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여름 나노 미니의 유행은 이미 지난 해부터 예견되었다. 전세계 패션을 주도하는 파리, 밀라노, 런던, 뉴욕 등 4대 도시의 유명 디자이너들이 각기 다른 컨셉트를 선보였다.
퓨처리즘(Futurism·공상과학영화 주인공처럼 번쩍이는 금·은색 옷감을 쓴 스타일), 핀업걸 스타일(pin-up girl style·1950년대 달력 모델처럼 육감적인 스타일), 모즈룩(modes look·1960년대 깡마른 모델인 트위기의 스타일에 뿌리를 둔 새 유행)….
주제는 각자 달라도 콜렉션의 메인 아이템은 예외 없이 ‘미니 드레스'였다. 구찌는 평면적인 무늬를 쓴 드레스를, 발렌시아가는 ‘미래’를 넘어 아예 ‘외계’로 날아간 듯한 은색 스커트를, 질 스튜어트는 오래 입은 빈티지 풍의 원피스를 선보였는데, 모두 아슬아슬한 길이를 뽐냈다. 바로셀로나와 도쿄의 디자이너들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렇게 대범하다 못해 당돌한 길이의 치마가 어떻게 아가씨들 옷장을 꽉 채우고, ‘올 여름에 꼭 사야 할 품목’으로 꼽히게 됐을까. 얘기가 좀 길다.
지난 몇 년간 미의 기준은 만장일치로 ‘S라인’이었다. 마치 다른 신체 부위란 존재하지 않는 것 같았다. 가슴과 힙에 대한 예찬이 넘쳤고 어느 해 보다 많은 여배우의 어깨 끈이 ‘사고로’ 흘러내렸다. 칸에서, 런던에서, 뉴욕에서, 도시를 막론하고 이미 유명한 여배우의 어깨 끈과 유명해지길 고대하는 신인 여배우의 어깨 끈이 잇달아 흘러 내렸다.
여가수들은 새 앨범이 나오면 신곡 대신 새로워진 S라인을 프로모션 했다. 가족 시간대 TV 프로에 인체의 특정부위가 얼굴처럼 클로즈업 되고, 유명인 가슴이 노출된 사진이 연예잡지 표지로 실려 길거리 가판대 앞줄에 진열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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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슨스 디자인 스쿨에 다니는 일레나 택스맨(20)은 맨해튼에 있는 ‘세븐틴’이라는 잡지사에서 인턴으로 일한다. 일레나는 예전에 입던 나팔바지를 모두 세탁소에 맡겼다.
“밑단을 줄이려구요. 이제 더는 나팔바지를 입을 일이 없으니까요.”
S커브를 살려주는 나팔바지가 밀려나고 몸에 좍 달라붙는 ‘스키니 진’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뉴욕의 어느 클럽 앞에서’, ‘친구와 쇼핑 중에’ 같은 제목이 붙은 파파라치 사진에서 유명인은 어김없이 스키니 진 차림이었다.
스키니 진 유행은 더욱 달라붙는 ‘레깅스’로 번졌다. 특히 레깅스는 여러모로 실용적인 탓에 유행이 시작되자마자 보급의 급물살을 탔다. 세탁법, 브랜드, 사이즈, 디자인 등 복잡하게 따질 것이 없고, 가격이 저렴하며, 색깔별로 구비해 입어도 이상하지 않은데다가 세련되기까지 하다. 그런 옷은 무조건 대박이다.
다만, 한가지 문제가 있었다. 요즘 뉴욕에서 잘 나가는 신예 디자이너 필립 림이 말했듯, 당신이 빼빼 마른 슈퍼 모델 케이트 모스가 아니고서야, 레깅스만 입은 궁둥이를 내놓고 거리를 활보하는 일은 본인에게나, 보는 이에게나 ‘예의’가 아니다. 그 민망한 실루엣을 완화해줄 대책이 필요했다. 그리하여 엉덩이를 가릴 수 있는 상의가 사랑 받게 됐다. 몸매가 드러나지 않는 풍성한 폭의 미니 원피스로 엉덩이를 살짝 가리고, 밑에는 레깅스를 받쳐 입게 된 것이다.
“그런데 올해 뉴욕에 80년만의 무더위가 찾아온대요. 벌써부터 이렇게 더운 걸 보면, 조만간 레깅스 없이 미니드레스만 입게 될는지도 몰라요. 더운 건 딱 질색이거든요.”
아니나 다를까 몇 주일 뒤 유행에 민감한 젊은이들이 모여드는 맨해튼의 웨스트 빌리지에서 다시 마주쳤을 때, 일레나는 짧은 원피스 아래 시원하게 맨다리를 내놓고 있었다. 일레나뿐만이 아니었다. 본격적인 여름철의 무더위가 시작되자 많은 여성들이 레깅스를 벗어 던지고 미니 원피스 차림으로 거리를 활보 중이다. 긴 상의 역할을 하던 미니 원피스가 ‘나노 미니’라는 과감한 아이템으로 다시 태어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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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의 떠오르는 패션 디자이너 레이첼 로이가 말했다.
“올 여름엔 편안하고 품이 넓은 엘레강스한 느낌의 미니드레스가 트렌드죠. 빛 바랜 아이보리, 모카나 밝은 회색 등 흰색에 가까운 원피스에 모던한 디자인의 구두를 매치해보세요. 면이나 나무 소재의 두꺼운 느낌이 나는 힐이라면 더 좋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