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어디 허투루 피는 꽃이 있더냐

곽재선문화재단 기획전 '탈북작가 7인의 블러섬'
일상에서 신는 北 '편리화' 50켤레
밑창에 편지 적어 바닥·벽면 설치
폴로(POLO) 대신 '포로'(PORO) 등
브랜드로고 이용한 시각·언어 유희
회화·사진·설치 60여점 갤러리선서
  • 등록 2024-07-04 오후 2:27:36

    수정 2024-07-04 오후 2:27:36

서울 중구 통일로 KG타워 갤러리선에 펼친 곽재선문화재단 기획전 ‘블러섬’에 참여한 작가들이 전시작을 배경으로 섰다. 왼쪽부터 코이, 강춘혁, 안충국, 전주영, 심수진, 안수민. 7인 작가 중 미국 워싱턴에 체류 중인 조다비 작가만 함께 하지 못했다(사진=이영훈 기자).
[이데일리 오현주 문화전문기자] #1. 떠나면 끝인 줄 알았나 보다. 깨끗하게 지우고 처음부터 다시 그릴 수 있는 세상을 보게 되리라 믿었을 거다. 그런데 아니었다. 이제와서 자꾸 눈앞에 밟힌다니까. 그 생각이 그 마음이 번번이 찾아가는 장소가 생긴 거다. 그리운 옛집이라고. 어린 시절 뒤도 안 돌아보고 몸만 빠져나왔던 그 집이 이젠 캔버스에 들어앉아 붓을 붙든다고 했다(안수민 ‘나의 집’ 외 2024).

작가 안수민이 기획전 ‘블러섬’에 걸린 자신의 작품들 앞에 섰다. 작가 옆으로 ‘나의 집 05’(2023), ‘샤인 3’(2023), ‘샤인 4’(2024)가 나란히 걸렸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안수민의 전시작. 왼쪽부터 ‘나의 집 30’(2023), ‘나의 집 08’(2024), ‘영성S’(2023), ‘나의 집 06’(2024), ‘영성S’(2023)(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2. 작업하고 싶었고 해야 했는데, 재료 살 돈이 없었단다. 넓적한 나뭇잎을 주워다 파내고 새기고 붙이는 일로 예술적 허기를 달래보고자 했다. 그래, 세상에 꽃을 피우는 일이 어디 쉬운 일이겠나. 그 시절 다 이겨내고 이젠 나뭇잎 대신 한지를 쓴다. 그 속에 되레 투명하게 비치는 자신을 심는다(심수진 ‘고난 속에서 피어난 꽃’ 외 2024).

작가 심수진이 기획전 ‘블러섬’에 걸린 자신의 작품들 사이에 섰다. 왼쪽부터 ‘사막에 피는 생명력 9’(2024), ‘가뭄에 피는 생명력 8’(2024), ‘풀밭에 피는 생명력 10’(2024), ‘나무 대문에 피는 생명력 4’(2024), ‘나무 뿌리에 피는 생명력3’(2024)이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심수진의 전시작. 왼쪽부터 ‘고난 속에서 피어난 꽃 3’(2024), ‘고난 속에서 피어난 생명력 2’(2024), ‘고난 속에서 피어난 꽃 4’(2024), ‘고난 속에서 피어난 생명력 6’(2024)(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3. 시멘트가 소리를 낸다는 걸 상상해 본 적 있는가. 그 소리로 세상과 소통을 한다는데. 견고한 바닥과 벽을 만드는 이 물성을 화면에 빌려놓은 뒤에 말이다. 어릴 때 아버지와 같이 미장일을 했던 경험이 떠올랐단다. 시멘트로 공간을 만들고 장소를 지어내던 일. 그 위에 삐죽이 사람을 세운다. 정체성을 찾아가는 자신이란다(안충국 ‘있다’ 외 2024).

