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가 채림이 서울 종로구 삼청로 학고재갤러리 개인전 ‘옻, 삶의 한 가운데’에 건 자신의 작품 ‘수화’(2018) 연작 앞에 섰다. 동그란 나무판에 전시한 작품들 중 일부를 떼어낸 듯한 다채로운 색감·질감의 옻칠 배경을 깔고 자개·진주·은 등으로 나무를 만들어 심었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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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일리 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완성’만 꺼내놨다. 윤기 잘잘 흐르는 매끈한 결정체로. 예술을 한 건지 노동을 한 건지, 시간은 얼마나 걸렸고 몇번이나 그만두려 했는지, 어떤 갈등이 있었고 무슨 타협을 찾아냈는지, 고통스러운 과정은 늘 뒤로 숨겼다. 하긴 한보따리 풀어놓는다고 쉽게 이해시킬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맞다. 창작의 괴로움을 말하는 거다. 사실 이 문제에 관해 뒷짐 진 채 듣고만 있을 작가가 어디 있겠나. 연차 불문, 장르 불문하고 작품보다 더한 수식과 은유까지 곁들일 수 있다. 하지만 여기 유독 그 정도가 심한 작업이 있다. ‘옻’이다. 30∼40회씩 칠하고 말리기를 거듭하는 인고가 ‘유난스러워’서다. 한끗 차로 독이 되고 약이 되는 성향이다 보니 그 앞에선 감히 내 성질을 고집할 수도 없다.
한 해 통틀어 몇 번 만날 수도 없는 그 작업이, 그것도 공예품에나 등장해 ‘낡은 전통’으로 제쳐뒀던 그 작업이, 전혀 다른 형체를 입고 불현듯 세상에 나온 것은 2014년. 나무판에 꽉 들어찬 그림으로 말이다. 단순히 회화로만 볼 것도 아니었다. 옻칠 그림 위에 자개를 얹고 보석까지 박아냈으니까. ‘부조 같은 그림’이어서 드물었고, ‘보석을 품어낸 그림’이어서 희귀했다.
| 채림의 ‘꿈결 같은’(2018). 옻칠한 나무판에 호박·산호·비취·진주·터키석·청금석·호안석·아콰마린·핑크오팔·은 등 온갖 보석으로 키워낸 나무 한 그루 심었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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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응을 먼저 보인 것은 되레 해외 갤러리였다. 파리·런던·뉴욕·싱가포르·베니스·바르셀로나 등 주요 도시의 유수 갤러리에서 번갈아 개인전과 그룹전 계획을 알려왔고 ‘보석 품은, 자개 끌어안은 옻 그림’이 연이어 날아갔다. 그중엔 런던 사치갤러리도 있었다. 상상이 충분히 되는 장면이다. 국내에선, 미대를 졸업하지 않은, 불문학을 한 데다 보석디자이너였다는 그이를 애써 반겼을 리가 없으니까.
어찌 됐든 지난 7년여의 과정이 참 고단했을 법도 한데, 지치질 않나 보다. 그 성과에 안주할 만도 한데, 그게 또 안 되나 보다. 2014년 이후, 해외를 제외하고 국내서만 다섯 번째인 개인전에 또 그 ‘완성’을 내보였다. “실험은 아직도 진행 중”이라고 했다.
| 채림의 ‘꿈결 같은’(2018)의 디테일. 입체감이 돋보인다. ‘부조 같은 그림’이어서 드물고, ‘보석을 품어낸 그림’이어서 희귀한 작품이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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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석디자이너에서 ‘옻 그림’ 작가로…삶 한가운데
옻 그림 작가 채림(58). 서울 종로구 삼청로 학고재갤러리 ‘옻, 삶의 한가운데’ 전은 그이의 실험이 정점에 오른 작품 144점을 건 자리다. 옻칠에 기반을 둔, 멈추지 않는 고안이 만든 조형적 실험 말이다. 특히 이번 전시에선 한층 ‘현대미술작가’다운 면모를 드러냈는데, ‘지태칠’이란 옻칠의 한 기법을 선뵌 거다. “한지로 만든 오브제에 점성과 접착력이 강한 옻칠로 마감하는 것을 지태칠이라 한다”는 설명이 따라나왔다. 화면의 어느 한 부분에 오톨도톨 박힌 심지가 보이는데, 때론 두꺼운 때론 얇은 한지를 밀고 접고 때려 ‘변형’을 만들어낸 것이다. 흙의 움직임을 포착한 듯한, 나무뿌리가 엉킨 채 땅 위로 치고 오른 듯한 입체감. 이 꿈틀대는 연작에 작가는 ‘대지’(2021)란 타이틀을 붙였다.
| 작가 채림이 서울 종로구 삼청로 학고재갤러리 개인전 ‘옻, 삶의 한 가운데’에 건 자신의 작품 ‘대지’(2021) 연작 앞에 섰다. 화면 하단에 오톨도톨 박힌 심지가 보이는데, 한지를 밀고 접고 때려 ‘변형’을 만들어낸 ‘지태칠’ 기법이다. 장식보다 회화에 좀더 충실한 작품이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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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명이 된 ‘삶의 한가운데’(2021) 연작도 이번 전시의 또 다른 성과다. 지태칠 작업보다 상대적으로 매끈한 질감과 다채로운 색감에는 땅보단 바다를 즐겨 내보이는데. “제주를 시작으로 여수·통영 등 한국의 풍경을 담는 이른바 ‘아리랑 칸다빌레’ 프로젝트의 일환”이라고 소개를 했다. 목판에 삼베를 올리고 옻칠로 마감한 서정적인 반구상의 여정이 파노라마처럼 흐른다.
