정도로 발전했습니다. 국채가 발행된 것도 대단하고 지표물이란 개념도 생겨났잖아요. 프리미엄 유동성 부분도 발생했구요. 이전 채권시장에 비해 아주 재미있어졌습니다. 리서치하는 분들만 봐도 그렇죠. ‘이 인재들이 어디에 숨어있다가 한꺼번에 나왔나’ 라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제가 채권을 처음 시작할 때만 해도 채권리서치라는 것이 사실 형편없는 수준이었어요. 리서치의 필요성도 거의 없었고. 리서치라고 해봐야 한국은행에 전화 한 통 걸어서 “5일자 통화평잔이 어떻게 되냐”고 묻는게 고작이었거든요. 회사채발행과 상환에 좀 신경쓰고. 매크로에 신경쓰기 시작한 것은 극히 최근의 일입니다. ABS의 경우 ‘어 이거 언제 도입됐지’ 하는 사이에 자리를 잡았고 CBO의 경우 ‘책에서만 읽어보다가 실제로도 접해보는구나’ 라는 평가를 받지 않았습니까. 삼성증권에서 채권팀의 상당부분을 크레딧 파트에 할애하고 있는 것도 변화를 감지할 수 있게 해주는 증거 중 하나입니다. 상당한 변화죠. 물론 이 과정에서 발전속도에 비해 운용시스템이 따라주지 않아서 생겨나는 문제들도 물론 있을 겁니다. 그러나 그건 차근차근 고쳐나가면 될 것이고… 저는 앞으로도 채권시장이 더 발전할 것이라고 봅니다. 아직 마이크로 데이터들이 시장에 많이 공개된 편이 아닙니다. 많은 곳에서 채권데이터베이스를 만들기 위한 움직임을 계속하고 있고 이를 시장참가자들이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게된다면 리서치 수준은 비약적으로 발전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채권시장에 있는 사람들은 앞으로 할 일도 많아지고 재미있는 일을 많이 접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나이에 비해서 상당히 젊어보이시는데 비결이라도 있습니까. ▲젊을때부터 꾸준히 운동을 해왔다는 것이 비결이라면 비결일까요. 운동이 삶에 있어서 큰 활력소가 됩니다. 태권도를 검도보다 먼저 시작한 이유는 대학신입생 시절 두 가지 중 어떤 것을 선택할까 하고 동아리 방을 기웃거리다 보니 검도반에는 선배들이 아무도 없고 태권도반에는 반장이 직접 앉아 있더라구요. 그래서 태권도반에 들어갔습니다. 참 인생이란 그런 것 같아요. 자신이 계획한대로 딱딱 맞아떨어지는 것이 아니더라구요. 채권시장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분석보고서 계속 쓸 것 -단기적으로 가지신 목표는 무엇입니까. ▲우선은 리서치에 지속적으로 참여하고 싶습니다. 리서치 중에서도 글을 정리하는 수준으로 참여하는 것 말고 채권시장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리서치페이퍼를 작성하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제가 상당히 대승적인 견지에서 이야기한다고 생각하실지 모르겠네요. 물론 그러한 의미도 포함돼있지만 소승적인 견지에서 보자면 우선 그런 식으로 채권시장이 발전해서 수탁고도 많이 늘었으면 좋겠습니다. 하하 -수탁고를 더 늘릴 수도 있는데 일부러 안 늘리는 건 아닌가요. ▲그런 측면도 없잖아 있습니다. 위험관리를 위해서죠. 회사채 비중을 아직까지는 크게 늘릴 생각이 없습니다. -리서치를 계속하면서 운용에 참가한다면 회의를 하면서 은연중에 김대표의 생각을 다른 사람들에게 강요하는 일 있지 않을까요. ▲저는 그렇게 제 주장을 강하게 내세우는 편이 아닙니다. 회의 중에 서로의 의견을 이야기하는 과정에서 방향이 많이 좁혀지게 됩니다. 그 다음에는 조금만 의견을 절충하면 되죠. 저는 절대 먼저 말하지 않습니다. 하이예크의 이야기 중 "Pretence of knowledge" 라는 말이 가슴에 많이 와닿더군요. 의역하면 “지식의 오만” 정도 되겠죠. 사람들은 아는 것을 너무 신봉하는 경향이 있어요. 사람들이 아는 것이 과연 그렇게 대단한가 이 말입니다. 