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손숙 "새끼 잃은 어미 어찌 소리 내 울랴"

이데일리가 만난 문화인 ⑧ 배우 손숙
''나의 가낭 나종 지니인 것'' 1인극
고 박완서 작가 자전적 작품
억눌린 슬픔 전달하고 싶었다
배우 인생 50년, 은퇴는…
무대 서는 매일이 전성기
몸 움직이는 한 계속할 것
  • 등록 2012-09-03 오후 12:37:04

    수정 2012-09-03 오후 12:37:04

배우 손숙(사진=권욱 기자 ukkwon@)


[이데일리 오현주 기자] 닮은 듯 다르다. 진중함 뒤에 언뜻 비추는 다분히 소녀적인 이미지가 닮았다. 정이 많으나 결코 흐트러지지 않은 깔끔한 성품도 닮았다. 그러나 한쪽에선 억척스럽게 삶을 뚫으려는 의지가 뻗쳐 나온다. 반면 다른 한쪽에선 한발 물러난 관조가 풍긴다. 이 차이는 그저 삶의 그림이 달랐던 데서 나온 것일 게다. 전쟁의 상흔을 안고 평생 짓눌리듯 살아온 이가 지난 50여년간 ‘이 정도면 여한 없이 했다’고 말하는 이와 같을 수는 없다. 지난해 1월 작고한 작가 박완서(1931∼2011)와 배우 손숙(68) 씨의 얘기다.

지난달 24일부터 박 작가의 동명소설 연극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이 손씨의 1인극으로 공연 중이다. 아들 잃은 어머니의 가슴 후비는 아픔을 고스란히 뿜어낸 작가의 자전적인 작품이다. 그로 인해 무대는 매일 “생떼 같은 자식을 가슴에 묻고 태산 같은 설움을 억누르며 살았다”는 작가의 고해를 품은 배우의 절규로 무겁게 가라앉아 있다. 극이 상연 중인 서울 흥인동 충무아트홀에서 지난달 30일 손씨를 만났다. “울 수조차 없는 짓눌린 슬픔을 전하고 있는 중”이라 했다.

작품의 힘으로 가보자

“많이 힘들다. 박 선생 작품이 워낙 사람을 후비고 비트는 데다가 아들 잃은 그 마음을 헤아리니 가슴이 저미는 까닭이다. ‘참척의 슬픔’을 연기해야 하는 것 아니냐. 그러나 작품으로서 빛나는 작품이다. 그것만 믿고, 작품의 힘으로 가보자 했다.”

‘나의 가장 나종…’은 1980년대 군사독재 시절 전경이 휘두른 쇠파이프에 아들을 잃은 어머니의 독백으로 이뤄졌다. 상처에 엉겨붙은 두터운 딱지 탓에 한동안 어머니의 아픔은 드러나지 않았다. 하지만 어느 날 깊은 심연에 똬리를 틀고 있던 그 비통이 기어이 터져나온다.

연극은 박 작가 타계 1주기 추모공연으로 기획됐다. “사실 지난 1월 작가가 타계했던 때를 맞추려고 했다. 좀 늦어진 셈이다. 하지만 박 선생이 아들을 잃은 게 8월이었으니 우연치 않게 들어맞은 셈이다.”

박 작가 딸들 반대로 원작 훼손 안해

1988년 박 작가는 5월 남편을 잃은 데 이어 8월 외아들을 잃었다. 당시 25살 서울대 의대 인턴. 교통사고였다. 소설 ‘나의 가장 나종…’(1993)은 그 한의 응어리를 당시 시대상에 어우르며 풀어낸 작품이다. 제목은 박 작가가 김현승의 시 ‘눈물’에서 따온 것. ‘나의 마지막까지 지니고 있는 것’이란 뜻이다.

