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박함이 덜하다면, 본격적으로 줄어드는 한국인 수를 따져보자. 인구가 줄어드는 걸 걱정하는 이유는 경제 때문이다. 인구구조의 변화는 곧 시장변화다. 그러니 경제와 인구는 떼려야 뗄 수가 없다. 어떤 경제전망도 인구통계를 분석하는 것만큼 효율적인 결과물을 만들어내지 못한다. 출산율이 떨어지고 청년층이 증발해버리고 노인층이 늘어난다면 결론은 훤하다. 경제가 시드는 거다.
여기 이런 그림이라면 어떤가. 미래한국의 어느 시점에서 잡아낸 암울한 스케치. 모계사회가 도래한단다. 힘센 여성들끼리 뭉치고 세상을 바꾸는 시대다. 반작용은 남성에게서 나타난다. 이들은 근육을 포기한 채 외로운 밥먹기를 이어간다. 슬픈 역설도 있다. 자립을 위해 고립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중년의 청년’이다. 죽어야 비로소 끝나는 고단한 일의 숙명을 이들은 평생 체험하며 산다. 한쪽에선 ‘득도한 층’도 생겨난다. 일찌감치 불가능을 깨달은 무념무상 방관세대다.
인구감소가 불러올 이 불편한 스케치는 경제지 기자 출신 대학교수인 저자가 그려냈다. 저자는 이를 한국사회에선 단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혁명적인 변화풍경이라고 일축했다. 미래가 변동하는 건 당연하다. 그러나 인구감소는 저자가 볼 때 제1순위다. 사회·문화, 정치·경제를 넘어 ‘한 개인의 삶’이 통째 흔들린다는 역설이다. 노인은 더 오래 살고 젊은이는 아이를 낳지 않는다는, 고령화의 일반론에서 월등히 진척된 주장을 편다. 미래한국에 ‘섹스가 사라진다’는 것. 어째서? 여성이 불확실성을 짊어진 남성을 선택해야 할 동기가 없고, 게다가 사랑을 나누는 일에도 비용이 발생하는 형국이라서다. 그렇다면 결과는? ‘경제도 사라진다’다.
한국사회에서 인구가 준다는 뉴스가 어제오늘 일이겠는가. 책의 미덕은 그 ‘뻔한’ 이슈를 도드라지게 깎아둔 데 있다. ‘뻔하다’에 발끈할 필요는 없다. 문제의 심각성을 아직도 깨닫지 못하는 대중이 훨씬 많다는 이유에서, 여전히 인구감소는 남의 일이라는 방치에 대해 불가피하게 붙인 말이니.
요즘 2030의 스펙은 역사상 최고 수준이다. 고려·조선시대 석학들이 그렇게 화려했을까. 난제는 그 스펙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거다. 사회진출에서 막히고 취업에서 좌절하고 비정규직에서 체념한다. 그런데 이것이 구직난으로 끝나는 사안이겠는가. 아니다. 이로 인해 엉뚱하게도 연애·결혼·출산이 접힌다. 돈을 못 버는데 가정을 이루고 게다가 아이까지? 언감생심이란다. 지난해 1.2명까지 떨어진 한국의 합계출산율은 2.1명의 인구유지선을 뚫은 지 오래다. 마치 좀비 같이 무력한 세대는 2030뿐만이 아니다. 절대다수의 노인도 다르지 않다. 역할도 없고 임무도 없다. 인구감소는 그들을 그저 ‘세대의 짐’으로 만들어버렸다.
▲미래로 날린 외상영수증
▲인구감소+성장둔화=감축소비?
인구감소가 불러온 저성장·고령화가 저금리·저투자·고실업으로 바로 이어진다는 게 저자가 세운 기둥이다. 계층이동의 연결고리는 무너졌고, 패자부활전도 기대하기 힘들다. 방법은 두 가지다. 어떻게든 벌거나 줄이는 것. 그런데 버는 일은 장담하긴 어렵다. 고용 없는 성장이 굳어진 데다가 경기침체가 당연해지고 있지 않은가. 결국 답은 소비를 줄이는 거란다. 감축소비의 실천이야말로 줄어든 인구가 빚어낸 미래한국에 대비하는 마지막 생존카드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근본 원인은 어떻게 제거할 건가. 인구를 공산품처럼 찍어낼 수 없는 노릇이니 아이를 낳아야 하는 거다. 그런데 출산이 ‘결단’이어서야 되겠느냐는 게 저자의 탄식이다. 대응책은 충격흡수장치를 갖는 거란다. 노인의 정의를 바꿔 한계를 풀어주고 없던 기회를 만들어내자고 한다. 정년연장도 하잔다. 잉여·불요노동력을 살릴 수 있단다. 그런데 여기까지다. 더 이상 ‘어떻게’가 책에는 없다. 나비효과처럼 A씨 부부가 아이를 낳지 않았더니 경제가 파탄되더라는 과정만 전개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는 제대로 건졌다. 안 태어나고 덜 죽는다면 결국 맞게 되는 건 디스토피아라는 결정적 위기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