프리드먼도 통화량을 자주 늘리고 줄이는 것에 대해서 상당한 반대의견을 피력한 적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쉽사리 금리예측을 하고 통화량을 움직이는 것이 경제에 악영향을 미친다는 거죠. 경제가 어떻게 움직일지는 잘 모르니까 일정퍼센트 안에서만 움직이라는 것이 그의 견해입니다. 저를 포함해서 특출한 사람이 아닌 경우 지식을 오만스럽게 사용해서는 안된다고 봅니다. 저는 제 자신을 무식하다고 여기고 있어요. 하나님이 세상을 만들었을 때 세상을 살아가는 원칙을 그렇게 복잡하게 만들어 놨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단순한 원칙이 복잡한 것에 의해 눌려진 것이 아닐까요. 운용시스템도 마찬가집니다. -비슷한 일을 하는 분들에 비해 자신의 장점이 뭐라고 생각하세요. ▲장점은 없습니다.(웃음) 자산규모 3년내에 10조로 늘릴 계획 -앞으로 미래에셋투신운용은 어떤 식으로 운용하실 겁니까. ▲우선 자산규모를 3년 이내에10조 정도로 늘릴 계획입니다. 그 정도 규모는 되야 시장에서 무슨 일을 해도 할 수 있겠더라구요. 그러나 메이저기관을 따라가겠다는 의미는 결코 아닙니다. 그렇게해서는 이길 수 없어요. 단기적으로 올해 안에 3조 정도를 만들겠다는 생각은 가지고 있습니다. 사실 자산규모를 늘리는 것은 운용쪽의 일이 아니라 마케팅부서의 일인데….왜 운용쪽에서 그러한 프레셔를 받아야하는지 모르겠어요. 운용은 운용만 잘하면 되는거 아니겠습니까. -회사채펀드 다음에 구상하고 있는 작품은 무엇인지 알려주시죠. ▲음…이건 정말 비밀인데(웃음) 채권에 관한 인덱스펀드를 만들어볼까 합니다. 준비를 확실히해서 시장수요도 봐가면서 제대로 한 번 해야죠. 채권운용 시스템에 투자해야 -채권시장이 역동적으로 발전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아직까지 일반인들에게 채권이라는 것은 생소합니다. 브로커 fee(수수료)도 너무 높다는 인식이 강하구요. 채권시장의 개선해야 할 점은 무어라고 생각합니까. ▲운용사들은 운용역들을 귀하게 다뤄고 시스템에 많은 투자를 해야 합니다. 무조건 ‘오냐오냐’ 해주라는 뜻이 아니라 능력에 걸맞는 합당한 대우와 보수를 줘야한다는 의미입니다. 최대한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어줘야 하는 것은 물론이구요. 한 운용사가 10조를 운영한다고 가정하면 fee는 300억 가량됩니다. 3조를 운용하는 경우 100억 정도 되겠죠. 3조를 운영하는 총 인력이 얼마인고 하니 기껏해야 25~30명이에요. 돈이 남는 건 당연하죠. 이 돈으로 시스템에 투자를 해줘야해요. 이런 열악한 시스템으로 자기 돈도 아닌 고객의 돈을 운용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제가 보기 운용시스템 개선은 매우 시급한 과제입니다. -김대표께서도 연봉형식으로 월급을 받습니까. ▲네. 연봉협상은 박현주회장이 아닌 관리쪽 대표와 합니다. -하이예크를 무척 좋아하시는 듯 한데… ▲꼭 그런 건 아니고…하이예크의 이야기 중에 뇌리에 남는 것이 많았습니다. 하이에크가 “지식의 오만”이라는 말을 했는데 이 말이 참 좋은 말이라고 봅니다. 우리나라는 너무 똑똑한 사람들이 많아요. 이 사람들에게 권력이 집중돼 있고 이 사람들은 자기가 뭐든 할 수 있다고 생각하죠. 경제분야도 마찬가지입니다. 정부는 정부가 경제를 핸들링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편집자주: 하이예크( Hayek, Friedrich August von) 빈 출생으로 1927년 오스트리아 경기연구소 소장, 1929년 빈대학 강사, 1931년 영국 런던대학 교수 등을 역임했다. 1936년까지 화폐의 순수이론, 경기순환의 원인 등에 관해 케인스와 논쟁을 벌였다. 1950년부터 1962년까지 시카고대학에서 연구생활을 했다. 다시 유럽으로 돌아와 그의 필생의 대작 “법, 입법, 자유”(1973~1979)를 완성했다. 사상적으로는 신자유주의 입장에서 경제계산불가능론을 주장했고 모든 계획경제에 반대하는 “자유의 구조”(1960) 등을 저술했다. 1974년 스웨덴의 K.G.