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간 6만명 불렀다…'검은 피카소' 바스키아 1조원대 작품

롯데뮤지엄 ‘장 미셸 바스키아: 거리·영웅·예술’ 전
회화·드로잉·도자기·사진 등 150여점
왕관·자동차·해골 등 상징 반복 사용
물질만능주의·인종차별 등 저항하며
거리낙서를 미술관으로…28세 요절
세계서 '가장 비싼 현대미술가' 꼽혀
  • 등록 2020-11-09 오전 3:30:01

    수정 2020-11-09 오전 3:30:01

‘장 미셸 바스키아: 거리·영웅·예술’ 전 전경. 오전 10시 30분 개장하자마자 찾아온 관람객들로, 전시가 열리고 있는 서울 송파구 올림픽로 롯데뮤지엄은 이른 시간부터 북적였다. 왼쪽으로 바스키아의 ‘빅터(Victor) 25448’(1987·182.9×332.7㎝)이 보인다. 바스키아 생애 마지막 작품이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이데일리 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오전 11시. 입구가 북적이더니 이내 잠잠해졌다. 도슨트(박물관·미술관 등에서 관람객에게 전시물을 설명하는 안내인)가 한 무리의 인파를 이끌고 이동을 시작한 거다. 족히 40∼50명은 돼 보였다. 사전예약은 물론 발열체크, 출입명부기록 등 심란한 여러 관문을 다 거치자면 여간 부지런히 움직이지 않으면 안 됐을 이들이다. 게다가 주말도 아닌 평일 오전이 아닌가. 대단하다 싶은 건 이뿐만이 아니다. 도슨트의 설명 하나하나를 맹렬히 경청하는 자세다. 한마디도 빼놓지 않을 듯 눈과 귀를 세운 채 도슨트 뒤를 흐트러짐 없이 따르는 중이니까. 전시 관계자는 “이 행렬이 하루에 세 차례, 1시간 가까이씩 이어진다”고 귀띔한다.

서울 송파구 올릭픽로 롯데뮤지엄. 저들이 시간과 비용을 아낌없이 내놓은 전시는 ‘장 미셸 바스키아: 거리·영웅·예술’ 전이다. 지난달 개막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관람객이 몰려들었다고 했다. 30분 간격으로 끊어가며 하루에 들이는 관람객 수를 통제하는 중에도 한 달간 6만여명이 다녀갔다니. 코로나19 이전 블록버스터급 전시를 무색게 하는 인기다.

장 미셸 바스키아의 ‘뉴욕 뉴욕’(1981). 거리낙서가 캔버스로 들어온, 그 시작점에 있는 작품이다. 시끄러운 뉴욕의 전경을 그래피티의 자유로움으로 묘사하고 있다. 검은 얼굴, 왕관, 썼다 지운 암호같은 문자들이 가득하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도대체 무엇이 이들을 그리도 집중하게 만들었을까. 그 시작은 아마 이쯤이었을 거다. 40여년 전인 1970년대 후반 미국 뉴욕 맨해튼 거리. 어느 날부턴가 평범치 않은 ‘벽그림’이 등장했다. 세련된 맛이라곤 전혀 없는, 어린아이가 어른 눈을 피해 급하게 긋고 칠하고 도망친 듯한, 그림이라기보단 차라리 낙서라고 해야 할 흔적. 그런데 참 묘한 일이다. 이질적이고 거칠고 자유분방한 형체들이 가슴을 흔드는 거다. 그 ‘범인’이 밝혀지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장 미셸 바스키아(1960∼1988). 아이티공화국 출신의 아버지와 푸에르토리코계 미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중퇴한 고교생 신분의 흑인 청년. 문제의 벽그림은 그가 친구 알 디아즈와 함께 브루클린·소호거리 곳곳에 유려하게 펼친 스프레이 낙서였던 거다. 둘이 만든 ‘팀명’도 보였다. 세이모(SAMOⓒ). ‘흔해 빠진 낡은 것’이란 뜻에 저작권 기호(ⓒ)까지 붙여, 진짜 함부로 터치해서는 안 될 작품처럼 내놨다. 무엇보다 내용으로 유추할 주제가 시선을 끌었다. 물질만능주의, 인종차별, 권위주의를 비판하고 조롱하던 메시지가 말이다. 반듯한 백인들이 들락날락하는 소호거리의 화이트큐브 갤러리들이 ‘화들짝’ 할 수밖에.

