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기자칼럼] '메갈로폴리스 미술관'과 '호크니' 사이에서

  • 등록 2019-08-12 오전 12:45:01

    수정 2019-08-12 오전 12:45:01

[이데일리 오현주 문화전문기자] ‘데이비드 호크니’ 전에 35만명이 다녀갔단다. 넉달 열흘여간의 기록이다. 가끔 이렇게 터져주면 미술계는 숨통이 트인다. 올해 성적은 괜찮다. 지난 4월 폐막한 국립현대미술관 ‘마르셀 뒤샹’ 전도 관람객 20만명을 넘겼으니. 호크니 전 개막을 앞두고 전시관람료·큐레이션 등을 지적받으며 자세를 낮췄던 서울시립미술관의 분위기는 반전됐다. 모르긴 몰라도 ‘호크니’만큼만 하자는 암묵적인 공감대도 형성됐을 터.

한껏 탄력을 받은 서울시립미술관이 새로운 목표와 중점과제를 내놨다. ‘여럿이 만드는 미래, 모두가 연결된 미술관’이란 목표를 세우고 실로 방대한 사업계획을 내보인 거다. 백지숙(55) 관장이 취임한 지 4개월여만이다. 호크니 전이야 백 관장 취임 전에 기획했다지만 운영진의 입장은 아무래도 남달랐을 거다. 뼈대라도 한 번 짚어보자.

“2022년까지 3개관을 더 지어 서울 전체로 퍼지는 ‘네트워크형 미술관’ 시스템을 구축할 거다. 국제적 네트워크에 기반한 메갈로폴리스 현대미술관을 지향한다” “2011년 수립 이후 제대로 실행이 안 된 ‘중장기 발전계획(2021∼2031)’을 다시 세우겠다.” “관습적인 명화전을 벗어나 호크니 전 같은 걸작전을 2년마다 홀수 연도에 열겠다. 짝수 연도에는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로 전문성을 확보하고.”

네트워크형이라. 그럴듯하지 않나. 이제 10개관을 채울 “신규 분관시대를 맞아 하이브리드형 프로그래밍을 통한 연계를 강화”할 거라니. 그런데 어째 좀 공허하다. 정확하게는 ‘척 와 닿질’ 않는다. 거대한 계획일수록, 그것이 국공립 배경을 업을수록 진해지는 불안감. 외용은 거창한데 뒷감당은 안 되는, 스케치는 괜찮은데 채색이 영 어설픈 대작을 본 듯한. ‘그런가 보다’ 듣고 있으면 그럴싸하다. 하지만 ‘국제적 네트워크 기반의 메갈로폴리스 현대미술관 지향’을 이해할 만한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되겠느냐는 거다. “공간의 장소적 구분보다 권역·기능·역사적 구분으로 나누고 서로 이어지는 미술관을 의미한다”는 설명은 잘 들었다. 하지만 미술관 좋자는 하이브리드고 네트워크지, 미술관 찾는 시민이 체득하는 것과는 다른 차원이 아닌가.

‘어떻게’가 빠진 것도 공허한 계획에 일조를 했다. 그림 한 점만 옮겨도 돈 문제가 따라붙을 텐데 그 현실적인 대책에 대한 언급은 아예 없다. 미술관 짓는 게 땅만 파면 되는 일도 아니고 예산은 어찌 확보할 거며 유지는 어찌하겠다는 건지. 청사진만 그려놓으면 따라다니며 계산서 끊는 담당이 따로 있는 건지.

이 야심찬 계획을 발표한 미술관장의 임기 역시 거치적거리는 문제 중 하나다. 국립현대미술관장이 3년 임기로 뭘 시작이나 해보겠느냐는 쓴소리는 여러 번 했지만 여긴 더 심하다. 서울시립미술관장의 임기는 2년이니까. 연임이 가능하다지만 그건 가봐야 아는 일이고. 다시 말해 이렇게 크게 벌인 판조차 ‘관장 책임 아래 진행’이란 게 불가능할 수도 있단 얘기다.

외형 넓히기도 좋고 네트워킹도 좋다. 하지만 결국 사람을 움직이는 건 콘텐츠가 아닌가. 여기에는 ‘어떤 전시’도 포함되지만 ‘어떤 계획을 어떻게 구체화’도 포함된다. 그래서 어려운 거다. 매번 관람객 입맛에만 맞출 순 없는 노릇이고, 국공립에 들이대는 구체화의 잣대는 더욱 매서우니. 시스템 확보란 건 더 어렵다. 화려한 문구가 아니라 실전이니까. 관람객이 35만명이든 100명이든 흔들림 없이 굴러가게 하는 게 진짜 시스템이니까.

게다가 이번 ‘35만명’은 양날의 검이다. 무엇을 하기도 무엇을 하지 않기도 힘들다. 이 정도는 해내야 한다는, 안으론 애매한 목표가 생기고, 밖으론 희한한 롤모델이 생기니까. 그뿐인가. 기록이란 게 만들어지면 나머진 대충 용서가 된다. 전시장 작품보다 전시장 인파를 보고 온 듯한 고충도, “사람이 너무 많아서”로 몰고 간 관객차별적 행태에도 그냥 눈감아주게 되니.

남의 잔칫집 찾아 분위기 깨자는 시비겠나. 작정하고 큰 스케치를 꺼내놨으니, ‘이번엔 제대로 채색했더라’고 제발 한 줄 쓸 수 있게 되길 바랄 뿐이다.

이데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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