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면 고인은 왜 장남을 상속인에서 제외했을까.
판결문을 살펴보면 고 허 회장이 장남의 회사 경영 관여를 차단하기 위해 주택을 증여하는 대신 지분 상속을 최소화한 것으로 분석된다.
장남인 허성수 전 녹십자 부사장은 1990년부터 15년 동안 미국에서 거주했고 2005년 귀국 이후 녹십자에서 근무했지만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장남을 상속인에서 제외하는 내용의 유언은 이미 허 회장이 장남에게 주택을 증여했다는 점이 가장 큰 요인으로 작용했다.
유언이 작성될 당시 허 회장은 장남과 주택과 관련된 법정 분쟁을 진행중이었다. 허 회장 부부는 2003년까지 거주하던 서울 논현동 소재의 504㎡ 규모 주택을 장남의 명의로 소유권 이전 등기했다가 부인 정모씨 명의로 가등기를 했다. 하지만 장남은 2008년 어머니를 상대로 가등기의 말소소송을 제기하며 이 주택의 소유권을 주장했다.
당시 법무법인은 허 회장에 보낸 의견서를 통해 “논현동 주택에 대해 장남의 주장이 받아들여질 경우 장남은 시기적으로 상속개시에 앞서 논현동 주택의 소유권을 확보할 수 있다. 하지만 상속개시 후에는 논현동 주택의 가치만큼 상속분을 선급받는 것이 돼 유류분이 줄어들게 된다”고 설명했다.
논현동 주택을 장남에게 증여하고 지분 상속은 최소화함으로써 장남이 추후 회사의 경영에 관여할 수 있는 여지를 축소시키려는 의도도 깔려 있던 것이다. 결국 장남의 가등기 말소소송이 인용되고 고인의 부인 정씨 측은 항소도 하지 않아 이 주택은 장남이 증여받게 됐다. 대신 장남은 고인이 보유했던 지분을 한 주도 넘겨받지 못하게 됐다.
한편 고 허영섭 회장의 유언이 공개되자 장남은 “고인은 유언 당시 유언능력을 갖지 못한 상태였으며 유언이 적법 요건을 갖추지 못했다”면서 유언무효를 주장했다. 이후 3년에 걸친 법정 공방에서 재판부는 “유언 당시 고인은 유언에 필요한 의사식별능력을 갖추고 있었고 유언도 적법한 절차를 거쳐 이뤄졌다”고 결론내렸다. 결국 허 전 부사장의 욕심이 지분 상속을 받지 못한 결정적인 원인이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