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샤를모리스 드 탈레랑페리고 (사진=메트로폴리탄 미술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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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종석 한양대 명예교수/음식문화평론가] 인류의 역사는 음식의 변천사이기도 하다. 우리의 밥상은 이미 과거의 밥상이 아니다. 조선후기의 기록에 성인남자는 7홉의 쌀로 한 끼 밥을 지어먹었다고 한다. 한국인은 밥심으로 산다고 했지만 이제는 사실이 아니다. 최근 국민 1인당 연간 쌀 소비량은 집계를 시작한 1963년 이후 최저치를 기록하고 있다. 요즘 사람들은 한 끼에 평균 밥 반 공기 정도로 버티고 있다. 반면에 육류소비량은 쌀 소비량을 추월하고 있다. 지난해 돼지, 소, 닭고기 등 3대 육류 소비량은 1인당 60.6㎏으로 쌀 소비량을 넘어섰다. 우리경제의 산업화는 외식산업의 발달과 함께 식생활의 서구화를 가져왔다. 우리의 식탁에 20년 전만 해도 볼 수 없었던 브로콜리, 셀러리, 파프리카가 등장하고 식당에는 부대찌개, LA갈비 같은 정체가 모호한 음식들이 팔리고 있다. 인스턴트식품과 배달음식의 소비는 날로 늘어가고 있다.
한 시대의 음식문화 발전에는 항상 그러한 변화를 주도하는 인물이 존재한다. 그들은 새로운 식재료와 요리법을 개발하고, 그것을 즐기며 평가하는 사람들이다. 편리한 식기와 식탁예절을 도입하는 것도 그들의 몫이었다. 오늘날의 음식문화를 만든 이들이 누구이며 어떤 역할을 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브리야 사바랭은 “당신이 무엇을 먹는지 말해주면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말해주겠다”고 했다. 이제 우리가 누구인지를 알아볼 때이다.
방탕하고 탐욕적이었지만 정치가로는 탁월했다“회의는 춤춘다. 그러나 진전은 없다“는 유명한 말은 1814년 빈회의에서 회자된 명언이다. 나폴레옹전쟁에 대한 사후처리와 유럽의 세력재편에 대해 논의하기 위해 열린 회의였다. 90개 왕국과 53개 공국 등이 참가한 엄청난 규모의 회의였지만 실제로는 승전4국인 영국,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러시아와 패전국 프랑스가 주도한 회의였다. 대부분의 이해관계가 결국은 민감한 영토문제였기 때문에 진척이 느릴 수밖에 없었다. 주최국 오스트리아의 외무장관 메테르니히가 참가국의 의견대립이 심해지면 번번이 회의를 중단시키고, 무도회를 열어 분위기를 바꾸는 바람에 그런 말이 다 생긴 것이다. 하루 일정 중 4분의3이 연회와 왈츠로 채워졌었다니 회의가 어떻게 돌아갔을지는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그런데 그 회의를 물밑에서 주무르며 실제로 분쟁을 조정한 인물이 프랑스의 외무장관 탈레랑이었다.
| ‘미식예찬’(1848년) 속표지에 있는 앙텔름 브리야사바랭의 초상화. (사진=위키피디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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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패전국 대표였음에도 승전국들의 갈등을 최대한 활용하는 책략으로 자국의 이득을 챙겼다. 그 결과 영토 재편 과정에서 프랑스는 손실을 최소화하고, 유럽의 강대국 지위를 계속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그 공로로 당대 최고의 외교관이라는 명성을 얻지만, 간교하고 권모술수에 능한 인물로 악명도 떨친다. 그의 본명은 자신의 정치경력만큼이나 긴 샤를 모리스 드 탈레랑 페리고(Charles-Maurice de Talleyrand-Perigord. 1754~1838)이다. 탈레랑은 프랑스혁명 이후 나폴레옹 집권기, 부르봉 왕정복고기, 루이 필리프의 7월 왕정에 이르기까지 프랑스의 정권이 무려 아홉 번 바뀌는 동안 매 시기 정치적 입장을 바꾸며 단 한 번도 권력의 중심부를 떠나 본적이 없다. 프랑스 역사상 최초의 총리도 역임했다.