작가 안충국이 기획전 ‘블러섬’에 걸린 자신의 작품들 사이에 섰다. 왼쪽부터 ‘기억’(2021), ‘있다 2’(2023), ‘있다’(2024), ‘다른 것을 알았을 때’(2023)이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안충국의 전시작. 왼쪽부터 ‘다른 것을 알았을 때’(2023), ‘다른 것을 알았을 때 2’(2023), ‘마음속 기억’(2019)(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흔치 않은 독백이 묻어나는 작품들. 그저 상상력으로 빚어내는 스토리텔링이 아니라서다. 지독한 현실을 기억하는 손과 붓이 꺼내놓은 거니까. 그래도 짧게는 10년, 길게는 20년이 흘렀다니 이젠 퇴색할 만도 하지 않느냐고 묻는다면, 그건 ‘뭘 몰라서’ 하는 말이다. 경험이란 건 누가 재단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여기 탈북작가 7인의 경험이라면 더더욱 말이다.

푸르지 않던 시절이 있었다. 그 시절을 거슬러야겠다고 했을 때 세상에 드리운 색은 이름조차 잃었을 거다. 그 색이 제자리를 찾는 데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처음에는 철저히 혼자였을 텐데, 이젠 친구도 생겼고 동료도 생겼다. 한데 모이니 목표도 분명해졌다. 지금 발 디딘 땅에 꽃 한번 제대로 피워봐야 하지 않겠느냐는 거다. 곽재선문화재단이 서울 중구 통일로 KG타워 갤러리선에 펼친 기획전 ‘블러섬’(Blossom)은 바로 그 땅이다. 회화·사진·설치작품 60여점을 걸고 세웠다.

서울 중구 통일로 KG타워 갤러리선에 펼친 곽재선문화재단 기획전 ‘블러섬’ 전경. 탈북작가 7인의 회화·사진·설치작품 60여점을 걸고 세웠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때론 한없는 그리움, 때론 치기어린 유머

꽃이 피고 만발한다는 뜻의 ‘블러섬’이란 타이틀 아래 모인 작가는 강춘혁(38), 심수진(45), 안수민(29), 안충국(29), 전주영(40), 조다비(36), 코이(34) 등 7인. 이들 작가는 모두 고향이 한반도 북쪽이란 공통점이 있다. 전주영 작가를 제외하곤 10대에 북한을 탈북했고 중국·몽골 등에서 몇년을 떠돌거나 아니면 곧바로 한국에 정착했다.

그렇다고 전시작이 비장한 일색일 거라 넘겨짚는다면 대단히 섭섭하다. 따뜻한 색과 밝은 터치를 바탕으로 유머와 치기까지 입고 있으니까.

전시의 기획자이자 7인의 리더 역할을 한 강춘혁 작가는 자본주의의 상징이라 할 유명브랜드에 손을 댔다. “평소 좋아하는 브랜드 로고를 이용한 시각적 유희, 언어적 유희를 꺼내봤다.” 가령 ‘나이스’(NICE)가 된 나이키(NIKE)가 하늘을 날며 사람들을 구하고, 폴로(POLO) 대신 ‘포로’(PORO)가, 펩시(PEPSI) 대신 ‘몹시’(MOPSI)가 등장하는 식이다. “멸종된 한반도 호랑이를 통해 자아를 투영”했다는 ‘자화상’(2024)도 있다. 멸종과 함께 멸족의 위기까지 생각해보게 됐다는 거다.

작가 강춘혁이 기획전 ‘블러섬’에 걸린 자신의 작품들 옆에 섰다. 왼쪽부터 ‘투게더’(2024), ‘자화상’(2024)(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강춘혁의 전시작. 왼쪽부터 ‘포로’(2024), ‘맥도망스’(2024), ‘몹시’(2024)(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전주영 작가는 어느 풍경을 재해석한 새로운 공간을 이미지화했다. 언뜻 먼 산과 깊은 물이 차곡차곡 쌓인 흔한 풍경인 듯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전혀 다른 세상이다. 현실과 비현실을 뒤섞은 ‘유토피아’라고 할까. 푸른 산과 푸른 물이 드넓게 펼쳐진 ‘스페이스’(2024), 아는 산과 아는 나무 등을 ‘알 수 없게’ 배치한 ‘다른 공간’(2024)도 있다. “과거에 머물렀던 시간과 장소, 거기서 만들어진 스토리를 통해 소통하려 한다”고 했다.

