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가지 힌트를 주마. 청년은 듀크대 대학원생이다. 납작 누워 있는 건 학교 경비원의 눈을 피해서다. 봉고차, 엄밀히 말해 포드 이코노라인 중고는 그가 공부를 하며 버티기 위한 진짜 최소 단위. 그렇다면 왜 이렇게까지? ‘빚을 지지 않기 위해서’란다. 좀 더 긴 해명을 들어볼까. “운이 나빠 경비원에게 들키기라도 하면 주차증을 박탈당할 테고 캠퍼스 내 모든 주차장 출입이 금지될 거다. 봉고차에 살 수 없게 되면 남들처럼 아파트를 빌리고 예쁜 커튼을 달고. 그렇게 되면 넉 달 전 나 자신과 한 약속을 깰 수밖에 없다. 다시 빚더미에 빠져들 거다.”
굳이 이럴 이유가 있을까. 요즘은 학자금 대출이란 것이 있지 않나. 게다가 여기는 미국이니 아무래도 상황이 좀더 낫겠지. 맞다. 정확한 지적이다. 학자금. 이 모든 전경은 학자금 대출에서 비롯됐다. 단 상황이 거꾸로다. 대출을 못 받아서가 아니라 대출을 덜컥 받아서 벌어진 사단이란 소리다.
청년의 이름은 켄 일구나스(32). 책은 그가 풀어낸 길고 지난한 사연이다. 첩첩이 기구한 생존기가 쌓이고 쌓인. 대략 감이 잡혔는가. 저자인 일구나스는 학자금 대출에 청춘을 저당잡힌 ‘미국판 삼포세대’다. 그가 빚더미를 헤치고 살아남기 위해 벌인 6년여간의 고군분투기를 눈물나게 쓴 거다. 그러면 이제 시간을 좀 거슬러보자. 2009년 그날 밤에서 4년을 되짚어 올라가는 거다. 다만 그를 이해하기 위한 한 가지의 전제가 필요하다. ‘월든’이다. 200여년 전 인물인 자연주의자 헨리 데이비드 소로(1817∼1862)가 썼다는 그 ‘월든’ 맞다.
▲‘삼포세대’ 미국이라고 예외는 없다
불황과 저성장의 시대에 태어난 것이 ‘죄’다. 원하지 않았다고 항변해도 소용없다. 세상이 그렇게 돌아가고 있으니. 인생을 포기하지 않을 수 없게 몰아세워 삼포세대를 키웠다. 그런데 여기 불타는 의지로 자포자기에 항거하는 ‘실험맨’이 나타난 거다.
그나마 4학년 땐 학생신문 편집자 경력을 살려 전국 25곳 신문사에 인턴지원을 했지만 결과는 ‘전패’. 좌절의 쓴맛을 본 그는 이내 돌변하기 시작한다. 더 이상 안일하게 살지 말자. 빚을 청산하자. 그후 다시 공부를 하자. 이번엔 절대로 빚은 지지 말고.
그때부터 3년여의 처절한 ‘빚 갚기 고행’이 이어졌다. 우선 알래스카로 이주한 그는 트럭 휴게소 청소원, 모텔 잡역부, 여행가이드 등 험하게 몸을 굴리며 수입의 80%를 저축하는 신기를 보여준다. 애초 ‘잉여청춘’에 불과했던 그가 지난 세월을 후회하며 비로소 자아성찰에 나선 순간. 결국 동기는 빚이었다는 얘기다. 학자금 대출 압박에 온몸으로 저항케 한 바로 그 투지란 것이.
▲‘봉고차 인문학’은 계속된다
수도승 같은 생활로 빚 갚기가 끝났다. 이젠 결심한 대로 공부를 할 차례. 학자금 대출을 받지 않고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저자가 이 지점에 옮겨온 것이 바로 소로의 ‘월든’이다. 특히 이 부분. “반드시 더 크고 호화로운 상자를 얻기 위해 돈을 빌리고 자유를 포기할 필요는 없다.”
하버드대를 졸업한 뒤 부와 명성을 좇는 세상을 등진 채 1845년 매사추세츠주 콩코드의 월든 호숫가에 통나무집을 짓고 은둔한 소로. 저자는 봉고차에서 대학원 생활을 한 2년 6개월이 소로가 ‘월든’을 쓰며 자급자족했던 2년 6개월로 비추기를 바랐던 것 같다. 물론 자발적인 건 아니지만 최소한 심정적으로는. 그렇게 주차장 숙식은, 아니 실험은 시작됐다. 다른 사람의 눈을 피해 극도로 소비를 제한하며 비밀스럽게 생활하는 실험.
▲‘빚 사회’ ‘봉고차 월든’ 중 비정상은?
‘대부분 학생은 그저 자신과 사회를 발전시키기 위해 빚을 진다’는 건 저자의 탄식이다. 오로지 교육받기 위해 빚을 져야 했던 그들에게 뾰족한 방안이 있겠는가를 되묻는다. 결국 그들은 “과거로 돌아가도 다른 선택은 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는 거다.
자신의 모든 상황이 종료된 뒤 저자는 소로와 연결된 지점에는 인문학 소양 한 가닥을 건져 올린다. “사람이 단순히 빚이 없거나 소름 끼치는 봉고차 안에서 돈을 아끼며 산다고 자유로워지는 것이 아니”라는 거다. 무엇보다 그동안 자신을 묶어뒀던 그물이 무엇인지 깨달아야 한다고 했다. 다시 말해 이 비싼 대학교육 안에 인문학이 없다면 대학 그 자체도 학자금처럼 그저 하나의 그물이 될 거란 뜻이다.
이제 저자는 4만달러 고연봉 잡지사 기자 제안도 점잖게 거절한 채 자아찾기에 나섰단다. 이 행보가 그에게 끝까지 힘이 될지 아니면 독이 될지는 모르는 일이다. 시절이 이토록 수상하니. 그저 그의 ‘봉고차’가 후대에 길게 읽히는 미학이었으면 하는 것. 오래전 소로의 ‘통나무집’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