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품 두 갈래 운명…'가나'의 소장품 됐거나 못 됐거나

가나문화재단 '가나아트컬렉션: 한국 근현대미술 & 한국의 수묵채색화' 전
2014년 재단 설립 후 처음 연 서울전
권진규·김경·박고석·이상범·김기창 등
'재발견·재조명' 근현대31인 100여점
"몇몇 '유명' 틀 깨고 새 면모에 집중"
  • 등록 2020-02-03 오전 12:35:00

    수정 2020-02-03 오전 2:09:29

권진규의 테라고타 ‘상경’(1968). 옆에서 바라본 ‘상경’은 한국 근대조각을 대표하는 권진규의 사실적인 인물상으로 주목받는다. 그 오른쪽 벽면으로 두 점의 유화 ‘정물’(연도미상)과 프레임에 연결한 철줄까지 제작했다는 테라코타 부조 ‘무제’(연도미상)가, 왼편 뒤쪽으로는 테라코타 ‘고양이’(1963)가 한눈에 들어온다. 서울 종로구 평창동 가나아트센터에 꾸린 ‘한국 근현대미술’ 전에 나선 23인 작가 중 드물게 5점을 내놨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이데일리 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첫 시선은 나혜석(1896∼1948)이 끌었다. 1920년대에 미국여행을 마치고 부산으로 돌아온 그이가 합판에 그린 그림. 거칠고 두꺼운 붓길을 내고 ‘별장풍경’(1929∼1930)이라 이름붙였다. 한국에 들인 인상파 화풍의 시작점이라고 할까. 그 한 점을 지나 다다른 국민화가 박수근(1914∼1965)과 장욱진(1917∼1990), 그들의 소품을 모은 벽면은 차라리 소소하다고 할 거다. 두 작가의 개성이 강렬한 ‘소금장수’(1956)와 ‘고목과 여인’(1960s), ‘아이들’(1974)과 ‘들’(1983) 등이 4∼5점씩 무리지어 걸렸는데도 말이다. 그 사정은 김환기(1913∼1974)에 이르러서도 다르지 않다. 특유의 달과 산이 흐르는 푸른 반추상화 ‘산월’(1962), 전면점화로 나선 길에 놓일 ‘16-Ⅳ-68 #13’(1968)도 이곳의 주인공은 아닌 듯하니까.

굳이 눈길을 잡아끄는 이를 꼽으라면 차라리 권진규(1922∼1973)라고 할까. 여인상 테라코타 ‘상경’(1968)을 비롯해 프레임에 연결한 철줄까지 제작했다는 테라코타 부조 ‘무제’(연도미상), 여기에 거의 알려지지 않은 유화 ‘정물’(연도미상) 두 점 등이 작은 컬렉션을 꾸미고 있으니.

이수억의 ‘6·25동란’(1954). 1918년 함경남도 정평에서 난 이수억은 한국의 전통문화 등을 소재로 서사성 짙은 대작들을 남겼다. ‘6·25동란’은 피란민의 비극적 행렬을 기하학적 구성과 향토적인 색감, 감각적인 표현으로 그려낸 초기 대표작. 아름다워서 차라리 처절한 작품이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하지만 이들의 거대한 명성조차 도입부에 불과하다. 한국을 대표하는 근현대의 서양화·한국화 작가 31인이 한 타이틀 아래 불려 나왔으니 말이다. 가나문화재단이 연 ‘가나아트컬렉션: 한국 근현대미술 & 한국의 수묵채색화’ 전이다. 전시장소는 둘로 나뉘었다. ‘한국 근현대미술’ 전은 서울 종로구 평창동 가나아트센터에, ‘한국의 수묵채색화’ 전은 인사동 인사아트센터에 펼쳤다. 이 구분에 따라 나혜석, 구본웅, 박수근, 김환기, 장욱진, 권진규, 도상봉, 문신, 권옥연, 김경, 남관, 문학진, 박고석, 박상옥, 박영선, 손응성, 이달주, 이봉상, 이수억, 정규, 최영림, 한묵, 함대정 등 23인의 서양화 50여점은 평창동에, 청전 이상범, 운보 김기창, 우향 박래현, 월전 장우성, 남정 박노수, 내고 박생광, 고암 이응노, 권영우 등 8인의 수묵채색화 50여점은 인사동에 걸었다.