장 미셸 바스키아의 ‘무제’(무쇠팔·1983)와 ‘무제’(기원전 2000년의 비너스·1982). 어린시절 큰 교통사고를 당한 뒤 회복기에 봤다는 책 ‘그레이의 해부학’은 바스키아의 작품에 두고두고 영향을 미쳤다. 뼈와 근육, 해골 등 신체기관을 그대로 노출한 독창적인 도상의 출현이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하지만 세이모 활동은 얼마 못 가 깨지고 만다. “입장 차이”가 그 이유였다는데, 이는 되레 바스키아의 행보를 더욱 자유롭게 한 모양이다. 당장 거리낙서를 캔버스에 채우는 작업에 들어섰으니. 1980년 대규모 그룹전 ‘더 타임스 스퀘어 쇼’, 1981년 뉴욕 PS1의 ‘뉴욕/뉴웨이브’ 전이 그 출발점이다. 특히 ‘뉴욕/뉴웨이브’ 전에선 특유의 화법으로 자신의 트레이드마크라 할 자동차, 비행기, 해골, 해부학적 인체, 문자를 붙인 작품 15점을 걸면서 ‘비딱한’ 존재감을 확실히 알렸다.

장 미셸 바스키아의 ‘여분의 담배’(1982). 창틀을 그대로 떼어다가 그 위에 드로잉을 했다. 굳이 그림 그릴 판을 가리지 않는 것도 바스키아 작업의 특징이다. 왕관과 자동차 등 즐겨 등장시켰던 상징만으로 간결하게 완성했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장 미셸 바스키아의 ‘올드카’(1981). 캔버스 작업 초기작이다. 선으로 구획지은 네 개의 화면을 자동차만으로 채웠다. 바스키아에게 자동차는 부이고 권력이며, 뉴욕이란 도시를 보여주는 강력한 상징이었단다(사진=롯데뮤지엄).


△불꽃같이 살다 28세 요절한 천재 아티스트

딱 8년이었다. 누구도 예상치 못한 출현으로 ‘현대미술의 전설’이 되고 홀연히 사라진 것은. 28세에 약물중독으로 급하게 세상을 떠나버리기 전까지 그는 3000여점을 그렸고 20세기 시각문화에 새 지평을 열었다는 극찬을 받았다. 당대 팝아트의 선두주자였던 앤디 워홀(1928∼1987), 또 다른 ‘낙서화가’ 키스 해링(1958∼1990) 등과 교류하며 저항문화를 열고 다지기도 했다. 실제 워홀은 바스키아의 재능을 먼저 알아보고 아버지처럼 후원하며 공동작업도 함께했더랬는데. 그 정 때문인가. 워홀이 수술후유증으로 사망하자 비통해하던 바스키아도 이듬해 워홀을 따라나섰으니 말이다. 그 불꽃같은 삶에서 바스키아는 “나는 갤러리 마스코트가 아닌 스타가 되길 원했다”는 소망은 이뤘다. “난 흑인 아티스트가 아니다, 단지 아티스트일 뿐이다”란 자존감도 지켜냈다. “날 반항아로 생각하는 걸 즐긴다, 멋진 것 같다”는 자부심도 충족했던 듯 보인다. 그러곤 종내 이렇게 정점을 찍는다. “나는 한낱 인간이 아니다, 나는 전설이다.”

장 미셸 바스키아가 인간적으로 또 작품으로 교감했던 중요한 두 인물과 함께 찍은 사진이다. 왼쪽부터 키스 해링, 앤디 워홀, 바스키아. “창의적인 사람들과 함께 지내면 많은 변화가 일어난다. 상대방에게도 나에게도 흥미로운 변화다. 아마 상호보완적일 거다”라는 문구는 바스키아의 것이다(사진=롯데뮤지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그다지 의식하지 않은 듯한 몇몇 단어와 이미지를 나열해 부조리하지만 무겁지 않은, 익살스럽지만 천박하지 않은 완성을 보는 것이 바스키아 회화의 특징이다. SAMO, 슈퍼맨에서 따온 알파벳 ‘S’ 외에도 달러($), 센트(¢), 엔(¥), 저작권(ⓒ), 왕관·자동차·해골 등은 반복적으로 사용하는 상징. 이를 알 듯 모를 듯한 텍스트와 뒤섞은 뒤 그 위에 선을 긋거나 덧칠을 하고, 또 열심히 지워냈다. 굳이 캔버스만을 고집하지 않았다. 손에 잡히는 대로 널빤지·문짝·창틀을 떼어와 화폭으로 삼았다. 유화·아크릴·수채물감, 오일스틱·크레용, 스프레이 등 색 내는 도구라면 무엇이든 가져다 쓰고.

