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일리 전재욱 기자] 조선의 왕은 자신의 논밭을 두고 농사를 지었다. 고려의 왕이 하던 것을 그대로 계승한 것이다. 농경은 나라의 근본이었기에, 왕이 앞장서 농사를 지어 풍요와 풍년을 비는 차원이었다.
| 설렁탕 이미지.(사진=마켓컬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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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의 논밭(적전·籍田)은 한양부 흥인지문(동대문) 동쪽으로 십리 밖에 있었다. 수도가 개성에 있을 때 보정문 곁에 뒀던 적전처럼 궁과 멀지 않은 데에 마련했다. 이때부터 고려의 적전은 서적전으로 조선의 적전은 동적전으로 나눠 불렀다. 한양이 개경보다 동쪽에 있어서 이렇게 구분한 것이다.
동적전은 왕의 전답이지만, 그렇다고 왕이 직접 경작한 것은 아니다. 관청 전농시(典農寺) 소속 노비가 주로 논밭을 일구는 데에 투입됐다. 나라의 제사에 쓰이는 곡물을 관리하는 관청이었기에 자연스럽게 역할을 맡았다. 전농시 관청이 있던 곳은 전농촌이라는 마을이 형성됐다. 그 자리는 지금의 동대문구 전농동이 돼 지명으로 이어진다.
전농촌에서 수확한 곡식은 궁으로 가는 길에 있는 제기리 선농단으로 옮겼다. 여기서 왕은 춘분과 추분에 풍년을 기원하는 제사를 지냈다. 비가 내리지 않아 가물면 기우제를 지내기도 했다. 제사는 농사 짓는 법을 가르쳐준 농사의 신 제신농씨(帝神農氏)와 오곡의 신 후직씨(后稷氏)에게 지냈다. 이때 전농촌에서 재배한 곡식을 제사 음식으로 썼다.
제사를 마치면 왕은 백성에게 제수 음식을 내렸다. 소를 잡아서 끓인 국에 밥을 말은 국밥이 대표 음식이었다. 선농단에서 내린 국밥이라고 해서 선농탕으로 부르다가 설농탕을 거쳐 지금의 설렁탕으로 변했다는 게 구전이다.
제기리는 제사를 지내는 터라는 의미의 제기(祭基)에서 유래했다. 선농단은 제터라고 불렀는데 이걸 한자로 옮긴 게 제기다. 이 동네가 지금의 동대문구 전농동과 맞닿은 제기동이다.
답십리역사거리부터 떡전교사거리까지 난 전농로, 그리고 전농로가 끝나는 떡전교사거리부터 시작해 고대앞사거리까지 난 도로 제기로. 이 두 도로는 과거 왕이 농사를 지으러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설렁탕을 먹었던 길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