타이틀 그대로 가나문화재단의 소장품을 공개하는 전시다. 이름만으로 쟁쟁한 이들 작고작가 31인의 1점 이상이 가나아트컬렉션에 들어있다는 뜻이고. 그럼에도 명성보다는 존재가치에 방점을 찍은 고즈넉한 자리로 꾸몄다. 도드라질 것도 부산할 것도 없이, 어찌 보면 한국미술사에서 가장 치열하게 살아남은 그들에 대한 오마주인 듯도 보인다.

남관의 ‘두 노인’(1955). 한국 추상미술 1세대로 꼽히는 남관의 서정성 물씬 풍기는 초기 구상화다. 1954년 파리로 떠나기 전 추구했던 향토적 주제를 고스란히 남겼지만 이후의 반추상, 추상으로 진행하는 전조도 보인다. 대상의 형태를 면분할로 쪼개고 뒤로 보이는 촌락 외에, 배경에서 다른 회화적 요소는 과감히 생략했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재발견·재조명’ 키워드로…작고작가 31인의 100여점

가나문화재단이 연 ‘가나아트컬렉션’의 서울전은 이번이 처음이다. 2014년 재단을 설립한 이후 2018년 제주, 2019년 정읍과 여수에서만 선뵌 적이 있다. 전시를 기획한 이보름 가나문화재단 큐레이터가 전하는 취지는 이렇다. “국내 미술계가 소개하는, 몇몇에 한정된 유명작가군의 틀을 깨보자 했다.” 다시 말해 ‘그간 소외돼온 작가·작품에 집중해보자는 의도’와 ‘그들의 새로운 면모를 내보여야 할 의의’를 높인 전시라는 말이다. 한마디로 ‘재발견’과 ‘재조명’이 키워드인 거다.

어느 작가에 편중되지 않게 1∼2점씩 내건 것도 그런 의향을 반영한 거다. 다만 그간 감춰져 있던 작품에 대한 배려가 없는 건 아닌데. ‘한국 근현대미술’ 전에선 권진규가 테라코타 조각과 부조, 유화 등 5점을 냈고, ‘한국의 수묵채색화’ 전에선 청전 이상범이 ‘하경산수’(1966)를 비롯해 1950∼1970년대 대작 15점을 냈다.

청전 이상범의 ‘하경산수’(1966). 1897년 충남 공주에서 난 청전은 전통회화의 변모를 끊임없이 꾀한 한국 근대 산수화의 대표작가다. 가로길이 178㎝의 ‘하경산수’는 청전이 70대에 이르러서야 만들어낸 긴 횡폭의 작품 중 한 점. 수묵의 농담이 드라마틱하게 드러난 대표작이다(사진=가나문화재단).


‘가나아트컬렉션’ 전의 숨은 의의도 있다. 이른바 ‘선긋기’다. 앞으로 가나문화재단에 귀속할 작품을 솎아내는 본격적인 신호라고 할까. 사실상 지금은 가나문화재단을 세운 이호재 서울옥션 회장의 개인소장품과 가나문화재단의 소장품, 법인인 가나아트의 소장품까지 혼재한 상태. 이제부터 이들 영역에 걸쳐 있는 ‘소장’을 구분하겠다는 의도라는 얘기다. 이는 가나문화재단이 장기적으로 추진해온 ‘미술관 설립’을 위한 포석이기도 하다.

이 회장의 개인적인 취향이든 가나문화재단의 안목이든 그간 미술품을 수집해온 기준을 이 큐레이터는 이렇게 정리한다. “소장자가 미술사적으로 중요하다고 생각한 작품이다.” 적어도 시장의 흐름만을 좇진 않았단 소리다. 미술사업이 목적이라면 굳이 구매하지 않았을 소장품이 적잖다는 얘기도 되고.

