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일리 오현주 기자] 그랬다. 해 바뀌고 봄이 오면 문창호지를 갈았다. 어렴풋이 옛기억이 떠오른다. 어머니는 입 안 가득 머금은 물을 뿜어 문을 적셔내고 오래된 문종이를 손으로 뜯어냈다. 밀가루 쒀 만든 풀을 새 창호지에 정갈하게 바르곤 찢어질까 비뚤어질까 조심조심 문 살 위에 붙였다. 손잡이 언저리에 지난 가을 주워뒀던 단풍잎 몇 장 붙인 작은 창호지를 한 번 더 발라낸 건 어머니만의 미학이었다.
문창호지 추억이 밴 연극 ‘3월의 눈’이 다시 돌아온단다. 극은 세상에서 사라져 가는 것들의 이야기를 풀어낸 작품이다. 재개발 열풍이 소란한 소도시 한구석, 낡은 한옥 한 채를 배경으로 노부부의 더 버릴 것도 보탤 것도 없는 인생 한 토막을 보여준다. 노부부는 하나밖에 없는 손자를 위해 마지막 재산인 한옥을 팔았다. 집은 재개발자들의 손에 이리저리 뜯겨 나갈 판이다. 내일이면 떠나야 하는 그들은 문창호지 바르는 일로 과거를 회상한다. 그리고 눈 내리는 3월 그 아침, 남편은 집을 나서며 아내를 향해 담담한 독백을 쏟아낸다. “이젠 집을 비워 줄 때가 된 거야. 내주고 갈 때가 온 거지. 그러니 자네도 이젠 다 비우고 가게.”
작품은 단순히 연극 한 편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선 ‘백성희장민호극장’부터 짚어야 한다. 2010년 말 국립극단이 서울 서계동에 ‘살아있는 전설’이라 불린 노배우 백성희와 장민호의 이름을 딴 극장을 세웠다. 그리고 2011년 3월 극장 개관작으로 이 두 배우를 주인공으로 한 ‘3월의 눈’을 올린다. 생존해 있는 배우이름을 딴 극장은 어느 나라에도 흔치 않다. 초연을 올리며 극단은 이런 홍보문구를 붙였다. ‘일기일회(一期一會), 일생 단 한 번뿐인 큰 공연을 관람하는 기회를 놓치지 마십시오.’ 한낱 관객들의 관심을 끌어내려는가 했던 이 문구는 사실이 됐다. 이제 3년째를 맞는 ‘3월의 눈’에 대배우 장민호는 없다. 지난해 11월 그는 지병을 못 이겨내고 타계했다. 그 몇 달 전 올린 ‘3월의 눈’ 재공연에서도 이미 병중이던 장민호를 대신해 배우 박근형이 나섰던 터다. 드라마와 영화에만 열중했던 박근형은 ‘늘 미안했다’는 회오와 함께 20년 만의 연극무대에서 열연을 펼쳤다. 그리고 올 3월에 다시 눈을 내릴 이는 배우 변희봉이다.
마을도 사라지고 집도 사라지고 사람도 사라진다. 하지만 결국 여기에 정수가 있다. 느릿하고 조용하게 노배우들이 멈춰 세운 그 시간에서 우리는 견딜 수 없는 아픔과 감동을 동시에 받는 거다. “난 집을 잃었고 자넨 집만 남았는가. 거기서라도 한숨 푹 주무시고 자다 일어난 듯 돌아오게. 꿈에서 깬 듯이 돌아가게나.” 감히 집 정도가 헐리는 서운함을 저무는 인생의 비애에 비유하다니. 그러나 이보다 더 적확할 수 있겠는가. 내리면 바로 녹는 3월의 눈처럼 머물다 돌아가는 삶에 기쁘고 슬플게 뭐가 있겠느냐는 철학이다.
고스란히 노배우의 공이다. 그렇다. 배우는 무대에서 말한다고 한다. 어디 배우뿐이겠는가. 우리는 모두 각자의 무대에서 말한다. 새 대통령의 새 무대가 열렸다. 장장 5년간 이어질 대무대다. 보고싶은 건 하나다. 새 대통령이 혼신의 연기를 다하고 내려오는 모습. 다시 5년 뒤 3월 흩날릴 눈발이 부디 서설이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