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쟤가 남자를 ‘강간’한 그 여자라고?”…혐의 벗고 오열한 그녀[그해 오늘]

2013년 형법 개정 후 ‘강간죄 적용’ 첫 기소 40대 女
남녀 모두 포함한 ‘사람’으로 ‘피해범위’ 확대 개정
법정서 혐의 부인 “가학행위 피하려 손발 묶었을 뿐”
변호인 “유죄 선고되면, 피고인은 한국 첫 여성 강간미수자”
국민참여재판 끝에 배심원 9명 만장일치 “무죄”
  • 등록 2024-08-19 오전 12:00:02

    수정 2024-08-19 오전 12:00:02

[이데일리 이로원 기자] “그럼 마지막으로 한 번만 만나자.” 2014년 8월 19일, 전 남편과 이혼한 전 모씨(여·당시 45세)는 4년여간 내연 관계를 이어오던 유부남 A씨(남·당시 51세)에게 이별을 통보받았다. 미련이 남은 전 씨는 이 같은 말을 하며 A씨를 자신의 집으로 끌어들였고, 이후 우리 나라에서 여성으로서는 처음으로 강간죄를 적용받아 재판에 넘겨지게 되는 신세가 됐다. 그녀에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사진=게티이미지


이날 새벽 전 씨의 관악구 자택. 추후 검찰은 법정에서 이 곳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전 씨가 ‘헤어지자’는 A씨에게 ‘한 번만 만나자’고 애원하며 집으로 유인해 수면유도제 졸피뎀을 홍삼액에 타 먹이고 강제로 성관계를 시도했다고 주장했다.

또 “A씨가 잠이 들자 노끈으로 손발을 묶어 성관계를 가지려 했으나 A씨가 의식이 몽롱한 상태에서 밀쳐내 실패했다”며 “이에 전 씨가 ‘다 끝났다, 죽여버리겠다’며 쇠망치로 머리를 한 대 때려 뇌진탕과 두피 열상을 입혔다”고 말했다.

당시 2013년 이뤄진 형법 개정으로 강간죄의 피해 대상이 남녀 모두를 포함한 ‘사람’으로 수정된 이후 남성을 강간하거나 강간하려한 여성도 강간죄로 처벌이 가능해졌다. 여성 가해자가 강간죄를 적용받아 기소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경찰은 전 씨에게 강간미수죄를 적용해 기소 의견으로 검찰에 송치했다. 검찰도 경찰의 수사 내용을 대부분 받아들여 같은 혐의로 전 씨를 구속 기소했다.

구속된 전 씨는 변호인을 처음 접견한 자리에서 이렇게 물었다. “변호사님도 제 얼굴을 아세요? 사람들이 제가 여성 첫 강간범이라고 신문에 났다는데요…”

전 씨의 사건이 구치소에 소문이 나며 동료 재소자들은 그를 따돌리고 괴롭혔다고 한다. 재소자들은 그에게 “남자를 강간한 그 여자냐”고 물었다. 전 씨가 울고 있으면 “너 같은 게 울 자격이 있느냐”고 몰아세웠다.

사건 발생으로부터 1년 뒤인 2015년 8월 20일, 서울중앙지법 417호 법정. 국민참여재판을 받기 위해 푸른 수의를 입고 법정에 출석한 전 씨는 단신에 자그마한 체구로 특히 눈길을 끌었다. 키 151㎝ 몸무게 44㎏. 이런 체구로 거구의 남성을 강간할 수 있느냐가 재판의 주요 쟁점이 됐다. 국민참여재판은 전 씨가 요청한 것이었다.

전 씨의 변호인은 A씨의 가학행위 요구를 피하고자 그의 손발을 묶은 것일 뿐 강간을 하려 한 게 아니었다며 혐의를 전면 부인했다. 그러면서 전 씨가 A씨와 함께 수면제가 든 홍삼액을 나눠 마신 정황을 근거로 들었다. 사건 현장에서 발견된 전 씨의 혈흔 속에서도 수면유도제 졸피뎀이 발견됐던 것이다.

전 씨 측은 또 정당방위 차원에서 A씨에게 망치를 휘둘렀다고 반박했다. A씨가 평소 전 씨에게 상습적으로 폭력을 휘두르고 가학적 성행위를 요구해왔으며, 사건 당일에는 자신의 아내 전화를 전씨가 받자 다시 주먹을 휘둘렀다는 설명이었다.

그럼에도 전 씨가 A씨를 떠나지 못했던 이유는 가족이 따로 없는 그녀에게는 버려진다는 두려움이 컸기 때문이라고 변호인은 변론했다. 전 씨의 어려운 성장과정을 들은 배심원들은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했다.

또 변호인은 전 씨의 정신과 감정의를 증인으로 요청해 “전 씨의 지적능력이 상당히 떨어지는 것으로 보이고 일상을 벗어나면 이에 반응하고 문제를 해결하는데 어려움을 겪는다”는 증언을 끌어냈다.

더불어 그는 “전 씨의 행위가 한치의 의심도 없이 증명됐느냐”고 배심원들에게 말했다. “유죄가 선고되면 피고인은 한국 첫 여성 강간미수자가 됩니다…과연 내가 이 사람을 단죄할 수 있을지 생각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15시간에 걸친 마라톤 재판 끝에 법정에 마침내 나직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배심원들 평결을 존중해 재판부도 무죄를 선고합니다.” 형사합의30부(부장 이동근)의 무죄 선고가 내려지자 전 씨는 마침내 그간 참았던 눈물을 터뜨렸다. 두 손에 얼굴을 파묻고 흐느끼다 법정 바닥에 엎드려 재판부에게 절을 한 채 한동안 일어서지 못했다. 배심원 9명이 만장일치로 전 씨를 무죄로 본 것이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A씨는 수면제를 먹은 후 어떤 일이 있었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면서도 자신에게 유리한 부분에 관해서는 일관되게 진술하고 있다”며 “또 전 씨에게 망치로 머리를 맞고 죽음의 공포를 느껴 소변까지 봤다고 주장하지만, 다툼이 끝난 뒤 전 씨의 피를 닦아주고 상처에 반창고를 붙여주는 등 공포감에 빠졌던 사람으로서는 취하기 어려운 태도를 보였다”고 밝혔다.

덧붙여 전 씨의 혈흔에서 수면제 성분이 나온 것도 납득할 수 없다고 설명했다. 재판부는 “전 씨의 혈흔에서도 수면제인 졸피뎀 성분이 검출된 것을 볼 때 전 씨도 당시 수면제를 먹은 것으로 보인다”며 “상대방을 강간하려는 사람이 스스로 수면제를 복용한다는 것은 매우 이례적”이라고 했다. 수면제 복용상태에서 기억했다고 하기엔 지나치게 구체적인 진술도 배심원들에게 의문을 갖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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