뮈르달과 함께 화폐와 경제변동의 연구가 인정돼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했다. (김경록 대표 약력) -62년 출생(본적 경남 마산) -마산고등학교 졸업 -81년 서강대 경제학과 입학 85년 졸업 -87년 서울대 대학원 입학(경제학 석사) -90년2월~92년6월 장기신용은행 -92년6월~98년6월 장은경제연구소 -98년7월~98년12월 장기신용은행 -99년1월~99년6월 국민은행 -99년7월~2000년6월 한국채권연구원 -2000년7월~ 미래에셋투신운용
2001.04.20 I 정명수 기자
  • (300조를 움직이는 사람들)⑤임지원 JP모건 이코노미스트(상)
  • [edaily] 경제학자들 중에서는 다른 사람들이 흉내낼 수 없는 ‘기이한 재주’나 ‘천재성’을 가진 사람이 많다.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의 그린스펀 의장도 청년시절 재즈악단의 색소폰과 클라리넷 연주가로 활동한 경력이 있다. 이번주 “300조를 움직이는 사람들”의 주인공인 JP모건의 임지원 박사도 이코노미스트로서의 명성만큼 독특한 경력과 번쩍이는 천재성을 가지고 있다. 임 박사는 IMF 외환위기 이후 경제전망과 분석에서 두각을 나타낸 몇 안되는 이코노미스트다. 임 박사는 98년 가을 한국의 99년도 성장률 전망 보고서에서 경기회복을 정확히 예측해 낸 것으로 유명하다. 임 박사의 보고서를 읽어보면 여성 특유의 차분함과 치밀함이 느껴진다. 숫자 하나하나를 차곡차곡 쌓아나가면서 흐름을 찾아내고 합리적인 결론을 이끌어낸다. 기관투자가들을 찾아가 경제전망 설명을 할 때도 기본적인 논리에 충실하지만 시장의 변화와 투자자들의 생각을 반영하려는 진지한 자세를 가지고 있다. 임 박사가 JP모건이라는 세계적인 투자기관의 이코노미스트로 입사해 훈련받고 자신의 능력을 발전시켜나가는 과정을 보면 미국 월가의 힘이 어디에서 나오는지 알 수 있다. 임 박사는 JP모건에 입사하기위해 무려 17명의 관계자와 인터뷰를 했다. 서울에서 2차례 인터뷰를 하고 홍콩으로 날아가 하루종일 아시아지역 리서치 담당자들과 온갖 이야기를 했다. 임 박사가 JP모건의 글로벌 리서치 조직에서 하고 있는 일들을 듣고 있으면 그는 JP모건의 일부가 아니라 세계금융시장의 일부라는 생각이 든다. 월가의 내로라하는 리서치 팀의 일원으로 한국 금융시장의 숨소리를 매일매일 전세계로 전달하고 있는 것이다. 임 박사는 “국내 경기상황만 놓고 보면 우리 경제는 2분기이후 회복 가능성이 높다”고 말한다. 미국 등 외부경제 환경이 아직도 불안정하기 때문에 경기둔화가 지속될 확률은 여전히 남아있다. 임 박사가 주시하는 것은 국내의 미묘한 경기신호와 함께 미국, 일본, 유럽, 기타 아시아 각국의 온갖 지표들이다. 임 박사의 전망이 힘을 얻을 수 있는 것은 그의 시야가 세계로 열려있고 국제금융시장속에 그의 생각이 자연스럽게 녹아들기 때문이다. 임 박사의 생각이 만들어지고 전달되는 과정을 자세하게 들어봤다.(약력은 인터뷰 하편 기사의 하단 참조) ▲박사학위는 경제학으로 받으셨는데 예술고등학교를 졸업하셨군요. 고등학교에서는 무엇을 전공하셨는지. -피아노를 전공했습니다. 사실 고등학교 얘기가 안 나오길 바랬는데(웃음). 어렸을 적부터 형제(1남3녀)가 다 음악을 했어요. 물론 지금은 언니만 음악을 직업으로 삼고 있지만요. 저희 집에 딸이 셋이다 보니 어머니께서 ‘결혼하고 나서 여자직업으로 가장 좋은 게 뭘까’란 생각을 많이 하셨나봐요. 그러다가 집에 있으면서도 경제적인 자립을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길이 음악이라는 생각을 하고 저희들에게 시키신거죠. ▲그래도 상당히 특이한 경우인 것 같습니다. 음악에서 경제학으로의 변신이라… -그린스펀 의장도 음악했는걸요 뭐(웃음). 고등학교 2학년 때 음악을 그만두기로 결심하고 학교에다 알렸어요. 그래서 고 3때는 실기시험만 형식적으로 보고 입시준비를 했습니다. -갑자기 음악을 그만둔 다음 입시공부를 시작하니 부담되지 않던가요. ▲요즘은 대학입시 시험도 인문/자연/예체능 이렇게 나뉘어 보지만 그때는 교과목은 다 똑같았습니다. 