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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일리 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처음에는 밋밋한 바구니를 닳았나 싶다. 한참을 들여다본 뒤엔 다른 확신이 생긴다. ‘붓이 스쳤구나’라는. 긴 획에서 앞뒤를 잘라내고 가운데 토막만 건져낸 듯하달까. 그렇게 화면에는 덩그러니 ‘점 하나’뿐이다. 늘 하나만인 건 아니다. 두 개일 때도 있고 여럿일 때도 있다. 하지만 ‘하나’가 가진 자신감에 비할 바가 아니다. 마땅히 위압적인 ‘한 점’이 된다.
그 절대 자신감으로 빚은 위압적인 ‘점 하나’에 미술시장의 뜨거운 시선이 꽂히고 있다. 상반기 ‘미술품 경매시장’의 결산을 앞두고 말이다. 지난해 이맘때부터 침체에 빠져 좀처럼 떠오르지 않는 분위기를 뒤집을 수 있을지 기대를 키우는 거다. 그것도 ‘더블 캐스팅’으로 말이다.
이우환(87)의 ‘점 하나’ 그림 ‘다이얼로그’(Dialogue·대화)가, 상반기 마지막 메이저경매로 여는 서울옥션과 케이옥션에 동시에 출품한다. 서울옥션은 27일 ‘173회 미술품경매’에 150호(226.9×181.8㎝) 규모의 ‘다이얼로그’(2008∼2014)를, 케이옥션은 28일 ‘6월 경매’에 300호(290.9×218.2㎝) 규모의 ‘다이얼로그’(2007)를 세운다. 두 작품의 추정가는 각각 9억~18억원(서울옥션)과 13억 5000만~20억원(케이옥션)이다.
이우환의 점 하나 ‘다이얼로그’ 연작이 경매에 나오는 일은 드물지 않다. 색도 크기도 다채로운 작품들이 꾸준히 사고 팔렸다. 하지만 회색 톤의 동일한 색상, 그것도 150호와 300호란 남다른 대작이 동시에 나선 일은 거의 없다. 덕분에 마치 대결구도처럼도 보인다. 두 경매사가 대표작으로 내세운 만큼, 낙찰이 되지 않을 경우 타격이 될 수밖에 없는 구조인 거다.
‘다이얼로그’를 앞세운 두 경매사가 6월에 내놓는 출품작은 206점, 165억원어치다. 서울 강남구 신사동 서울옥션 강남센터에서 먼저 진행할 ‘제173회 미술품경매’에는 135점 85억원어치가 신고를 마쳤다. 다음날 서울 강남구 신사동 케이옥션 본사에서 여는 ‘6월 경매’에는 72점 약 80억원어치가 나선다.
상반기를 마감하는 6월 경매는, 경매로 견인할 미술시장 반전에 대한 부담을 안고 있다. 지난해 말 매출결산 2360억원으로, 2021년보다 930억원이 감소했던 경매시장은 올해 들어서도 뚜렷하게 나아지는 조짐이 없는 상태다. 참고로 올 1분기 총 5회 열린 서울옥션과 케이옥션의 메이저경매가 기록한 낙찰총액은 약 253억원. 전년대비 58% 감소라는 아쉬운 성적표를 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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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말을 나누는 ‘대화’란 뜻을 가진 이우환의 ‘다이얼로그’는 ‘조응’(Correspondance) 연작에서 파생했다. 점 두 개 이상이 든 작품 ‘조응’에서 하나씩 덜어내고 궁극의 절정인 ‘한 점’만을 남긴 셈인데. ‘조응’이든 ‘다이얼로그’든 맥락은 다르지 않다. 관계를 맺어야 이뤄지는 가치. 이미 오래전부터 그의 작업을 꿰뚫어온 핵심개념인 ‘관계성’을 이어가는 중인 거다. ‘점 하나’와 거대한 여백의 관계, ‘점 하나’와 그 하나가 놓인 공간, 결국 ‘점 하나’의 작가인 나와 누군가와의 관계까지.
이제껏 서울옥션·케이옥션 양대 경매사를 통한 미술품 경매에서 가장 비싸게 팔린 ‘다이얼로그’는, 2022년 11월 서울옥션 홍콩세일에서 13억원에 거래된 작품이다. 2015년 제작된 150호(227.0×182.0㎝) 화면에는 푸른 점이 찍혔더랬다. 이보다 앞선 그해 5월 서울옥션 컨템포러리아트세일에선 역시 푸른색의 80호(145.0×113.8㎝·2014) 작품이 9억원에 팔리기도 했다.
케이옥션에선 2021년 ‘8월 경매’에서 2012년 제작된 100호(130.3×162.2㎝) 규모가 7억원에 낙찰되기도 했다. 이번 출품작과 유사한 회색 점이 찍혔다. 말 그대로 ‘불장’이던 시절 시작가 5억원에서 출발한 작품은 단 2분만에 몸값을 2억원이나 끌어올려 화제가 됐더랬다.
굳이 한 점 그림이 아닌 ‘다이얼로그’까지 살펴본다면, 또 해외 경매사까지 장을 확대해본다면, 지난달 크리스티 홍콩 이브닝세일에서 약 19억원(1126만 5000홍콩달러)에 팔려나간 ‘다이얼로그’(2020·227.5×182㎝)가 있다. 파랗고 붉은 두 개의 점을 박아낸 작품은 세계적인 부동산 사업가 제럴드 파인버그의 소장품으로도 관심을 끌었고, 결국 동명 연작 중 최고가를 기록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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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우환 외에도 서울옥션·케이옥션이 6월 메이저경매에 동시에 조명한 작가 중엔 이배(67)가 도드라진다. 서울옥션은 ‘불로부터’(2021·93.8×74.7㎝)와 ‘불로부터(2000·80.2×60.5㎝)를 각각 추정가 7000만∼1억 2000만원에, 케이옥션은 또 다른 ‘불로부터’(2001·100×65.1㎝)를 1억 6000만∼2억원에 내놨다. 이배 작품의 비중이 적잖은 것도 비슷하다. 서울옥션과 케이옥션 모두 6점씩. 낮은 추정가로 각각 4억 3500만원어치, 4억 8000만원어치에 달한다.
이밖에도 근현대를 아우르는 작가들의 작품이 양대 경매사의 실탄으로 나선다. 서울옥션은 상대적으로 저평가된 근대화가를 조명하는 ‘시대여울’ 코너를 마련하고 이세득·최영림·오지호 등의 작품을 배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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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중 이세득(1921∼2001)의 ‘반도호텔 벽화를 위한 원화’(1954·29.5×75.3㎝)가 귀한 작품으로 꼽힌다. 한국미술의 현대화에 기여한 바가 큰 이세득은 1950년대 옛 반도호텔이나 명동의 시공관 같은 건축물 실내장식에 나서 당시로선 불모지던 건축물 공공미술에 선구적 역할을 했더랬다. 추정가는 1000만∼2500만원이다. 여기에 최영림(1916∼1985)의 ‘검은태양’(1959·51×44.5㎝, 추정가 800만∼2000만원), 오지호(1905∼1982)의 ‘설경’(31×40.2㎝, 추정가 1000만∼2200만원)도 함께 나선다.
케이옥션은 박서보(92)의 흔치 않은 작품을 내세웠다. ‘지그재그 묘법’ 시기, 그러니까 한지의 물성을 드러내는 작업으로 ‘한지의 재발견’에 나섰던 때 제작한 ‘묘법 No.88912’(1988·181.8×227.3㎝)이다. 추정가 6억 2000만∼12억원을 달고 새주인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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