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수와 딥토크 1] 비운의 천재? 앞으로가 중요하다

  • 등록 2007-11-02 오전 11:49:09

    수정 2007-11-02 오전 11:54:48


[이데일리 SPN 김삼우기자] 그는 “이상하게 지난 일들을 잘 기억하지 못 한다” 고 했다. 심지어 ”내가 어떻게 축구를 했는지 감감할 때가 있다“고도 했다.

축구계에서 ‘비운의 천재’하면 첫 머리로 이야기되는 김병수(37)의 말이다. 그는 현재 포항 스틸러스의 기술부장으로 일하고 있다. 지난 25일 만난 그는 수원에 있었다. 18일부터 29일까지 열린 2007 험멜코리아 제62회 전국대학축구선수권대회에 출전한 선수 가운데 쓸만한 재목을 찾기 위해서였다. 구단 기술부장 업무 가운데 하나가 선수 스카우트다.

2007 삼성 하우젠 K리그에서 팬들의 관심을 끌어 모은 선수는 고종수(29, 대전)였다. 방황과 좌절을 거듭하다 부활의 가능성을 보였기 때문이다. 고종수가 화제에 오르자 축구팬들의 기억 속에 어렴풋이 떠오른 이가 김병수였다. 고종수가 이름을 올릴 뻔한 ‘한국 축구 비운의 천재’를 대표하는 선수로 회자되기 때문이다.

요즘도 축구팬들은 1992년 1월 27일 열린 92 바르셀로나 올림픽 아시아 최종예선 한일전에서 경기 종료 1분30초를 남기고 그가 터뜨린 결승골을 기억한다. 이 한 골로 한국은 올림픽 본선 진출을 이룰 수 있었다.

하지만 김병수는 그 이전부터 '한국 축구의 희망‘으로 기대를 한 몸에 모았던 천재였다. 경신고 시절부터 천부적인 게임감각과 정교한 패싱, 유연한 드리블, 날카로운 슈팅력, 그리고 득점 감각까지 겸비한 걸출한 재목으로 주목을 받으며 16세, 19세이하 청소년 대표를 비롯 올림픽 대표, 성인 국가대표 등 엘리트 코스를 밟았다. 뛰기만 하면 천재성을 발휘, 각급 대표팀에 이름을 올렸던 그는 당시 ’한국에서 가장 축구를 잘 알고 하는 선수‘로 꼽혔다.

90년 이탈리아 월드컵 대표팀을 이끌었던 이회택 감독(현 대한축구협회 부회장)은 본선 출전에 앞서 전력 보강을 위해 그를 발탁하려다 부상이 회복되지 않은 탓에 이를 이루지 못하자 몹시 안타까워 했을 정도였다. 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는 한국의 본선행을 주도한 뒤 부상으로 본선에는 참가하지 못하는 불운을 맛봤다.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이어진 부상 여파 탓이었다.

결국 한국에선 제대로 꽃을 피우지 못하고 93년 일본 실업축구 나고야 코스모스에 진출했다가 4년여가 지난 뒤 한국으로 돌아왔다. 이후에는 K리그에 복귀하는 대신 지도자로 방향을 돌렸다. 경신고, 포철공고, 고려대 코치 등을 거쳐 2003년부터 포항과 인연을 맺고 코치에 이어 기술 부장을 지내고 있다. 선수 유니폼을 벗은 뒤에는 소식도 뜸해졌다. 가끔씩 불운한 축구 천재 이야기가 나올 때면 그의 이름이 오르내렸다.

▲언젠가는 다시 그라운드로 돌아가야죠

개인적으로 누구보다 큰 시련과 좌절을 겪은 그였지만 그는 여전히 ‘축구는 나의 운명’이라며 성실하게 제 2의 축구 인생을 살고 있었다. “선수 생활을 일찍 마감했지만 오히려 또 다른 눈을 뜨게 된 기회가 됐다“고 말했다.