| 마리앙투완 카렘의 초상화 (사진=생트 주느비에브 도서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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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레랑은 권력 지향적이며 탐욕이 많아 뇌물로 큰 재산을 모았고, 주교출신이면서 여성들과 염문을 뿌리고 다니는 등 방탕한 생활을 했지만 정치가로서는 대단한 수완을 발휘했다. 그는 나폴레옹을 정계에 등장시켰지만, 몰락시키는데도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탈레랑은 대대로 군인이었던 귀족가문에서 태어났으나 다리가 불구여서 성직자의 길을 걸었고, 주교의 자리에까지 올랐다. 그의 거주지였던 발랑세성에는 그가 신었던 신발이 지금도 전시되어 있는데 오른쪽 구두가 왼쪽의 두 배에 이를 정도로 크다. 그 때문인지 탈레랑은 ‘절름발이 악마’ 라는 별명을 얻게 된다. 일생이 음모와 배신, 변절로 점철된 탈레랑에 대해 빅토르 위고는 “그는 괴상하고 두려우며 탁월한 인물이었다. 그는 곤디처럼 성직자였으며, 마키아벨리처럼 귀족이었고, 푸셰처럼 타락했으며, 볼테르처럼 재치 있었고, 악마처럼 절뚝거렸다”는 평가를 남겼다. 탈레랑은 프랑스혁명이 일어나자 혁명정부에 가담했고 교회 재산을 국가에 귀속시키는 법률안을 통과시켜 교회로부터 파문당하였다. 공포정치를 피해 잠시 미국으로 망명했던 그는 다시 프랑스로 돌아가 총재정부의 외무상에 오른다. 그 후에도 여러 정권에서 외무상과 대시종장을 지내기도 했으며, 7월 왕정에서는 영국 주재 대사로 기용되어 벨기에의 독립을 도우기도 했다.
| 샤또 오 브리옹 간판 (사진=Chateau Haut-Brion 홈페이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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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샤또 오 브리옹 와인 (사진=Chateau Haut-Brion 홈페이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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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전국 프랑스가 승전국 못지 않은 영향력을 갖게 되다
장장 10개월에 걸쳐 진행된 빈회의가 끝나자 처분만 기다리는 신세였던 패전국 프랑스는, 탈레랑의 뛰어난 수완에 힘입어 승전국 못지않은 영향력을 갖게 되었다. 탈레랑의 무기는 화려한 언변과 훌륭한 음식, 그리고 와인에 대한 뛰어난 식견으로 상대를 사로잡는 미식외교였다. 빈회의 참석을 준비하면서 그는 루이 18세에게 “회의에는 외교관보다 요리사를 데려가고 싶다”고 건의하였다. 그러고는 나폴레옹의 궁중 요리사였으며 ‘요리의 왕’으로 불리던 마리앙투완 카렘을 빈으로 데리고 갔다. 사실 카렘을 나폴레옹에게 천거한 사람도 탈레랑이었다. 그는 “내게 훌륭한 요리사만 준다면 나는 좋은 성과를 가져올 수 있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는데 그것도 다 카렘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었다. 그는 빈으로 어마어마한 양의 최고급 와인을 가져가서 만찬주로 제공했다. 탈레랑은 대단한 와인애호가로 한때 샤토 오브리옹을 소유했던 적이 있었는데 그런 인연으로 좋은 와인을 빈에 가져갈 수 있었던 것이다. 탈레랑의 지휘 하에 준비된 최고의 요리사 카렘의 음식과 정상급 와인에 회의참석자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1855년, 프랑스가 보르도와인의 등급을 정할 때 샤토 오브리옹은 당당히 1등급에 이름을 올리게 된다.
