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얼빈’이 현 시국에 읽히는 방식[정덕현의 끄덕끄덕]

정덕현 문화평론가
  • 등록 2025-01-16 오전 5:00:00

    수정 2025-01-16 오전 5:00:00

[정덕현 문화평론가] “모든 걸 포기하고 죽으려 했습니다. 죽은 동지들의 참담한 비명이 귓가를 맴돌고 눈앞을 떠돌았습니다. 그 순간에 깨달았습니다. 나는 죽은 동지들의 목숨을 대신해 살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내가 해야 할 일을 알았습니다. 대한제국을 유린하는 일본 늑대의 우두머리, 늙은 늑대를 반드시 죽여 없애자고.” 우민호 감독의 영화 ‘하얼빈’은 이러한 내레이션과 함께 죽은 줄 알았던 안중근(현빈 분)이 꽁꽁 얼어붙은 두만강을 건너 살아 돌아오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영화관에서 봐야 그 압도적인 규모가 느껴질 법한 그 광경은 실제 두만강의 풍경은 아닐 게다. 칼바람이 불어오는 얼음 위를 홀로 걸어나가는 모습은 보기만 해도 오한이 들 것 같은 느낌으로, 그곳을 걷는 이의 마음속을 들여다보게 만든다. 그 마음은 지옥이다.

그는 신아산 전투에서 포로로 잡힌 일본군 장교 모리 다쓰오(박훈 분)를 ‘만국공법’을 지켜야 한다는 이유로 풀어줬다가 동료가 희생되는 충격적인 사건을 겪었다. 내레이션으로 나온 그 말 그대로 그는 ‘모든 걸 포기하고 죽으려는’ 마음도 있었을 게다. 꽁꽁 얼어붙은 두만강 위를 걷다가 그 차디찬 얼음바닥에 누워버린 그는 그러나 끝내 일어나 다시 그 얼음 위를 걸어나간다. ‘길을 잃고’ 방황하던 그를 붙잡아준 건 아이러니하게도 그를 절망하게 한 먼저 간 동지들이었다. ‘하얼빈’은 이 일로 목표를 분명히 알게 된 안중근이 ‘늙은 늑대’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기 위해 계속 앞으로 나가는 이야기다. 그 끝이 결국 자신의 죽음이라는 걸 알면서도.

사실 안중근의 이 이야기를 모르는 한국인은 없을 게다. 누구나 역사책을 통해서 그 이야기를 접한 바 있고 역사 다큐멘터리나 심지어 예능 프로그램에도 그 이야기는 자주 등장했다. 뮤지컬과 영화로도 제작된 ‘영웅’이 있었고 종교적으로 그려낸 영화 ‘도마 안중근’도 있었으며 보다 인간적인 안중근의 면면을 따라간 김훈 작가의 소설 ‘하얼빈’도 있었다. 이 정도면 누구나 다 아는 이야기를 굳이 영화로 왜 만들었을까 싶지만 본래 역사를 소재로 하는 작품들은 시대에 따른 재해석이 담기게 마련이다. 우민호 감독의 ‘하얼빈’은 두만강을 건너는 장면이나 사막을 건너가는 장면처럼 마치 지옥도 같은 압도적인 풍광으로 펼쳐진 절망적인 심리적 상황 속에서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나아가는 위대한 인간의 모습으로 안중근을 재해석했다. 그래서 안중근을 비롯한 독립투사들이 은거지에 모여 대화를 나누는 장면들은 마치 렘브란트의 그림을 보는 듯한 음영이 분명한 영상으로 담겼는데 그것 역시 이들의 내면이 투영된 것처럼 표현된다. 어둠이 금세라도 이들을 잡아먹을 것처럼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지만 그 어둠은 오히려 이들의 굳은 의지가 드러나는 얼굴을 빛나게 한다.

