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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일리 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소산 박대성(76). 우린 그이를 두고 ‘한국 수묵화의 대가’라고 불러왔다. 시비 걸 여지없이 맞는 말이다. 겸재 정선(1676∼1759)부터 청전 이상범(1897∼1972)과 소정 변관식(1899∼1976)으로 이어지는 진경산수화의 맥을 지켜내면서도 전통 수묵화를 현대로 끌어내는 데 주저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명쾌하고 간단한 이 수식으로 설명할 수 있는 건 그리 많지 않다. 화백, 또 화백 작품과 더불어 한국현대사를 타고 흘렀던 이야기는 차고 넘친다.
전속작가란 개념조차 없던 1984년, 가나화랑(가나아트의 전신)의 1호 전속작가가 됐던 일, ‘대통령이 좋아하는 작가’로 청와대에 줄줄이 작품이 불려들어갔던 것도 모자라 2018년 남북정상회담 환담장에 두 점(1990년 작 ‘장백폭포’ ‘일출봉’)을 걸었던 일, 2015년 830점을 기증해 경북 경주에 솔거미술관을 세우게 한 일, 그 미술관에 지난 6월 폭 11.5m의 국내 최대 수묵화 ‘몽유 신라도원도’(2021)를 걸고, 역시 그 미술관에서 지난 3월 자신의 전시작 위에서 용감하게 미끄럼을 탔던 한 꼬마를 “애들 눈엔 그렇게 보일 만했다”며 대인배답게 용서를 했던 일도 있다. “훼손도 작품의 역사”라며.
사실 이 모두에 늘 따라붙는 아픈 사연이 있는데. 그이가 ‘왼손 없는 화가’라는 거다. 고향인 경북 청도에서 네 살 때던 1949년, 왼쪽 팔꿈치 아래를 모두 잃게 된 비운은 평생 화백의 이름 석 자에 엉겨붙어왔더랬다. 그이가 화가가 된 동기와 무관치 않았던 탓이다. “우연찮게 호작질(‘낙서’의 경상도 사투리) 하는 걸 본 집안 어른들이 그랬지. ‘대성이가 그림 잘 그린다.’ 부모도 없고 팔도 하나 없는 아이가 안쓰러워 던진 말일 텐데, 그 한마디가 모든 것을 바꿔 놨어. 진짜 그림을 시작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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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업의 정수 ‘불국설경’…26년 동안 세 번 그려
경주에 살며 작업하는 화백이 모처럼 서울에 ‘떴다’는 소식은, 그이의 개인전 ‘정관자득: 인사이트’보단 조금 늦게 당도했다. 서둘러 만나러 나섰다. 서울 종로구 인사아트센터에 펼친 전시는 서울 개인전으론 3년 만이다. 이번엔 개인전 그 이상의 의미가 보태졌다. 내년 ‘미국 순회전’을 향한 출발점으로서란다.
‘미국 순회전’이 뜬금없는 행보는 아니다. 1990년대 초반 화백의 미국행부터 시작된 인연 덕이라니. “다들 모더니즘, 모더니즘 하는 데 그게 뭔지 궁금하더라고. 그래서 뉴욕으로 갔지.” 달랑 먹과 붓만 들고 향한 그곳에서 배워온 게 있다면 “내가 있을 데가 아니다”란 것. 그리 오래 걸리진 않았다. “이제 뭘 해야겠다”는 걸 알게 됐다고 하니. 1년 남짓 뒤 한국으로 돌아오자마자 그이가 향한 곳이 경주다. “내가 왜 이리 돌아다녔을까 생각하니 바로 불국사가 떠오르더라고. 귀국하자마자 경주로 갔고 문 닫기 5분 전 가까스로 대웅전 앞에 섰지. 아랫도리가 흔들리고 전율이 엄습하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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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이후 화백은 1년간 불국사에서 ‘얹혀살게’ 된다. “그 큰 절에 객을 위한 방이 세 개뿐이라고 안 된다는 것을 우기고 우겨 허락을 받았어. 나중에 주지스님이 그러더라고. ‘그림은 전혀 모르지만 뭔가 할 것 같은 눈빛이었다’고.”