그래서 특별히 어려운 점은 없었어요. 인문계쪽으로 가는 친구들이 드물지만 있긴 있어서 저 혼자 한 것도 아닙니다. 피아니스트에서 영문학도로 다시 경제학자로 -박사학위를 노스캐롤라이나대 채플 힐에서 받으셨군요. ▲노스캐롤라이나 단과대 중 채플 힐이 제일 먼저 생긴 곳이에요. 경제학을 가르치구요. -석사도 채플 힐에서 하신 건가요? ▲학부에서는 영문학을 했습니다만 부전공과목으로 경영학을 했습니다. 경제학 과목도 많이 수강했구요. 유학은 로타리 장학금을 받고 노스캐롤라이나대로 갔는데 아무래도 제가 다른 사람들보다 경제학적 백그라운드 지식이 없다보니 그 쪽에서 유학 전에 조건을 내걸었습니다. “네가 여기 와서 한 학기 정도 듣고 성적이 괜찮게 나오면 바로 석사로 옮겨주겠다” 고 하더군요. 그래서 한 학기 듣고 곧바로 석사로 편입했고 석사 1년을 마친 후 다시 박사과정으로 진학했습니다. 그래서 석사 논문은 없어요. -학부 때 영문학공부는 열심히 하셨나요? ▲영문학 공부는 2학년때까지 했습니다. 그 다음부터는 경제, 경영학 공부를 더 많이 했어요. 그냥 제 스스로 한 거죠. 경제학은 명쾌하다 -왜 느닷없이 경제학에 관심을 갖게 되셨나요. ▲영문학이 성격에 맞지 않았습니다. 제가 성격상 명료하고 명쾌한 것을 좋아해요. 하지만 문학이라는 것은 끊임없이 문제제기를 하고 고민을 해야하잖아요. 그러다보니 정서적으로 맞지 않는 부분이 많았어요. 자연스럽게 경제학쪽으로 마음을 굳히게 됐어요. 대학 1학년 때 경제학원론을 들었는데 저도 놀랄 정도로 잘 맞았고 공부하는 것도 좋아했거든요. 유학가서도 공부는 무척 재미있게 했습니다. -혼자 공부하시면서 어렵지 않았나요? ▲결혼 안하고 가니까 편했죠. 자기시간도 많고. 남자들이야 다르겠지만 여자로서는 혼자있을 때 공부해야 유리한 점이 많습니다. -공부가 재밌었다고 한 것은 학교와 기숙사만 오갔다는 뜻인가요. ▲대학원생 신분으로 유학을 갔기에 미국이 어떤 나라인지 둘러볼 기회는 그리 많지 않았어요. 통상적으로 다른 유학생들과 거의 비슷한 생활을 했다는 게 맞겠죠. 학교-기숙사-교회를 열심히 오갔습니다.(웃음) -시간이 날때는 무슨 일을 하세요. ▲다른 하우스의 리포트를 읽기도 하고 베스트셀러나 신앙서적도 많이 읽습니다. 정서적으로 불안하다거나 프레셔를 많이 느낄 때는 그런 종류의 책을 읽어야 편안해지더라구요. -고등학교 때까지 음악을 전공하셨는데…특별히 좋아하는 음악가는. ▲바하와 모짜르트를 참 좋아했어요. -수학은 원래 좋아했습니까 ▲정말 좋아했어요. 역사도 좋아하고. 영화나 책도 드라마틱한 것은 별로 안 좋아해요. TV 프로그램도 역사관련물을 주로 봅니다. -유학하시면서 경제학이란 학문에 대해 어떻게 느끼셨나요. ▲명료하고 해답이 있다는 것이 너무 좋았습니다. 영문학을 공부할 때 그런 것이 없어서 많이 힘들어했거든요. 나는 항상 문제제기를 하고 잘못을 지적해야 하는 사람인데 대답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니까 말입니다. 박사과정 중 초기 2년까지는 경제학이란 학문이 굉장히 명쾌하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공부하면서 뇌리에 팍팍 각인된다는 느낌을 자주 받았습니다. 물론 나중에 박사논문 쓰면서는 그런 생각을 안했어요.(웃음) 학문의 바다에서 시장속으로 -논문 쓸 때 어려움은 없었나요. ▲처음 공부를 시작할 때는 대가들이 만들어놓은 모델을 가지고 설명을 하기 때문에 모든 것이 굉장히 명료하게 느껴집니다. 하지만 세부로 들어가면서 ‘설명이 안되는 일들이 얼마나 많은가. 또 이제껏 배워왔던 것이 얼마나 허무한가’ 라는 생각이 들게 돼요. 그래서 많이 괴로웠고 그만둘까라는 생각도 했었습니다. 하지만 ‘벌써 2번이나 그만뒀는데 여기서 또 그만둘 수는 없다’ 라는 마음으로 끝냈죠.(웃음) -유학에서 귀국까지 얼마나 걸렸나요? ▲귀국한 것은 95년 12월이에요. 유학가기 전 많은 일들이 있었는데 어쨌든 공부는 마치고 돌아올 수 있었죠. 대학졸업은 87년 2월에 했구요. 중간에 1년 반 정도 유학준비만 했어요. 그래서 88년 12월에 유학을 떠나게 됐습니다. -처음 직장인 삼성경제연구소는 미국에 있을 때 입사한 건가요? ▲95년 여름에 제의를 받고 마지막 학기를 마친 다음 한국으로 들어왔습니다. 삼성경제연구소에서도 지금과 비슷한 일을 하긴 했지만 성격은 많이 달랐어요. 아무래도 우리나라 경제연구소들은 경제 예측보다는 정책권고 업무를 많이 할 수밖에 없잖아요. 아무래도 외국계에서는 “그래서 무엇을 할 것인가”에 중점을 두는 편이죠. -결혼은 언제 하셨나요. ▲ JP모건 홍콩지점에 있을 때 했어요. 남편은 학교에 있습니다.
