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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일리 오현주 문화전문기자] 멀찌감치 부산스러운 한 남자가 보인다. 정리를 하는 모양이다. 손에 종이봉투 몇 개가 들려 있다. 그 모습이 지극히 평범하고 자연스럽다. 눈이 마주치자 “작가의 매니접니다”라고 먼저 자신을 소개하며 활짝 웃는다.
매니저의 그 하루는 꽤 분주할 듯했다. 장대비가 내리는 금요일 아침, 오픈에 맞춰 줄줄이 찾아드는 손님 맞이는 기본이고, 벽에 걸린 작품을 하나하나 소개하고, 틈틈이 작가의 컨디션 체크에도 여념이 없다. 도대체 어떤 작가길래 이토록 충직하고 ‘능력있는’ 매니저까지 대동한 채 전시를 연 건가. 달랑 방명록과 팸플릿이 전부인 작은 테이블에서 전시명을 확인할 수 있었다. ‘신미선 개인전’이라고.
지난 14일 서울 종로구 인사동 한국미술관. 인사동길에 즐비한 여느 갤러리와 다를 게 없는 풍경이지만, ‘강렬한 첫인상’을 남긴 매니저와 작가는 범상치 않다. 작가 신미선(60)의 이름이 익숙지 않다면 매니저의 이름은 어떤가. 신기욱(62). 공식 직함은 미국 스탠퍼드대 사회학과 교수이자 아시아태평양연구소장이다. 한국·미국·중국이 얽히고설킨 고차함수는 물론, 일본·북한이란 변수, 또 중국·대만과의 관계까지, 들이대는 복잡한 문제마다 명쾌한 분석으로 세계권력지도를 다시 그려낸다. 한마디로 태평양을 사이에 둔 나라들에서 크고 작은 문제가 터지기만 하면 전화벨이 가장 먼저 울리는 정치·외교분야 석학이다. 그런 그이가 한국, 그것도 인사동 한 전시장에 모습을 드러냈으니 의외라고 할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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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 데뷔전 준비부터 손님맞이·작품소개 등
“이번 전시는 아내 신미선의 데뷔전이다. 이쪽(미술분야)으로는 잘 모르다 보니 하나부터 열까지 일일이 묻고, 찾고. 그게 가장 어려웠다.” 전시 일정은 잡히고 당장 작품을 한국으로 보내야 하는 일부터 말이다. 포장은 어찌 하고, 배로 띄워야 하는지 비행기로 날려야 하는지, 살면서 다신 없을 줄 알았던 ‘맨땅에 헤딩’하는 경험을 새삼 겪은 셈이니. 그런데 그 어려움을 말하면서도 신 교수는 연신 싱글벙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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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뷔전’이란 소개로 보듯 신 작가는 늦깎이 신진작가다. “그림을 시작한 건 채 5년이 안 된다. 우연한 기회에 한국으로 치면 문화센터쯤 되는 커뮤니티센터에서 붓을 처음 잡았다.” 계기라면 ‘갱년기 불면증’이란다. “3시까지 잠을 못 이루는 고통을 겪었더랬다. 그림을 시작한 뒤론 시간이 너무 잘 가더라. 무엇보다 아이 셋을 키우며 느꼈던 ‘내 것이 없다’는 생각에서 벗어난 게 가장 크다.”
이제껏 작품 수는 150점 남짓. 오일과 아크릴을 쓴 회화작품은 물론 오일파스텔, 아이패드 등 도구를 따지지 않고 작업한 드로잉 등이 다채롭다. 이번 전시에 건 ‘정물 있는 풍경’ 외에도 일상 곳곳에서 찾아낸 인물·동물·사물 등을 화면에 옮겨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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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 전폭적 지원 입고 ‘한국미술국제대전’ 수상까지
그런데 이 ‘신진작가’의 붓질이 보통이 넘는다. 그도 그럴 것이 이번 전시는 한국미술국제교류협회가 주최하는 ‘제30회 한국미술국제대전 특별초대전’. 18일까지 12개국 작가의 300여점으로 꾸린 자리에 신 작가는 미국 대표로 출품해 ‘국제미술상’을 수상한 자격으로 개인전 부스를 냈다. 이후 11월 뉴욕으로 장소를 옮겨 이어갈 전시에도 신 작가의 작품이 걸릴 예정이다.
“혼자서는 못했다. 자신 일처럼 나서는 남편의 적극적인 지원이 없었더라면 불가능한 일이다. 처음부터 오늘 이 자리까지 말이다. 작가로선 늦었지만 서두르려 하지 않는다. 그리고 싶은 걸 그리다 보면 뭐든 그려지지 않겠나.”
따지고 보면 짧지만 긴 여정이었다. 기어이 여기까지 올 거였다면 말이다. 그 길을, 물론 부부가 함께 걸어온 거고. 이제 신 교수가 분석하는 냉철한 세계정세가 들리든, 신 작가가 그려내는 정감 있는 세상풍경이 보이든, 어느 하나를 떨어뜨려 생각할 순 없게 됐다. 그걸 아는 건지, 뒤돌아 나오는 길에 울리는 ‘작가’와 ‘매니저’의 앙상블이 들린다. “이제 시작입니다. 지켜봐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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