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 도입 확정한 비동의간음죄…국내 입법 논의도 급물살 탈까

日 의회, '비동의 간음죄' 만장일치 통과시켜
범죄성립 '비동의 상황' 나열해 처벌대상 확대
기존법 처벌 못하는 '원치않는 성교' 영역 인정
우리나라 아직 "신중검토"…논의필요성 공감대
  • 등록 2023-07-14 오전 6:00:00

    수정 2023-07-14 오전 6:00:00

[이데일리 한광범 기자] 이웃나라인 일본이 중의원과 참의원에서 비동의 간음죄를 만장일치로 통과시킨 가운데, 우리나라에서도 비동의 간음죄 도입을 둘러싼 사회적 논의가 급물살을 탈 수 있을지 관심이 쏠리고 있다.

(그래픽=게티이미지뱅크)
14일 법조계에 따르면 차기현 광주고법 판사는 대법원이 발간하는 ‘해외사법소식’에 기고한 글을 통해 일본의 ‘비동의 간음죄’ 입법에 대한 의미를 다뤘다.

지난 5월 일본 중의원, 6월 참의원을 만장일치로 통과한 개정안은 기존의 ‘강제성교죄’와 ‘준강제성교죄’를 통합해 ‘부동의성교죄’를 도입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해당 법안은 자민당 정부가 마련해 국회에 제출한 원안에 중의원 논의 과정에서 정부의 5년 단위 실태 조사 의무를 부여하는 부칙 일부가 추가된 것이었다.

개정안은 부동의성교죄가 성립하는 ‘부동의 상황’을 8가지 항목으로 목록화하고 있다. 기존 법안의 성립 요건인 △‘폭행 또는 협박’ 등의 유형력 행사 △피해자의 심신상실·항거불능 외에 추가로 행위태양이나 피해자의 특정한 상태를 포함시켜 처벌 대상을 대폭 확대했다.

日, ‘피해자가 동의할 수 없는 상황’까지 강간 인정

구체적인 ‘부동의 상황’은 △폭행 또는 협박을 이용하거나 이를 당한 것 △심신의 장애를 발생시키는 것 또는 그것이 있는 것 △알코올이나 약물을 섭취하게 하는 것 또는 그 영향이 있는 것 △수면 및 그 밖의 의식이 명료하지 않은 상태로 만드는 것 또는 그 상태에 있는 것 △동의하지 않은 의사를 형성, 표명 또는 완수할 틈이 없는 것 △예상과 다른 사태에 직면하게 하여 공포를 일으키거나, 경악케 하는 것 또는 그 사태에 직면하여 두려움이 크거나 경악하고 있는 것 △학대에 기인하는 심리적 반응을 일으키게 하거나 그것이 있는 것 △경제적 또는 사회적 관계상의 지위에 기초한 영향력으로 인하여 받게 될 불이익을 우려하게 하거나 이를 우려하고 있는 것이다.

위의 4개 항목은 기존 부동의성교제에 있던 내용이고, 아래 4개 항목은 이번에 개정안에 새롭게 추가된 내용이다. 개정안은 여기에 더해 △그밖의 유사한 행위나 사유도 추가적인 범죄 성립 요건으로 규정해 구성 요건 체계가 확대될 수 있는 여지를 뒀다.

차 판사는 “일본 법무성 내에 설치된 ‘성범죄에 관한 형사법 검토회’가 논의 끝에 성범죄 수단 부분의 구성요건을 보다 세분화해야 한다고 지적했다”며 “폭행·협박을 수단으로 하는 성범죄와 심신상실과 그에 준하는 항거불능상태를 요건으로 하는 성범죄로만 구별해 놓은 것은 잘못이라는 지적이었다”고 설명했다.