2001.04.06 I 정명수 기자
  • (300조를 움직이는 사람들)③국민연금 한승양 팀장(하)
  • [edaily]“300조를 움직이는 사람들” 이번주는 국민연금의 한승양 팀장이다.(인터뷰 상편에서 이어짐) ”작년 수익률 211bp 초과달성, 재작년 101bp 초과달성” 시황에 맞는 투자전략 구사 -국민연금의 경우 여유있는 운용이 가능하다고 하셨는데, 작년처럼 금리가 많이 떨어지면 오히려 운용에 있어서 운신의 폭이 좁다고 생각합니다. 지난해처럼 금리가 급락했을 때의 운용방법과 지금처럼 금리가 바닥 언저리에 있다고 생각될 때의 운용방법은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 국민연금 기금중 채권부분이 시가평가를 받아야 하는지 아닌지는 사실 지금도 논란이 되고 있습니다. 지금은 시가평가와 장부가평가 방식을 병행하고 있죠. 물론 시가평가제의 장점이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가장 큰 장점은 운용의 투명성 아니겠습니까. 모든 걸 다 공개하니까요. 시가평가 방식으로 보면 작년도에 14.4%의 운용수익으로 벤치마크대비 211bp를 초과했습니다. 재작년에는 101bp를 비트했구요. 더욱 중요한 것은 작년은 금리 하락기였고 재작년은 금리상승기였다는 점이죠. 국면과 상관없이 이러한 큰 수익을 냈다는 것은 나름대로 저희가 그 국면에 따라서 다양한 전략을 구사해왔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무엇보다도 제일 중요한 것은 운용의 기본 원칙에 충실하면서 리스크관리를 철저히 가져가는 겁니다. 저희는 매월 꾸준히 보험료가 들어와 기금이 계속 늘어나는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금리만을 예측해서 운용하는 것은 일종의 투기라고 생각해요. 대단히 위험하다는 말입니다. 금리예측보다 저평가된 채권을 발굴하는데 꾸준한 노력을 들이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죠. ”금리예측 대단히 어려워, 일종의 투기..저평가 채권 발굴에 주력” -하지만 목표수익률을 정할 때는 향후 금리에 대해 예측할 수 밖에 없지 않습니까. ▲절대규모를 가지고 있는게 아니기 때문에 크게 좌우받지 않습니다. 금리가 낮으면 낮은대로 높으면 높은대로 시장상황에 맞춰가면 되니까요. 올해 들어서는 금리하락이 너무 심하다 싶어서 만기보유채권의 듀레이션도 많이 줄이고 보수적으로 운용했습니다. -시장이 막 흔들릴 때 국민연금이 수익성과 무관하게 흔들리는 시장을 방어해줄 수 있는 기관이 돼야한다는 기대를 가진 시장참여자들이 많은데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런 말씀을 많이 듣기는 하지만 저희는 “price taker”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거지 “price maker”가 되려는 생각이 추호도 없습니다. “price maker” 가 되고자 하는 국내기관이 있다고 가정할 때 그걸 해낼 수 있는 기관은 사실 국민연금 하나밖에 없을 겁니다. 하지만 우리가 시장가격을 형성한다면 여러가지 부작용만 나올 뿐이고, 우리가 해서도 안되는 일이에요. 가격이라는 것은 금융시장 상황과 수급논리에 의해 자율적으로 형성되야지, 어느 한 쪽이 큰 포지션을 가졌다고 해서 거기에 의지하게 되면 시장자체가 왜곡 되거든요. 