작가 전주영이 기획전 ‘블러섬’에 걸린 자신의 작품 ‘스페이스’(2024) 옆에 섰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전주영의 전시작. 앞쪽으로 ‘다른 공간’(2023)이 걸렸다. 멀리 뒤쪽으론 ‘휴식’(2024·시계반대방향), ‘무제’(2024), ‘무제’(2024), ‘반복’(2024)이 보인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유일하게 설치작품을 내놓은 코이 작가의 테마는 ‘그리움’이다. 북한에 두고 온 친구 50명에게 짧은 편지를 쓴 ‘여전히 너에게 안부를 묻는다’(2024)다. 작품의 재료가 독특하다. 운동화 50켤레. 그 밑창을 빌려 작가는 하나하나에게 인사를 전하고 있는 거다. “작품에 쓴 운동화는 북한에서 신는 ‘편리화’다. 중국을 통해 구했다. 한국에 온 지 15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사그라지지 않는 ‘그리움’을 썼다.”

기획전 ‘블러섬’에 나온 작가 코이의 작품 ‘여전히 너에게 안부를 묻는다’(2024) 설치 전경(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작가 코이가 기획전 ‘블러섬’에 내놓은 자신의 작품 ‘여전히 너에게 안부를 묻는다’(2024) 앞에 섰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코이의 50켤레 운동화 중 하나. 북한에서 ‘편리화’라 불리는 이 운동화 밑창에는 15년 전 탈북한 뒤 연락이 끊긴 친구 50명에게 보내는 편지가 쓰여 있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사진작품 10여점을 내건 조다비 작가는 국내보다 미국에서 주로 활약한다. 북한에서의 체험, 탈북 중 중국에서 만난 사람, 한국에 살면서 겪은 일 등이 ‘자원’이지만 한계는 없어 보인다. 농부나 어부의 작업, 파도를 넘나드는 어선, DMZ에 걸쳐진 철조망(‘DMZ 1·2’ 2024, ‘노인과 생선’ 2024, ‘외국인 노동자들’ 2024 등)까지 소재로 삼았다. “타인이 바라보는 게 아닌 내가 바라보는 나를 향해 던지는 끊임없는 질문”이라고 했다.

기획전 ‘블러섬’에 나온 조다비의 사진작품들. 왼쪽부터 ‘오솔길’(2024), ‘고기 잡으러 떠나는 배’(2024), ‘DMZ 1’(2024), ‘외국인 어부들’(2024)(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조다비의 전시작. 왼쪽부터 ‘노인과 생선 1’(2024), ‘노인과 생선 2’(2024), ‘외국인 노동자들’(2024)(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감추려고도 드러내려고도 하지 않는다”

풀기도 막막한 사연을 과감히 생략해도 된다면 말이다. 이들 작가가 국내 대학(홍익대 회화과·패션디자인과, 서울디지털대 회화과)에서 미술교육을 받았던 건 재능보다 더한 노력이 옵션인 행운일지도 모른다. 다만 조다비 작가는 다른 길을 걸었다. 중어중문학(국민대)을 전공하고 글 쓰는 사진작가가 됐다.

그 긴 여정의 끝에 이 땅에서 작가로 살며 터득한 건 ‘자연스러운 블러섬’이다. 아마도 이념이나 의식이 들어간 원색적인 도상을 떠올릴, 이들 작가가 자주 맞닥뜨리는 편견에 대한 대응방식이기도 할 텐데. “굳이 작정하지 않는다”는 거다.

지난하게 살아온 배경을 감추려 하지도, 드러내려 하지도 않는다고 했다. 작품이 어떻게 보이도록 의도하거나 작업이 어떻게 비쳤으면 하는 바람을 갖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한데. 20대 동갑내기 두 작가의 생각이 단단하다. “먼저 보는 건 작품이지만, 작품이 보이면 작가가, 작가가 보이면 그 삶이 보이는 법”(안수민)이라고, “완성도라는 건 작가와 작품, 관객이 소통을 이룰 때 높아지는 게 아니냐”(안충국)고 나직이 일러줬다. 전시는 19일까지.

서울 중구 통일로 KG타워 갤러리선에 펼친 곽재선문화재단 기획전 ‘블러섬’에 참여한 작가들이 전시작을 배경으로 섰다. 왼쪽부터 코이, 강춘혁, 안충국, 전주영, 심수진, 안수민. 7인 작가 중 미국 워싱턴에 체류 중인 조다비 작가만 함께 하지 못했다(사진=이영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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