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족함을 인식하고 있으나 구체적 위법성과 손해는 입증되지 않았다. 정부는 공공시설부터 단계적 개선을 추진해왔다.”(피고 측 대리인)
“법이 동등한 접근권을 보장하라고 했는데, 3~5%대 접근성을 두고 ‘할 만큼 했다’는 주장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조희대 대법원장)
대법원이 23일 장애인의 일상적 시설 접근권을 제한한 정부의 법적 책임을 묻는 첫 전원합의체 공개변론을 열었다. 4시간 가까이 진행된 이날 공개변론에서는 정부가 1998년부터 2022년까지 24년간 장애인편의법 시행령에서 소규모 소매점의 장애인 편의시설 설치 의무를 300㎡ 이상 시설로 제한한 것의 위법성과 국가배상책임을 두고 치열한 공방이 벌어졌다.
|
원고 측 참고인으로 출석한 배융호 한국환경건축연구원 이사는 “회의에 나갔다가 30분을 헤매도 들어갈 수 있는 식당을 찾지 못해 점심을 굶어야 했던 적이 있다”며 “지인과 카페에서 대화하려 했지만 1시간 동안 들어갈 만한 곳을 찾지 못해 길에서 이야기하다 헤어지기도 했다”고 실제 경험을 토로했다.
반면 피고 측 이산해 변호사(정부법무공단)는 “장애 유형은 15가지가 넘고, 소매점 접근권은 다른 권리에 비해 대체 수단이 많다”며 “온라인 구매나 대형마트 이용, 활동보조인 지원 등 다양한 방법이 있다”고 반박했다. 이어 “간이 경사로 설치 시 안전사고 위험과 보행자 통행 방해 등 부작용도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어진 질의응답 순서에서 대법관들은 정부의 책임을 엄중하게 보는 질문을 쏟아냈다. 오경미 대법관은 “교통약자 이동권은 90% 이상 보장하면서 시설 접근권은 5% 미만이라는 불균형을 어떻게 설명할 것이냐”고 지적했다. 권영준 대법관은 “2022년 시행령 개정이 가능했다면 그 이전에도 가능했을 것”이라고 추궁했다.
특히 조희대 대법원장은 “5%도 안 되는 수치를 두고 정부가 ‘할 만큼 했다’고 하는 주장은 도저히 이치에 안 맞는다”며 정부 측 주장의 모순을 지적했다.
|
피고 측 참고인으로서 의견을 제시한 안병하 강원대 법전원 교수는 “접근권 확보를 위해서는 편의점 내부 진열대 간격 조정 등 추가 조치가 필요한데, 이는 시행령만으로 해결될 수 없다”며 “개별 장애인의 구체적 피해 사실이 입증돼야 한다”고 했다.
대법관들은 배상책임 범위에 대해서도 깊이 있는 질문을 이어갔다. 서경환 대법관은 “전국 휠체어 장애인 26만명에게 일률적으로 배상할 경우 막대한 예산이 소요된다”며 현실적 해법을 물었다. 이에 원고 측은 “개인정보 유출 사건의 경우처럼 실제 소송 제기는 매우 제한적일 것”이라며 “상징적 배상으로도 제도 개선의 의미가 있다”고 답변했다.
각계에서 제출된 의견도 다양했다. 대한변호사협회는 “행정입법이 위법하다고 인정되는 이상, 재량권을 이유로 공무원의 고의과실을 부정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건축공간연구원은 “우리나라의 편의시설 기준이 해외보다 낮다고 단정할 순 없으나, 의무 면제 시설에 대한 대체수단이나 인적 서비스 규정이 없는 것은 문제”라고 분석했다.
마무리 변론에서 원고 측은 “1984년 한 장애인이 ‘들어갈 수 없는 식당 화장실, 우리가 살 땅은 어디입니까’라는 유서를 남기고 목숨을 끊었는데 40년이 지난 지금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며 문제의 심각성을 호소했다. 또한 “전체 인구의 30%를 차지하는 장애인, 노약자, 유아차 동반자, 임산부 등 모두의 문제”라고 강조하기도 했다.
피고 측은 “장애인 활동지원법 등 다양한 법과 제도를 통해 접근권 개선을 추진해왔다”며 “국제적 기준에 비춰봐도 정부의 노력이 크게 미흡했다고 보기 어렵다”고 반박했다.
법조계는 대법원이 이번 판결을 통해 행정부의 입법 재량과 기본권 보장 의무 사이의 중요한 판단 기준을 제시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이 사건 선고는 변론 종결 후 2~4개월 내에 이뤄질 예정이다. 이번 전합 공개변론은 2021년 이후 3년만에 진행된 것으로, 조희대 대법원장 취임 이후 첫 전합 공개변론이 이뤄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