금리가 많이 올라가 있을 때 국민연금이 시장에 들어가는 것은 수익을 내기 위한 우리 운용전략의 일부입니다.. ”국민연금은 ‘price taker’이지 ‘price maker’는 아니다” -국민연금은 국정감사 때마다 국회의원들의 표적이 되곤 하는데… 연금의 운용자로서 “밖에서 국민연금의 이러이러한 점만은 알아줬으면 좋겠다” 라고 생각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저는 국민들이 국민연금을 자산운용 원리로 보아주셨으면 합니다. 여기에 어떤 공적인 역할을 지나치게 부여하거나 정치적 관점에서 바라보지 말고 운용이나 투자의 관점에서 봐달라는 겁니다. 물론 나날이 규모도 커져 금융시장에서 차지하는 역할도 커지고 있고 국민들의 복지와 관련된 만큼 그러한 요소를 아예 배제할 수는 없겠죠. 하지만 모든 것을 운용중심으로 생각해야만 나중에 국민들에게 돌아갈 몫도 커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장기적 관점으로 봐 달라는 말입니다. -지금 한 팀장님의 직속상사인 본부장은 어떤 분이십니까? 입사전에도 안면이 있었나요? ▲김선영 본부장이십니다. 미국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으시고 교수생활도 하시다가 귀국해서 한신평에서 1년 정도 계셨습니다. 그 다음에 동양증권에서 오래 근무하셨구요. 이론과 실무를 겸비하신 덕장이시죠. 안면이 있었다기보다는 저도 같은 업계에서 근무해서 얼굴과 존함을 널리 알고 있는 정도였습니다. -운용에 관해서는 가족들에게도 얘기하지 않으신다구요. 직원들에게도 단단히 자물쇠를 채우라고 요구하십니까. ▲저는 제 자신의 업무, 특히 운용과 관련해서는 가족들과 전혀 얘기를 하지 않아요. 직업윤리라는 거창한 말은 제쳐 두고라도 ‘공은 공이고 사는 사’가 돼야 하지 않겠습니까. 더구나 국민연금과 같은 거대자산을 운용하는 사람으로서 업무관련 얘기를 함부로 할 수 없죠. 대외적으로 저희 팀의 원칙이 있습니다. 운용사실과 결과는 공개하되 사전 운용 계획이나 시장에 대한 전망은 절대 얘기하지 못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호가 우선의 원칙, 신상품 아이디어는 언제든지 환영 -현재 채권시장을 다루는 매체가 거의 없는 편인데요. 채권시장의 참여자로서 어떤 뉴스나 기사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십니까. ▲저희가 중시하는 원칙중 가장 중요시하는 부분이 건 바로 거래의 투명성입니다. 유통시장의 경우 거래 원칙은 오직 하나, 가격우선이에요. 호가가 제일 좋은 곳과 거래하는 거죠. 이런 투명성을 정착시키는 것과 관련한 기사가 많이 나왔으면 하는게 바람입니다. 발행시장 측면에서는 ABS에서도 알 수 있듯이 저희는 신상품에 대한 관심이 지대해서 시장에서 항상 앞서 나갔습니다. 저희는 증권사가 독특한 상품을 개발해서 시장에 들고나오면 그걸 끝까지 존중해줍니다. 모든 거래를 공정하게 투명하게 한다는 게 우리 팀의 단호한 방침입니다. -채권운용팀의 의사결정은 어떻게 이루어 지나요? ▲ 우리 채권운용팀의 특성은 각자의 역할이 명확하게 주어져있다는 거에요. 저는 운용전략이나 방침만을 정하고 리스크 관리에 전력을 다 합니다. 개별 딜은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증권사 브로커들도 잘 몰라요. 모든 일이 팀원-팀장-본부장 세 단계만 거치면 될 정도로 의사결정구조도 단순하구요. 저는 제가 아무리 하고 싶은 일이 있더라도 담당자가 반대하면 안 합니다. 저희 본부장님도 마찬가지십니다. 원칙에 입각한 조직 운영체계이죠 ”채권운용팀에서는 공부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 -신상품에 계속해서 관심을 가진다는 말은 국민연금의 전 직원이 계속 공부를 해야한다는 뜻과도 일맥상통하는데요. 실제로 그렇습니까? ▲적어도 채권운용팀에서는 공부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어요. 