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무살이 되기전 일본으로 건너가 오사카 지역 재일동포들과 애환을 같이 했던 이 명예회장은 신한은행 설립을 주도한 장본인이자 신한 역사의 산증인이다. 신한금융 임직원들은 이 명예회장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에 안타까움을 나타내고 있다.
지난 1917년 경북경산에서 가난한 농민의 6남매중 2남으로 태어난 이 명예회장은 오사카의 쓰루하시(鶴橋) 무허가 시장에서 자전거 타이어 장사로 본격적인 일본생활을 시작했다. 일본이 태평양 전쟁 패전 이후 암거래 단속을 이유로 쓰루하시 시장을 강제폐쇄하려고 하자 이를 막아내 교포들의 큰 신망을 얻었다.
1955년에는 교포상인들을 규합해 신용협동조합이라 할 수 있는 오사카흥은을 설립했고, 이후 일본인들이 경영하는 신용조합을 제치고 일본내 가장 실적이 좋은 조합으로 성장시켰다.
신한은행이 설립된 것은 그로부터 5년이 지난 1982년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갑작스러운 서거로 은행 설립작업이 지연됐으나 전두환 정부가 민간은행 설립을 검토하면서 이 명예회장의 숙원이 이뤄졌다. 신한은행은 자본금 250억원, 총 4개 영업점 274명으로 문을 열었다. 일본전역에 산재해 있던 340여명의 재일동포들이 출자금을 모아 국내에서 처음으로 순수 민간자본 은행을 탄생시킨 것이다.
이 명예회장은 호탕하고 리더십이 강한 인물이었다고 한다. 1988년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엄청난 사업비로 고민하던 정부에 재일교포들의 성금 540억원을 모아 전달했다. 당시 재미교포들보다 더 큰 성금을 모아 쾌척했다고 한다. 외환위기 직후에는 `국내송금보내기운동`을 주도해 어려움을 극복하는데 도움을 줬다.
이 명예회장을 잘 아는 금융권 관계자는 "쾌활하고 호방한 성격의 그는 보스형 리더였다"며 "재일교포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하며 신한을 이렇게 키운 장본인인데 타개소식을 들어 안타깝다"고 말했다.
이 명예회장은 그간 일본 도쿄의 요양원에 머물렀던 것으로 전해진다. 신한금융 안팎에선 그가 건강했으면 지난해 신한을 극심한 혼란으로 몰아넣은 경영진간 내분사태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안타까워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한편 이 명예회장의 유족들은 고인의 유지를 받들어 가족장을 치렀다. 이 명예회장은 생전 분향소를 차리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이에 따라 한동우 신한금융 회장과 서진원 신한은행장 등 신한금융 임직원들은 일본을 방문하지 않는 대신 유족들과 협의해 적절한 시기에 국내에서 추모식을 갖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