지금 그가 맡고 있는 기술부장이라는 직책이 우선 궁금했다. 14개 프로구단 가운데 포항이 유일하게 운영하고 있는 직책이다. 수원에 온 이유와 일을 설명하던 그는 그래도 어서 현장에 돌아갔으면 좋겠다고 했다,

“주업무는 유망주 스카우트, 구단이 운영하는 유소년 축구 시스템 관리, 선수 평가, 그리고 외국선수 스카우트나 트레이드시 구단에 조언하는 일 등을 한다. 아무래도 선수 스카우트에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올해부터 이 일을 맡고 있고 또 하다 보니 매력도 있다. 그래도 선수들과 함께 하는 코치일이 더 낫다. 언젠가는 운동장으로 돌아 가야하지 않겠는가”


▲비운의 천재? 앞으로가 중요하다
그리고 ‘비운의 천재’ 이야기를 꺼냈다. 한국 축구사를 말할 때, 아쉬운 선수를 떠올릴때 대부분 그의 이름이 거론될 것이기 때문이다. 역시 그는 자신이 이렇게 기억되는 것을 내켜하지 않았다.

“그런 말이 나올 때 특별하게 생각이 드는 것은 없다. 웃으면서 그런 가보다 하고 넘기는 정도. 자꾸 그런 말이 나오는 것은 좋아하지 않는다. 유쾌하지 않다. 앞으로가 중요하지 지나 간일은 중요하지 않더라. 어떻게 보면 팬들은 한창 때의 나만 생각한다. 안타까워하는 것이지만 지나간 일들일 뿐이다. 실제 심각하게 생각해보지도 않았다. 앞으로 나아가야지. 선수 때와 달리 또 다른 할 일이 많다.”

그의 축구 인생에서 부상은 악몽과 같았을 것이다. 고종수는 ‘부상의 부’자가 나오는 것도 싫다고 했다. 여러 가지 아쉽고 후회스러운 일이 많을 법 했다. 요즘과 같은 재활 시스템의 혜택을 받았다면 그렇게 빨리 선수 생활을 마치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고등학교 1학년때 오른 발목을 다쳤다. 그리고 계속 반복됐다. 원래 발목 구조가 약했나 보다. 물론 당시 재활 프로그램이 잘 되어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은 있다. 주로 압박붕대에 의존하거나 방치되던 때였다. 테이핑하는 것도 별로 없었다. 시대적인 거다.

또 아프고 하면 한게임을 다 뛰지 않고 반 게임을 뛸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하는 아쉬움도 있다. 그랬다면 몸이 그렇게 빨리 상하지 않았을텐데. 어렸던 것 같다. 반 게임만 뛴다는 게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라고도 여겼다. 당시에는 대표팀에 가서도 후보로 있는 일이 자존심 상했던 시절이었다.
 
K리그에서 한번 뛰었으면 하는 생각도 한다. K리그에서는 뛴적이 없었으니까. 그랬으면 최소한 우리 동기들의 반만큼은 못했을까.(김병수의 동기는 서정원 정광석, 김봉수 등으로 대학 졸업 당시 이들이 프로축구 드래프트제에 반발, 집단으로 드래프트를 거부하겠다는 뜻을 밝혀 축구계에 큰 파문이 일었다. 축구계에서는 한국 축구사상 찾아보기 힘들 만큼 기량이 뛰어난 선수들이 대거 포진했다고 평가했다) 다른 쪽에 큰 후회는 없다. 여러 가지일들을 후회하기보다는 긍정적인 방향으로 생각한다. 지도자로서 축구를 보는 지식, 지혜 그런 것들을 빨리 얻을 수 있었으니까.“

▲부상 탓에 한국에서는 운동을 할 수 없었다

한번 부상이 오자 그에게는 일상사처럼 됐다.
“사실 한국에서는 운동을 계속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에 일본에 갔다. 바르셀로나 올림픽 대표팀에서 뛸 때도 한 2년간 쉬다가 3개월 정도 훈련하고 합류했다. 고려대에 가서도 1년 쯤 쉬다가 2주정도 훈련하고 고연전 나가고 하는 일이 되풀이 됐다. 더 쉴 수도 있었지만 연세대와 정기전은 스스로도 너무 뛰고 싶었다. 올림픽 최종 예선을 마치고 난 뒤 무릎이 고장나 또 수술을 했다. 본선에 나갈 수가 없었다. 그때 몸이 한계점에 온 것 같았다.”