직원들에게 끊임없이 공부하라고 하고 또 실제로도 그렇게 합니다. 이번에 신규채용계획을 가지고 있는데 공부 안하고 대충대충 일하는 사람이라면 절대로 채권운용팀에 들어올 수 없습니다. 앞서 말했듯 각자가 자신의 고유역할을 가지면서 그 팀워크하에서 모든 일이 이뤄지는데 자기분야에서 최고가 되지못하면 그 조직이 어떻게 굴러가겠습니까. -새로운 상품말고도 매매기법이나 신규시장에 대한 관심은 없습니까? ▲물론 있습니다. 이제 해외로 나가야죠. 외평채 등 해외한국물, 미국 재무성 채권 등에도 관심 -현재 국민연금운용규정상 해외투자가 가능한가요. ▲금년 7월1일부터 가능하도록 국민연금법이 개정되었습니다. 사전에 철저하게 준비하고 있습니다. 우선적으로 외평채 등 한국물위주로 할 계획입니다. 언젠가는 미국시장에서 재무부채권(TB)의 주요 고객이 될 것입니다. -해외투자를 계속하게 되면 중장기적으로는 포지션을 가지게 되는데요. 파생될 거래도 많을 거구요. ▲지금 운용역 중 한명이 그걸 전담해서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국민연금정도의 규모를 가진 자산이 수익을 내려면 해외로 나갈 수 밖에 없어요. 앞으로 수년내에 국민연금의 총규모가 세계 5대 기금중의 하나가 됩니다. 이 막대한 자산이 국내에만 묶여있으면 리스크 관리가 안됩니다. 그렇게하지 않으면 수익도 못 내고 안정성도 담보할 수 없습니다. -부하직원들에게 강조하는 바는 뭡니까. ▲현재 채권운용팀 직원들은 유능하고 성실합니다. 어려운 여건하에서도 국민의 노후 복지를 책임지고 일한다는 자부심으로 열심히 일합니다. 저는 우리 직원들에게 소신과 긍지를 가지고 맘껏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려고 노력합니다. 앞으로 이 사람들과 계속 같이 근무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그들에게 “만약 당신이 다른 곳으로 옮기게되면 지금 받는 연봉의 10배를 받고 옮겨라. 당신은 그럴만한 가치가 있다” 고 말합니다. 국민연금에서 일했다는 자체만으로도 도덕성은 검증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운용능력은 물론이구요. 저는 이 친구들을 훌륭한 매니저로 키워야한다는 막중한 책임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 전에 저는 이들과 오랫동안 같이 일하고 싶은 마음은 물론이구요. 팬션펀드는 기금성격상 매니저들이 장기적으로 안정적인 환경에서 근무할 수 있도록 해줘야 돼요. 그러기 위해서는 근무조건 개선과 함께 저는 팀장으로서 이들에게 적당한 권한을 부여하고 긍지를 가지고 일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뿐만 아니라 국민연금 채권운용팀의 매니저들은 모두 즐겁게 일하고 있습니다. -국민연금에 계시면서 가장 보람을 느끼신 일은 뭡니까 ▲뛰어난 운용수익과 부실채권 전무는 앞서 말씀드렸고. 그 다음으로는 ABS시장을 개발한 것입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 딜은 지난해 현대중공업 회사채 투자” -기억에 남는 딜은?. ▲지난해 5월 현대중공업 회사채 관련 딜이죠. 현대중공업은 굉장히 좋은 회사임에도 불구하고 무척 저평가된 상태였습니다. 우리팀이 두 달동안 현대중공업 리서치에 매달리고, 회사도 방문하면서 “이런 저평가 채권은 매입하여야 한다”는 확신을 얻었어요. 시가보다 40bp나 높게(채권가격을 싸게) 받았어요. 투자위원회에서 심의도 거쳤고 근데 그당시 5월말 소위 ‘왕자의 난’이 터지면서 문제가 꼬였지요. 그후 여러가지 루머가 나오면서 개인적으로 곤욕을 치뤘는데 그 후에 대부분 팔아서 엄청난 매매차익을 남겼습니다. 대단한 딜이었습니다.(웃음) -작년의 경우 금리움직임을 이해하면 아침에 샀다가 저녁에 팔아서 큰 이익을 남길 수 있는 장세였는데 국민연금의 경우 그런 딜을 하십니까. ▲저희는 시장에 대해 휩쓸리지 않고 한걸음 물러나 여유를 가지고 보려고 합니다. 