| 샤또 오 브리옹 라벨에 쓰이고 있는 성(사진=Chateau Haut-Brion 홈페이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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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샤또 오 브리옹 와인 (사진=Chateau Haut-Brion 홈페이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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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레랑은 적대국을 회유하기 위한 가장 효과적이고 매력적인 협상수단이 만찬테이블이라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항상 최고의 정찬으로 상대방을 사로잡는 ‘식탁외교’를 펼쳤다. 탈레랑은 프랑스 요리에 대한 자부심이 너무 강했던 나머지 “영국은 종교는 300개인데 요리는 3개뿐”이라고 비하 한 적도 있으며, 미국대사에게 “미국은 땅덩이는 그렇게 넓으면서 요리는 어째 그것밖에 안되냐”고 비아냥거렸다는 일화도 남겼다. 스스로도 대단한 미식가였는데 “혹시 저녁식사처럼 매일같이 찾아오고 그 때마다 한 시간 이상 지속적으로 즐거움을 주는 다른 쾌락을 안다면 나에게 알려 달라.”는 말을 남길 정도였다. 그는 평소에도 자신의 사유지에서 나는 각종 허브와 신선한 야채 등 식자재를 주방에 꾸준히 조달시켰다. 아침이면 카렘과 요리재료를 놓고 그날의 메뉴에 관해 장시간 토의할 정도로 음식에는 진심이었다.
영국 귀부인 레이디 프랜시스 셸리는 빈회의 직후 프랑스에 체류 중 일 때, 로버트 스튜어트 경이 주최한 만찬에서 탈레랑을 처음 만났다. 그녀는 그때 본 탈레랑의 첫인상을 “그렇게 악마와 같은 얼굴을 한 남자는 본적이 없다”고 혹평했다. 그러나 그 후 탈레랑 저택의 식사초대에 응하고 그가 직접 서빙 하는 수프와 코스요리를 먹고 나서는 “이런 저녁을 두 번 다시 먹어볼 수 있을까? 꿈을 꾸는 듯한 기분이었다. 식사 도중의 대화는 먹는 것에 관한 것뿐이었다. 모든 요리가 화제의 대상이 되었고, 식탁에 내놓은 다양한 와인에 관한 그의 지식은 뛰어났다. 탈레랑은 자신이 직접 요리들을 설명해 주었는데, 그 모습은 마치 중요한 정치현안을 논의하고 있는 듯 흥미롭고 진지했다”고 술회하였다. 이처럼 탈레랑은 화술이 뛰어났는데 “말은 생각을 밝히기 위한 것이 아니라, 감추기 위한 것”이라는 노회한 생각을 밝힌 적도 있다. 그는 외교적 수사에 관해서도 “외교관이 ‘그렇다’고 하면 그건 ‘고려해보겠다’는 의미이고, ‘고려해보겠다’고 하는 건 ‘안 된다’는 의미이다. 하지만 ‘안 된다’라고 말하는 자는 외교관이 아니다” 라는 재미있는 일화를 남겼다. 이러한 완곡어법은 지금까지도 외교관들이 지켜야 할 중요한 덕목으로 전해지고 있다.
탈레랑의 업적을 기려 프랑스 음식역사에 큰 족적을 남긴 요리사 줄 구페와, 프로이센 황제의 요리장 위르뱅 뒤브아는 탈레랑의 이름을 그들의 요리에 붙여 경의를 표했다. 탈레랑은 유언처럼 “앞으로 수백 년 동안 사람들이 나에 대해서 계속, 내가 누구인지 그리고 내가 어떤 생각을 했는지 이야기했으면 좋겠네”라는 말을 남겼다. 현대에 와서 그를 주제로 한 영화까지 만들어졌으니 탈레랑의 소원은 이루어진 셈이다.
| 예종석 한양대 명예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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