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들은 1931~1932년 일제와 해녀조합의 수탈과 착취에 항거한 제주해녀항일운동을 주도했다. 제주해녀항일운동은 연인원 1만7000여 명이 참여한 제주도 내 최대 규모 항일운동으로 평가된다. 법정사항일운동, 조천만세운동과 함께 제주 3대 항일운동 중 하나로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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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 3명은 제주도 구좌면(현 구좌읍) 출생이다. 부춘화 선생은 15세, 김옥련 선생은 9세, 부덕량 선생은 13세에 가족 생계를 위해 해녀 생활을 시작했다.
선생들은 1928년부터 1931년까지 하도보통학교 야학강습소에서 함께 공부하며 근대 항일·민족의식을 깨우쳤다.
이듬해인 1931년 12월 일제의 해녀 착취에 항의하기 위해 선생들이 하도리 해녀 회의에서 대표로 선출됐다.
선생들은 ‘도사의 조합장 겸직 반대, 일본 상인 배척’ 등 요구조건 관철을 위해 제주도사와 직접 협상했다. 위협을 느낀 제주도사는 요구 조건을 5일 내에 해결하겠다고 약속했다.
제주도사가 돌아간 이후 일제는 무장경찰을 출동시켜 1월23일부터 27일까지 해녀 34명과 청년 수십명을 체포했다.
선생들은 경찰에 체포돼 미결수로 수개월간 경찰서 유치장에 수감돼 고초를 겪었다. 부덕량 선생은 고문 후유증으로 몸이 쇠약해져 28세로 사망했다.
정부는 선생들의 공훈을 기리기 위해 부춘화 선생에게 2003년 건국포장을, 부덕량 선생에게는 2005년 건국포장을 각각 추서했다. 김옥련 선생에게 2003년 건국포장을 수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