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섭 선생도 묵던 사랑방"…정이었구나 '이상욱 따뜻한 추상'

△학고재갤러리 이상욱 '더 센테너리' 전
충정로 적산가옥서 작품 지켜온 장남
초기부터 말년까지 회화 40여점 엄선
"평생 추사 연구…서체추상으로 연결"
고향 향한 그리움, 동그라미로 표현도
'잊힌 1세대 추상화가' 26년만 개인전
  • 등록 2023-07-07 오전 6:40:00

    수정 2023-07-07 오전 10:19:38

이상욱 화백의 장남 이홍기 씨가 서울 종로구 삼청로 학고재갤러리에서 연 이상욱 개인전 ‘더 센테너리’에 건 아버지의 작품들 앞에 섰다. 한국 1세대 추상화가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전시에 나선 아들은 “어릴 땐 세상의 그림이 다 이런 줄 알았다”며 엷게 웃었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이데일리 오현주 문화전문기자] 멀리서도 시선을 잡아끄는 초록색 동그라미가 있다. 각진 네모 위에 커다란 몸체를 슬그머니 기댔는데. 둥근 원이란 말은 여기선 맞지 않다. 지름이 같지 않은, 한쪽 귀퉁이가 옆으로 삐져나온 원이니까. 달랑 도형 두 개로만 채워낸 화면일지라도 보일 건 보인다. 어느 돌담에 비스듬히 떠오른 달이란 게. 질박하게 덧칠해 쌓아낸 그리움이란 게.

추측은 맞았다. “둥글둥글한 것은 모두 고향 이야기”라고 했다. 이 공간에 들인 적잖은 ‘둥글둥글’은 끝내 되찾지 못한 그 땅에 대한 이야기였던 거다.

그 땅은 함경남도 함흥이라고 했다. 거기가 어떤 곳인지 우린 알 수가 없다. 어떤 무게인지도 모른다. 그저 그이에겐 이런 것이었나 할 뿐이다. 때론 일그러져 보일 수밖에 없는 보름달(‘망향’ 1976)이며, 때론 가파른 산세를 그보다 거칠게 그어낸 마음(‘망향’ 1984)이었다가, 결국 모양도 빼내고 색도 빼낸 채 ‘나 다녀갔다’는 무형의 자취만 남겨야 하는 곳(‘흔적’ 1985)으로.

서울 종로구 삼청로 학고재갤러리 이상욱 개인전 ‘더 센테너리’ 전경. 왼쪽 벽면으로 ‘작품 84’(Work 84·1984·130×130㎝)가, 오른쪽 벽면에는 ‘독백’(Monologue·1970·103×103㎝)이 걸렸다. 이 화백 화업의 키워드라 할, 엿가락을 뚝뚝 분지른 듯한 ‘막대’와 반듯하지 않은 일그러진 ‘동그라미’가 든 대표작 두 점이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이상욱(1923∼1988) 화백. 사실 그이가 잃은 건 고향만이 아니다. 이름도 잃었다. 이렇게 적나라하게 말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 안타깝지만, 그이는 ‘잊힌 작가’다. 김환기(1913∼1974), 유영국(1916∼2002)을 잇는 한국 1세대 추상화가인 데다, 하물며 ‘서정추상주의’ ‘서체추상주의’를 개척한 작가로 꼽히고 있음에도 말이다.

작정하고 무심하자는 이가 세상에 몇이나 되겠는가. 그저 사람 사는 일이 그렇게 내몰았을 거다. 그런데 참 묘한 일이다. 누구도 그리 말해주진 않았을 텐데, 벽에 걸린 화백의 그림들이 대신 전하고 있지 않은가. 오랜 시간 무던히도 외로움을 견뎌왔을 작품들이 전하는 따뜻한 위로.

