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는 헌법 제13조 3항에 따라 연좌(連坐·collective punishment)제를 금지하고 있다. 그런데 이 연좌제가 최근 다시 도마에 오르고 있다. 가족이 예전에 진 빚을 유명인에게 갚으라는 요구가 잇따라 터지는 이른바 ‘빚투’(빚 too·
연좌제는 주로 봉건사회의 왕조 국가에서 시행됐던 제도로, 죄인의 죄를 가족·친지들에게도 함께 묻는 것을 뜻한다. 앞서 형사 처분에 국한했던 연좌제는 갑오개혁(甲午改革)으로 폐지됐고, 그 이후 공직 임용·사관학교 입학 제한, 취업·해외여행 제한 등의 간접적 연좌제도 1980년 8월1일부로 공식적으로는 모습을 감추게 됐다. 하지만 비공식적으로, 우리 삶 속에 실재하는 사실상의 연좌제가 어디 ‘빚투’ 뿐이랴.
몇 해 전 미국에서 저소득층 아이들의 문해(文解·literacy) 능력 연구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인터뷰를 위해 미국 원주민(Native American) 마을을 방문했다. 책이나 영화에서 봤던 원주민들의 전통 가옥 ‘티피(teepee)’를 상상했는데, 마을에 도착한 뒤 받았던 충격의 여진은 아직도 남아 있다.
당시 영하 20도의 날씨였는데, 대부분의 마을 아이들은 망가진 트레일러나 컨테이너에 살고 있었다. 난방 시설은커녕, 외투 살 돈이 없어 반소매 여름 티셔츠 안으로 팔을 넣고 양팔을 포갠 채 집 안에서 떨며 노는 아이들도 있었다.
미국 정부와 역사적·정치적 이유로 보상금 및 정부의 복지 혜택을 거부한 미국 원주민 부모들의 입장에 고개를 끄덕이다가도, 한 구석의 아이들을 보며 이 곳이 세계 제1의 강대국이 맞나 싶은 씁쓸함이 들었다. 국가가 개인의 삶에 개입하지 않을 때의 민낯을 보는 듯 했다.
지난달 7명의 목숨을 앗아간 서울 종로구의 한 고시원 화재 참사는 ‘집 아닌 집’에 사는 국민들의 모습을 세상에 드러냈다. 사상자는 대부분 ‘고시생’이 아닌, 40~60대 일용직 노동자들이었다. 올해 1월에 발생했던 종로구 여관 방화 사건도 마찬가지다. 화재는 이 숙박시설에 ‘살고’ 있던 일용직 노동자들의 희생으로 이어졌다.
고시원·여인숙과 같은 숙박업소, 비닐하우스·컨테이너·판잣집·쪽방 등 사회적으로 주택으로 인정받지 못할 정도로 열악한 ‘비주택’에 사는 가구가 적게는 40만, 많게는 228만 가구로 추정된다. 우리 눈에 잘 보이지 않게 밀려난 가난한 사람들이 이 만큼이나 된다는 말이다.
주거기본법 제2조는 ‘주거권’을 “물리적 사회적 위험으로부터 벗어나 쾌적하고 안정적인 주거 환경에서 인간다운 주거생활을 할 권리”라고 규정하고 있다. 고시원 등의 ‘비주택’은 ‘집’이 아니기 때문에, 이 주거권을 보호하기 위해 국가가 만든 최소한의 장치인 ‘최저주거기준’ 적용조차 받지 못한다.
‘집’도 아닌 곳에 사는 ‘창피함’과 ‘자괴감’은 사람들과의 관계 단절로 내몰고, 인간의 꿈과 삶을 통째로 갉아 먹는다. 현재로서는 비숙박 다중이용업소 등을 포함한 비주택 거주자들이 얼마나 되는지 정확히 파악된 자료도, 통계도 없는 상황이다.
‘노숙’의 담장 위를 아슬아슬하게 걷고 있는 ‘주거 빈곤’의 끝자락에 있는 이들에 대한 실태 조사와 관련 현행법의 개정이 시급하다. 지원 대상을 ‘노숙인 등’으로 한정한 현행 노숙인법에 주택이 아닌 곳에 사는 이들, 즉 ‘비주택자’들을 포괄하는 개념을 도입하는 고민을 진지하면서도 늦지 않게 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