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헌의 혁신@미술]<19> "내가 곧 셀럽이다"…예술보다 빛난 '흥행'

▲순수미술에 상업주의 뿌리내린 앤디 워홀
대중시장 겨냥해 미술비즈니스를 '흥행업'처럼
먼로·캠벨수프 등 소재로 '팩토리'서 대량생산
미디어 통해 작품보다 자신알리기 집중하기도
팝아트로 현대미술 영토확장한 파괴자·혁신가
  • 등록 2020-10-30 오전 4:10:01

    수정 2020-10-30 오전 4:10:01

마흔 살의 야심만만한 ‘상업미술가’ 앤디 워홀. 1968년 2월 스웨덴 스톡홀름 현대미술관에서 연 회고전 개막에 앞서 자신의 작품 ‘브릴로 상자’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브릴로 상자’ 역시 태생은 슈퍼마켓이다. 쓰고 버린 상품상자를 가져다가 목수에게 같은 크기로 수백 개를 만들어달라고 주문하고, 실크스크린으로 상표를 제작해 상자의 겉면에 붙여 ‘대량생산’했다.


미술은 사람을 움직였습니다. 밥으로만 채울 수 없는 풍요와 평화를 안겨줬으니까요. 그림의 힘이고 조각의 에너지입니다. 하지만 미술의 역할이 이뿐이라 한다면 미술을 잘못 알고 있는 겁니다. 문명을 이끌고, 의식을 뒤집고, 결정적으로 돈의 흐름을 주도했던, 그것을 못 본 겁니다. 미술의 사조와 양식이 탄생할 때마다 세계경제에는 ‘변화의 그림’이 걸렸습니다. 바로 ‘혁신’을 주도했던 겁니다. 우리 시대의 이야기꾼 이주헌 미술평론가가 이데일리와 함께 그 장면, 장면을 들여다봅니다. ‘미술로 이룬 혁신’의 현장입니다. 매주 금요일 독자 여러분을 아트인문학의 세상으로 안내합니다. <편집자주>


[이주헌 미술평론가] 팝아트의 선구자 앤디 워홀(1928∼1987)은, 순수미술 쪽에서 ‘극혐’으로 치던 상업주의를 순수미술의 중심에 뿌리내린 예술가다. 현대미술이 온갖 경계를 타파하며 그 영역을 확장해왔지만, 작가 스스로 상업주의와의 경계를 허물고 그것을 새로운 예술이라고 부르리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런 점에서 워홀은 전례가 없는 파괴자이자 혁신가였다.

전통적으로 사람들은 미술가들이 돈에는 큰 관심이 없는, ‘꿈을 먹고 사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미술가들 자신도 예술을 하며 돈을 앞세우는 것을 수치스러워했다. 하지만 워홀은 달랐다. 그는 앞장서서 돈을 추구했고, 돈이 예술에 의미를 더해준다고 믿었다. 돈과 관련해 그는 이런 말을 했다.

“난 평생 싸구려 스와치 시계를 차고 다녔지만 돈으로 다 해결할 수 있을 때 가장 행복했다. 돈은 내게 순간을 결정하는 기회일 뿐 아니라 감정의 원천이다. ‘내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게 뭘까’라는 질문이 돈을 그리게 했다. 예술도 근본적으로 돈을 통해 아름다움을 획득한다.”

그런 그였기에 워홀은 자신을 뼛속까지 ‘상업미술가’라고 생각했다. 오로지 순수만을 부르짖는 예술가들은 그에게 아무런 감흥을 주지 못했다. 반대로 그에게 적대적인 예술가들은 그를 예술을 이용해 오로지 돈과 잇속, 인기만 챙기는 ‘사악한 인간’으로 여겼다. 예술의 이름으로 미술을 타락시키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워홀이 1968년 6월 3일 밸러리 솔라나스라는 여성의 총에 맞아 죽을 뻔했을 때 동시대의 거장 프랭크 스텔라조차 “로버트 케네디는 죽고 워홀이 살아나다니!”라고 한탄할 정도였다(로버트 케네디 미국 대통령은 워홀 사건 이틀 뒤인 6월 5일 저격당해 다음 날 사망했다).