70년 화업에서 ‘핵심’이라고 할 1년이 그렇게 만들어졌다. 이후 20여년을 지켜온 경주시대를 연 시작점이자 화업의 정수 ‘불국사’가 등장한 결정적 계기였으니까. 눈이 좀처럼 오지 않는 경주에서 ‘불국사 설경’을 봤고, 화폭에 옮겼던 것도 천운이랄까. 폭 8m 높이 252㎝에 달하는 ‘불국설경’은, 그 뜨거운 한 해를 보낸 뒤 가나화랑 전시에 등장했다. “그때가 1995년이니 26년 동안 불국사 설경을 세 번 그린 거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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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세 번째 설경이 이번 전시에 나왔다. 폭 448㎝, 높이 199.5㎝의 ‘불국설경’(2021)은 ‘금강설경’(2019·772×223㎝), ‘한라산 봉우리’(2021·490.5×347.5㎝)와 함께 규모로도, 지형적으로도 세 꼭짓점을 이룬 작품이다. 이들을 앞세워 이번 개인전에는 신작 위주로 70여점을 걸었다. ‘구룡폭포’(2021), ‘버들’(2021), ‘만월’(2021) 등 자연소재의 풍경, 수집한 도자기에 화백의 독특한 글씨를 올려 사실적으로 묘사한 ‘고미’(2021) 연작 16점 등. 전시작 대부분은 미국 LA 카운티미술관을 시작으로 하버드대 한국학연구소, 뉴욕주립대 스토니브룩 등을 도는 미국 순회전에 따라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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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희컬렉션이라…만감이 교차하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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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회를 물으니 “만감이 교차하더라”란 대답이 왔다. 잠시 옛 생각에 빠져들던 화백은 그 시절 어디쯤에 멈춰섰다. “내가 이건희 회장의 전속화가기도 했어. 월급 받고 그림 그리고, 그게 전속이지 뭐. 여러 가지를 그렸어. 그때 많은 작품이 호암갤러리에 들어갔지. 1980년대 중반부터 1990년대 중반쯤이려나. 그래도 이 회장은 뭘 그려달라고 하진 않았어. ”
세상에 처음 꺼내 놓은 말이다. 사실 그이의 또 다른 별칭 중엔 ‘이건희가 사랑한 한국화가’가 있다. 변변한 미술수업 한 번 받지 않고도 대한민국미술대전에서 1969년부터 8번에 걸쳐 입선을 하고 1979년 중앙미술대전에선 대상까지 받아낸 그이를 이 회장은 물론 부친인 이병철 회장도 많이 아꼈더랬다. 결국 화백은 1988년 ‘대작 100점’으로 호암갤러리 650평을 채운 개인전을 열었고, 이 회장은 그때 전시작 대부분을 사들였다.
내친김에 ‘이건희미술관’에 대해 어찌 생각하는지도 물었다. “말해 뭣해? ‘이건희’ 자체가 명품이잖아. 이름도 쓰고 제대로 짓기도 해야지. 그 소장품을 다 들여놓고 ‘OO구청미술관’이라고 하면 그게 되겠어?” 사실 화백에게도 비슷한 경험이 있었다. 830점을 기증해 만든 솔거미술관 말이다. “결국 내 이름을 못 달았어. 지방의원들이 반대를 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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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하나 눈과 발을 붙들지 않는 작품이 없지만 전시작 중 유독 한 점이라면, ‘푸른 소’를 그린 ‘청우 1·2’(2021)라 하겠다. 이중섭의 ‘붉은 소’와 묘하게 겹치는 ‘소 그림’을 보는 즐거움도 있지만 오랜만에 화백의 ‘색’을 보는 짜릿함이 적잖다. 한동안 사라졌던 그이의 채색이야기도 이번에 들었다. “호암갤러리 개인전 이후 온전히 먹으로만 돌아섰지. 그즈음 나온 아크릴물감을 섞어 쓰는 재미가 쏠쏠했는데. 더는 안 되겠더라고, 나를 잃을 거 같아서.” 연신 ‘잘한 일’이었다며 껄껄 웃는 화백은 편안해 보였다. “맑은 화선지에 뭘 찍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그런 인생을 살았다는 화백의 얼굴이. 전시는 23일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