작가 특유의 ‘보석을 입힌 옻’은 연작 ‘꿈결 같은’(2018), ‘바람 부는 풍경’(2018), ‘꽃이 피는 풍경’(2018), ‘하늘, 바다 그리고 시’(2020) 등에 실어냈다. 진주·은·산호·비취·호박·터키석·자개 등을 올렸는데 이 귀한 보석들은 한 그루 나무 몸통과 줄기로(‘꿈결 같은’), 오묘한 푸른빛 바다에 흘러가는 바람으로(‘하늘, 바다 그리고 시’), 하늘과 땅의 경계를 가르는 산등성이로(‘바람 부는 풍경’ ‘꽃이 피는 풍경’) 그 변신이 자유롭다. 나무와 나눈 대화란 뜻의 ‘수화’(2018·지름 48㎝) 연작 17점은 보석 중 보석이라고 할까. 산·숲의 축소판이라 할 동그란 나무판에 꽃과 풀, 나무를 보석으로 심어냈는데, 전시작의 일부를 떼어내 디테일로 꾸린 듯한 구성미가 도드라진다.
| 채림의 ‘수화’(2018) 연작 중 부분. 나무와 나눈 대화란 뜻이다. 17점으로 구성했다. 산·숲의 축소판이라 할 지름 48㎝ 원형 나무판에 꽃과 풀, 나무를 보석으로 심어냈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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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전시를 한눈에 정리한 듯한 ‘요약본’도 있다. 20×20㎝ 소품 105점을 한 데 모아 거대한 대작으로 연출한 ‘멀리에서’(2019∼2021)인데. 거칠고 매끈하고, 어둡고 밝고, 보석이 박히고 한지가 주름을 만들고, 삼베로 포인트를 주고 옻으로 기대치 못한 색을 낸 지난한 과정을 망라했다.
“내 이름에 들어가는 수풀림(林) 때문인가 보다. 나무와 풍경, 숲을 작업하며 나를 담는다고 여긴다.” 그 흔한 나무와 풍경, 숲이지만 작가의 그것은 누구도 들인 적 없는 ‘청정’ 그 자체다.
| 채림의 ‘멀리에서’(2019∼2021) 연작. 20×20㎝ 소품 105점을 한 데 모아 거대한 대작으로 연출했다. 이번 전시작들을 한눈에 정리한 ‘요약본’처럼 보인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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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험하고 가장 값진…옻칠의 마법 사실 그이는 ‘보석디자이너 채림’으로 더 오래 살았다. 독특한 장신구 디자이너로 이름도 알렸더랬다. 각종 공모전과 콘테스트에서 상도 많이 받았다. 그런데 잘 나가던 보석디자이너가 왜 굳이 방향을 틀었을까. “아무데서나 편하게 등장할 수 없는 내 주얼리가 다른 방식으로 세상과 소통케 하고 싶어서”였단다. “자식 같은 작품들이 잠깐 빛을 본 이후 혹여 도난이라도 당할까 어두운 금고 속에 갇혀 있는 게 마음에 걸렸다”는 거다.
사실 작가가 전통에 눈뜬 건 옻 작업을 하기 이태 전쯤이다. 전통 장신구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면서 산호·호박·비취 같은 보석을 끌어들인 거다. 여기에 ‘자개’는 ‘작가의 한 수’였다. 그 장신구를 꺼내놓을 바탕을 궁리하는 단계서 옻칠이 가장 먼저 떠올랐단다. 잘 알려지지 않은 옻의 주요한 성질 중에 ‘접착성’이 있다. 무엇을 갖다 붙여도 착 끌어안아 마치 태생이 한몸인 듯한 형체를 만드는데. 작가가 가장 잘 다루는 보석을 달아낸 것이 무모한 일만은 아니었던 거다. 하지만 대가가 지독한 ‘팁’이었다. 흔히 ‘옻 오른다’는 육체적 고초까지 감수해야 했으니.
| 채림의 ‘삶의 한가운데’(2021). 나무판에 삼베를 올리고 옻칠로 완성했다. 제주를 시작으로 여수·통영 등 한국의 풍경을 담은 이른바 ‘아리랑 칸다빌레’ 프로젝트 작업 중 한 점이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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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채림의 ‘꽃이 피는 풍경’(2018). 나무판에 삼베를 올리고 옻칠로 배경을 만든 뒤 자개·진주·은 등으로 하늘과 땅의 경계, 그 위에 피어난 꽃을 표현했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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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로는 엉뚱한 데서 받았다. 시간이 갈수록, 저 살아갈 온도와 습도를 만나면, 색이 맑아지고 밝아지는 ‘옻칠’의 마법을 본 거다. 옻칠에만 부여할 수 있는 ‘피어난다’ ‘핀다’란 표현을 “경험했다.” 바로 여기서 작가는 “삶의 치유와 회복을 봤다”고 했다. 당장은 고통스럽더라도 환하게 드러낼 때가 반드시 올 거란 얘기다.
“신의 눈물이라고 한다. 옻은 옻나무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내보내는 수액이라 채취할 수 있는 양이 적다. 그러니 작업도 고되고.” 그 ‘신이 눈물’을 짜내는 일이 어떨지 능히 짐작할 수 있을 터. 수려한 자태를 위해 파닥거리는 백조의 발길질이 이보다 험할까. 그렇다고 쉽게 멈출 발길질도 아니지 않은가. 전시는 13일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