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해도 온전하고 찬란한 순간들…오늘을 응원하는 '퍼펙트 데이즈'[스크린PICK]

  • 등록 2024-07-14 오후 1:52:57

    수정 2024-07-14 오후 1:52:57

[이데일리 스타in 김보영 기자] 도쿄 시부야의 공공시설 청소부 ‘히라야마’는 매일 반복되지만 충만한 일상을 살아간다. 오늘도 그는 카세트 테이프로 올드 팝을 듣고 필름 카메라로 나무 사이사이에 비치는 햇살을 찍고, 자전거를 타고 단골 식당에 가서 술 한 잔을 마시고 헌책방에서 산 소설을 읽으며 하루를 마무리한다. 그러던 어느 날, 사이가 소원한 조카가 찾아오면서 그의 반복되는 일상에 작은 변화가 생긴다.

도쿄 시부야 청소부의 반복되는 잔잔한 일상, 올드팝과 필름 카메라를 즐기는 중년 남성. 상업 블록버스터들이 즐비한 7월의 극장가를 떠올렸을 땐 한없이 단출한 소재다. 그럼에도 영화 ‘퍼펙트 데이즈’(감독 빔 벤더스)는 인간에 대한 깊이감 있는 성찰, 감독의 정수를 흡수해 안면 근육의 떨림마저 감정으로 소화해낸 배우의 열연으로 긴 여운을 선사하는 작품이다.

영화 ‘퍼펙트 데이즈’가 누적 관객수 3만명 돌파를 목전에 두며 조용히 독립예술영화 박스오피스에 울림을 주고 있다. 지난 3일 개봉한 ‘퍼펙트 데이즈’는 매일 반복되는 하루를 살아가는 도쿄의 청소부 히라야마(야쿠쇼 코지 분)의 평범하지만 반짝이는 순간을 담은 영화다.

한없이 잔잔해서, 누군가에겐 누추하게 여겨질지 모를 평범한 주인공의 평범한 하루. 하지만 이 영화가 걸어온 길은 평범하지 않다. ‘퍼펙트 데이즈’의 주인공 ‘히라야마’를 맡은 야쿠쇼 코지는 지난해 열린 제76회 칸 국제영화제 남우주연상을 품에 안았다. 에큐메니컬상을 수상한 작품이기도 하다. 칸영화제 경쟁 부문 심사위원이 선정하진 않지만, 에큐메니컬 재단이 별도 심사위원을 조직해 인간 존재를 깊이있게 성찰한 예술적 성취가 돋보이는 작품에 수여하는 상이다. 평범한 중년 남성의 단출한 일과가 평단과 대중에 어떤 에너지를 준 것일까.

‘퍼펙트 데이즈’는 사실 일본의 비영리단체 닛폰 재단이 도쿄의 공공 화장실 캠페인 ‘더 도쿄 토일렛’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탄생한 작품이다. 안도 타다오 등 일본의 세계적 건축가와 디자이너들이 인식 개선을 위해 공공화장실을 깨끗하고 안전하며 감각적인 디자인으로 바꾸는 캠페인이다. 빔 벤더스는 이 캠페인과 관련한 다큐멘터리 연출을 의뢰받았으나, 다큐가 아닌 공공화장실이 등장하는 장편 극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역제안을 함으로써 이 영화가 기획됐다. 야쿠쇼 코지가 영화에 대한 각별한 애정으로 제작에 참여했다. 리허설 없이 단 17일간 촬영을 진행했다.

‘퍼펙트 데이즈’는 약 일주일의 흐름으로 추정되는 히라야마의 반복되는 하루, 같은 일상 속 미묘한 변화들을 진지하게 따라간다.

