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경제 반세기)"한밤의 충격"..8.3 사채동결조치②

채권자 희생 담보로 기업에 특혜
정경유착, 기업 모럴헤저드 시발점
  • 등록 2005-06-09 오후 12:40:20

    수정 2005-06-09 오후 12:40:20

[edaily 이종석기자] 전경련 회장단으로 부터 연쇄부도 가능성을 보고받은 박정희 대통령은 참모들을 통해 사실확인 작업에 나섰다. 김정렴 비서실장은 “전경련 건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대통령의 질문에 대해 “김 회장의 말은 결코 과장된 것이 아니며, 사태가 금융위기로 확산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사채를 일정기간 동결하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라고 보고했다. 상황을 파악한 박 대통령은 즉각 대책마련을 지시한다. 사채동결을 통해 당장의 금융위기를 해결하고, 장기적으로 기업공개를 유도해 기업들의 직접자금 조달을 원활하게 만드는 방안을 강구하라는 것이었다. ◇ “극비 보안을 유지하라” 사채동결을 위한 실무대책반장에는 금융 전반은 물론 상법 민법 등에 두루 밝은 김용환 당시 청와대 외자담당비서관(후일 재무부장관 역임)이 선임됐다. 71년 9월 김 반장은 소수의 엘리트 작업팀을 편성해 비밀작업에 착수한다. 작업팀에는 김 반장의 법대 동창이자 상법 전문가인 김종현 당시 주택은행 부장(후일 주택은행 전무), 정영의 재무부 이재2과장(후일 재무부장관 역임), 성준경 한국은행 조사역(후일 한미은행 전무), 심형섭 청와대 비서관(후일 대한보증보험 사장 역임) 등이 참여했다. 작업팀이 준수해야 할 가장 중요한 과제는 ‘보안 유지’였다. 사채동결 사실이 사전에 유포될 경우 모든 사채가 일시에 기업에서 빠져나가 연쇄도산을 일으키고 결국 금융공황으로 이어질 것이 불을 보듯 뻔했다. 사채동결 조치가 성공하려면 무엇보다 ‘보안 유지’가 관건이었다. 김용환 전 장관의 회고. “사안의 성격상 비밀유지가 성패를 좌우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작업팀원 모두로 부터 보안유지 서약서와 사직서를 받았놓고 일을 시작했지요.”(김용환 회고록) 작업팀의 일상은 첩보작전을 방불케 했다. 작업팀은 보안을 위해 회현동에 있는 뉴남산관광호텔과 평창동 올림피아호텔, 우이동 그린파크 호텔 등을 오가며 작업을 진행했다. 혹시라도 호텔 직원이 의심할까 싶어 방안에 “경주종합개발계획”이라는 가짜 챠트를 걸어 놓기까지 했다. 복사기가 고장날 경우를 대비해 작업팀원 중 한명이 복사기 회사에 가서 직접 복사기를 분해, 조립하는 방법을 배워 오는 등 만일의 사태에 대비했다. 당초 사채동결조치의 발표 D데이는 72년 1월15일로 잡혀 있었다. 작업팀은 발표 일정에 맞춰 73개 조항으로 구성된 대통령 긴급명령과 관련세법 시행령 개정안, 특별금융조치 시행안 등 사채동결과 관련된 모든 조문작성을 마무리 지었다. 그러나 당시 “국가보위에 관한 특별법” 제정을 놓고 여야가 극한 대립양상을 빚는 등 정국이 불안정한 모습을 보이자 청와대에서 긴급조치 단행을 연기할 것을 요청해 왔다. 실무팀은 작업을 잠정 중단하고 호텔에서 철수했다. ◇ 한밤중의 긴급조치 정국이 안정을 되찾은 72년 6월, 사채동결조치의 D데이가 8월3일로 다시 책정됐다. 작업팀은 우이동 그린파크호텔에 모여 마무리 점검에 나섰다. 보안유지를 위해 호텔 한 개층을 통째로 전세내 작업을 진행했다. 7월말 모든 문서작업을 마무리 지은 김용환 반장은 대통령 재가에 앞서 국무총리와 경제기획원 장관, 재무부장관, 건설부 장관 등 관계부처 장관들의 서명을 받기 위해 각 장관실을 방문한다. 김 전 장관의 회고. “김종필 총리 뿐만 아니라 서명인 모두가 내용은 묻지 않고 서명만 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사채에 관한 특별조치에 관해서는 성격상 전모를 미리 알아서는 안된다는 각 자의 양해가 있었지 않았나 싶습니다.” 마침내 72년 8월2일 밤 11시40분, 대통령이 주재한 청와대 임시국무회의에서 8.3조치가 대통령 긴급명령 제15호 “경제의 안정과 성장에 관한 긴급명령” 형식으로 의결, 공포됐다. 긴급조치의 골자는 ▲기업과 사채권자의 모든 채권채무 관계는 72년 8월3일을 기준으로 무효화되며 ▲정부가 2000억원을 마련해 기업이 은행에서 빌린 단기고리 대출금의 일부를 연리 8% 장기저리 대출로 대체해준다는 것이었다. 채무자는 신고한 사채를 3년거치, 5년 분할상환 조건으로 상환하되 이자율은 월 1.35%로 낮췄다. 당시 사채 평균이자가 월 3.84%였던 만큼 긴급조치로 인해 기업의 사채이자 부담이 3분의 1 수준으로 대폭 경감된 셈이었다. 박 대통령은 긴급명령과 함께 발표한 특별담화문을 통해 “허다한 기업들이 사채의 질곡에 허덕이고 있는가 하면 또 한편으로는 일부 기업들이 탈세의 수단으로 위장사채를 보유하고 있는 현실은 선량한 기업보호뿐만 아니라 사회정화라는 견지에서도 마땅히 광정(匡正)되어야 한다”고 밝혀 고리사채 근절 의지를 재천명했다. 박 대통령은 또 “막중한 재정부담을 무릅쓰고 기업을 지원하는 이유가 기업의 이익만을 보장해 주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며 “기업의 건실한 성장 없이는 경제발전과 국민생활의 향상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에 이 같은 긴급조치를 취하게 되었다”고 배경을 설명했다. ("한국경제 반세기"는 매주 화, 목요일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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