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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이데일리 김정남 특파원] 월가를 충격에 빠뜨린 ‘아케고스 사태’의 피해가 속속 드러나고 있다. 한국계 펀드매니저 빌 황이 이끄는 아케고스 캐피털 매니지먼트와 거래로 은행들의 손실 규모가 10조원이 넘을 것이라는 추정이 나왔다. 그 중 크레디트 스위스(CS)가 4조원 안팎 직격탄을 맞은 것으로 보인다.
아케고스 같은 패밀리 오피스는 ‘규제 사각지대’에 놓여 있어 제2, 제3의 아케고스 사태는 언제든 나타날 수 있다는 게 월가의 우려다. 미국 정가에서는 벌써부터 헤지펀드 규제 강화 움직임이 나오기 시작했다.
아케고스發 손실액 최대 100억달러
30일(현지시간)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CS는 이번 아케고스의 파산 위기로 32억달러(약 3조6000억원)의 손실을 볼 것이라고 베렌버그 은행은 추정했다. CS는 성명을 통해 “이번달 말 마감하는 올해 1분기 실적에 상당한 영향을 줄 수 있다”고 했는데, 그 구체적인 추정치가 나온 것이다. CS가 아케고스와 한 구체적인 거래 내역은 아직 나오지 않았다. 일각에서는 손실 규모가 최대 40억달러(약 4조5000억원)에 이를 것이라는 전망도 있다.
CS는 아케고스와 총수익스와프(TRS) 등의 파생상품 계약을 맺고 돈을 빌려줬다. TRS는 IB 등이 총수익 매도자로서 투자자, 다시 말해 아케고스 같은 총수익 매수자 대신 기초자산인 주식을 매입하고, 그 주식에서 발생하는 이익과 손실을 투자자에게 귀속하는 파생금융상품이다. 계약을 맺은 IB는 그 과정에서 투자자로부터 일정 수수료를 받는다. 아케고스는 이를 통해 최대 8배의 레버리지를 일으켜 투자에 나설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골드만삭스와 모건스탠리는 담보로 잡고 있던 주식을 블록딜로 처분하며 그나마 손실을 최소화했다. 하지만 CS는 대처가 한 발 늦었고, 이로 인해 가장 큰 손실을 본 IB가 됐다. CS 주식예탁증서(ADR)는 전날 뉴욕 증시에서 11.50% 폭락한데 이어 이날 3.47% 내렸다. CS ADR은 사태가 발생한 지난 26일 이후 3거래일간 16.81% 고꾸라졌다.
CS 외에 노무라는 이미 “미국 고객사와 거래 과정에서 일어난 사태로 20억달러(약 2조3000억원) 손실을 볼 수 있다”고 밝혔다. 이 역시 아케고스 거래와 관련한 것으로 전해졌다. 두 IB들의 손실액만 최소 6조원 이상이라는 계산이 가능하다. 노무라 ADR은 최근 3거래일간 16.04% 폭락했다.
두 IB에 이어 일본 MUFG 역시 적지 않은 손실을 봤다. MUFG의 브로커리지 사업부는 아케고스와 거래로 인한 손실 추정액이 3억달러(약 3400억원)라고 전했다. MUFG는 미국 고객의 이름은 언급하지 않았지만, 월가는 아케고스가 유력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이날 뉴욕 증시에서 MUFG ADR은 전거래일 대비 1.94% 하락했다.
이번 사태로 은행들의 전체 손실액이 최대 100억달러(약 11조3000억원)에 이를 것이라는 JP모건의 추정까지 나왔다. 블룸버그 등에 따르면 JP모건은 당초 손실액을 25억~50억달러로 예상했으나 이를 두 배 더 높였다. 키언 아부호세인 JP모건 애널리스트는 “CS와 노무라가 왜 포지션을 정리하지 못했는지 당황스럽다”며 “CS의 경우 이번 주말까지 상세한 거래 내역이 나오기를 기대한다”고 했다.
패밀리 오피스 성격의 아케고스는 베일에 싸인 회사다. 도드프랭크법에 따르면 일정 규모 이상의 헤지펀드는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에 등록해야 한다. 거래 기록 역시 당국에 제출할 의무가 있다. 그러나 패밀리 오피스는 이같은 의무가 없다. 이 때문에 규제 사각지대에 놓인 패밀리 오피스의 ‘고위험 고수익’ 투자가 지속적으로 월가를 뒤흔들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연쇄 마진콜이 발생할 경우 증시 패닉장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특히 패밀리 오피스들이 굴리는 자산은 2019년 기준으로 6조달러(약 6800조원)에 달한다는 추정이 있을 만큼 덩치가 커졌다. 지금은 훨씬 더 불어났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정가에서는 이미 규제 목소리가 나왔다. ‘월가 저승사자’로 불리는 민주당 소속 엘리자베스 워런 상원의원은 이날 CNBC에서 아케고스 펀드의 붕괴를 두고 “광범위하게 규제를 피한 헤지펀드, 불투명한 파생상품, 개인간 암거래, 높은 레버리지 등이 위험한 상황을 초래했다”며 “투명하고 강력한 감독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아케고스 사태를 직접 언급한 정가 인사는 워런 의원이 처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