93년 일본으로 떠난 것도 결국 부상 탓이었다. 하지만 그는 일본에 갈 수 있었던 일을 행운이라고 말했고 가장 좋았던 때로 기억했다. “아프지 않았으니까”가 이유였다, 한국에서는 도저히 운동을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고 했다.

“고려대 시절 일본에 전지훈련을 갔다. 당시 일본 팀 감독이 나를 좋아했다. 제일은행에 있을 때 수술도 시켜주고 재활하는 것도 도와줄테니 오라고 했다. K리그에 가려면 드래프트를 거쳐야 했는데 자신이 없었다. 팀들도 내가 하도 많이 다치니까 반신반의했다. 그래서 내가 과감하게 포기했다.

일본에서 몇 년간 운동할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자 위안이었다. 가장 큰 차이점은 한국에서는 훈련을 할 수 없었지만 일본에서는 훈련을 하지 않아도 됐다. 훈련 자체가 강하지도 않았고 내가 알아서 훈련을 하도록 프리하게 해 줬다. 훈련을 무리하게 하지 않았다. 그리고 시합에 뛰도록 했다. 훈련 강도가 높고 심했으면 운동을 못했을 것이다.

일본에서는 신뢰도 얻었다. 2년 정도 지나니까 주장을 하라고 시킬 정도였다. 왜 주장을 해야 하느냐고 물었더니 해도 된다고 하더라. 팀은 J리그 진입을 목표로 하고 있었고 같이 가자고 했다. 세레소 오사카 가시와 레이솔 등 당시 일본 실업팀들은 다 그런 과정을 거쳐 J리그로 올라갔다. 하지만 우리 팀은 가장 큰 스폰서가 문제가 생겨 결국 구단이 해체됐다.

일본에서는 스트라이커를 봤다. 팀이 약해서 원래 포지션인 플레이메이커로 활동하는데 한계가 있었다. 어느 날 감독이 스트라이커를 해보라고 했다. 좋은 생각이라고 여기고 열심히 했다. 매력이 있었다."

▲26살 때 뒤가 보였다

그는 일본에서 이렇게 운동할 때인 26살 전후를 축구 인생의 피크였던 것 같다고 했다. 하지만 97년 한국에 돌아와서도 K리그에 가지 않았다. 스스로 몸의 한계를 느꼈기 때문이다.

“일본에서는 아프지 않고 계속 운동을 하다 보니 축구 선수로서 몸이 됐다고 할까, 그런 게 느껴지더라. 그때는 하루도 안 쉬고 꾸준히 훈련했다. 26살 정도가 되니까 뒤가 보이더라. 볼을 잡으면 그림이 그려졌다. 그때가 피크였다. 그리고 즐거웠다.

97년 팀이 해체되고 난 뒤 한국에 돌아왔다. K리그 팀에서 오퍼가 있었지만 스스로 포기하고 98년부터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다. 몸의 한계를 느꼈다. K리그 팀들이 하는 훈련을 할 수 없었다“

김병수는 축구 인생에서 힘들었던 때도 기억에 없다고 했다. 숱한 좌절 탓인지 무의식적으로 지난 일들을 잊어버리려 하는 듯 했다.

“가장 힘들었을 때? 그런 기억도 없는 것 같다. 92년 고려대를 졸업하고 갈 데가 없었을 때가 생각난다. 몸도 아파 수술도 해야 했고, 운동을 그만두려고 했었다. 일본행이 돌파구가 됐다. 제일은행에서 월 80만원 받는 촉탁 신분이었다. 부상으로 1년간 있으면서 마지막 경기에 30분 뛰고 나왔다.

바르셀로나 올림픽 일본전에 대한 감흥도 사실 크게 없다. 그랬던 때가 있었지 하는 정도다. 하긴 그때 큰일을 하긴 했었다.”
 
(사진=김정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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