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리뷰] 70∼80대 `노장투혼` 봄날은 끝나지 않았다

연극 `3월의 눈`
백성희·박근형·오영수 등
원로들의 느림 미학 진수
  • 등록 2012-03-09 오후 1:14:50

    수정 2012-03-09 오후 1:35:54

이데일리신문 | 이 기사는 이데일리신문 2012년 03월 09일자 33면에 게재됐습니다.
▲ 연극 `3월의 눈`(사진=국립극단)
[이데일리 오현주 기자] 그랬다. 기억이 난다. 해가 바뀌고 계절이 바뀌면 방문과 창문에 창호지를 갈았었다. 입안 가득 머금은 물을 뿜어 문을 적셔내고 오래된 문종이를 손으로 뜯어냈다. 밀가루 쒀 만든 풀을 새 창호지에 정갈하게 바르고 나선 찢어질까 비뚤어질까 문 살 위에 붙였다. 창호지가 소용을 다했던 것처럼 기억 한줄기도 같이 무너졌다.

연극 `3월의 눈`은 세상의 사라져가는 것들에 관한 이야기다. 재개발 열풍이 소란한 소도시 마을. 낡았지만 탄탄한 한옥 한 채를 배경으로 노부부 장오와 이순이 더할 것도 보탤 것도 없는 인생 한 토막을 들려준다.

노부부는 하나밖에 없는 손자를 위해 마지막 재산인 집을 팔았다. 집은 재개발자들의 손에 이리저리 뜯겨나갈 판이다. 내일이면 떠나야 하는 그들은 문창호지 바르는 일로 과거를 회상하며 잠시 지금을 잊는다. 그리고 눈 내리는 3월 그 아침 장오는 이순이 짜준, 채 완성되지 못한 스웨터를 걸치고 집을 나선다. “이젠 집을 비워 줄 때가 된 거야. 내주고 갈 때가 온 거지. 그러니 자네도 이젠 다 비우고 가게.”   마을도 사라지고 집도 사라지고 노부부도 사라진다. 그뿐이다. 느릿하고 조용하다. 하지만 작품의 미학은 바로 여기에 있다. 한순간 미동도 어떤 소리도 내지 않는 배우가 멈춰 세운 그 시간에서 견딜 수 없는 아픔과 감동을 동시에 받는다. “그래도 이 집이 나보다 낫군. 흩어질 땐 흩어지더라도 뭐가 되든 된다네. 책상도 되고 밥상도 되고.” 감히 집 정도가 헐리는 서운함을 저물어가는 인생의 비애에 대비하다니. 그러나 이보다 더 적확할 수 있겠는가.  
▲ 연극 `3월의 눈`(사진=국립극단)
고스란히 배우의 공이다. `노장의 투혼`은 괜한 포장이 아니었다. 연륜이 뭐고 세월은 또 뭔지를 연기가 아닌 연기로 온전히 옮겨낸다. 지난해 3월 초연을 했던 노배우 장민호는 병중이라 했다. 그의 빈자리를 중견배우 박근형이 메웠다. TV드라마와 영화에 열중했던 그가 `늘 미안했다`는 회오와 함께 20년만에 무대로 돌아왔다. 여든 중반 백성희의 상대역이다. 이들과 번갈아 나서는 오영수와 박혜진 커플은 초연의 관록을 다시 보여준다.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흩날리더라~.” 이순의 콧노래가 내내 귓전에 머문다. 해마다 3월이면, 철 지난 눈까지 흩뿌리면 가슴 한켠 아리는 통증으로 되살아날 게다. 하지만 극은 한사코 부인한다. 내리면 녹는 눈처럼 왔다가 돌아가는 인생이 기쁠 것도 슬플 것도 없다, 그렇게 말한다. “난 집을 잃었고 자넨 집만 남았는가. 거기서라도 한숨 푹 주무시고 자다 일어난 듯 돌아오게. 꿈에서 깬 듯이 돌아가게나.” 18일까지 서울 서계동 백성희장민호극장. 02-3279-2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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