△워홀, 자신을 뼛속까지 ‘상업미술가’라 여겨

지금도 워홀의 예술을 비판적으로 보는 미술인이 없지 않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적극적으로 돈을 추구한 이답게 그의 작품은 갈수록 고가에 팔리고 있으며, 그가 간판 역할을 한 팝아트는 현대미술의 주류 가운데 하나로 확고히 뿌리를 내렸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가 행한 ‘성공방정식’을 따라 철저히 상업주의적인 방식으로 화단에서 성공한 미술가들 또한 급격히 늘어났다.

워홀은 1928년 8월 6일,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피츠버그에서 광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21세에 뉴욕으로 가 일러스트레이터로 성공한 그는 1950년대 ‘소비자혁명’의 힘을 보면서 자신과 같이 상업미술을 전공한 사람도 얼마든지 순수미술 쪽에서 큰 활약을 할 수 있으리라는 확신을 얻었다.

상업의 영역에서 순수의 영역으로 넘어온 사람답게 그는 자신의 작품을 마케팅하고 홍보하는 것뿐 아니라 창작활동까지도 철저히 비즈니스적으로 접근했다. 워홀의 발상이 놀라운 것은, 기본적으로 비즈니스 자체가 예술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는 “비즈니스를 잘하는 것이 최상의 예술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실크스크린과 채색을 병행해 완성한 앤디 워홀의 ‘자화상’(1986)이다. 워홀의 다른 ‘자화상’들과 달리 마치 네거필름처럼 제작한 것이 특징이다. 30.4×25.5㎝ 규모의 작품은 2018년 국내 한 미술품 경매에서 10억원에 팔렸다(사진=이데일리DB).


워홀은 자신의 ‘미술 비즈니스’를 일종의 연예산업, 곧 흥행업처럼 생각했다. 제아무리 상업적 센스가 있다 하더라도 미술을 흥행업이라고 생각한 미술가는 이제껏 없었다. 흥행업은 무엇보다 대중을 상대로 하는 비즈니스다. 반면 미술품 거래는 소수의 부유한 엘리트를 상대로 하는 비즈니스다. 전통적으로 비평가, 큐레이터, 아트딜러 등으로 이뤄진 폐쇄적인 이너서클에서 그 명성과 가치가 결정된다. 그러나 워홀은 자신의 작품을 ‘엘리트시장’이 아니라 ‘대중시장’을 겨냥한 상품처럼 만들었고, 그 마케팅 방식을 활용해 시장가치를 높이고, 나아가서는 그렇게 해서 얻은 상징자본으로 이너서클에도 영향을 줘 궁극적으로 미술사적 가치마저 높게 평가되도록 만들었다. 총체적인 흥행의 성공을 이끌어냈던 것이다. 그는 흥행의 귀재였다.

“박스 오피스가 엄청나다는 건 ‘대흥행’을 의미한다. 당신은 1마일 떨어진 곳에서도 그 냄새를 맡을 수 있다. 그 단어를 더 많이 소리 내어 말하면 냄새는 더 짙어지고, 냄새가 짙어질수록 더 크게 흥행한다.”

△“앤디 워홀의 가장 위대한 작품은 앤디 워홀 자신”

흥행사로서 그는 자신의 작품 소재를 최대한 대중들에게 인기가 있거나 대중적인 소재로 한정했다. 마릴린 먼로나 엘리자베스 테일러 같은 ‘셀럽’, 코카콜라나 캠벨수프 같은 인기 소비상품, 미디어에 오르내린 각종 사건이나 사고의 이미지들이 그 대표적인 사례다. 복잡하고 관념적인 것, 고급문화와 관련한 것은 의도적으로 배제했다. 물론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이나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최후의 심판’ 같은 순수미술의 걸작을 활용한 작품도 있지만, 사실 이들 걸작도 워낙 유명해 이미 대중들에게는 ‘셀럽’ 같은 것이었다.

