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일리 김미경 기자] 화성 침공이 계획되던 시절 병력을 주둔시킬 목적으로 만들어진 작은 우주섬 ‘사비’. 침공 계획이 흐지부지되면서 이곳은 폭력과 비리가 판치는 그저 그런 도시가 됐다. 인공중력을 만들어내느라 빠르게 자전하는 탓에 사비에서는 사실상 장거리 저격이 불가능하다. 날아가는 총알이 전항력의 영향을 받아 휘어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확히 과녁에 명중시키는 ‘천재 킬러’가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소도시 사비가 동요하기 시작한다.
장편소설 ‘우주섬 사비의 기묘한 탄도학’(자이언트북스)의 줄거리 일부다. 마치 1980년대 홍콩 누아르 영화를 보는 듯한 작품은 배명훈(44) 작가가 영상화 작업을 염두에 두고 쓴 첫 소설이다.
| 한국 과학소설(SF)의 이정표가 된 배명훈 작가가 최근 서울 올림픽공원에서 신작 장편소설 ‘우주섬 사비의 기묘한 탄도학’ 출간 인터뷰에 앞서 책을 들고 사진을 찍고 있다. 배 작가의 이번 신작은 소속 에이전시인 블러썸크리에이티브가 CJ ENM과 손잡고 기획한 ‘언톨드 오리지널스’ 시리즈의 첫 작품으로, 영상 콘텐츠로 확장하는 것이 목표다(사진=이데일리 김태형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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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 작가의 일곱 번째 장편소설이자, 소속 에이전시인 블러썸크리에이티브가 CJ ENM과 손잡고 기획한 ‘언톨드 오리지널스’(Untold Originals) 시리즈의 첫 작품이다.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의 원천 지식재산권(IP) 발굴을 위한 프로젝트로, 먼저 단행본으로 출간한 뒤 이를 영상 콘텐츠로 확장하는 것이 목표다.
배 작가는 이번 프로젝트의 첫 시작을 맡았다. 2009년 기념비적인 첫 책 ‘타워’ 출간 이후 자신만의 독자적 세계를 구축하며 문단과 독자를 홀린 배 작가의 새로운 도전이기도 하다. 배 작가를 필두로 블러썸크리에이티브 소속 소설가 김중혁, 천선란, 김초엽 등이 참여할 예정이다.
신간 출간에 맞춰 최근 이데일리와 만난 배 작가는 “늦게나마 드라마 ‘스물다섯, 스물하나’를 정주행하고 있는데, 내 작품 속 주인공을 생각해보지는 않았지만 문득 배우 김태리와 잘 어울리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면서 “웃기고 코믹한 영화나 드라마를 즐겨본다”고 웃었다.
제2의 영상 저작물을 전제로 한 만큼 기존 소설 작법과는 다르게 접근했다. 그는 “소설을 쓰는 방법과 영상 장면을 쓰는 접근법은 다르다. 소설은 내면 묘사나 설명을 길게 할 수 있지만, 영상은 카메라로 찍을 수 있도록 장면화해 바꿔야 했다”면서도 “단행본을 출간해야 하는 만큼 소설로 남아 있을 수 있게 선을 찾는 작업이 까다로웠다”고 회상했다.
캐릭터 중심으로 모든 이야기를 그려나가야 하다 보니, 그 기준을 염두에 두고 쓰는 작업자체가 난관이었다. “재미있는 캐릭터를 많이 만들려고 했어요. 설명을 줄이는 대신 장면을 많이 넣었고요. 과학소설(SF) 장르다보니 구현 가능성을 감안해 너무 복잡하지 않으면서도 볼거리를 갖추는데 시간을 할애했습니다.”
이번 소설을 쓰는데 걸린 총 소요 시간은 대략 1개월 반. 배 작가에게도 이번 작업이 새로운 시도였지만 단숨에 써내려간 셈이다. 그는 “평소 중장편 소설을 마감하는 데 걸리는 시간과 비슷하게 마무리했다. 영상화 작업을 고려한 작품인 만큼 시행착오를 고려하면서 썼는데 계획대로 된 것 같다”며 “구상을 오래하고 집필이 짧은 편이다. 이야기 흐름이 반 이상 정립된 후에 쓴다”고 언급했다.
| 배명훈 작가의 신작 장편소설 ‘우주섬 사비의 기묘한 탄도학’ 책 표지(사진=자이언트북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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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리 쓰는 만큼 다작 작가이기도 하다. 서울대 외교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취미로 글을 썼다는 그는 2004년 대학문학상을 받았고, 2005년 친구의 제안으로 출품한 ‘스마트D’로 SF공모전에 당선되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첫 작품집 ‘타워’(2009년)가 출간 첫해 1만부 가량 팔리면서 한국 SF소설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었다는 평을 받았다. ‘타워’가 절판되고 나선 한동안 중고정가의 다섯배 이상 가격으로 거래됐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배 작가 작품의 힘은 낯선 공간이지만 현대사회에서 여전히 유효한 문제들을 담고 있는 ‘리얼’한 SF소설이라는 데 있다. 가상의 세계를 통해 지금, 여기, 우리의 삶을 포착한다.
그에게 작가 자신의 작품 세계에 대해 물었다. “경쾌하고 밝은 이야기”라는 짧은 답변이 돌아왔다. 그는 작가의 말에서 “한편의 이야기를 이끌어가다 보면 중요한 기로에서 나 또한 자주 그런 고민과 마주친다. 무겁게 풀어낼까. 경쾌하게 풀어갈까. 결국 신나는 스텝을 선택하고 만다”, “세상의 부조리를 다루고 있지만, 입꼬리가 비틀어지지 않는 상쾌한 웃음, 웃을 사람이 누구고 웃음의 대상이 누구여야 하는지 헷갈리지 않는, 건강하고 소박한 유머감각 같은 것들”, “문학이 유쾌해도 좋다는 믿음, 덕분에 소설 쓰기가 지긋지긋하지 않다”고 적었다.
“독자들에게 즐거운 이야기를 들려드리고 싶어요. 해피엔딩으로 마무리하는 게 더 어렵거든요. 그것이 제 역할인 것 같아요. 비꼬지 않은 모습이었으면 좋겠어요. 그럼에도 그냥 웃고 넘어가는 게 아니라, ‘우리 그럼 어떻게 살아야 하지?’ 그런 질문을 던지고, 자기 질문에 답할 수 있는 소설이면 좋겠습니다.”
| [이데일리 김태형 기자] 배명훈 소설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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