학고재갤러리 이상욱 개인전 ‘더 센테너리’ 전경. 왼쪽부터 ‘무제’(1970·62×52㎝), ‘작품 70’(Work 70·1970·72×60㎝), ‘상황’(Situation·1967·43×33㎝), ‘무제’(1966·50×50㎝), ‘풍경’(Landscape·1958·74×92㎝). 이 가운데 ‘풍경’은 전시작 중 가장 오래된 작품이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이상욱을 재조명하는 전시가 서울 종로구 삼청로 학고재갤러리에서 열렸다. 회고전보단 좀더 가볍게 개인전이란 타이틀을 내건 전시명은 ‘더 센테너리’(The Centenary). 탄생 100주년을 기념한다는 뜻이다. 신경 써서 곱씹지 않으면 그냥 여느 전시려니 할 만한 100주년이다. 야단법석이어도 이상할 게 하나 없는 그 100년을 차분하게, 그 분위기만큼 고즈넉한 작품 40여점을 걸고 기념한다.

“세상 그림은 모두 다 아버지처럼 그리는 줄”

함흥의 명문가에서 난 화백은 청년시절 그림 그리는 일에 대한 장애는 없었던 듯 보인다. 단 하나 막은 게 있다면 시국이다. 일본 유학 중 태평양전쟁이 터지자 공부를 중단한 채 돌아와야 했고, 북한에 소련이 주둔한 이후엔 갓 결혼한 아내, 가족과 함께 남하해야 했다. 서울에 정착했다. 1947년이었다.

학고재갤러리 이상욱 개인전 ‘더 센테너리’ 전경. ‘작품 79-9’(Work 79-9·1979·52×62㎝·왼쪽)와 ‘점’(Point·1977·61×51㎝)가 나란히 걸렸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당시 화백이 서울에서 가장 먼저 한 일은 살집을 구하는 일. 와병 중이던 형을 돌봐야 했기 때문이라는데. 어렵사리 서대문구 충정로에 적산가옥 한 채를 샀단다. 하지만 그땐 몰랐을 거다. 이후 76년째 그 집을 떠나지 못하게 될 줄은. 화백이 세상을 떠난 뒤론 그이의 분신이라 할 두 가지가 대신했다. 아들과 작품.

장남인 이홍기 씨는 ‘아버지의 집’을 여전히 지키고 있다. 부모는 물론 이제는 다 흩어져 사는 2남 3녀 형제들과의 추억 때문만은 아니다. 500여점 온전히 품고 있는 아버지의 작품들 때문이다.

학고재갤러리 이상욱 개인전 ‘더 센테너리’ 전경. 왼쪽부터 ‘점’(Point·1973·91×73㎝), ‘상황’(Situation·1974·108×108㎝), ‘작품 74’(Work 74·1974·108×108㎝)(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당시의 회상은 전시장에서 만난 홍기 씨가 대신해줬다. “부엌 옆 작은 공간에 작업실을 만들었더랬다. 그런데 말이 좋아 작업실이지 제자와 지인이 찾아와 늘 붐비는 사랑방이나 다름없었다.” 그 지인 중에 이중섭(1916∼1956) 화백도 있었단 얘기는 처음 들었다. “머물 곳이 마땅치 않은 이 화백을 아버지는 집에 몇 달간 묵게 했다. 어머니를 위해 만든 두 평 반짜리 다다미방에 기거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1978년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 자택에서 촬영한 이상욱 화백(왼쪽)과 이 화백이 친필로 쓴 ‘작가의 말’(1974. 8. 31). 이상욱 개인전 ‘더 센테너리’에 아카이브로 나온 전시품을 다시 촬영했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과연 아버지의 작업이 선구적인 추상이란 걸 아들은 알고 있었을까. “그땐 세상의 모든 그림이 다 그런 줄 알았다”며 홍기 씨가 웃는다. “아버지는 평생 추사 김정희를 연구했다. ‘내 선생은 김정희’란 말도 자주 했고.” ‘서체적 추상’이란 게 거기서 나왔을 거란다. “필체나 서체를 모방한 것과는 다르다. 감정·감흥·사상·생각을 묻혀 내려 한 거다.”

이번 40여점 전시작은 모두 이 집에서 나왔다. “한 점의 대여도 없다”고 했다. 덕분에 그간의 세월이 어슴푸레 보인다. 작품을 지켜내야 하는 유족의 숙명 같은 거 말이다. “아버지가 다작은 하지 않으셨다. 정확하진 않으나 유화 200여점, 판화 200∼300여점이 현재 남아 있다. 1940∼1950년대 초기작은 망실이 많다. 당시 매체에 소개된 흑백사진은 있으나 정작 원작은 없는 경우다. 1960∼1970년대 여유롭지 못한 시절, 약주 좋아한 아버지가 술값 대신 내놓기도 많이 하셨을 거다.”