“지난해 4∼5월경 유승희 연출이 작품을 들고왔다. 예전 책으로 봤을 때 가슴을 뒤흔들렸던 터라 덥석 잡아들었다.” 다만 극을 표현하는 데선 연출과 의견이 갈라졌다. “연출은 관객을 좀더 울려줬으면 했다. 그런데 내 생각은 달랐다. 새끼 죽이고 우는 것조차 아닌 것 같았다. 기막힌 얘기지만 선생 자체가 이미 정제된 상태에서 썼다 싶었다. 울고불고 안하고 싶었다. 가능한 한 묻고 갔다.”

작품은 최대한 연극적 요소를 빼고 있다. “희곡으로 씌인 작품이 아니다. 처음엔 손을 보려고도 했는데 박 선생 딸들이 반대를 했다. 거의 원작 훼손없이 그대로 대사를 한다.” 지문도, 동선에 대한 설명도 없는 작품을 손씨는 1시간 넘게 무인도 개척자마냥 홀로 뚫어간다. 그래도 손씨는 작품이 박 작가에게 폐를 끼치는 건 아닌지 걱정이다.

내년 50주년 150여편 출연

어느덧 50주년이다. 출연작이 몇 편이나 되느냐는 우문에 150여편쯤 되지 않겠냐는 답이 왔다. “데뷔는 대학 1학년 때 했다. 배우가 되겠다고 작정한 건 아니었는데 여기까지 오게 됐다.” 스스로 토로한, ‘무대에 서면 정말 막막하다’는 1인극이 유독 많다. ‘담배 피우는 여자’ ‘위기의 여자’ ‘셜리 발렌타인’에 이어 이번이 네 번째다. 대표작은 14년째 하고 있는 ‘어머니’라 하겠지만 “그래도 다 내 자식인데 어느 것이 낫다 할 수 있겠냐”고 했다. 하지만 작품은 좀 고르는 편이다. “사회성이 있는 것과 감동이 큰 것을 선호한다.”

배우 손숙(사진=권욱 기자 ukkwon@)


고기 덜 먹고 극장가는 문화 필요

연극 후배들에 대한 애정도 적잖다. “요즘 세상에 컵라면으로 끼니 때우며 죽기 살기로 덤비는 젊은이가 몇이나 되겠느냐”고 안쓰러움을 드러낸다. “하지만 이제 곧 좋은 날이 올 거란 얘기는 해줄 수가 없다. 그래서 선배로선 미안하다.” 그렇다고 조언까지 접은 건 아니다. “연극은 배우의 상상력과 감성을 필요로 하지만 재주만으로는 안 된다. 내실을 다지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

손씨의 고언은 최근 불거지고 있는 ‘예술인복지법’으로도 이어졌다. “복지법이라고 통과만 시켜놓고 내용은 없이 말만 무성하다. 기초가 필요한데 그건 안하고 매번 한류만 거론하고 있지 않냐. 문화국민의 바탕을 만들어줘야 한다. 학교교육부터 ‘고기 한번 덜 먹어도 극장간다’가 돼야 한다는 얘기다.”

전성기? 바로 오늘이다

무대에서 50년을 살아낸 노배우의 소회를 듣고 싶었다. “내일은 영원히 안오는 거다. 늘 오늘뿐이다. 그러니 전성기도 오늘일밖에. 50주년에 은퇴한다 할까 생각한 적 있다. 그런데 그것도 건방진 소리 같더라. 그냥 어느 날 몸이 말을 안 듣든지 대사를 못하든지 하면 사라지기로 했다. 무대에 못 서는 그날이 은퇴일이다.”

▲ 손숙은…

1944년 경남 밀양 생. 고려대 사학과를 중퇴하고 1998년 명예학사학위를 받았다. 1967년 동인극장에서 연기 시작, 1971년 극단 산울림 창단 단원, 1986년 국립극단으로 옮겨가 20여년 몸 담았다. 1999년 환경부 장관과 환경운동연합 공동대표를 역임했다. 주요 작품으로 ‘신의 아그네스’(1976, 2007), ‘담배피우는 여자’(1996), ‘어머니’(1999~), ‘메디슨 카운티의 추억’(2003), ‘셜리 발렌타인’(2005, 2011), ‘아내들의 외출’(2010~2012)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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