장 미셸 바스키아의 ‘무제’(1982·245.1×229.2㎝). ‘노란 타르와 깃털’(Yellow Tar and Feathers)이란 부제가 달렸다. 다듬지 않은 나무패널을 이어붙이고 채색·콜라주 등 다양한 기법으로 다양한 이야기를 전한다. 바스키아가 처음으로 로스앤젤레스 여행을 갔을 때 그린 작품으로 1982년 LA 가고시안갤러리서 연 개인전에 걸었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장 미셸 바스키아의 ‘무제’(노란 타르와 깃털·1982·245.1×229.2㎝)를 옆에서 봤다. 이어붙인 두 개의 나무패널이 보인다. 하나는 안쪽, 하나는 바깥쪽을 화판으로 썼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그의 작품을 두고 ‘사회적 편견과 억압에 대한 저항’을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사회가 정한 암묵적 약속이란 걸 깨고 사회를 덮고 있는 모순을 비웃었으니까. 언어체계, 인과관계, 백인중심 체제·사상까지. “대부분의 내 작품에는 아프리카계 주인공이 등장한다, 하지만 난 그들을 묘사한 그림은 흔치 않다는 걸 깨달았다”고 고백했을 정도니, 아마 그의 항거는 뼛속에서부터 삐져나왔을 거다.

△반항·저항으로 뭉친 스타작가의 대규모 회고전

뉴욕에서 단독화물로 비행기에 태워 서울 잠실에 내린 전시작은 150여점이다. 단독으로 실어 나르는 데 부족하지 않은 가치는 ‘작품가’가 대신 말해준다. 회화와 드로잉, 도자기·사진 등 이번 전시에 나온 작품들의 가격이 1조원대에 달한다고 하니. 이 중에는 2000억원을 호가한다는 ‘다른 길 옆 들판’(The Field Next to Road·1981)을 비롯해, 생애 마지막 작품인 ‘빅터’(Victor 25448·1987)도 포함돼 있다.

장 미셸 바스키아의 ‘다른 길 옆 들판’(The Field Next to Road·1981). 이번 전시작 중 가장 비싼 작품으로 2000억원을 호가한다. 1981년 작품 중 가장 큰 그림(220.9×401.3㎝)이기도 하다. 뼈를 드러낸, 바스키아 특유의 인체묘사가 보인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거리의 반항아’가 ‘세계 화랑가의 기대주’로 신분세탁을 한 것 역시 갈수록 천정부지로 솟는 그의 위상과 무관치 않다. 현재 그는 데이비드 호크니, 제프 쿤스 등과 함께 세계서 가장 비싼 현대미술가군에 들어 있다. 가장 가깝게는, 2017년 5월 뉴욕 소더비경매에서 회화 ‘무제’(Untitled·1982)가 1억 1050만달러(약 1239억)에 낙찰되며 여러 기록을 두루 바꿔놓은 전적이 있다. 1980년대 이후 작품 중 경매 1억달러를 넘긴 첫 작품, 미국 작가 중 최고가 작품 등등.

‘검은 피카소’란 별칭을 생전의 바스키아는 좋아하지 않았단다. 그런데 어쩌겠나. 그를 한 단어로 표현할 이만한 수식을 아직 찾아내지 못하고 있으니. “내가 아프리카계 유색인인 게 내 성공과 무슨 상관인지 모르겠다. 나를 아프리카계 아티스트와 견줄 것이 아니라 모든 아티스트와 비교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맞다. 그래서 피카소다. 검은 얼굴에 왕관을 씌운 영웅(‘무제’ 1984 등)을 아무나 그리겠나. 전시는 내년 2월 7일까지.

평일 오전 11시, 도슨트 프로그램에 참여한 관람객 40여명이 작품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다. 롯데뮤지엄 전시 관계자는 “도슨트 뒤를 따르는 이 행렬이 하루에 세 차례, 1시간 가까이씩 이어진다”고 귀띔했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생전의 장 미셸 바스키아(1960∼1988). 불꽃처럼 살다가 불꽃처럼 사라졌다. 1980년대 초 뉴욕화단에 혜성처럼 나타나 28세에 약물중독으로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8년여 동안 3000여점을 남기고 자신의 말처럼 ‘전설’이 됐다(사진=롯데뮤지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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