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규태의 코덱스]‘쿼런틴’의 아련한 추억

  • 등록 2020-06-11 오전 5:00:00

    수정 2020-06-11 오전 5:00:00

[임규태 공학박사·전 조지아공대 교수]신종 코로나 바이러스(코로나19)가 최초로 발견된 지 6개월이 지났다. 현재 전 세계 확진자수는 700만 명, 사망자수는 40만 명에 달한다. 하지만 인류는 아직도 코로나19 치료제와 백신을 개발하지 못하고 있다. 물론 전 세계 의료인들이 백신과 치료제를 개발하고 있으므로 해결책이 나오는 것은 시간문제다.

하지만 또 다른 치명적 바이러스가 언제 또다시 지구촌을 덮칠지 알 수 없다. 그날이 오면 인류는 지금과 같은 팬데믹(세계적 대유행)에 다시 빠질 수밖에 없다. ‘병’을 중심으로 세워진 현대 의학 체계는 끊임없이 변이를 일으키는 바이러스를 원천적으로 차단할 수 없기 때문이다.

코로나19에 대한 의학적 대처방법이 전무한 상황에서 각국 정부는 ‘자가 격리’ 이외에 뾰족한 선택지가 없다. 각국 정부는 격리가 혁신적인 바이러스 퇴치법인양 자국 국민들에게 선전하고 있다. 현시점에 가장 효과적인 전염병 퇴치법인 격리는 언제 처음 등장했을까.

‘격리’를 뜻하는 영어 단어 쿼런틴(Quarantine)은 ‘40일’을 의미하는 이탈리아어 콰란타 조르니(quaranta giorni)에서 유래했다. 어떤 연유로 40일이라는 의미의 이탈리아어가 격리를 의미하게 되었을까. 1448년 유럽에 또다시 흑사병이 창궐한다. 베니스 정부는 흑사병 확산을 막기 위해 베니스 항구로 입항하는 무역선에 탑승한 선원들을 40일 동안 배에서 나오지 못하도록 강제했다. 이렇게 해서 40일이라는 의미의 쿼런틴이 격리를 의미하는 어원이 되었다.

사실 자가 격리라는 전염병 퇴치법이 생긴 건 그로부터 100년을 더 거슬러 올라간다. 14세기 중반 유럽에 처음 흑사병이 창궐해 유럽 인구 3분의 1이 사망한다. 흑사병이 한창이던 당시 크로아티아 남부의 두브로브니크라는 도시에 30일간 자가 격리를 실시한 기록이 남아있다. 결국 자가 격리는 유럽에 처음 흑사병이 창궐한 시점부터 사용된 가장 오래된 방법이다.

피터 부르겔 엘더가 유럽 흑사병 창궐 당시를 묘사한 ‘죽은 자의 승리’.
지금 이 말이 불편한 사람은 ‘자가 격리’보다 ‘사회적 거리두기’가 더 효과적이라고 주장할 지도 모른다. 미안하지만 사회적 격리는 1918년 스페인 독감이 전 세계를 휩쓸던 당시에 사용한 전염병 퇴치법이다. 100년 전 인류는 독감의 원인이 바이러스라는 사실 조차 모르는 상태에서 이 방법을 사용했다.

2020년 인류가 바이러스와 전쟁에서 사용하는 무기들은 600년 묵은 자가 격리와 100년 묵은 사회적 격리뿐이다. 도대체 인류는 그동안 무엇을 하고 있었다는 말인가.

코로나19 팬데믹 상황에서 대한민국은 성공적으로 대처한 국가로 칭송받고 있다. 보다 정확히는 대한민국 언론이 한 목소리로 말하고 있다. 코로나19 사태 와중에 한국 이외 국가를 경험한 내 관점에서 한국의 방역 성공은 국민들의 성숙한 대처 때문이라기보다는 코로나19 확진자 검사에 자신의 삶을 희생한 의료인들 덕분이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는 코로나 검진을 위해 불철주야 고생하는 의료진들에게 응원의 메시지를 보내는 ‘덕분에 챌린지’가 유행이다. 나도 그들의 취지에는 공감하지만 솔직히 그들을 말리고 싶다. 국민들의 응원을 바라보는 의료진들은 당혹스럽다. 의료인들은 자신들이 힘들어한다는 사실이 밖으로 새어나가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만약 힘에 부친다는 사실이 공론화되면 의료인들의 안락한 삶을 보장해주는 다양한 정책과 비즈니스 모델이 봇물처럼 쏟아질 테니까.

