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호무역주의와 탈세계화라는 트럼프의 실물경제 노선이 금융시장에서의 금융세계화를 오히려 강화하는 것은 일종의 아이러니다. 금융디지털화로 거래편의성이 극대화하면서 투자자금의 순간이동과 개인 투자자까지 글로벌 자산배분이 가능한 환경이 만들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지만 거꾸로 수익률 경쟁에서 뒤처진 주식시장은 자국의 수요기반 약화를 걱정해야 하는 상황이 오고 있음을 의미한다. 오죽하면 금융선진국 영국에서 수요기반 확충을 위해 국내주식 투자를 강력히 추진하는 연금민족주의(Pension Nationalism) 흐름이 나타나겠는가.
우리나라는 코로나 19 이후 개인과 기관투자가의 국내 증시 참여가 약화하며 수요기반의 구조적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 외국인에게는 일상화된 글로벌 자산배분을 국내 개인과 기관투자자들이 적극 수용하면서 개인의 해외 주식 보유액이 최근 140조원에 달한다고 한다. 개인의 국내 상장주식 보유액(2021년 661조원)을 고려하면 개인이 보유한 주식의 20% 정도를 해외 주식으로 보유하고 있다. 한국은행 자금순환표로도 개인의 해외 주식 매수규모는 코로나 19 전후로 4년 평균이 9000억원에서 13조원으로 크게 늘었다. 국내 기관투자자의 글로벌 자산 배분은 보다 체계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고객자금을 관리하는 수탁자로서 책임을 고려하면 당연하다.
지난 8월 엔캐리 청산 충격이나 최근의 트럼프 트레이드는 수요기반의 구조변화로 생긴 증시 안전판 공백을 메울 수 있는 증시체질 개선이 필요함을 시사한다. 그간의 증시체질 개선정책은 코리아 디스카운트 해소에 맞춰졌다. 성과도 있었다. 일반주주보호 장치가 크게 강화됐고 밸류업 프로그램으로 대기업의 주주 중시 경영에 상당한 시동을 걸고 있다. 저평가된 주식이 제대로 평가받을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고 있다. 그런데 코리아 디스카운트 해소가 증시 안전판의 직접적인 대책은 될 수 없는 만큼 분리해서 대응하는 것이 맞다.
미국은 401(k)같은 자본시장의 안정적인 수요기반이 있다. 401(k)를 포함한 미국 퇴직연금은 연간 보험료 유입액만 6500억달러(900조 원)에 이르고 시장 상황과 관계없이 뮤추얼펀드를 통해 주식시장에 유입되는 만큼 가장 강력한 주식시장 수요기반이 되고 있다. 글로벌 금융위기 때도 401(k)는 안정적으로 주식시장에 유입되며 안전판 역할을 했고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보고서를 보면 불과 2~3년 만에 연금 손실을 회복하는 회복탄력성을 보였다.
다른 나라와 가장 큰 차이는 국내 사적연금이 주식시장에서 역할을 하지 않는 것이다. 퇴직연금과 개인연금은 분류상으로는 기관투자가이지만 기능상으로는 사실상 예금자 또는 보험계약자에 가깝게 운영된다. 적립금이 400조원, 연간 보험료 수입이 50조원이 넘는 퇴직연금이 글로벌 자산배분을 하는 기금형 운용체계를 갖춘다면 주식시장에서는 과거 공적연금이 수행하던 암묵적 안전판 기능이 자동복원되는 동시에 국민연금을 보완하는 노후소득보장수단으로서 역할이 강화되는 일거양득이 가능할 것이다.
요즘 영국도 퇴직연금 개혁안을 준비하고 있다. 호주처럼 퇴직연금을 8개의 거대기금으로 재편하고 규모의 경제로 높아진 자산배분 여력을 활용해 FTSE 상장주식과 벤처투자의 약화한 수요기반을 강화하겠다는 것이다. 연금 선진국이라는 영국조차 수요기반 강화를 위해 연기금을 재편하는 상황을 보면 글로벌 금융경쟁의 강도가 얼마나 치열한지 짐작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