김경의 ‘소녀’(1954). 1922년 경남 하동에서 난 김경의 본명은 만두다. 생명의 강인한 근원을 추상적으로 그리기 시작했다는 1956년 이전의 작품이다. 말라비틀어진 명태와 항아리, 턱을 괴고 있는 소녀와 그 뒤에 누운 소 등 당시 김경이 사랑했다는 모티프가 다 들어 있다. 흙빛으로 만들어낸 생명력이 진하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가나문화재단은 2014년 이호재 당시 가나아트 회장이 3억원을 재단 출연금으로 내놓고 개인소장품 200여점을 기탁해 설립했다. 개인화랑이 미술재단을 만든 첫 케이스로, ‘성공한 상업화랑의 경험과 축적한 미술자산을 공익화하겠다’는 선언으로 주목받았다. 염두에 둔 모델이 있었다. 스위스 바젤의 바이엘라미술관이다. 바이엘라미술관은 화랑에서 출발해 공공미술관으로 성공적인 전환을 했던 기관. 당시에도 ‘가나현대미술관’(가칭)의 건립을 목표라 했으니, 미술관 설립은 여전히 가나문화재단의 숙원인 셈이다.

△유명작가의 유명작품보단 ‘존재가치’에 따라

‘재발견’ ‘재조명’이란 키워드가 그렇듯 전시는 유명작가의 유명작품에선 다소 비켜나 있다. 그보단 ‘그간 보지 못했던’에 방점을 찍는다. 풍경을 주로 그린 것으로 알려졌던 박고석의 인물화 ‘여인’(연도미상), 일그러지고 어긋난 얼굴을 과감히 화면에 들인 최영림의 ‘자화상’(1971), 천재화가라 소문이 자자했던 구본웅이 종이에 채석한 ‘괴석’(1945)과 나무판에 유화물감을 올린 ‘여인좌상’(1940s), 서사성 짙은 대작을 그렸던 이수억의 아름다워서 더 처절한 ‘6·25동란’(1954), 반구상부터 추상까지 정물·인물을 독창적으로 창조했던 문학진의 ‘연주자들의 합주’(1979)와 ‘만돌린을 들고 있는 여인’(1973), 한국 추상미술의 1세대로 꼽히는 남관의 서정성 물씬 풍기는 구상화 ‘두 노인’(1955) 등은 전시의 본질을 제대로 들여다보게 만드는 점점이다.

박고석의 ‘여인’(연도미상)과 최영림의 ‘자화상’(1971)이 나란히 걸렸다. ‘여인’은, 강렬한 색감과 두꺼운 마티에르의 토속적인 산수풍경을 주로 그려 ‘산의 화가’라 불린 박고석의 드문 인물화다. 그 붓터치 그대로 단단한 여인상을 만들어냈다. ‘자화상’ 역시 최영림의 작품에선 드문 편. 흙모래로 낸 거친 질감에 올린 일그러지고 어긋난 얼굴이 독특하다. 혼돈을 겪은 작가 자신의 모습이란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가나문화재단이 처음 진행했다는 한국화 특별전인 ‘한국의 수묵채색화’ 전의 면면도 다르지 않다. 일단 수묵채색화의 고정관념을 흔드는 작품들의 방대한 규모가 압도한다. 운보 김기창의 ‘농악’(1980)과 권영우의 ‘무제’(1983)는 세로길이 220㎝를 넘겼고, 고암 이응노의 ‘군상’(1986)은 가로길이가 273㎝에 달하는 대작. 청전 이상범의 병풍 ‘사계산수도’(1970) 역시 빠질 수 없다. 이외에도 우향 박래현의 ‘작품 16’(1968), 월전 장우성의 ‘춤추는 유인원’(1988), 내고 박생광의 ‘무속 2’(1980s) 등, 변화하는 시대상을 변화하는 한국화법에 담아낸 정수가 줄줄이다.

자칫 어느 밀실에 박혀 있었을지도 모를 미술품의 운명이 한끗 차로 갈린 현장. 그 갈림길의 가치를 확인케 해줄 ‘한국 근현대미술’ 전은 3월 1일까지, ‘한국의 수묵채색화’ 전은 23일까지다.

운보 김기창의 ‘농악’(1980‘). 김기창이 일찍이 관심을 가졌다는 농악 소재의 작품 중 한 점이다. 굵고 검은 필획의 직선으로 면분할한 인물의 동선이 단순하지만 두드러진다. 7세에 장티푸스 후유증으로 청력을 상실한 김기창에게 ‘농악’은 소리가 빠진 가장 격동적인 장면이었을 터다(사진=가나문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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