그는 “기존 법은 자칫 성범죄 피해자가 무리하게 성교 등을 강요받는 상황에서 의식만 뚜렷하게 있다면 분명하게 거부의사를 표현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전제가 있었다”며 “(법무성은) 실제 피해자가 처한 여건을 보면 이 같은 구분으로 포섭할 수 없는 ‘원하지 않았던 성교 등 행위’ 영역이 존재한다고 본 것”이라고 지적했다.

2017년 형법 개정을 통해 ‘강간죄’를 ‘강제성교죄’로 바꾸고 처벌대상과 형량을 대폭 강화했던 일본은 법 개정 이후에도 법무성을 중심으로 성범죄 관련 개정 논의를 지속해 왔다.

법무성은 수년간의 논의 끝에 발간한 보고서에서 기존 법으로 처벌할 수 없는 ‘원하지 않았던 성교 행위’ 영역으로 △예상치 못한 성적 행위의 시도 및 그에 따른 놀라움·혼란과 같은 심리 상태에 빠진 케이스 △기만적인 방법이 이용된 경우 △극도의 스트레스로 분명 의식이 있지만 몸이 움직이지 않는 얼어붙기 반응(freeze response)이 일어난 상태 등을 언급하며, 이 같은 법 개정을 통해 공백을 메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우리나라에 비해 성범죄에 미온적으로 알려진 일본이 비동의 간음죄 도입을 확정했지만 우리나라는 아직 구체적인 도입 계획이 없는 상태다. 지난 정부부터 여성가족부는 비동의 간음죄 신설 필요성을 언급해 왔지만 정부는 ‘사회 각층의 충분한 논의를 거치는 종합적 검토가 필요하다’며 반대 취지의 신중검토 의견을 내놓고 있다. 자칫 입증 책임이 검사가 아닌 피고인에게 주어질 수 있다는 점이 가장 뜨거운 쟁점이다.

한동훈 법무부 장관과 김현숙 여성가족부 장관이 지난해 9월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국정현안관계장관회의에 참석해 대화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입증책임, 검사 ‘유죄 입증’서 피고인 ‘무죄 입증’ 전가 우려도

김현숙 여가부 장관은 지난 2월 국회 대정부질문 답변에서 “비동의 간음죄에 대해서 국내외적으로 찬반 의견이 많기 때문에 전문가 의견수렴과 해외 입법례를 연구하고 충분한 사회적 논의가 필요하다”고 신중한 입장을 드러냈다.

한동훈 법무부 장관은 같은 날 “동의 없는 성관계는 기본적으로 범죄다. 동의 여부를 묻는 건 세계적 판례 방향”이라면서도 신중한 입장의 이유를 구체적으로 밝히기도 했다. 유죄의 입증 책임이 검사에게 있는 형사재판에서의 통상적 모습과 달리 비동의 간음죄가 도입될 경우 피고인이 무죄를 입증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한 장관은 “범죄를 의심받는 사람이 상대방 동의가 있었다는 걸 법정에서 입증하지 못하면 억울하게 처벌받게 되는 구도가 된다. 죄를 안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상대방의 주장을 반대로 입증하는 건 굉장히 어려울 것”이라며 “대법원 판례가 피해자 의사를 함부로 무시할 수 없다고 보는 상황에서 억울한 사람이 처벌받을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했다.

차 판사 역시 이와 관련해 “비동의 간음죄 도입으로 자칫 성범죄의 입증 책임이 사실상 전환되는 결과가 되지 않도록, 법원도 피해자의 내심의 상태를 추단 하기에 적합한 심리의 방식을 체계화해 대비해야 한다”고 밝혔다.

신중한 입장인 정부 역시 논의 필요성엔 공감하고 있는 만큼 우리나라에서도 관련 논의를 급물살을 탈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차 판사는 “법원으로선 기존 판례에 나타난 피해자의 거부 의사 형성을 저해하는 구체적 유형력의 행사 태양이나 어떤 피해자의 심리 상태를 이용한 간음 등이 처벌 필요성이 있는 것인지를 구체적으로 목록화해 입법단계에서부터 적극 대응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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