그들의 우려는 현실이 되었다. 청와대와 여당은 2022년부터 의대 정원을 500명 증원하는 안을 검토하고 있다. 일각에서는 정원 1000명의 공공 의대를 신설하자고 주장한다. 그동안 의대 정원 확대를 반대했던 의료계가 힘들다고 불평할 수 없는 이유다.

의료인들의 삶의 질을 향상해주려는 움직임은 의사 증원에 그치지 않는다. 그동안 의료계가 반대해왔던 원격진료가 비대면 진료라는 이름으로 다시 추진되고 있다. 추진하는 측에서는 전화나 영상통화 등 다양한 IT 기술로 의사들이 효율적으로 진료를 할 수 있게 도와준다고 주장한다.

IT 기술을 활용하는 의료혁명은 코로나 팬데믹 상황에서 더욱 큰 효과를 발휘한다. 개인의 생체 정보에 이상이 감지되면 스마트워치가 자동으로 담당 주치의에 연락해 적절한 조치를 취할 수 있도록 해준다. 팬데믹이 발생하면 특정 지역 개인들이 전송하는 생체정보를 취합해 실시간으로 상황을 파악하고 대처할 수도 있다. 물론 원격진료가 봉쇄된 한국에서는 소설이다.

경기 고양시 명지병원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신종코로나) 선별진료소에서 로봇을 이용한 원격 진료를 시행하고 있는 모습.(사진=연합뉴스)
공상 과학(SF) 영화 같은 이 시나리오는 IT 세계에서는 미래가 아닌 과거 이야기이다. 2015년 등장한 애플워치는 애초부터 건강 산업을 염두에 두고 개발되었다. 2018년 모델부터 심전도 기능이 탑재되었지만 현재 대한민국에서 이 기능은 불법이다. 의료계가 반대하는 원격진료에 포함되기 때문이다.

만약 의료계가 인공지능(AI)을 진찰 도우미로 사용한다면 한 사람의 의사가 돌볼 수 있는 환자 수는 획기적으로 늘어난다. 따라서 의사 정원을 늘리자는 주장은 명분을 잃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코로나 사태로 의료계는 혼란에 빠졌고, 그 틈에 그들이 반대하던 두 개의 정책들이 거침없이 질주하고 있다.

원격진료를 둘러싼 갈등은 코로나 사태로 더욱 복잡해졌다. 의료계 내부에서도 원격진료에 대한 찬반이 엇갈리고 있는 상황이다. 중소형 병원들은 원격진료가 활성화하면 대형병원에 환자를 빼앗기게 될 것이라며 도입을 반대한다. 하지만 대형병원들은 코로나 사태가 초래한 언택트(비대면) 시대에 적합한 원격진료 도입에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결국 밥그릇 문제다. 나는 현재진형형인 의료 갈등에서 타다와 택시업계 간 갈등의 데자뷔를 본다. 대중교통을 볼모로 삼은 타다-택시업계 갈등은 결국 타다의 자진 폐업으로 막을 내렸다. 이제 국민들은 예전처럼 비오는 날 자정 광화문에서 잡히지 않는 택시를 찾아 헤매야 하는 처지가 됐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희망을 버리고 싶지 않다. 의료 산업의 갈등이 타다와 같은 파국으로 끝난다면 국민들이 치러야할 대가가 너무 크기 때문이다. 단순한 불편의 문제가 아니라 국민의 생명이 담보로 잡혀있기 때문이다. 코로나19 팬데믹은 이런 사실을 국민들에게 일깨워 주었다. 코로나가 창궐하기 이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 세상이 바뀌었음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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