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업공무원제도의 경직성이 문제죠. 문호를 임용고시로 한정하고 그렇게 채용한 사람만 정년과 신분을 보장받고 끈끈한 연대를 유지하며 권력을 행사하는 배타적 운영 말이죠.”
“우리 정당정치의 최대 약점은 브레인이 없다는 거예요. 정당 안에선 출세하기도 어려울뿐더러 월급도 없으니 인재가 붙지 않죠. 싱크탱크가 있어야 정당이 제대로 된 정책을 생산할 테고 정책대결을 할 것이며 이상한 싸움질만 하질 않을 텐데요.”
“금감위에 있을 때였어요. 어느 날 회의를 끝내고 가니 제 방 앞에 모 재벌그룹 임원이 지키고 서 있었는데 방금 끝낸 회의내용을 정확히 알고 있더라고요. 채 1분도 걸리지 않는 거리였어요.”
지금 한국경제는 정상이 아니다. 이런 상황이 정상일 리가 없다. 더 심각한 건 비상식과 비정상이 정상처럼 보인다는 거다. 그렇다고 이렇게 계속 갈 수는 없다. 과연 생존비법은 없는 건가. 일단 속 시원히 얘기라도 해보자. 그래서 8인의 경제전문가가 한자리에 모였다. 김태동 성균관대 명예교수, 윤원배 숙명여대 명예교수, 윤석헌 전 숭실대 교수, 이정우 경북대 명예교수, 이동걸 동국대 초빙교수, 최정표 건국대 교수, 장세진 인하대 명예교수, 허성관 전 동아대 교수 등이다. 이들의 공통점이라면 오랜 세월 대학에서 연구했고 대통령을 보좌해 정책을 만들었거나 각 부처 장관으로 나라살림을 꾸린 적이 있다는 것.
의기투합은 단 한 지점이었다. 경제가 바로 설 때 사회가 정상화된다는 확신. 모여서 말이라도 하다 보면 정상화의 묘안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 이들의 토론모임은 그렇게 시작했다. 지난해 7월부터 올해 1월까지, 양극화·부패·가계부채·노동·재벌·관료개혁·재정·경제성장 등 8개 주제를 도마 위에 올렸다.
▲‘수저계급’이 신경 쓰이기는 마찬가지
석학이라고 다르겠나. 헬조선·흙수저 등 신조어가 먼저 알아본 사회경제 현상은 그들에게도 편치 않아 보였다. 양극화 문제에서 헬조선은 단연 화두가 됐는데. 신분과 가난이 대물림되고 재벌지배가 세습된다는 의미로 아프게 수용해야 한다는 데 공감한다. 이것이 바로 양극화의 결정적 단면이 아니겠느냐는 거다.
보통 양극화는 기술, 세계화, 제도·정책에 따라 심화하게 돼 있단다. 그런데 한국의 양극화는 단연 제도·정책 탓이라고 했다. 1980년대까진 인플레이션이 주요 원인이고, 1997년 이후엔 미국서 직수입한 시장만능주의가 주범이었다. 거품 낀 매매가의 부동산이 부자와 서민의 간격을 벌렸고 약한 세율이 자산의 양극화까지 만들어놨다고 봤다.
방법은 없겠나. 우선 복지지출로 입을 맞췄다. 복지증대 없이 지금 상태가 지속되면 경제성장이 둔화할 때 버팀목이 사라진다는 거다. ‘복지는 비용이 아니라 투자’라고 믿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만의 성’을 깨는 방법
8차례의 토론 끝에 석학들이 끌어낸 정책 아이디어는 두 가지. 관료제도를 개혁할 ‘교체공무원제도’와 양극화 해법으로 제안한 ‘기본소득제’다. 대통령 임기와 같이 시작했다가 같이 끝내는 교체공무원제도를 시행하면 공무원의 책임감 있는 정책수행을 기대할 수 있을 거라고 봤다. 소득·나이·성별 등을 따지지 않고 누구에게나 일정한 소득을 매월 지급하는 기본소득제라면 양극화 해소에 실마리가 될 수 있을 거라고도 했다. 그런데 참 결론이 여의치 않다. ‘어떻게 할 건데’의 부분에선 명쾌한 답안을 내놓지 못한다.
▲위기는 누가 알아채야 하는 건가
그나마 추린 대안은 이렇다. ‘소비부터 늘려야’다. 그런데 걸림돌이 있다. 비정규직이 너무 많다. 600만∼800만명이 낮은 소득에다가 언제 잘릴지 모르는 상황에 몰리니 돈 쓰란 소릴 할 수나 있겠느냐는 거다. ‘전·월세 안정’도 꼽았다. 청년층 생활비 중 주거비가 60∼70%를 차지하니 가처분소득이 확 줄어들 수밖에. 단순히 성장률만 높이자고 덤비는 건 버려야 할 정책 일순위다. 개발에 목매지 말고 삶의 질을 높이면서 지속가능한 성장을 챙겨야 한다는 강조다. 한마디로 이자율 낮춰 빚으로 집 사게 하고, 잠깐 세금을 깎아줘 자동차판매를 늘리는 고육책은 말짱 ‘꽝’이란 얘기다.
‘한국경제가 정상이라고 생각하십니까’로 따지듯 시작한 만큼 난상토론은 예상했다. 종이 안에만 머물지 않겠다는 거친 모색이 반갑기도 하다. 그럼에도 씁쓸한 대목이 없지 않다. 비정상경제가 하루아침에 튀어나온 건 아닐 텐데. 한국경제를 쥐락펴락하던 관료시절에 보지 못한 것을 이제야 털어놓은 형국이 됐으니. ‘비정상이 더욱 심해진 듯’이란 말로는 옹색하다. 나무에서 시선을 거두니 비로소 숲이 보이더란 얘긴가. 비정상경제의 짐에 비정상관료의 짐을 하나 더 얹은 듯한 아쉬운 뒷맛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