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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일리 오현주 문화전문기자] 하얀 저고리에 푸른 치마를 입은 여인이 슬쩍 고개를 돌리는 척, 도포에 갓을 쓴 사내에게 묘한 눈길을 보내고 있다. 그것도 잠시 이내 장면은 바뀌고 상황은 반전된다. 빨래터에서 치마를 걷어붙이고 방망이질 중인 여인을 바위 위에서 몰래 내려다보는 점잖은 사내가 등장하니까. 단오날에 반나체로 목욕 중인 여인들을 바위틈에서 훔쳐보는 동자승도 있다. 어디 이뿐인가. 조선의 블랙핑크라 할 여인들의 퍼포먼스도 한창이다. 시퍼런 칼을 휘두르는 격정적인 춤사위로 곰방대 길게 늘어뜨린 선비들의 눈을 현혹시키고 있다.
한 장면, 한 장면 주옥같은 조선의 풍속화가 NFT(대체불가토큰)로 되살아나는 중이다. 조선의 3대 풍속화가로 꼽히는 혜원 신윤복(1758∼1814?)의 화첩 ‘혜원전신첩’(국보)에 속한 30점이 말이다. ‘월하정인’ ‘이부탐춘’ ‘야금모행’ ‘단오풍정’ ‘쌍검대무’ 등 18세기 말부터 19세기 초까지 한양을 배경으로 당대 가장 핫 했을 남녀 간의 로맨스를 화가의 ‘은밀한 시선’으로 담아낸 걸작선이다.
사실 신윤복의 화첩을 NFT로 제작한다는 그 자체는 이제 더 이상 큰 시선을 끌 일이 못 된다. NFT가 닿은 영역이 그만큼 넓어졌고, 그것이 신윤복이든, 김홍도든 그다지 놀랄 일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화젯거리로 부상한 다른 이유가 있는데, NFT를 발행하는 주최가 ‘간송미술관’이라는 데 있다. 지난달 말 간송미술관은 내년 초까지 ‘혜원전신첩’에 든 풍속화 30점을 하나씩 NFT로 발행한 뒤 순차적으로 판매에 붙인다는 계획을 내놨다. 그저 일회성 계획인 것만도 아니다. 이번 NFT 작업을 시작점으로 ‘간송 메타버스 뮤지엄 프로젝트’란 큰 그림을 그리겠다고 했으니까.
‘혜원전신첩’은 간송미술관이 소장한 주요 문화재 중 한 점이다. 간송 전형필(1906∼1962)이 1930년 일본 오사카 고미술상에서 구해 보존처리를 한 뒤 소장해왔고 이후 1970년 국보(당시 제135호)로 지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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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송미술관이 소장한 주요 문화재 ‘혜원전신첩’
과연 판매는 어쨌을까. ‘솔드아웃’, 말 그대로 다 팔렸다. 다만 완판까지는 시간이 걸렸다. 랜덤으로 진행한 민팅(대체불가한 고유자산정보를 부여해 가치를 매기는 작업) 이후 4일여가 걸린 7일에서야 완판 신호가 떴으니까. 흔히 NFT 작품 판매에 왕왕 후일담으로 함께 뜨는 ‘몇초 만에’ ‘몇분 만에’는 성사되지 않은 셈이다. 어찌 됐든 이렇게 구매한 ‘단오풍정 NFT’는 구매자에 따라 이후 NFT거래소에서 웃돈을 얹어 재판매를 할 수 있다.
‘단오풍정’ 이외에 앞으로 수순을 밟을 다른 29점에 대한 NFT 발행·판매도 이 방식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한 작품을 조각낸 NFT 각각을 판매하는 방식 외에 원본 전체를 그대로 NFT로 제작할 수 있는데, 이럴 땐 프리세일보다 경매를 통한 방식으로 새 주인을 찾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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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민정음 해례본’ 이은 두번째 NFT 발행
간송미술관이 그 ‘한국의 우수한 문화재’를 NFT로 발행·판매한 것은 ‘혜원전신첩’이 처음은 아니다. 지난해 7월, 국보인 ‘훈민정음 해례본’을 NFT로 제작해 1개당 1억원씩, 한정판 100개를 판매하기도 했다. 정확한 통계가 공개되진 않았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절반 이상이 팔려나간 것으로 알려졌으니 지금껏 그 이상을 예측해볼 순 있다. 1940년 경북 안동의 한 고택에서 찾아냈다는 ‘훈민정음 해례본’은 간송이 10배의 웃돈을 얹어주며 사들인 일화로 유명하다. 1962년 국보로 지정된 이후, 줄곧 간송미술관의 ‘얼굴 문화재’로도 상징성이 높았다.
시선은 양 갈래로 나뉜다. ‘훈민정음 해례본’이든 ‘혜원전신첩’이든 단지 소장품이란 이유만으로, 엄연한 ‘국보 문화재’를 이처럼 자유롭게 NFT화하고 또 수시로 시장에 내놓을 수 있는 것인가. ‘보다 많은 국민이 향유할 수 있는 방법’이란 점에선 긍정적이다. 이는 간송미술관의 취지와도 다르지 않은데. NFT사업에 앞서 간송미술관은 “국보급 유물의 독점적 희소성을 모든 국민이 향유할 수 있도록 소장성과 가치를 가진 NFT 기술로 재탄생시켜 영구보존한다”는 원칙을 정해놨더랬다.
하지만 이 단단한 원칙도 ‘문화재를 돈벌이 수단으로 이용한다’는 비난 앞에선 종종 빛을 잃고 있다. 재정난을 겪어온 간송미술관이 운영관리를 위한 수익창출에 몰려 지나치게 상업화로 가는 게 아니냐는 지적도 완강했던 터. 이에 대해 전 관장은 “대체불가능한 NFT를 소유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 의미가 크다”며 불필요한 억측에 쐐기를 박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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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한 논란 속에도 NFT의 가능성을 내다보겠다는 ‘간송 메타버스 뮤지엄 프로젝트’는 박차를 가하는 모양새다. 형태는 여러 갈래다. 밋밋한 평면 이상으로, 1개의 NFT 작업에서 파생한 음악·영상·드라마 등 2차, 3차 창작물을 기대해볼 수 있다는 뜻이다. 메타버스 플랫폼 안에 뮤지엄을 세우고 그간 못 보던 형태의 게임을 만들어낼 수도 있다고 했다. 이미 굵직한 국보로 발을 뗀 만큼 메타버스를 채울 후속작도 적잖은 규모일 것으로 보인다. ‘훈민정음 해례본’ ‘혜원전신첩’을 앞세워 간송미술관은 국보 12점, 보물 32점 등 지정문화재를 소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