히라야마의 하루는 지독하리만치 똑같은 일과의 연속이다. 해가 채 뜨지 않은 새벽, 동네 할머니가 골목 길바닥을 빗자루로 청소하는 소리를 알람 삼아 눈을 뜬다. 일어나자마자 이부자리를 정리한 후 침실 쪽방 문을 열어 화초에 물을 주고 부엌의 좁은 싱크대에서 양치와 세수를 한 후 수염을 다듬는다. 청소 작업복으로 갈아입고 현관문 앞에서 지갑, 열쇠, 동전, 시계 등 소지품을 챙긴다. 현관문을 열자마자 하늘을 바라보며 상쾌히 웃어보인다. 집 앞 자판기에서 늘 마시는 캔커피 하나를 뽑아들고 청소도구가 가득 실린 차에 올라탄다. 차 안에는 히라야마가 좋아하는 올드팝 가수들의 카세트 테이프가 가득 쌓여있다. 그날 기분에 맞는 카세트 테이프를 골라 음악을 들으며 일터로 향한다. 여기까지 판에 박힌 듯 똑같지만, 매일 달라지는 차 안 선곡들로 다른 하루를 그리고 있음을 유추할 수 있다. 누군가는 세상의 더러움이 한데 모인, 가장 낮은 곳이라고도 말하는 공공화장실. 하지만 히라야마는 장인이 한땀 한땀 예술 작품을 만들 듯, 화장실 곳곳을 구석구석 정성스레 청소한다. 점심시간엔 신사가 있는 근처 공원에서 간단히 샌드위치로 끼니를 해결한다. 주머니 안에서 필름 카메라를 꺼내 하늘을 찍는다. 늘 같은 자리에서 올려다 본, 나무 사이사이 비치는 햇살을 렌즈에 담는다. 퇴근하면 동네 공중목욕탕에서 몸을 씻고 지하 상가에 위치한 선술집에서 간단히 술 한잔과 마른 안주를 곁들인다. 집에 돌아오면 중고 책방에서 구입한 책을 읽다 잠이 든다. 쉬는 날의 일상은 조금 다르다. 빨래를 하고 필름 사진의 인화를 맡기며, 중고 책방에서 윌리엄 포크너, 파트리샤 하이스미스 등 작가들의 책을 구입한다. 자전거를 타고 자신에게 관심이 많은 중년의 여사장이 운영하는 낡은 바에 들른 뒤 귀가해 하루를 마무리한다.

지루할 만큼 반복되는 하루들을 영위하나, 히라야마는 그 자체로 충만한 듯 늘 잔잔한 웃음을 머금고 있다. 화장실 청소부인 자신을 무시하는 사람들, 청소 중에 불쑥 들어오는 취객, 제대로 일하지 않는 청소부 동료를 마주할 때도 미소를 잃지 않는다. 현실에 불평하는 대신 고단함을 달랠 ‘소확행’들을 발견하며 자신의 하루를 충만히 채운다. 예컨대 자신에게 손을 흔들어준 어린 꼬마, 청소하다 발견한 쪽지, 느티나무 아래에 자그맣게 핀 어린 새싹 같은 것들이다.

금욕적이면서도 단조롭던 그의 일상은 여동생의 딸인 조카가 찾아오며 작은 변화를 맞이한다.

히라야마가 일상을 되풀이하며 마주하는 많지 않은 사람들, 그들과 최소한으로 나누는 대화, 드러내진 않지만 표정으로 유추할 수 있는 그들의 말 못 꺼낼 사연들까지. ‘퍼펙트 데이즈’는 극 중 히라야마가 나뭇잎 사이사이에 비친 햇살을 매일 필름 카메라로 찍어 쌓아 올리듯이 그것들을 묘사한다. 영화의 엔딩크레딧이 모두 올라가면, 자막으로 등장하는 ‘코모레비’란 단어가 이 영화의 주제를 함축한다. ‘흔들리는 나뭇잎 사이 일렁이는 햇살’로, 바로 그 순간에만 존재한다는 뜻이다. 매일 똑같아 보이는 히라야마의 나뭇잎 사진들을 겹쳐보면 다른 그림이 나오듯이, 반복되는 히라야마의 일상 안에도 미묘한 변화와 자극들이 있다. 남들 눈에 한없이 평범하고 누추할지언정 똑같기만 한 하루는 없다. 지겨운 매일을 버티며 웃음을 잃지 않는 히라야마의 삶의 태도 역시 결코 쉽게 지켜지는 게 아니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세상에서 외로이 고군분투를 펼치고 있다. 그럼에도 지금을 살아가는 인간의 삶이 가장 아름다운 이유다.

영화 말미 클로즈업으로 비춰지는 히라야마의 엔딩신이 압권이다. 야쿠쇼 코지는 최소한의 대사, 섬세한 표정 변화를 통해 히라야마의 심정을 온몸으로 전달함으로써 그 자체가 영화의 메시지가 됐다. 칸 남우주연상에 이견이 없을 경이로운 열연이다. 그 마지막 2분이 긴 여운을 남기며 히라야마가 택한 삶의 태도와 방식에 생각할 거리를 안겨준다.

‘파리, 텍사스’, ‘베를린 천사의 시’, ‘부에나 비스타 소셜클럽’ 등을 선보이며 세계 영화제를 석권한 빔 벤더스 감독의 영상미, 적재적소에 배치한 60~80년대 올드팝 OST 음악이 영화의 품격을 끌어올린다. The Animals의 ‘The House Of the Rising Sun’부터 Lou Reed의 ‘Perfect Day’, Nina Simone ‘Feeling Good’ 등 명곡들이 아련함을 선사한다.

3일 개봉. 124분. 빔 벤더스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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