작품 수용의 측면에서는 미술관이나 갤러리 같은 전시장 못지않게 매스미디어를 통한 소통을 중시했다. 미디어가 자신의 작품을 자주, 크게 다루도록 하기 위해 그는 스스로가 셀럽이 돼야 한다는 사실을 일찍부터 깨달았다. 그러니까 작품만 부각하고 예술가는 조명 뒤로 숨는 게 낫다는 전통적인 사고를 버리고, 작품 자체보다 자기를 알리는 데 더 많은 에너지를 썼다. 그래서 젊은 날부터 ‘앤디 슈트’라고 불리는 튀는 옷을 입고 가발까지 써서 누구라도 한 번 보면 결코 잊지 못할 독특한 페르소나를 창조했다. 자연히 시간이 흐를수록 더 많은 미디어의 주목을 받은 그는 결국 “앤디 워홀의 가장 위대한 작품은 앤디 워홀 자신”이라는 말까지 듣게 된다. 종내는 그 스스로가 그의 예술의 표본이자 척도가 돼버렸다.

국내 한 갤러리가 연 ‘팝아트’ 전에 걸린 앤디 워홀의 ‘마릴린 먼로’ 연작. 워홀이 캠벨수프·코카콜라 등 인기 소비상품과 함께 제작한 ‘셀럽’ 시리즈 중 하나다. 먼로를 비롯해 엘리자베스 테일러, 엘비스 프레슬리, 마오쩌둥 등은 워홀이 즐겨찾은 ‘단골 유명인’이었다(사진=이데일리DB).


워홀은 ‘비즈니스맨’답게 작품제작 과정 또한 매우 효율적으로 관리함으로써 생산성을 높였다. 그는 전통적인 회화 제작 방식을 버렸다. 주로 실크스크린 판화에 기초한 형식으로 작품을 제작함으로써 기계적인 방식이 주가 되게 했다. 이렇게 하니 작품을 빠른 시간에 다량으로 생산할 수 있었고, (많은 부분을 자신이 직접 하지 않고 조수들에게 맡겼어도) 작품의 질 또한 일정하게 유지할 수 있었다. 자신의 작업실을 워홀은 ‘팩토리’, 곧 공장이라고 불렀다.

△1960년대 비틀스와 함께 팝문화 이끈 쌍두마차 평가

이처럼 미술하고는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철저히 상업적인 마인드로 미술에 접근한 워홀은 바로 그 전략으로 철옹성 같던 순수예술의 높은 벽을 허물어뜨렸고, 결과적으로 대중이 미술에 보다 쉽고 편하게 접근하게 함으로써 ‘미술의 영토’를 확장하는 공을 세웠다. 경직돼 있던 미술에 대한 관념이 그로 인해 ‘경천동지’할 정도로 바뀌어서 사람들은 이전에 비해 훨씬 개방적이고 유연하며 자유로운 시각으로 예술을 즐길 수 있게 됐다.

미술을 대중의 품에 안긴 그의 이런 성취를 기려 ‘라이프’지 1969년 송년호는 커버스토리 ‘1960년대-격동과 변화의 10년’에서 워홀을 비틀스와 함께 당대의 팝문화를 이끈 쌍두마차로 평가했다. 순수예술계(?)에 속한 인물이 당시 세계 최고 팝스타와 동급의 스타로 인정받은 것이다. 비록 그는 세상을 떠났지만 그에 대한 대중의 인식은 지금도 강하게 살아 있어, 대중을 대상으로 그가 만든 이미지에 대한 인지도 조사를 해 보면 헬로키티 이미지와 거의 동급으로 나온다. 워홀이 제작한 이미지를 담은 의상, 팬시상품, 가구 등이 지금도 계속 출시되는 이유다.

