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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중 하나였던 한국이 어느덧 세계 10위권 경제 대국으로 올라섰다. 그 과정에서 국내에서도 숱한 도전이 있었다. 1호점들의 성공을 발판으로 한국 경제는 지난 반세기 동안 괄목할만한 성장을 해왔다. 그러나 국내에서는 아직 시애틀의 스타벅스 1호점처럼 새로운 도전의 역사를 보존하는 작업들이 활발하지 못하다.
‘1호점을 찾아서’는 한국 경제 성장에 기여한 1호점들의 역사를 되돌아보는 코너다. 이를 통해 1호점의 가치를 제대로 조명하고 의미를 부여할 예정이다. 또한 시애틀의 스타벅스 1호점이 전 세계 여행객들의 명소가 되었듯이 우리 주변의 1호점 또한 그런 명소로 자리 잡기 바라는 마음도 함께 담았다.
[이데일리 김용운 기자] 서울의 북동쪽 도봉구 창동의 지명은 양식을 쌓아놓는 곳집을 뜻하는 한자어 창(倉)에서 유래했다. 창동이란 이름을 얻게 된 이유는 실제로 그곳에 양곡창고가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후기 한양의 북쪽이었던 창동 인근에는 조정에서 관리하는 양곡창고가 있었고 경원선이 깔리면서 역도 생겼다. 해방 이후 행정구역을 정비하면서 예전에 양주목이었던 도봉구 일대는 서울로 편입되었고 그 과정에서 창고가 있던 동네란 의미에서 창동이란 지명이 붙여졌다.
◇서울 북동쪽 양곡창고가 있던 마을에 들어선 ‘이마트 1호점’
1993년 11월 중순 지하철 1호선과 4호선 환승역인 창동역 서쪽 신축 대형건물에 간판이 걸렸다. 당시 창동역 주변 공장들이 떠나간 자리에 택지개발과 함께 신흥 아파트단지가 조성됐다. 또한 중랑천 건너 상계동에는 이미 10차가 넘는 주공아파트 단지들이 빼곡히 들어섰고 가까운 쌍문동 또한 서울 강북권 최초의 민영 아파트 단지가 만들어진 상황이었다.
서울의 동네 중 한 곳인 창동과 그 인근 지역의 내력을 적어 내려 간 것은 바로 이마트(139480) 1호점 때문이다. 1993년 11월 12일 창동역 서쪽 반경 100미터 거리 신축건물 외벽에는 이마트라는 간판이 걸린다. 이날 이마트 창동점에는 약 2만 6800명의 고객이 몰렸고 2억원의 매출을 올렸다. 비로소 국내에도 대형할인점 시대가 열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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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마트를 출점 시킨 신세계백화점의 판단은 달랐다. 먼저 국민소득 1만 달러 시대에는 소비자들이 부나 신분 과시를 위해 물건을 사지 않는다는 것을 파악했다. 여기에 1980년대 후반 미국의 월마트 등의 성장을 지켜보면서 생활용품의 품질격차가 사라지고 가격과 편의성이 소비자 선택의 기준이 된다고 확신했다. 그리고 수년간 연구 끝에 한국형 대형할인점인 이마트를 출범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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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 유산으로 지정된 이마트 창동점
이마트 창동점은 올해로 문을 연 지 햇수로 24년을 맞이했다. 그동안 두 차례 증축을 했음에도 매장 규모는 4297㎡로 1만㎡가 넘는 다른 지역의 이마트에 비해 규모는 작은 편이다. 이마트 창동점 반경 4㎞ 안에는 홈플러스 방학점, 하나로마트 창동점, 롯데 빅마트 등 대형할인점이 인접해 있어 경쟁도 치열하다. 그러나 이마트 창동점의 성공이 없었더라면 한국의 대형할인점 등장은 더 늦어졌을 것이다. 이마트 창동점의 성공을 발판으로 국내에도 대형할인점 전성시대가 열렸다. 대형할인점은 가격결정권이 기존 제조업체에서 유통업체로 이동했음을 보여준 상징적인 유통채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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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이마트 창동점을 찾는다면 창동역 서쪽 1층 출구 서쪽 벽에 걸려 있는 ‘서울미래유산’ 명패를 찾아볼 것을 권한다. 그리고 조선시대 양곡을 모아두던 창고가 있던 창동에서 한국 최초의 대형할인점이 탄생한 사실을 떠올리면 그곳의 의미가 더욱 남다를 것이다. 사실 이마트 창동점이 처음 문을 열었을 때에는 지금과는 다른 ‘창고형’ 대형할인점을 표방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