리스크관리없이 금리만을 예측하여 트레이딩을 하는 것은 도박에 가까운 겁니다. 외국의 매니저들은 금리예측이라는 걸 참고자료로 사용할 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아요. 예측이라는 것은 언제 어디로 움직일지 모르지 않습니까. 중요한 것은 개별채권에 대한 상대적인 가치를 파악하는 거죠. 그걸 위해서는 여러가지 기법이 도입되어야 하고요 -거래가 마무리되는 시간은 언제쯤입니까? 그리고 그 이후의 시간은 어떻게 보내시나요. ▲거래 끝나고 대충 정리하면 5시 정도 됩니다. 저희에게는 여러가지 정보 및 자료가 엄청나게 들어옵니다. 그 많은 자료들을 다 보기만 하려해도 시간은 오히려 모자랍니다. -주말에는 무엇을 하며 시간을 보내시는지. 운동은 하십니까. ▲국민연금 오기전엔 운동을 좋아했는데 여기와서는 거의 못하고 있습니다.(갑자기 목소리를 높이며) 전 주말이 따분해요. 전 천성적으로 일체질인가 봅니다. 하하. -아버님이 학자시라고 했는데 무엇을 전공하셨는지. ▲저희 아버님은 서양 철학을 전공하신 학자세요. 지금은 은퇴하셨지만.. 서울대 철학과를 나오시고 동경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으신 후 대학교에서 오랫동안 교수생활을 하셨어요. 평생 공부만 하시고 산 분이세요. 안타까운 점은 아들 셋 중 아무도 아버님의 위업을 받들지 못하고 장사꾼이 돼버린거죠…참..하하. 워낙 어려운 시절을 학자로만 살아오신 분이라서 저에게 의대나 치대를 가라고 권유하셨어요. 그 말씀을 지키지도 못했지만 말입니다. 하지만 제가 뭘 하든지 간에 아버님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것을 느낍니다. 스스로 의식도 많이 하는 편이고요. 저는 고리타분한 사람이에요.(웃음) -부인은 사회생활을 하시는가요. ▲국민연금에 오고 나서 연봉이 반으로 줄었습니다. 제가 결혼을 일찍한 편이라 아이들이 벌써 중학생인데 여러모로 어려움이 많았죠. 아이들에게 한참 돈이 많이 들어갈 시기에 급여가 반밖에 안되니 집사람의 고생이 심했어요. 솔직히 연봉을 많이 줄 테니 오라는 제의도 있었더랬습니다. 그런데도 버틸 수 있었던 건 집사람 덕분입니다. 제가 돈을 가져다주지 않으니 밖에 나가서 직접 돈을 벌더라구요. 미국 핌코사의 유명한 채권 펀드매니저인 빌 그로스라는 사람이 있어요. 그 사람은 56세나 되는데도 일년 연봉이 4천만불입니다. 물론 미국과 비교할 순 없겠지만 누가됐든 우리나라에서도 그가 받는 액수의 1/100을 받는 펀드매니저는 나와야하지 않겠어요. (한승양 팀장 약력) -60년 출생(본적 전북) -전주고 졸업 -85년 서울대 국제경제학과 졸업. 한미은행 입사 -86~94년 쌍용투자증권, 연구소 -94~98년 교보증권 채권팀장 등 -98~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 채권운용팀장 (인터뷰 후기) 한 팀장과 기자는 인터뷰를 마친후 호프를 한 잔씩 마셨다. 한 팀장의 주량은 소주 1병 정도라고 했는데 술을 즐기는 편은 아닌듯 했다. 한 팀장은 국민연금으로 이직하기 직전 교보증권에서 소위 기관영업이라는 것을 했다. 그는 “새벽에 생선들고 남의 집 문 앞에서 서있어 봤냐”고 물었다. 한 팀장이 지금은 국내 채권시장에서 가장 강력한 매수기관(buy side)의 책임자이지만 한 때는 몸소 영업을 했던 경험을 얘기했다. 그는 “요즘 펀드매니저들을 보면 대접을 받을 줄 밖에 모른다”며 “겸손하고 투명하게 운용하는 법을 배워야한다”고 말했다. 스스로 우리 채권시장의 2세대라고 말하는 한 팀장의 태도는 단호하고 때로는 차갑게 느껴졌다. 그는 “23조원의 돈을 관리하다보면 무한한 책임감과 함께 무섭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그의 차가움은 바로 그 무서움때문인지도 모르겠다.
2001.03.27 I 정명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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