이상욱 화백의 장남 이홍기 씨가, 이상욱 개인전 ‘더 센테너리’가 열리고 있는 학고재갤러리에서 아버지 작품들을 배경으로 섰다. 뒤편 오른쪽부터 ‘작품 84’(Work 84·1984·130×130㎝), ‘무제’(1982·93×93㎝), ‘흑과 백’(Black and White·1970·103×103㎝·부분)이 걸렸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추상으로도 못내 지우지 못한 서정의 두께

전시는 초기부터 말년까지 화백의 평생 작업을 꿰뚫고 있다. ‘풍경’(1958·74×92㎝)을 시작으로 타계 한 해 전 그린 ‘흔적’(1985·220×220㎝·2점)까지, 화업의 가운데 토막을 옮겨놨는데. 그중 ‘흔적’은 유화로선 화백의 마지막 작품이기도 하다. 1950∼1960년대 두툼한 화면이 정점을 찍고, 1970년대 조금씩 옅어지다가 말년엔 ‘수묵화화’한 작품의 정수를 모았다고 할까. 40여점 중 판화가 1점, 나머진 모두 유화다.

당시 화단에 녹아든 추상은 바다 건너의 추상과는 결이 달랐다. 사실 ‘한국적’이란 말 외에 적당한 용어가 없다. 화백의 서정적 추상도 마찬가지다. 누가 봐도 해이고 구름이고 산인 형체가 단순하게 변형한 선과 면에 따라나오는 식이다. 추상으로도 못내 지우지 못한 구상의 흔적까지 잔뜩 묻혀낸 것은, 말로는 형용이 어려운 그리움 때문이었을 터.

이상욱 개인전 ‘더 센테너리’가 열리고 있는 학고재갤러리에서 한 관람객이 전시작을 둘러보고 있다. 왼쪽부터 ‘독백’(Monologue·1975·132×132㎝), ‘작품 75’(Work 75·1975·132×132㎝), 작품 75-A’(Work 75-A·1975·132×132㎝)가 나란히 걸렸다. 도상은 그대로이나 색과 형체가 점점 옅어지는 경향을 보인 1970년대 작품들이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이상욱 개인전 ‘더 센테너리’가 열리고 있는 학고재갤러리에서 한 관람객이 아카이브 전시품을 둘러보고 있다. 그 위로 ‘작품 79-10’(1979·37×47㎝), ‘작품 79’(1979·35×52㎝), ‘홀로그라프’(Holograph·1960s·33×33㎝·2점), ‘흔적’(Trace·1982·35×52㎝), ‘망향’(Nostalgia·1984·35×46㎝)(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학고재갤러리가 이 화백의 이름을 부른 건 두 번째다. 지난해 새해 첫 전시로 띄운 ‘에이도스를 찾아서: 한국 추상화가 7인’에 이름을 올렸더랬다. 1920년대생 추상화가들의 57점을 내걸었던 전시는 그이들의 삶, 작품세계, 미술사에서의 위상까지 ‘애써’ 가늠했더랬다. 낯익은 서정에, 정감까지 흠뻑 묻힌 그이들이 한국화단에서 주류였던 적이 없던 터라.

지난해가 맛보기였다면 이번엔 본편인 셈이다. 이 화백 ‘개인전’으로는 26년 만이다. 1992년 국립현대미술관에 이어 1997년 일민미술관에서 꾸린 회고전이 마지막이었다. 그 고독한 기다림을 이번 전시가 드디어 깼다. 29일까지다.

서울 종로구 삼청로 학고재갤러리 이상욱 개인전 ‘더 센테너리’ 전경. 앞쪽에 걸린 ‘망향 76’(Nostalgia 76·1976·20×25㎝) 뒤 안쪽으로 ‘독백’(Monologue·1970·103×103㎝)이 보인다. 두 작품 모두 고향 함흥을 향한 이 화백의 그리움이 얹혀 있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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