결코 ‘하얼빈’은 편안하거나 유쾌하게 즐길 수 있는 영화는 아니다. 절망의 어둠 속을 들여다보는 일이고 꽁꽁 언 길을 함께 걸어가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 영화가 요즘처럼 어려운 극장가에서 400만 관객을 돌파했다는 건 놀라운 일이다. 도대체 무엇이 이런 영화의 힘을 만들어내고 있는 걸까.

혹자는 ‘국뽕’을 이야기하지만 ‘하얼빈’은 결코 감정에 호소하는 작품은 아니다. 이는 마지막에 사형대에 오르는 안중근의 모습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영웅’에서 그 장면은 비장하게 그려지며 관객들의 감정을 끌어올리지만 ‘하얼빈’에서는 무감하게 처형되는 장면으로 간단히 연출된다. 그런 점에서 이 작품의 흥행은 여러모로 그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현 시국의 영향을 얘기할 수밖에 없다. 이런 시국이 아니라면 그저 평범한 대사 한 줄로 여겨졌을 이토 히로부미가 조선인에 대해 말하는 대사가 이토록 화제가 됐을 리 없기 때문이다. “조선이란 나라는 어리석은 왕과 부패한 유생들이 지배해 온 나라지만 저 나라 백성이 제일 골칫거리야. 받은 것도 없으면서 국난이 있을 때마다 이상한 힘을 발휘한단 말이지.” 메인 예고편에도 고스란히 들어간 이 장면에서 관객 대부분은 현재 벌어지고 있는 탄핵 정국을 떠올렸을 것이다. 비상계엄 선포라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을 때 국회로 달려가 이를 저지했고 탄핵안 통과를 위해 국회의사당 앞에 구름같이 모여 응원봉을 들었던 시민을 떠올리지 않았을까.

우민호 감독이 한 매체와의 인터뷰를 통해서 이 장면에 대해 꺼내놓은 이야기 역시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이토 히로부미가 실제로 한 말이에요. 유생들이나 왕은 하나도 두렵지 않은데 마차 타고 총독부를 갈 때마다 자신을 쏘아보는 민초들의 눈빛이 너무 서늘했다고요. 민초들에겐 두려움을 느낀 거죠. 그런데 지금 시대가 이렇다 보니 그게 또 다른 의미로 받아들여지게 돼 참 아이러니하고 서글프기도 하네요.”

당대 민초들의 눈빛처럼 현재의 관객들도 같은 눈빛으로 이 영화를 쏘아보며 현 시국을 생각하지 않았을까. ‘하얼빈’은 그래서 그 절망적인 시국을 외면하지 않는 눈빛들이 모여든 영화처럼 보인다. 물론 이건 우민호 감독이 의도한 바는 아니다. 하지만 임진왜란과 일제강점기에 무능한 기득권자들에 의해 비극에 내몰린 민초들이 그 절망을 뚫고 나오는 그 과정들이 지금도 반복되고 있다는 건 감독의 말처럼 서글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영화는 풀 한 포기 자라날 것 같지 않은 얼음 위를 걸어가는 안중근의 모습으로 시작하지만 그가 사형대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장면에서 화면을 전환해 하늘을 향해 뻗어 있는 나뭇가지들을 보여준다. 꽁꽁 얼어붙은 겨울의 절망이 꽃이 피어나는 봄으로의 희망을 꿈꾸는 장면이다. 그런데 그 봄은 그냥 오는 게 아니라고 영화는 말하고 있다. 누군가 포기하지 않고 가야 할 길을 꿋꿋이 걸어간 이들이 있어 그 봄이 오는 것이라고. “어둠은 짙어 오고 바람은 더욱 세차게 불어올 것이다. 불을 밝혀야 한다. 사람들이 모일 것이다. 사람들이 모이면 우리는 불을 들고 함께 어둠 속을 걸어갈 것이다.” 안중근의 외침이 가슴에 와닿는 꽁꽁 얼어붙은 시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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