물론 고가의 작품을 거래하는 미술시장에서도 그는 여전히 환영을 받는다. 현재 최고가를 기록하고 있는 작품은 2008년 거래된 ‘여덟 명의 엘비스’로, 인플레이션율을 감안해 계산하더라도 2019년 미국 달러화 기준으로 1억 1870만달러(약 1394억원)에 이른다.

※ 캠벨수프 통조림(Campbell’s Soup Cans)

1962년 7월 미국 로스앤젤레스 페러스갤러리에 낯선 장면이 펼쳐졌다. 뜬금없이 통조림 32개가 등장한 것이다. 동네 슈퍼마켓에 진열한 상품과 다를 게 없었다. 각기 다른 32가지 맛이 담긴 수프 통조림 세트. 물론 슈퍼마켓의 그것들과는 확연히 달랐다. 실물이 아니라 인쇄물이었으니까. 그럼에도 식료품 진열대를 만들고 진짜 수프 통조림인 양 하나하나 선반 위에 올려 전시했다. 이것이 바로 이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통조림이 된, 앤디 워홀의 ‘캠벨수프 통조림’이다. 워홀의 새로운 시도가 늘 그랬듯, 세간의 조롱을 있는 대로 다 받으며 한 개당 100달러씩 판매했던 그 ‘작품’(당시 진짜 캠벨수프 통조림은 캔당 29센트였다)은 전시에서 32개 중 6개가 예약판매가 됐다. 하지만 작품의 진가를 알아보는 이는 늘 따로 있는 법. 갤러리 디렉터이던 어빙 블럼이 6개에 대한 예약판매를 일일이 취소시키고 32개 모두를 1000달러(약 113만원)에 사들인다. 그 뒷이야기는 알려진 그대로다. 33년 뒤인 1995년 ‘캠벨수프 통조림’은 뉴욕현대미술관(MoMA)에 1450만달러(약 164억 4000만원)로 몸값을 높여 다시 팔렸다. 워홀을 더 유명하게 만들고, 워홀에 의해 더 유명해진 캠벨수프는 이후 ‘캠벨수프 통조림’ 100개 연작, 찢어진 라벨과 찌그러진 통조림 등으로 변주를 이어가며 워홀이 주도한 미국 팝아트의 핵이 됐다.

미국 뉴욕현대미술관(MoMA)이 전시 중인 앤디 워홀의 ‘캠벨수프 통조림’. 워홀의 대표작이자 대중의 소비문화를 현대미술 영역으로 끌어들인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뉴욕현대미술관은 1962년 32점 연작으로 제작한 작품을 1995년부터 소장해왔다.


△이주헌 미술평론가는…

미술로 삶을 보고 세상을 읽는다. 좀 더 많은 이들이 미술을 통해 일상의 풍요를 누리도록 글 쓰고 강연하는 일이다. 소명으로 여긴다고 했다. 발단이 있다. 홍익대 미대에서 서양화를 전공한 뒤 돌연 일간지 기자가 되면서다. 그림에 관심을 잃어서가 아니라 그림을 막은 생계 때문이었다. 낮에 일하고 밤에 그리자 했다. 하지만 ‘투잡’은 쉽지 않았다. 미술담당 기자생활에서 얻은 필력과 생각을 가지고 현장으로 나왔다. 미술을 대중과 제대로 연결하는 미술평론가의 ‘진정한’ 역할, 그것을 해보자 했다. 그렇게 가나아트 편집장을 하고, 학고재 관장을 오래 한 뒤 서울미술관 초대관장까지 지냈다. 지금은 양현재단 이사로 있으면서 온전히 글과 강연에만 집중하고 있다. 지은 책이 수십 권이다. 굳이 대표작을 꼽자면 ‘신화의 미술관’(2020), ‘리더의 명화수업’(2018), ‘역사의 미술관’(2011), ‘지식의 미술관’(2009), ‘50일간의 유럽미술관 체험 1·2’(2005)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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